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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서문을 잘 쓰고 계십니까?

LNCK 2011. 4. 26. 18:57

 

◈책의 서문을 잘 쓰고 계십니까?        요12:23~25         설교 편집



이 세상에서 우리 각자의 평균 80년 인생

그 이후의 영원한 삶과 빗대어 볼 때,

<책의 서문> 또는 <교향곡의 서곡>에 해당되는데요...  



비유컨대 이 땅의 생명은 대하소설의 서문(序文)이나,

장엄한 교향곡의 서곡(prelude)과 같다는 것입니다.


비록 짧고 간단해도

전편(全篇)에 드러날 스토리나 주제를 일부씩 다 맛보게끔 만든 것입니다.

본편은 동일한 모티브를 활용해 더 깊고 넓고 길어지는 것입니다.


서문은 본편의 일부가 발췌 인용된 것입니다.

또한 본편의 요약을 담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인생은

영원한 천국의 서문, 서곡, 예고편입니다.


지금 천국을 누리지 못하면서.. 본편에는 천국을 누리리라 생각하지 맙시다.

지금 천국을 누리는 성도는.. 본편에서 그 천국을 더 풍성히, 완전하게 누리게 될 것입니다.

(보통의 경우, 책의 서문만 읽어도, 그 책의 질을 파악 가능 합니다. 우리 각자 인생도 마찬가집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서문이나 서곡을 가장 훌륭하게 잘 쓸 수 있겠습니까?

(인자이셨던) 예수님은 어떻게 서문이나 서곡을 가장 아름답게 장식하셨습니까?

-십자가를 지심을 통해서 였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요12:23~25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헬라인 몇 사람이, 예수님을 뵙기 원했습니다.

그 말을 전해들은 예수님은 ‘내가 곧 죽을 것이며 그래야 영광을 얻는다’고 대답했습니다.


이어서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26절)고 했으니

그들도 당신처럼 죽어야 한다는 뜻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예수님께 나아온 헬라인들이

예수님께 배운 첫 교훈이

“이 땅에서의 네 생명은 미워하고 죽여라”는 것이 되었습니다.


한창 유명세를 타고 있는 젊은 유대 랍비에게

뭔가 소중한 인생의 지혜를 배우러 왔다가

오히려 ‘죽으라!’고 하니.. 참 당황했으리라 짐작됩니다.

       그러나 ‘죽는 것’이 서문/서곡을 제일 잘 쓰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신자도 이런 뜻을 강조하는 설교를 듣게 되면

조금 당혹스럽긴 마찬가지입니다.

이 땅에서의 삶은 정말 아무 의미와 가치가 없기에

주님의 일을 하다 순교해야만.. 가장 큰 보람일 것이라고 믿게 됩니다.


그러나 거창한 순교는 아니더라도,

현재의 삶에서, 자기 주변 몇 사람 돌보는 정도로 작은 행복을 느끼며 사는 것도

‘순교적 각오, 죽는 각오’ 없으면 .. 계속하기 힘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죽는 것’이, 내 인생의 서문/서곡을 잘 쓰는 것입니다.


★관련글  열심과 능력보다 죽는 게 우선이다



예수님의 삶 중에 한 가지 특이한 것은 <글을 남기지 않으신> 것입니다.

모세는 오경을, 다윗은 시편을, 선지자는 선지서를, 바울은 서신서를 남겼는데.

예수님은 성경을 한 권도 쓰시지 않으셨습니다.


물론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이 성령에 감동하여

예수님 대신에, 복음서를 써서 남겼으니.. 직접 쓰신 것과 다름없습니다만...


그 이유를 굳이 추론해 보면,

예수님은 책과 글로써 뭘 남기신 것이 아니라,

삶의 족적으로서,

즉 십자가를 친히 지심을 통해서... 직접 몸으로써 남기신 것입니다.

가장 아름다운 서곡을.. 몸으로 친히 쓰셨다는 얘기입니다.


(성 프랜시스도 직접 책을 쓰지는 않았지만, 삶의 족적으로 아름다운 ‘생의 서문’을 썼으며,

클라라 등 다른 사람들이 프랜시스에 관한 책을 써 주었습니다. 예수님처럼 말입니다.)


오늘 내가 투신하고 헌신하는 일이

‘내가 죽는 일’입니까? 아니면 ‘내가 사는 일’입니까?


사역의 규모가 크고/작고..

사람이 많이 모이고/안 모이고..

그것이 포인트가 아닙니다.


‘내가 죽는 일’입니까? 아니면 ‘내가 사는 일’입니까?

그것이 포인트입니다.


오늘 내가 투신하고 헌신하는 일이

‘예수님을 위한 일’입니까? 아니면 ‘나를 위한 일’입니까?


마25장에 보면, 양과 염소가 나눠지는 최후의 심판 장면이 나옵니다.

그 때 심판의 기준이 ‘예수님을 위한 일’이었나/그렇지 않았느냐(자기를 위한 일이었느냐)입니다.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마25:40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마25:45


우리가 하루 일과 중에 모든 일을 곰곰이 되돌려 보면,

어쩌면 ‘다 자기 자신/명예/이익/인기를 위한 일’이 되기 쉽습니다.


-주리고 목마른 자에게 구제를 하더라도

-나그네를 영접하고, 옷 입히고

-병든 자와 감옥에 갇힌 자를 돌아보더라도


‘자기를 위한 일’이 될 수 있고,

‘예수님을 위한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교회 봉사를 하더라도,

내 이름과 내 명예와 내 인기를 위해서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위하여’

이름도 모르는 어린 소자를 위하여

먹이고, 마시우고, 영접하고, 옷 입히고, 돌아보는 사람은..

       그렇게 ‘죽는 것’이, 내 인생의 서문/서곡을 가장 잘 쓰는 것입니다.

       뭘 크고 거창하게 하는 것에 관계 없이요.


천국의 본편이, 이 땅의 서문에 가장 풍성하고 아름답게 드러나려면

'썩는 밀알이 되어서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역으로 그러지 않으면.. 신자의 현재의 삶은.. 허송세월일 뿐입니다.

(그것이 보기에 너무나 안타까우신 하나님은

참 신자라면 반드시 그 자리에까지 이끌고 갈 것입니다.)  


최근에 이사야서를 읽으면서

이사야 선지자는 ‘참 쓸데없는 예언을 많이 썼구나!’ 라는 생각을 문득 했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현실에 적절한relevant 설교’를 좋아합니다.

현실감각이 뒤떨어진 설교에 대해서는.. 매우 거부적입니다.


그런데 이사야서는.. 너무나 현실감각이 뒤떨어져 있었습니다.

7장에서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라며 메시아를 예언하고,

8장에서 ‘기묘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강의 왕’ 라며 메시아를 예언하고

11장에서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이렇게 각 장마다 메시아를 예언하는데,

그게 글쎄요, 7백년 후에나 되어질 일입니다. (나중에 알고보니, 7백년 후의 일이었습니다.)


     요즘 누가 7백년 후에 되어질 일을 예언하면..

     누가 그런 예언에 관심 기울이겠습니까?

     70년 이후라도.. 사람들은 아무 관심 없어할 것입니다.

     ‘현실의 절적성 relevance’ 이 너무 떨어진 메시지이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13장부터는 바벨론, 모압, 암몬, 애굽 등

주변국가에 대한 예언이 나옵니다.

이건 한 술 더 떠서 ‘현실의 절적성 relevance’이 더 없습니다.


아니, 바벨론, 모압, 암몬, 애굽 등

그 나라 사람들이 하나도 듣지도 않는 이야기를

자기 혼자 독백 식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 나라 사람들은 ‘이사야’ 라는 사람의 존재 자체도 아마 몰랐을 것입니다.

(혹자는 아직 ‘바벨론’이란 나라가 생기기도 전이었다고 합니다. 당시는 앗수르 시대)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지난 2천7백년 동안도 마찬가지고,

이사야서를 얼마나 열심히 읽고 있습니까?

(종말과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서도.. 비현실적인 메시지라도.. 계속 외쳐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사야의 예언은, 거의 ‘노아의 방주’ 수준입니다.

정말 ‘산꼭대기에서 방주를 짓는 식’이었습니다.


이 글의 주제는,

현실에서는 ‘현실에 적절한, 현실 감각이 뛰어난, 현실에 돋보이는’ 사람이 우대 받지만,


때로 하나님이 명령하시고, 우리 각자에게 사명을 주시는 내용은,

-전혀 비현실적이고,

-현실감각은 제로이고,

-현실에서는 거의 정신병자처럼 이상하게 오해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비현실적으로 계속 사는 그것이 바로 -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을 위한 사명 감당이며,   not 자기를 위한 사역

그것이 바로 자기 영생을 위하여 - 서곡을 아름답게 장식하는 일인 것입니다.

                                               서문을 아름답게 쓰는 일입니다.


지금 계란으로 바위를 치고 계십니까?

하나님이 주신 자기 사명이란 확신이 서거든.. 계속 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 각자를 평가하실 때,

어떤 업적/성취/물량으로 평가하지 않으시고,

‘얼마나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잘 죽었느냐?’ - 그것으로 평가하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