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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란 무엇인가?

LNCK 2011. 4. 28. 14:30

 

◈‘의’란 무엇인가?                창38:26              교회론9강 31'~40' 녹취, 편집



▲세상적인 ‘의’ 개념

우리가 알고 있는 바, 서구 사상이 말하는 의는

어떤 도덕적 윤리적 수준을 정해 놓고,

거기에 맞게 살아내는 것을 ‘의롭다’ 그러고

그 수준에 못 미치는 것을 ‘불의’라고 이해한다.


그래서 이런 서구 사상적 영향을 받아서

우리 믿는 신자들도, ‘의’라고 할 때

예수님이 우리 죄를 다 용서해 주셨기 때문에, 우리 죄가 없어졌고,

그래서 우리는 의롭다 함을 얻었는데,


거기서 ‘의, 의롭다’ 라는 개념을

도덕적이고, 윤리적 차원에서 이해하고 있다.


     물론 포괄적으로 볼 때, 그런 부분도 없지 않겠지만,

     히브리식 ‘의’의 개념은, 그런 것과는 차원과 각도가 완전히 틀린다.


▲히브리식 의 (차다크) 개념

사람은 항상 관계를 갖고 살게 되어있다.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

사람과 자연과의 관계

사람과 하나님과의 관계

이렇게 늘 관계를 갖고, 관계 속에서만 존재하게 되어 있다.


그런데 이 관계는, 

관계의 대상이 나에게 요구하는 것이 있게 된다.


부모와 자식 관계라고 하면,

부모가 자식에게 요구하는 것이 있고,

자식이 부모에게 요구하는 뭐가 있다.


부모는 자식에게.. 순종하고, 자기를 의지하기를 원하는 요구가 있고,

자식은 부모에게.. 자기를 보호, 사랑, 공급해 주기를 요구한다.


하나님과 우리 관계 사이에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있고,

우리가 하나님께 그 관계 속에서 요구하는 것이 있을 것이다.


그 관계가 요구하는 내용에 맞게 살아내는 것을 “의롭다”고 그런다.

이것이 바로 <히브리식 개념>이다.


▲관계 속에서 정의되는 “의” - 다말의 예

예를 들면, 유다의 며느리 다말이

시아버지를 속이고 후사를 얻기 위해서, 시아버지와 동침한다.


그런데 나중에 시아버지 유다가, 다말을 가리켜

‘네가 나보다 의롭도다!’ 라고 말한다.   창38:26              *히 ‘차다크’


며느리가 시아버지를 속이고 동침한 것이 뭐가 의롭기에,

유다가 다말에게 ‘너는 나보다 의롭다’고 말했는가?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따지면 화형에 처해져야 마땅하다. 전혀 의롭지 않다. 

실제로 처음에 유다는, 다말을 두고서 ‘화형 시켜 버려라’고 말했다.

그런데 유다는, 어떻게 다말을 보고 ‘의롭다’고 그러는가?

    -관계 속에서 풀어야 한다. ‘의’는 관계 속에서 규정되기 때문이다.


시아버지와 며느리의 관계에서,

시아버지가 며느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대를 이음’이다.

집안의 핏줄이 계속 내려가는 것이다.


과정은 좀 복잡하지만,

다말은.. (외간남자와 간음을 피하면서도)

시아버지가 원하는.. 가문의 대를 이어주었다는 것이다.


다말은, 시아버지와의 관계 안에서 충실했다.

그래서 유다는 그것을 두고서 ‘너는 나보다 의롭다’고 한 것이다.


     다말이 진짜 자기 자녀를 갖고 싶다든지, 아니면 무슨 욕구 때문에 그랬다면,

     얼마든지 재혼해서 자기 자녀를 갖거나, 원초적 욕구를 충족할 수 있었다.

     (지금 정황상, 다말은 유다 집에서 쫓겨난 상태에 있었다. 창38:11

     그러니 얼마든지 재혼할 수 있었고, 사별한 여자의 재혼은, 흠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뻔히 위험을 불사하면서 까지도, 시아버지를 택한 것은,

     며느리로서 자기 의무 - 가문의 대를 이어주는 것에 충실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가 유다의 ‘도장끈과 지팡이’를 요구하고, 그것을 간직하고 있었던 것도,

     그것이 일탈이거나, 순간 충동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 사건의 파장이 몰고 올 위험과 어려움을, 사전에 충분히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런 위험에도 불구하고, 다말은, 그 집의 대를 잇기 위한 자기 소임을,

     막대한 위험과 희생을 각오하고, 이행했다는 것이다.  


     그런 살신성인의 정신 때문일까? 그가 예수님의 족보에도 자기 이름이 올려졌다.

     그는 유다의 가문을 잇기 원했을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 대부터 내려오는 ‘하나님의 백성’의 가문을 계속 잇기 원했던 것이다.

     어떠한 자기희생이라도 다 치를 것을 각오하면서!


그래서 유다가 ‘너는 나 보다 의롭다’고 말한 것이다.

그 말은 또한

유다 자기는 며느리와 관계에서, 그 요구/의무에 충실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즉, 셋째 아들 셀라가 장성해서, 며느리에게 주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혹시 또 셋째 아들마저 죽을까봐, 미온적이며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나보다 옳도다 내가 그를 내 아들 셀라에게 주지 아니하였음이로다. 창38:26


     지금 <히브리식 의>의 개념을 설명하고 있다.

     다말과 유다의 관계를 예를 들어서, 그 개념을 설명하는 것뿐이지,

     이런 관계를 성경이 옹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말의 행위에 관한 신학적 해석은 다음 기회에 하기로 하고,

      다만 ‘히브리 개념의 의’를 설명하고 넘어가자)


▲하나님이 ‘의로우시다’는 뜻

하나님의 의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하나님의 의로우시다!’ 라고 말할 때,


‘하나님의 죄가 없으시고, 도덕적, 윤리적으로 완전하신 분이시다!’ 라고

뭐 이렇게 헬라 철학적 개념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게 아니다.

 

‘하나님이 의로우시다’ 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맺은 언약의 <관계>를 끝가지 지키신다’는 뜻이다.

그 하나님으로서의 자기 역할을 충실하게 해 내신다(언약을 끝까지 지키신다)는 뜻으로 ..

‘하나님은 의로우시다’ 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언약의 관계로 묶여 있다.

하나님은 영원히 의로우신 분이시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하나님의 의를 보이신다. 어떻게 보이시는가?


이스라엘의 대적들을 몰살시키신다.

그 언약의 관계 안에서, 이스라엘을 보호해야 하기 때문에,

이스라엘 이외의 다른 민족들에게는 피도 눈물로 없는 분처럼 보인다.

하나님이 이방은 그렇게 막 대하셨다. 이스라엘과 관계에 충실하기 위해서다.


(물론 이스라엘이 그 언약을 스스로 깨뜨렸을 때,

하나님도 이스라엘을 완전히 보호하지는 않으셨다. 언약이 잠시 깨어졌기 때문이다.)


삿5장에, 하나님께서 가나안 왕 야빈과 그 군대를 몰살시킨 후에, 드보라가 찬양하는 내용이 나오는데, 

거기서 드보라는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가리켜 ‘의로우신 일이다’라고 얘기한다.

     여호와의 의로우신 일을 칭송하라. 그의 이스라엘을 다스리시는 의로우신 일을 칭송하라! 5:11

 

 

아무리 다른 이방 민족이라도 그렇지..

부녀자와 어린아이까지 한 사람도 남김없이 다 몰살시킨 것이

과연 하나님의 의로우신 일인가?


-그러나 성경은 그것을 두로 ‘의롭다’고 말한다.

그 언약의 관계에 있어서, 하나님이 충실히 언약을 지켜나가시는 것을 두고서

‘하나님은 의롭다’ 그런다.


▲중간정리하면,

이렇게 히브리 사람들에게 있어서 "의" 개념은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존재들이,

그 관계에서 요구되는 삶을 성실하게 살아내는 것을 의롭다. 라고 말한다.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를, 퍼뜩 알아차리셔야 한다.

     우리가 믿음을 통해서 "의롭다" 함을 얻게 되었는데,

     (‘믿음’은 이제까지 많이 다루었고, 지금 ‘의롭다’함에 대해 살피는 중이다..)


     우리는 쉽게 그것을 ‘헬라 철학적/세상적’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래서 의롭다 함을 얻었으니, 하나님 보시기에 perfect하게 되었다.

     비록 우리는 불의하지만, 하나님이 의롭게/perfect하게/죄가 없게 봐 주신다..  

     이렇게 '윤리적으로' 이해한다.


     그렇지만 <히브리식 의 개념>은 그게 아니다.

     관계 속에서, 그 상대가 요구하는 바를 충실히 이행하는 것을 - "의"라고 한다.


     그러므로 ‘의’란 

     어떤 관념/생각/개념/철학이 아니라, (내가 깨끗하게 된 거야.. 이런 개념이 아니라)

     실제 삶속에서/실제 관계속에서 나타난다는 것이다.

     의롭다/불의하다.. 이것이 현실 속에서 삶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바울을 로마서를 써서, <의롭게 된> 예로, 아브라함을 드는데..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다고 했고,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그것을 의로 여기셨다고 했다. 창15:6, 롬4:3 


아브라함이 죄를 멀리하고, '윤리적, 도덕적'으로 하나님이 정하신 수준까지 잘 살아내었기 때문에

그가 의롭다 칭함을 받은 것은 물론 아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다’고 하니까,

‘나도 하나님을 믿으면 되지!’ 하면서.. 우리가 믿음을 ‘관념/생각/철학’으로 이해하면 곤란하다.


     예나 지금이나 중동 땅은 항상 불안하다.

     약탈이 많고, 치안이 불안했다.

     그래서 자연히, 사람들은 떼를 지어 다녀야 했다.

     소위 ‘카라반’caravan이 그래서 생겨났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의롭게 여기셨다는 것은,

당시 모든 인간이 타락하고, 하나님은 그들을 떠나셨다.

아브라함도 역시 갈데아 우르에서 영적으로 죽은 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살았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을 여셨다. 그리고 하나님을 알아보게 만드셨다.

그리고 그에게 복을 주시겠다고, 그 갈대아 우르를 떠나라고 말씀하셨다.

그 관계 속에서, 아브라함은 순종해서, 자기 삶의 기반을 다 버린 것이다.

그래서 과감하게, 위험한 중동의 개척지를 향해, 목숨을 버릴 각오로 떠난 것이다.

 

     -어떤 개념/관념/생각으로 하나님을 믿은 것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순종했다.

 

나중에 독자 이삭을 바치라고 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어떤 관념/생각으로 독자 이삭을 바친 것이 아니라,

진짜 제단을 쌓고, 칼을 빼어 들고는, 이삭을 죽여서 바치려 했다.

하나님과 관계 속에서 순종한 것이다.


하나님이 ‘하늘의 별과 바다의 모래처럼 네 자손을 많게 하리라’고 약속하셨을 때도,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다’는 것은,

그래서 그 척박한 광야와, 가나안 땅에서 그는 자기 자리를 떠나지 않고 굳게 지킨 것이다.


보통 사람 같았으면, ‘이거 뭐냐, 약속은 거창한데, 현실은 아무 것도 없이 빈털터리네!’

하면서, 다시 갈대아 우르로 돌아가든지 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 관계속에서, 하나님을 배반하지 않고,

끝까지 자기 자리를 지켜내면서, 그 땅에서 ‘나그네와 행인’으로 순종하며 살았다.


아브라함은, 그 관계가 요구한 것을, 순순히 지킨 것이다.

그것을 하나님은 그에게 "의"로 여기셨다..

단순히 하나님을 ‘생각/관념’으로 믿은 것이 아니다.


우리들도 의로 여기심을 받은 분들이다.

그 ‘의롭다’는 개념을 잘 알고 계셔야 한다.


우리도 하나님과 언약의 관계에 있다. 분명히 그렇다.

하나님이 시내산에서 주신 계명이 언약이며,

십자가와 부활로 새계명과 새언약을 주셨다.


관계 안에서,

일례로,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는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충실하게 순종하며 사는 것이 ... 의로움이지,

 

‘내 생각으로 하나님을 믿는다. 그래서 나는 성경의 약속을 따라 의롭게 되었다.’

- 이것은 성경적인 ‘의로움’이 아니다.

개념이 완전히 틀린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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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것이란?

‘의’란 말의 사전적 의미는 ‘올바르다’이지만,

신학적 의미는 ‘올바를 뿐만 아니라, 서로 화목된 관계’를 말한다.


화목이라는 것은 올바름을 바탕으로 한다.

올바름 없이 화목할 수 없다.

‘화목’과 ‘올바름’ 두 개념이 보태진 것이 ‘하나님의 의’이다.


하나님과 올바르고 좋은 관계,

또한 사람들과 올바르고 좋은 관계를 ‘의’라고 말한다.


그래서 성경이 말하는 가치를 간단히 말하면, 그것은 ‘하나님 나라’인데

그 내용은 ‘생명과 사랑과 의’이다.

이것이 최고의 가치요, 영원한 가치다.  <519번 글에서 가져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