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te[#pg_il_#

분류 없음/2010

길갈에서 보김으로

LNCK 2011. 3. 7. 13:29

 

◈길갈에서 보김으로     삿2:1~5   10.08.13.설교녹취  김성수 목사 삿3강 42~60‘

 

*일련의 연속설교 정리

1) 다 쫓아내지 못하였더라 

2) 길갈에서 할례

3) 길갈에서 보김으로 (아래 글)

 

 

▲지난 시간 복습

하나님의 언약이 우리를 살린다.

하나님의 언약이 주도하셔서

우리를 구원의 길로 이끌어 가신다는 것을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다.  

 

할례를 받은 자들은, 자기 육이 죽고,

하나님의 약속(언약)에 의해 끌려가는 은혜 받은 사람들이 된다.

사람이, 자기 의지로 믿는 것 같지만, 하나님 편에서 보면, 하나님이 끌고 가시는 것이다.

 

왜 하나님께서 요단강을 건너자마자, 길갈에서 할례를 행하게 하시는가?

1)인간의 '육'을 죽이고, 하나님의 생명으로 다시 살게 하기 위함이고,

2)하나님의 구원사역(언약 성취)에, 인간의 힘이 전혀 필요 없다는 뜻이다. (할례 후에 다 쉬고 있었다) 

 

한마디로 말하면, 구원역사가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 시작되었고, 진행되며,

언약에 의해 양육되며, 언약에 의해 완료될 것이라는 것이다.

 

인간의 공로는 거기에 전혀 보탬이 안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신학이 칼빈주의인데, 성경이 그렇게 말하고 있다.)

 

 

◑1. 가나안을 울면서도 못 쫓아낸다.                             

 

▲인간은 절대 다 못 쫓아낸다. 다 안 쫓아낸다.

그럼에도 이스라엘은 수시로 자신들의 눈과 귀에 의존하여,

자기들의 욕심을 버리지 못했다. 그래서 가나안 족속들을 조금 남겨둔 것이다.

다 내어 쫓지 않았다.

 

같은 사건을 하나님 편에서 보면,                  

하나님이 그렇게 조금 남겨두도록 섭리하셨다. 허락하셨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이 난로에 손 한 번 대게 하시고는, 더 이상 손대지 말라는 뜻이요,

자기 절망성을 철저히 깨닫고, 오직 구원자만 의지하도록 하시기 위함이었다.

 

마치 사울 왕이, 하나님께 제사 드리겠다고 좋은 송아지 남겨둔 것과 같다.

그것은 절대 기특한 생각이 아니다. 사울왕은 그것 때문에 폐위 당했다.

그게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악이다. 내가 하나님께 뭔가 해드릴 수 있다고 착각하는 것!

 

그렇게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눈과 귀에 의존해서

자신들이 되고 싶은 미래를 스스로 꿈꾸었고,

그러한 자신들의 욕망에 반하는, 하나님의 명령은, 초개처럼 버리기 일쑤였다.

 

▲하나님도 다 쫓아내 주시지 않으셨다.

그때 하나님께서 그들을 협박하신다.             

 

삿2:3 그러므로 내가 또 말하기를, 내가 그들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지 아니하리니

그들이 너희 옆구리에 가시가 될 것이며, 그들의 신들이 너희에게 올무가 되리라.

 

이것은 하나님이 지금 성질 부리시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우리의 인생이다. 여기서 우리는 뭔가를 배워야 한다.

 

▲‘우리가 안 쫓아내면, 주님도 안 쫓아내시고, 그들이 우리에게 올무/가시가 된다’

이 말씀이 민수기, 신명기, 여호수아서에서 반복적으로 나오는데,

본문 사사기2:3절에도 나온다. ↖

민수기, 신명기, 여호수아서는 직접 찾아보자.↙

 

민33:55 너희가 만일 그 땅 거민을 너희 앞에서 몰아내지 아니하면

너희의 남겨둔 자가 너희의 눈에 가시와 너희의 옆구리에 찌르는 것이 되어

너희 거하는 땅에서 너희를 괴롭게 할 것이요

56 나는 그들에게 행하기로 생각한 것을 너희에게 행하리라

 

너희가 가나안 족속을 조금 남겨두면,

내가 가나안 족속에게 내릴 심판을, 너희에게 내리시겠다고 하셨다. :56↖

 

그런데 결국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열심(주권)이다.

그러니까 가시와 올무 때문에 이 땅에서 고통과 심판을 받는다.

그러면서 회개하면서 구세주를 찾게 되고, 그래야 영원한 심판에서 벗어난다.

 

신7:16, 25, 12:30 (본문 생략)

 

수23:12  너희가 만일 퇴보하여 너희 중에 빠져 남아 있는 이 민족들을 친근히 하여

더불어 혼인하며 피차 왕래하면

 

13 정녕히 알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민족들을 너희 목전에서 다시는 쫓아내지 아니하시리니

그들이 너희에게 올무가 되며, 이 되며, 너희 옆구리에 채찍이 되며

너희 눈에 가시가 되어서 너희가 필경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신 이 아름다운 땅에서 멸절하리라

 

그러니까 이스라엘은 아무리 교훈을 하고, 심지어 협박을 해도

이 세상 매력에 대한 애착을 놓을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이 여실히 증명되고 있다.

 

하나님이 민수기, 여호수아, 사사기에서 매 시대마다 계속 반복, 협박하셨는데도

백성들은 도무지 그 경고를 안 들었다. 불순종했다.

 

울면서도 세상을 못 버린다.  삿2:4

본문 삿2장에 보면,

백성들이 그 경고를 듣고, 보김에서 울었다고 했다.

삿2:4 여호와의 사자가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 이 말씀을 이르매, 백성이 소리를 높여 운지라

 

그들이 자신들의 불순종의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해서 흘리는 눈물인가?

그럴 수도 있겠지만, 아니다.

 

아마도, 도저히 해도 해도 안 되는 자신들의 처지를 연민해서 흘리는 눈물이었다.

그들이 소리 높여 울자마자, 한 일이 무엇인가? - 우상숭배로 되돌아간 것이었다.

삿2:4절에서 울었고,  울면 뭔가 달라지는 게 있는가.. 기대했더니

2:11절에서 또 여호와를 배반했다. ↙

 

삿2:11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바알들을 섬기며

13 곧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고,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겼으며...

 

 

◑2. 그래, 가나안과 한 번 같이 살아봐!

 

▲이 때 하나님이 옆구리에 가시를, 그 백성에게 보내신다.  삿2:3

여기서 ‘가시’란

2~3미터 되는 나무꼬챙이(죽창 같은)를 뜻한다.

 

같은 의미의 단어가 바울이 자기 몸에 박혔다고 말한

‘사단의 가시’이다.

그 ‘가시’는, 생선가시가 아니라. 군대에서 사용하는 2~3미터되는 끝이 뾰족한 '나무 창'(스콜롭스)이다.

 

‘옆구리에 가시’, 또한 '올무'

그런데 잘 생각해 보시라. 이방인의 올무에 걸려 옆구리를 '창'으로 뚤린 분이 계신다.     

 

우리는 죽을 때까지 세상을 못 내려놓기 때문에,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심판(옆구리에 가시)을

이 심판을 예수님이 대신 받으실 수밖에 없었다.

그 옆구리에 창이 뚫고 들어와 버린 것이다.

 

‘너희 옆구리에 가시가 되리라’고 하신 경고의 말씀이

예수님께 그대로 이루어진 것이다.

예수님이 인간을 대표하여, 그 형벌을 대신 다 받으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복음이다. 그러나 우리는 맛보기로 작은 가시가 박힌다. 큰 가시는 주님이 박히시고..

 

▲인간의 공로.. 가 아니다. 안 된다.

우리는 종종 결심한다.

‘그래 맞아, 이 세상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 이런 것 사랑하면 안 되지..

가나안 문화를 다 버려야지’

그렇게 결심하는 것 .. 좋다. 필요하다.

 

그러나 내 의지나 존재가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섣불리 착각하지는 마시라.

‘그렇게 살아야지, 살아 볼 거야!’ 좋은 결심이다. 해 보시라.

그러다 안 되거든, 그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자기 가슴에 꼭 새기시기 바란다.

(그런 자기 의지적 노력이 전혀 무가치하다. 그러나 ‘도덕률 폐기론’은 또 안 됨.)

 

▲된통 맛 좀 봐라!

여전히 하나님의 열심히  구원사역을 이루어 가시는데..

어떻게 섭리하시는가 하면..

 

우리가 예수 믿고 이 세상과 여전히 관계간음하며 살면,

하나님이 한 번 살아보라고 놔두신다.

 

마치 조강지처들이

‘가서 한 번 살아봐라!’ 하듯이

 

‘너희도 세상과 한 번 짝 해 봐라. 그리고 나에게 돌아오기만 해라’는 것이다.

 

▲같은 내용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것이 ‘탕자의 비유’이다.

아버지는 아셨다.

탕자가 나가서 방탕하고, 죽을 고생할 것을..

 

그리고 가부장적 히브리 문화에서

탕자 같은 아들은, 돌로 쳐 죽여도 마땅한.. 그런 요구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니까 얼마든지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탕자의 아버지는, 마치 바보처럼, 탕자의 요구를 순순히 다 들어주신다.

 

‘나가서 한 번 네 마음대로 살아봐! 그러나 나중에 꼭 집으로 돌아오기만 하라’는 것이다.

‘나가서 한 번 돼지 치고, 쥐엄열매 먹고 살아보라’는 것이다.

 

물론 그러셔 놓고, 그 아들이 돌아오기만을, 문 밖에서 계속 기다리시는 아버지시다.

 

그것이 에덴동산의 선악과요,

우리가 지금 살펴보고 있는 ‘가나안을 다 쫓아내지 못한’ 이유이다.

그렇게 가나안과 혼인하고 짝해서 한 번 살아보라는 것이다. 혼 좀 나보고 깨달으라신다.

 

▲그래서 우리는 내가 못 버린 그 옆구리의 가시 때문에, 이 세상에서 고통스럽게 살게 된다. 

그런 고통 때문에, 탕자처럼, 다시 아버지께로 돌아오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만 나의 아버지로 경배하고 살아야 하는데,

모든 인간들이, 그렇게 피조물을 우상으로 삼아서 산다. 롬1장

그 삶이 얼마나 허황되고, 어둡고, 더럽고, 추악한 삶인지를 열심히 배우시면 된다.

 

돈이 많으면 많은 곳에서

없으면 없는 상태에서 ..  세상이 추한 곳임을 열심히 배우시고,

‘오직 아버지 안에 평안과 생명과 영생이 있구나!’ 그것 배우시면 된다.

그런 면에서 더욱 성숙되어가고, 지어져 가는 것이다.

 

 

◑3. 적용/ 그래서 성도는 세상을 보는 관점이 달라야 한다.

 

가나안을 흠모하고, 세상을 연모하는 그 관점이

달라져야 한다는 것이다.

 

여러분, 우리 성도는, 세상 사람들과 다른 점이 있는데,

성도와 세상 사람들이 다른 점은, 영의 눈과 귀가 열렸다는 점이다.

 

이 세상은, 하늘의 시각에서 봤을 때,

하나님이 '야 저것들 내 근처에 오지도 못하게 해!'

라고 말하실 정도로 더럽고 추악한 좀비들의 세상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시내산에서 짐승까지도 가까이 못 오게 하셨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이 세상이 매력적이고, 살만한 곳으로 여긴다.

 

그러면 영의 눈과 귀가 열린 사람은, 이 세상이 어떻게 보이는가 하면,

끊임없이 자기는 이 세상을 사랑하고 있는데,

내가 사랑하는 존재의 실체가 문득 문득 보이면서 실망하게 된다.

 

(정말 사랑해서 그 남자/여자랑 결혼했는데,

살다보니까 그가 늑대/구미호로 변하는 것이다. 실체를 깨닫게 된다는 뜻)

 

그런 것처럼, 우리는 이 세상에서 육의 몸을 입고 있기 때문에,

영적으로는 십자가에서 이 육의 몸이 죽었지만, 아직도 내가 육의 몸을 갖고 있다.

그래서 세상이 매력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래서 행복한 가정생활도 꿈꾸고, 출세와 부유한 삶도 꿈꾸고,

자녀가 출세하는 것도 보고 싶고, 여러 가지를 꿈꾸며 산다.

 

정말 여기가 좀비들의 세상이라는 게 끊임없이 자각이 된다면,

그걸 꿈 안 꾸고, 천국을 꿈꾸며 살 것이다.            *좀비 : 죽은 시체가 살아 움직이는 것

 

그런데 우리는 속고 있다.

우리는 예수를 믿으면서도, 세상을 아름답게만 보고 있다.

 

※이 세상을 보는 관점에 대해서, 이 내용이 맞지만, 각론으로 또 다른 관점이 있을 수 있음

   이 세상이 '가나안 이방 세상'이지만, 또한 우리가 건설해야 할 '하나님 나라'도 있음.

   지금 이 설교문은 전자(가나안 이방 세상)만 말하는 것임. 후자는 다른 설교에서 말할 것임.

 

영의 눈과 귀가 뚫린 사람, 열린 사람에게는

이 세상이 문득 문득

내가 너무너무 사랑하는데,

내가 사랑하는 이 세상(가나안 족속, 그런데 가족 포함)이 가끔 좀비요, 구미호로 들통 나는 것이다.

 

그럴 때마다 거기에 대한 애착을 조금씩 내려놓는 것이.. 신앙생활이다.

 

그런데 그게 고통스럽다. 끝까지 내가 이 좀비들에 대해 사랑을 놓지 못한다. (죄송한 표현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그 즉시 자기는 너무 행복하고, 기쁘고,

평안과 안식 속에서 자기는 한 번도 밖으로 나와 본 적이 없다는 사람이 간혹 있는데.. (그런 면도 있지만)

동시에 우리는 무척 괴로워지게 된다.

 

영과 눈이 열렸으니까, 이전에 못 보던 것들이 막 자기 눈에 보이기 시작하는데,

그렇게 아름답고, 탐스럽고, 보암직도 했던 세상이

사실은 속으로는 추악하고 해골 같은, 천국이 아니라는 뜻 곳이요,

 

내 가족도 그렇고, 심지어는 나 자신까지도 그렇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심지어 자기 스스로 고민하게 된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내랴?’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게, 결국 저렇게 더러운 것이었나를

끊임없이 폭로 당하는 현장에서 내가 스스로 괴로워진다. 맞다. 우리는 '죄성'을 사랑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나를 반드시 완성의 자리로 세우신다'는 복음이 있기 때문에,

내가 기쁨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이지,

내가 늘 정신병자처럼 ‘나는 항상 기뻐요 헬렐레’ 이게 안 된다.

 

누가 예수 믿는 것이 기쁘다고만 그러시는가? 

물론 일면 기쁜 면이 있지만, 동시에 끊임없이 괴로운 면이 있다는 것이다.

이 세상이 좀비 같은 세상이요, 심지어는 나도 비슷하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처절하게 내가 미워진다.

     거기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부르짖게 된다.

 

     그때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온다.

     ‘네 안에 새 생명이 있단다.

     지금 네가 힘들어하고 아파하는 것은 사실 네가 아니야

     너는 이미 죽었어!’

 

      그러면서 예수 안에서 새로 부활한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그 힘과 능력과 자부심으로 세상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내 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안에 새롭게 태어난 나를 사랑하게 된다.

 

▲여러분, 우리가 ‘종말’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데,

종말(심판)은, 이미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심을 통해 시작되었다.

예수님의 오심은, 구원과 동시에 심판이었다. ‘믿는 자에게는 구원.. 안 믿는 ~ ~’

 

지금 우리는 지난 2천년 동안 ‘종말’을 살아왔고, 지금도 살아가고 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을 결코 아름답게만 볼 수 없다’는 뜻이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고 있는 곳이라는 것이다.

 

여러분, 지금 성도로서 뭘 추구하시는가?

이 멸망 받을 세상에서, 좀 더 호사를 누리는 것을 추구하시진 않는가?

 

심판이 시작된 이 세상에서

구명보트를 찾고, 구명조끼를 입어야 될 사람들이,

거기서 도박판, 파티에 열중해 있더라는 것이다.     ‘타이타닉’에 빗대어..

 

그런데 거기서 악단을 보면,

이 배가 침몰할 것을 알고는,

더 이상 재즈 음악을 연주하지 않고,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 십자가 짐 같은 고생이나’ 찬송가를 연주했다.

 

눈과 귀가 열린 사람은, 이 현실 세상의 신나는 댄스곡만 연주할 수 없다.

영생의 찬송을 불러야 한다는 것이다.

 

▲좀 심하게 말씀드리면,

신자라는 사람들이 세례를 받고도, 전혀 자신의 육이 죽지 않고 펄펄 살아있어서

자기 인생에 대한 자기의 답(야망)을 하나도 버리지 않고 꼭 쥐고 있으면서

누가 거기에 부합되는 설교나 기도를 해 주면,

그게 고맙고 감격스러워서, 집 팔아서까지 헌금하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을 천국에 데려가시기 위해

세상에서 ‘자꾸 망하게 섭리’하시는 것이다.

그래야 세상 버리고, 천국 소망 품으니까! 그래야 구명조끼 입으니까!

 

그러므로 본질적으로 영생을 지향하지 않고,

(영생은 따 놓은 당상으로 치고) 현세적 복을 강조하는 현실의 기독교는

아주 위험한 복음을 전하고 있다는 것이다. 곧 파선할 타이타닉 호처럼!

 

▲마치는 말/ 길갈에서 보김으로!

 

길갈에서 할례(세례)를 받았다고 다 끝나는 것이 아니다.

신앙생활은 ‘길갈에서 보김으로’ 가는 길이다.   삿2:1참조

보김은.. 엉엉 우는 곳이다.  삿2:4

 

결론은.. <울면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계속 울면서, 천국을 지향하는 것이.. 우리 신앙생활이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은,

그렇게 이 세상이 어떠한 상태이며,

우리 인간의 실체가 어떤 존재인지를 항상 폭로한다.

 

오늘도 여호와의 사자가 그들의 실체를 확 폭로했더니

그들이 보김에서 엉엉 소리 내어 울었다.

 

우리도 울어야 한다.

억울해서도 울고, 내 모습이 폭로당하니까 부끄러워서 울고

하나님이 내 소원대로 안 해주시니까 원망스러워서 울고..

 

하나님 앞에서 우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런데 그런 성도의 울음은 전부 합력되어 선을 이룬다.

하나님의 말씀이 떨어지면, 거기에는 울음이 나오게 되어 있다.

 

여러분이 매주 설교를 들으시면서

그 말씀 속에서 여러분의 실체가 폭로되어질 때 울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왜 이 모양인가?’ 하며 탄식하면서 울고,

‘그런데 왜 나는 여전히 세상이 사랑스럽지?’ 하면서 또 울고..

 

그렇게 여러분이 울다가 천국가시는 것이다.

천국에서 주님은, 그 눈물을 ‘내가 닦아주마!’ 하신다.           계7:17

 

그 눈물 흘리라고, 하나님이 섭리로 가나안을 다 내쫓지 않으셨다.

탕자가 집을 나가도록 허락하신다.

한 번 선악과 따 먹어보라는 것이다.

 

우리가 세상과 짝해서 외도하다가, 옆구리를 가시에 찔려서 피를 철철 흘리면서, 

비로소 '내 진짜 신랑 하나님이 최고이구나..' 하고 주께로 울며 돌아오는 것이다.

 

탕자가 ‘아버지 집이 최고구나’ 하고.. 돌아오는 것이다.

사사기처럼, 다시 또 하나님께 부르짖으면서.. 돌아오는 것이다.  주1)

 

 

..................... 더 읽으실 분 .......................

 

삿2:3 그러므로 내가 또 말하기를 내가 그들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지 아니하리니

그들이 너희 옆구리에 가시가 될 것이며, 그들의 신들이 너희에게 올무가 되리라 하였도다.

 

그런데 위 본문 3절을 히브리 원어로 보면,

사실 거기에 ‘가시’라는 단어가 없다.

 

그런데 민수기, 여호수아에서 '가시'가 들어가 있었기 때문에   민33:55, 수23:13

여기서도 ‘가시’를 넣어서 번역한 것이다.

 

정확히 원문에 출실하게 번역하면, ‘그들이 너희들에게 옆구리가 될 것이다’이다.

 

이 ‘옆구리가 된다’는 말은,

당시 문화적으로 ‘너의 신부가 된다’는 뜻이다.  *아마 ‘짐, 굴레’의 의미로서 신부

아담의 옆구리로 통하여, 신부인 하와가 나왔듯이 말이다.

 

 

주1)

그래서 말씀을 올바로 전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욕을 먹게 되어 있다.

사50장에서, 이사야가 말씀을 올바로 전했더니,

사람들이 자기에게 등짝을 후려갈기고, 뺨을 때리고

수염을 뽑고, 얼굴에 침을 뱉었다고 했다.

 

이사야는 하나님이 보낸 예언자였다.

하나님의 예언이 올바로 떨어지면, 반드시 그런 일이 일어난다.

 

예레미야는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전했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전하면, 자기가 꽤나 잘 될 줄 알았는데,

도리어 사람들에게 심한 멸시를 받으니까 ‘내가 하나님께 속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이제 다시는 전하지 말아야지 하고 몇 번을 결심하지만,

그런데 그때마다 마음이 불편하고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말씀을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다고 했다. 렘20:9 

 

여러분이 다 선지자고 예언자이다. 말씀을 전하는 자, 삶에서 복음을 나타내는 자이다.

우리는 이렇게 연약한데,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이 나를 이렇게 살려내는가?

이것을 삶에서 보여주는 사람들이다.

 

삶에서 복음을 나타내고, 때로는 입을 통하여 복음을 설명하게 하신다.

그런데 우리가 세상으로부터 엉뚱한 상상치 못한 대우를 받게 된다.

 

세상에서 욕먹고,

또 그 세상을 사랑하는 자기 자신 때문에 스스로 괴로워하고

그래서 이래 저래 눈물을 흘리게 된다.

 

하나님이 모세를 불러서 이스라엘 백성에게로 가라고 해놓고,

가는 길가에서 모세를 죽이려 하셨다.

아들 할례 시키지 않았다고.

 

십보라가 눈치가 빨라서, 아들의 양피를 베어서 던졌다.

무슨 뜻인가?

 

모세야 네가 지금 나의 지팡이를 갖고 이스라엘에 복음을 전하러 가고 있다.

그렇다고 네가 뭐 대단한 존재라서, 내가 너를 택한 줄 아느냐?

너도 이렇게 죽을 운명이야, 너도 하나님의 할례 언약 아니면,

너도 살 수 없는 존재란다. 이것을 가르쳐 주시고 보내시는 것이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만 하지 않으면, 어떤 면에서 양피 잘릴 일도 없이 편하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고 나서는 순간부터,

하나님은 우리 뒤를 쫓아오신다. 양피 베시러!

 

그래서 사도바울은,

하나님이 나에게 사형선고 내리신 것처럼, 나는 매일 죽음의 위협에 처했다고 말했다.

마치 하나님이 죽이시려고 하는 것 같았다고 했다.

 

이게 뭐냐? 왜 바울을 그렇게 쓰시나?

걸핏하면 죽을 고생하게 하시고,

 

하나님은 바울을 통해 뭘 일하시는 게 관심이 있지 않으시고,

바울을 점점 변화시켜 가시는 것이다.

 

여러분의 삶도 마찬가지다.

우리 삶은 계속에서 길갈에서 보김으로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방문으로 이어진다.

 

이 땅의 헛된 재미에 빠져서 헛된 웃음 웃지 말고,

드라마, 영화, 코미디, 스포츠, 술, 마약, 취미 몰두..

그것 진짜 재미 아니야, 그것 한 번 먹어 봐라고 주신 것이다.

먹고 빨리 포기하라는 것이다.

 

대신에 우리는 울어야 한다...

자신에 대해 절망하고, 세상에 대해 실망하면서

구세주와 언약을 붙잡게 되고, 그 분에 의해 끌려가게 되어있다.

그 과정에서 흘리게 되는 눈물을.. 너무 생소하게 받아들이지 마시라.

 

진정한 신앙인의 천로역정은 ‘울게 되어 있다.’

물론 울면서 또 범죄하지만,       

그래서 up and down 하면서도 계속 천국을 향해 지향 ('지향'을 화살표로 그려서 설명하면 "" )하는 것이다.

 

'분류 없음 > 2010' 카테고리의 다른 글

결단주의와 쉬운 믿음   (0) 2011.04.27
애굽 종살이를 잊지 말라  (0) 2011.04.08
길갈에서 할례  (0) 2011.03.05
방주, 갈대상자, 법궤, 모세 & 예수 2889  (0) 2011.02.24
옷니엘과 악사 2888  (0) 2011.02.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