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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때부터 소경을 고치신 예수님

LNCK 2011. 5. 4. 09:42

◈날 때부터 소경을 고치신 예수님         요9:1~6         인터넷설교스크랩, 녹취


약간 신학적입니다. 성경을 보는 눈을 열어줍니다.



◑‘소경’을 고치심은 ‘죄인’을 구원하는 사역


▲요9:1, 예수께서 길 가실 때에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보신지라

소경은 주님을 볼 수 없었고, 주님이 먼저 소경을 보셨다.


여기서 ‘보다’의 헬라어 ‘에이도’는 원래 ‘알다’라는 뜻과 같이 쓰인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란 말처럼, 보는 것은 곧 알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주님은 지나가시는 길에, 우연히 불쌍한 소경을 발견하신 것이 아니라,

이미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계셨으며,

알고 계신 그를 찾아가셨다... 라는 의미에서 특별히 ‘에이도’(보다)가 쓰인 것이다.


소경은, 주님이 자기에게 다가오시는 줄을 몰랐을 뿐만 아니라,

주님의 이름을 먼저 부르지도 않았다.        ※참고로, 바디매오는 먼저 불렀음

따라서 그는 주님께, ‘자기 눈을 뜨게 해 달라는’ 부탁도 할 수 없었다.


이것이 바로.. 구원 받기 전의 우리 상태이다.

그러므로 구원은, 전적으로 은혜로 받는 것이지,

내가 노력하여, 내가 성화되어 자격을 갖추고 구원에 이르겠다는

자력自力구원 식의 이론은 타당하지 않다.  ※여기까지 서론, 아래부터 본론


▲그래서 성경에서 ‘소경’은 죄인들을 총칭하는 단어로, 자주 쓰였다.

복음서에는, 주님의 많은 치유사건 중에

유독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신 사건’이 가장 많이 기록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죄인의 눈을 뜨게 하셔서 구세주를 보게 하신 사건’이다.


복음서의 예수님의 치유사건을 종합해 보면,

귀먹은 벙어리를 고친 사건.. 1회

중풍병자 고친 사건.. 1회

열병 앓던 자 고친 사건.. 1회

문둥병자 고친 사건.. 2회

죽은 자를 다시 살려낸 사건.. 3회

반면에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사건.. 5회


이와 같이,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신 사건이, 압도적으로 많다.

이것은 성경이, 소경의 상태를

영적으로 어두움 가운데 있는 죄인들의 상태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래서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심으로써,

주님은 그런 어둠의 상태에 있는 죄인들에게 찾아오셔서,

그들을 광명한 빛으로 인도해 내시는 분, 즉 구원으로 이끄시는 분이심을

상징적으로 설명해 주고 있다.


▲요9:3,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그 소경을 통해 ‘하나님의 하시고자 하시는 일’은

지금까지 위해서 설명한 내용이다.


우리 죄인들은 혼돈, 공허, 어둠 속에서

갈 길을 모르고 헤매며 살고 있었고,

성전 문 앞에서 구걸을 할 수밖에 없는 거지 소경 같은 존재였는데, 

그것도 날 때부터..


구세주께서 주도적으로 찾아가시고,

은혜로 그의 눈을 뜨게 하셔서

영생과 구세주를 알아보게 하신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태어날 때부터 ‘소경’(죄인)으로 태어나서,

‘거지’같은 인생을 살다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였다는 것이다.


이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예수님은

‘중도실명자’가 아닌, ‘날 때부터 소경’을 택하여 고쳐주신 것이다.


예수님의 구원 사역, 성경의 기록목적 모두가

‘죄인의 구원’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본문의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시는 일’이었다.


▲요9:4,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 번역이 약간 잘못되었다.

‘내가 하여야 하리라’이다. I must work 이다.         *참고로, 다른 번역도 있음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해야 한다..

예수님은 재차 강조해서, 다짐하여 말씀하신다.


단순히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치유사역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죄인의 영적으로 감긴 눈을 뜨게 하신 구원사역에 초점이 있다는 것이다.

그 일을 예수님은 ‘I must work, 내가 반드시 해야 하리라’ 하며 다짐하신다.


▲영안이 열려야 한다.


요3: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위 말씀은, 거듭남보는 것을 동격으로 설명한다.


거듭남(다시 태어남)은

‘보는 눈’이 바뀌는 것이다.

‘육신적인 눈’에서 ‘하나님 나라의 시각’으로 바뀌는 것인데...



◑왜 하필 진흙을 그의 눈에 바르셨는가?


▲요9:6,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예수님이 병자들을 고치신 방식은, 매번 달랐다.

그런데 본문은, 그 중에서도 가장 기이한 방식이고, 심지어는 비위생적인 것 같다.


그냥 ‘소경아, 눈을 떠라’ 이렇게 말씀 한 마디만 하시면 될 것을,

죽은 나사로도.. 나와라 하고 말씀하시니까 무덤에서 걸어 나왔는데...


굳이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서, 그의 눈에 바르시는 등...

복잡한 절차를 거치신 이유가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것을 살펴보고자 한다.


▲성경에서 , 또는 티끌의 특별한 의미 

성경에서 흙과 티끌은,

‘저주받은 죄인들’과 그 ‘죄’를 총칭하는 말이다.


창2:7절에,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셨는데, 여기까지는 좋은 흙이었다.

이 흙이 타락한 후에 이렇게 변했다.


창3:14절에, ‘(뱀에게) 너는 종신토록 흙을 먹을지니라.’


‘(아담에게)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평생 수고해야 그 소산을 먹을 것이다.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니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창3:17~19


아담의 범죄 후에 흙은,

저주받은 인간의 현실과, 그 결말을 가리키는 소재로 변했다.


▲주님은 흙과 자신을 섞어서 개었다.

예수님의 침이, 저주 받은 땅의 흙과 섞여졌다.

하늘의 빛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내려오셔서

저주 받은 육신 안으로 들어와 버리시는 것이다.


이렇게 예수님의 성육신(인카네이션)을

침으로 진흙을 개어서 만드시는 사건이.. 다시 한 번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 진흙이 소경의 눈에 붙여졌다.

즉 저주 받은 흙(사람)이

예수님과 연합되었을 때, (침으로)

그 상태에서, 소경의 눈이 보게 되었다/영생을 보게 되었다/구원을 얻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밀가루도 아니요, 소금도 아니요,

특별히 흙에다가..


또한 물도 아니요, 우유도 아니고,

특별히 침으로 (비위생적임에도 불구하고)

진흙을 개어서, 소경의 눈에 바르신 <상징적> 이유라고 생각한다.


하늘의 하나님이,

이 땅에 내려오셔서,

이 죄인(흙)들과 함께 뒤섞이셨다.

그들을 품어 안아 버리셨다.


▲요9:5,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이 말씀도, 본문의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신 사건이,

‘단순한 치유 사역’이 아니라,

‘구원 사역’임을 명백히 선언하고 있다.


본문이, 소경의 눈을 뜨게 한 ‘단순한 치유사역’이라면,

본문의 중간에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라는 말씀이 넣어질 필요가 없었다.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나는 치유자니라’라면 몰라도...


정리하면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신 사건’은

‘죄인의 눈을 뜨게 하셔서, 구세주와 영생과 천국을 보게 하시려는 구원사역’

이라는 뜻이다.


       오늘 우리의 신앙생활도, 교회의 설교도

       성경이 증거하는 바와 같이

       구원사역, 구원의 완성, 신앙의 성숙, 온전함을 향하여 나아가야 한다.


       구원은 따 놓은 당상이니,

       이제 앞으로는 죽복이나 받으며 살자.. 이것은 성경의 주제가 결코 아니다.

       (그 외 구체적인 적용은 각자 연구합시다)

                                                                                                                       김성수목사님 요한복음강해 40강 23~25분, 34~39분 근처 녹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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