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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로암 연못까지 내려간 이유

LNCK 2011. 5. 4. 19:57

 

◈실로암 연못까지 내려간 이유       요9:6~13       김성수목사님 요한복음40강 후반부 녹취                                 


신학적이라서 TEXT로 이해가 힘들 수 있습니다. 인터넷에서 직접 찾아서 들어보세요.



▲지난 회 복습 : 굳이 침으로 진흙을 이겨서, 소경의 눈에 바르신 이유

하나님이신 예수님(침)이

죄인(흙)과 연합하심으로써,

그리스도와 연합을 모형적으로 보여주었다.


그래서 하나님 되심이 죄인에게 전가(연합)되고,

죄인의 실상이 하나님께 전가되어져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와 연합, 또는 성육신’으로

죄인을 구원하시는 구원사건의 모형

‘침으로 흙을 이겨서 소경의 눈에 바르는 사건’속에 담겨 있다고 본다.


멀리 하늘에서 말씀으로만 죄인을 구원하지 않으시고,

친히 이 땅에 죄인가운데 내려오셔서, 죄인 속에서 거하시면서,

죄인의 모습으로서, 죄인을 구원하실.. 그 성육신의 사역을.. 모형하고 있는 것이다.


     그 결과 죄인의 눈이 떠지고,

     다시 보게 되는(구원을 받게 되는) 사건을, 본문이 설명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침으로 흙을 이겨서 눈에 바른 사건’의 신학적 해석이다. 주1)



◑굳이 실로암 연못에 가서 씻어야 하는 이유


▲요9:7,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예수님은 그 자리에서 직접 고쳐주지 않으시고,

눈이 안 보이는 소경을, 실로암 연못까지 보내셔서,

그 눈을 뜨게 하신 이유는 무엇일까?


다시 말해서,

성경이 ‘구원이 책’이라면, 이것 역시 <구원 사역>을 담고 있을 터인데,

실로암 연못에 가서 씻는 사건은, <구원 사역>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가?


     그런데 요한복음8장과, 요한복음9장을 비교해서 살펴보자.

     요8장의 예수님과, 요9장의 소경은 상당한 유사점이 발견된다.


     즉 요9장의 소경이 실로암 연못으로 가는 사건은,

     지상에 오신 그리스도의 사역을 예표하고 있고,

     또한 ‘작은 예수’인 우리 각자 성도의 삶을 예표하고 있는데,

     우리 성도 각자 역시.. 실로암으로 내려가서 눈을 씻어야 한다는 것이다...


요8장의 예수님과, 요9장의 소경의 유사점

유사하다는 뜻은.. 소경이 예수님을 예표하고 있다는 뜻이다.


            요8장의 예수님

             요9장의 소경

▲1.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의 빛임을 유대인에게 말하자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거짓말쟁이로 몰았다.

8:12~13

눈을 뜨게 된 소경이 거짓말쟁이로 몰린다.

9:18

▲2. 예수님은, 자신에 대해

아버지께서 증거하신다고 말씀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그것을 이해 못 했다.

8:18~19

소경의 부모가 아들에 대해 증거한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그것을 이해 못 했다.

9:18~20

▲3.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돌로 쳐

죽이려 했다.

소경의 말을 들은 유대인들이

그를 쫓아내 버린다.

공동체에서 쫓겨남은, 거의 죽음과 같다.

▲4. 예수님은 당신을 가리켜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말한다. 8:16

날 때부터 소경된 자는

예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는다’ 9:7

 

▲5. ▲6. ▲7.은 중요하므로 아래에서 따로 빼서 설명함 

 


이와 같이 요8장의 예수님

요9장의 소경이 아주 흡사하게 대비/병행되어 있다.

이 사실은 무엇을 뜻하는가?


결론부터 미리 말씀드리면, 요9장의 소경은,

요8장과 비슷하게 ①예수님을 예표하면서,

②나아가 ‘작은 예수들’인 우리들이 나아가야할 ‘성도의 삶’을 보여주고 있다.


▲5. 두 분 다 <나는 나다> 하며 하나님을 예표함

주님께서 당신을 가리켜 ‘나는 나다. 에고 에이미’ 라고 칭하시는데,

그것은 하나님에게만 쓸 수 있는 단어이다.    ※나는 나다.. 출3:14 참조


요8장에서는, 예수께서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에고 에이미) 하시니..  요8:58   


요9장에서는, 이 소경이 자기를 가리켜 ‘내가 그로라/ 에고 에이미’라고 선언한다.

혹은 그 사람이라 하며 혹은 아니라 그와 비슷하다 하거늘 제 말은 내가 그로라(에고 에이미) 하니.. 요9:9 


요한은 지금, 요8장과 9장에서

의도적으로 이 같은 단어들과 내용들을 들어서,

예수 그리스도소경으로 예표되는 성도를 대비해서 설명하고 있다.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예수는,

육신의 몸을 입으시고,

즉, 더러운 티끌과 침이 함께 이겨지셔서

죄인의 환부에 붙여지시고,


가장 비천한 죄인의 모습이 되셔서

실로암 물에 내려가심으로써, 죄인들이 구원을 받는다.


예수님이 가신 길을, 소경이 가고 있고, 성도가 가야할 길이라는 것이다.


▲6. 둘 다 <보내심을 받은 자>

보내심을 받은 주님의 십자가의 삶을..

주님께 보내심을 받은 소경이

그대로 판박이처럼 보여준다.


날 때부터 소경이었던 자가

그 눈에 진흙을 이겨 붙임으로 말미암아.. 상황이 더 힘들게 되었다.

원래 소경인데다가, 그 위에 진흙까지 더 붙였으니, 더 안 보일 것이다.


그런 모습으로, 실로암 연못까지, 소경이 걸어가는 모습은  *상당히 먼 거리

‘자기를 보내신 분의 명령을 확실하게 수행하기 위함’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으셨고,

소경은.. 예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아서 실로암까지 가고 있다.

(‘실로암’이란 말은 ‘보내심을 받았다’는 뜻이므로, 소경이 보내심을 받은 것은 확실하다. 요9:7)


두 분 다 보내심을 받은 점에서 유사하다.

예수님의 삶이, 소경의 삶에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이렇게 요한은, 8장과 9장을 연결해서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보내심을 받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예수님이 그러셨다.

‘하나님이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요20:21


주님이 우리를 어디로 보내시는가?

실로암 연못으로 보내신다.


구원의 완성 지점으로 우리를 보내시는데,

거기까지 가는 길에는 온갖 조롱과 멸시와 억지와 천대

이런 것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눈에 진흙을 이겨 붙이고)

실로암 못으로, 낮은 곳으로

한 발 한 발 걸어 내려간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눈에 진흙이 붙여진) 성도의 삶인 것이다.


▲7. 둘 다 <겸손하고 낮아진 모습>

진흙을 눈에 이겨 바른 소경이

실로암 연못까지 길을 더듬어 걸어가는 모습은,

‘나는 소경입니다’하며 낮아진 모습이요,

구경하는 사람들로부터 온갖 조롱과 멸시를 받는 모습이다.


그러면서 소경은, 실로암 연못에 더듬으며 도달하는데,

실로암 연못은, 성밖 기드론 골짜기 기혼 샘에서 흐르는 물이

지하수로를 통해서 예루살렘 성에 마지막으로 도달하는 종착지이다.

다시 말하면, 물의 표고차로 보면, 가장 낮은 지점이다.

예루살렘 안에서도 가장 낮은 지점을 의미한다.


소경은, 조롱과 멸시를 뚫고서, 그 가장 낮은 곳, 실로암에 내려가서,

자기를 보내신 분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하여,

가장 낮은 곳에 도달하여, 무릎을 꿇고서(더 낮아짐), 소경은 자기 눈에 진흙을 씻었다.

 

지상에서 성도의 삶이란 것은,

예수님이 보여주신 삶이요, 본문의 소경이 보여주는 삶이다.


하늘보좌를 차지하신 그 분이,

이 땅에 성육신으로 내려오셔서,

이 세상의 죄악들과 이겨지셨다. mixed


그리고 갖은 수난과 멸시를 받으시고,

그러한 조롱과 멸시 속에서도, 하나님의 명령을 이루겠다고

‘내가 네게 준 자를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겠다’고  요6:39

십자가에까지 아래로 내려가셨다.       *십자가 : 가장 낮은 자리라는 뜻

(소경이 실로암에 내려가는 길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이다.)


그러므로 이 ‘실로암까지 더듬어 가는 소경의 모습’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조롱, 수치, 낮아짐을 상징함과 동시에,


작은 예수인 우리 성도 각자가 걸어가야 하는 길이며,

-특히 구원의 완성을 위해서, 구원의 성숙을 위해서 걸어가야 하는 길을

모형 또는 예표하고 있는 것이다.


▲적용 / 다윗의 예


시116:5,  주님은 은혜로우시고 의로우시며, 우리의 하나님은 긍휼이 많으신 분이시다.

6 주님은 순박한 사람을  지켜 주신다. 내가 가련하게 (낮게) 되었을 때에, 나를 구원하여 주셨다.


다윗은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할 만큼, 재물과 권세를 다 쥐었던 사람이다.

그런데도 완전한 행복, 만족이 없었다.

그래서 얼마든지 합법적으로 자기 욕정을 채울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불법적으로 밧세바를 범하고 만다.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재물과 권세를 갖고도

그것으로 자기의 만족을 다 채울 수 없어서

범죄할 수밖에 없는 존재가.. 인간이란 말이다.


이 세상에서, 어떤 힘과 권세를 갖고도 행복과 만족에 도달할 수 없다.

그런데 가장 낮은 곳에 내려가서 무릎을 딱 꿇었더니

주님이 거기서 나를 구원하셨더라.. 는 이야기다.

‘내가 가련하게(낮게) 되었을 때에, 나를 구원하여 주셨다.’


소경이 실로암 연못에까지 내려갔을 때, 거기서 눈을 뜬 것이다.

그때 구원에, 눈을 뜨는 것이며,

그때 비로소 참 행복에 내가 도달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다윗의 고백이었다.


이렇게 상한 심령으로 자신을 부인하고, 낮은 자리에서 섰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고, 그 때 비로소 행복할 수 있다.


세상의 힘을 흠모하며 쫓아갈 때는,

그것에 눈이 팔려.. 절대 하늘의 것으로 기쁘고 만족한 삶을 맛볼 수 없다.

이렇게 구원받은 자들의 표지는.. 실로암으로 내려가는 낮아짐이다.


성도의 신앙생활이란,

자꾸 나를 자랑하고, 유명해지고, 높아지려고 하는 그런 시도가 아니라.. 낮아짐이다.

돈을 많이 벌고/ 못 벌고

유명해지고/ 무명한 상태로 살고,

높은 자리에 올라가고/아니고

이게 문제가 아니다.


돈이 많든지/적든지.. 낮아지고 겸손함이,

예수님과 연합해서 (눈에 진흙을 바르고) 실로암 연못으로 내려가는 것이

그것이 구원의 완성으로 가는, 성도의 믿음이 성숙해 나가는.. 표지이다.

거기 실로암에서 비로소 눈을 뜬다는 것이다.


2성 장군, 3성 장군이

교회에서 주차관리나 허드레 일을 하면서, 그렇게 비천하게 스스로 낮아지는데..

거기에 (수치가 아니라) 묘한 성령의 감동과 행복함이 있더라는 것이다. 


각자의 처지와 상황 속에서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삶, 섬김의 삶, 사랑의 삶을 살아내라는 것이다.


때로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눈에 자꾸 침을 퇴퇴 뱉어서

진흙을 이겨 붙이는 듯한.. 그런 기분 나쁜 경험을 주실 때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진흙을 눈에 붙이고 실로암까지 걸어가라고 명하신다.


왜 나를 이렇게 낮추시나?

왜 나에게 이런 수치를 주시나?

-낮은 자리로 내려가라는 것이다.


마지막에 진흙을 다 닦아 주신다.

그때 우리 눈에 시각이 열린다.

영광의 주와, 그리스도와, 구원과, 천국과, 영생을 보는 눈이 확 뜨인다.


지금 잠시 부끄러움 당하는 것.. 뭐 어때요? 괜찮다. 잘 참으시라.

각자의 자리에서 실로암으로 내려가는.. 그 낮아짐의 삶을 잘 살아내시라.


..................................


주1)

그런데 요한복음은 7개의 이적이 모두 신학적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본다.

다른 복음서는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요한복음만큼은, 매우 신학적으로 쓰여졌다고 본다. 


   *관련글 / 거듭남의 기적이 가장 중요한 기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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