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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가들의 아침 묵상

LNCK 2011. 5. 10. 16:23

◈영성가들의 아침 묵상                        시5:3                    출처보기

 

 

하나님과 함께 걷는 오솔길이 어색한 이들을 위해, 영성가들의 산책로를 따라가 보았다.

 

 

◑유진 피터슨 목사               *「시편으로 드리는 매일기도」의 저자

 

유진 피터슨이 말하는 하나님과 자신의 독특한 관계는

우리 모두에게 열려 있지만, 누구나 누리는 삶은 아닌 듯하다.

 

▶시편 기도

저는 매일 아침 5시반 이나 6시쯤 일어나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셨다”고 말하고, 커피를 끊여서 마시고

서재로 올라가 1시간 반 정도 시편과 신약을 읽습니다.

 

그리고 히브리 시편으로 기도하기도 하고,

영어로 시편을 기도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이것들을 외우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묵상하는 기도를 주로 한다는 뜻, 개인적 필요의 기도보다..)

 

결혼 후 하루도 빠짐없이 이러한 아침 시간을 가졌습니다.

40여 년쯤 되었을까요?

 

▶숲에서 보내는 안식일

그리고 동일한 세월 동안 우리 부부는 안식일(일주일에 하루를 온전히 쉼)을 지켰습니다.

매주 월요일이면 저희는 숲으로 향합니다.

 

숲에서 우리는 시편을 읽고서, 두세 시간 정도 조용히 침묵의 시간을 갖습니다.

조용히 기도하는 시간을 갖고 나서, 육신이 쉬는 시간을 갖습니다.

일이라 부를 만한 것은 피합니다.

 

저는 안식일을 지킴으로써, 우리가 통제하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통제하시는 삶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 자아의 통제가 멈추게 됨으로써 말입니다.

 

▶종종 멈추고 묵상의 시간을 가짐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우리보다 늘 하나님이 더 적극적이십니다.

그러므로 제가 하나님의 임재의 경험이나 느낌들을 인위적으로 만들어 내는 것은

매우 바보 같은 짓입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읽거나 공부하다가, 어떤 생각이 떠오르면

저는 말씀으로 깊이 묵상을 합니다.

 

만일 이 자연의 아름다움에 거하는 것이라면,

그것으로 내가 느려지고, 하나님의 진리에 대해 순응적이고, 수동적으로 되며, 고요해진다면,

그래서 제 무의식과 직관에 다가선다면.. 저는 그리스도를 묵상합니다.

 

그러나 다른 의미에서 인위적으로 신비적 상태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라면

저는 묵상을 하지 않습니다.

 

▶삶이 단순해지면서, 하나님을 더욱 깊이 체험합니다.

저는 많은 사람들과 부대끼며 분주한 가운데 있으면서

중요한 변화들이 일어난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깊이 체험하지 못했습니다.

 

리젠트칼리지를 은퇴하고 고향으로 돌아와서는, 삶의 분주함이 줄어들었습니다.

이때 제가 느끼는 것은

하나님에 관해 지금까지 느껴 보지 못한 깊은 지각입니다.

 

이러한 상실감과 빈 느낌 속에서 저는

제 자신이 줄어들고, 하나님이 더 늘어가는 것을 느낍니다.

 

영성의 역사를 보면,

적극적으로 하나님이 자녀에게 주시는 이미지와 약속들을 강조하는 가운데

하나님을 찾는 길이 있었고,

 

반대로 자기를 부인하는 방식으로 이러한 것들을 부정하고

사막으로, 침묵으로 들어가는 방법이 있었습니다.

 

저의 젊은 시절은 전자를 선호했습니다. 성경도 그러합니다.

주님의 나의 반석, 나의 산성, 성육신된 주님 등..

기도 가운데 많은 적극적인 이미지와 약속들을 좇았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자신을 부인하는 방법 속에도 어떤 정화 작용이 있습니다.

자신을 비우고, 자아의 죽음을 묵상하는 등

(나이 들면서 고통과 죽음의 한계에 더욱 가까워져서 그런지는 모르나)

이 후자 속에서도 풍성함을 발견합니다. 이 둘은 함께 가는 것일 겁니다.

 

하나님과 관계를 갖는 것은 함께 communion 하는 것입니다.

예배와 기도가 그 통로가 됩니다.

여기엔 침묵이 있고, 비움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데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계시입니다.

우리는 영적인 길을 짐작하는 것이 아니라, 계시로써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매일 반복적으로 계시를 취해야 합니다.

밥을 먹는 것처럼 말입니다.

 

둘째로 신학 서적을 읽어야 합니다.

신학 서적들을 통해 계속해서 하나님에 관해 들어야 합니다.

말씀과 신학을 통해 우리는 계속해서 하나님에 관해 들어야 합니다.

 

거기에 한 가지를 더한다면 단순한 주의력 혹은 경배적인 주의력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가지는 주의를 기울이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면

우리는 그분의 임재함에 대한 감정이나 장치를 만들어내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우리는 다만 귀를 기울이고 깨어 있어야 합니다. 경배의 길로 말입니다.

 

 

 

◑이상규 목사           *큐티 사역 목회자, 「에덴의 삶을 회복하는 큐티」 저자

 

말씀 묵상을 하기 전에, 제 마음을 준비하는 데 충분한 시간을 가집니다.

충분히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하고, 주님을 생각합니다.

그분과 좋은 관계 속에 대화를 한 후 말씀을 읽습니다.

 

마음을 준비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을 말합니다.

‘주님이 내 앞에 계시다’라는 것을 고백하면서 바라봅니다.

 

주로 저는 “당신은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라고 반복해 고백합니다.

“당신은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한마디를 고백한 다음

그분이 그리스도라는 것이 얼마나 큰 뜻인가 묵상합니다.

 

에덴에서 인간이 타락한 후에 이스라엘 민족사를 통해 그렇게 갈망하던 그분을

지금 내가 마주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인생을 만들어 회복해 가시는 절정의 모습과, 아들의 모습을 떠올리며,

하나님과 깊은 사랑과 교제의 친밀함을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회복합니다.

 

내가 지금 뵙는 분이 참 놀라운 분이라는 것을 느끼게 되고,

경외감이 솟고, 예배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주님과 사랑의 밀회를 합니다. 침묵 가운데 마음이 부풀어 오릅니다.

그 후,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통로로 말씀을 읽습니다.

 

▶감동 받은 말씀을 계속 붙잡고 묵상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들을 수 있도록 포용의 마음을 준비하고

본문을 읽으면 본문 가운데 성령께서 감동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큐티는 단순히 성경 본문을 해석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내 마음에 주시는 씨앗을,

주님으로부터 오는 말씀의 씨앗을 마음에 담는 것입니다.

 

내게 온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마음에 와 닿는 말씀을 잡는 것입니다.

마음에 감동이 있습니다. 바로 그 순간을 기다립니다.

 

성령께서 본문의 여러 말씀 가운데 어떤 말씀을 내게 주시는지 듣습니다.

그 말씀을 듣습니다. 그 말씀을 만나면 계속 거기에 머무릅니다.

 

주님은 우리의 근원에 말씀하십니다. 나의 중심부에 말씀이 수용되길 바라십니다.

마음에 뿌린 것은 계속 자란 나무나 추수하는 곡식이 아니라, 씨앗입니다.

마음에 와 닿은 말씀을 만나 거기에 머문다는 것은

그 씨앗이 자라나고 싹이 나고 그 씨앗 안에 있는 메시지가 깨달아지고 느껴지도록

묵상하는 것입니다.

 

그 말씀을 계속 보는 것입니다. 생각하는 것입니다. 계속 느끼는 것입니다.

그 말씀 안에 머무는 동안에 그 씨앗이 마음속에서 싹이 나고 자라게 됩니다.

 

묵상이라는 것은 씨앗의 형태로 온 말씀을

온전하게 전 지각으로 듣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 생각으로 풍성히 깨달아서 듣고

정서적으로 주신 말씀을 충분히 느끼고

의지에까지 그 말씀이 심기는 것입니다.

 

▶말씀을 오랫동안 마음에 남기기 위해서는 손으로 써야 합니다.

처음에 깨달아진 것을 손으로 씁니다. 묵상하며 더 깨달아지면 또 손으로 씁니다.

문장을 잘 쓰거나 멋있게 쓰는 것이 아니라 핵심을 씁니다.

 

정직하게 쓰면 마음에 남습니다.

핵심적인 어떤 표현들은 마음에 남고, 지속적으로 떠오릅니다.

 

만약 사무실에 있다면 그 노트를 간직하며 펼쳐 보거나

책상 위에 펼쳐 놓을 수도 있습니다.

 

묵상이 아침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 마음에 품고 담아 두어 점점 그것이 자라도록 해야 합니다.

 

주님을 바라보는 것은 즐거움입니다.

요즘은 어떤 말씀이 아닌 그 말씀을 주시는 주님을 바라봅니다.

 

삶의 근원적인 변화는 주님, 그분과의 관계에서 옵니다.

주님을 내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시험을 이기고,

어떠한 상처나 어려움도 이깁니다.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의 임재를 느끼는 묵상으로 더욱 나아가길 바랍니다.

 

 

 

◑유해룡 목사            *장신대 영성학 교수, 「하나님 체험과 영성 수련」 저자

 

▶하루를 기도로 출발해서, 낮에도 계속 기도를 이어갑니다.

기도는 끝이 없습니다. 기도는 하루 종일 하는 것입니다.

하루 종일 기도가 되려면 기도를 출발시켜야 합니다.

 

기도의 안전한 방법은 말씀을 통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말씀이 자기 욕구를 자극하고, 주변 상황을 만집니다.

때로는 자신의 욕구를 제쳐 놓기에 답답할 수 있지만, 말씀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아침을 기도로 시작하면 그 기도가 하루의 삶을 비춰 줍니다.

오늘 아침에 하나님과 대화한 것을 의식(기억)하고 하루를 살아간다면..

이것이 깨어 있는 삶입니다.

 

▶십자가, 사랑 등 본질적인 것에 집중하면, 비본질적인 것들은 자연히 사라집니다.

일반적으로 기도를 시작하면 굉장히 많은 비본질적인 생각들이 떠오릅니다.

그러나 내가 듣고자 하는 소리는 주님의 음성입니다.

 

주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십자가’를 묵상하고, ‘사랑’이라는 한 단어를 붙듭니다.

그러면 잡념이 서서히 사라지고, 본래의 소리로 기도하게 됩니다.

한동안 말씀을 붙잡으며 거기에 닻을 내립니다.

 

그러다 어느 소리가 들리고, 말씀이 열리며, 적극적으로 거기에 참여하면서

본래적인 자아를 가지고 대화를 하게 됩니다.

 

보통 우리가 바라는 모든 것들은 비본질적인 것들이 많습니다.

주님께 초점을 맞추는 동안, 비본질적인 것들이 걸러집니다.

 

▶기도는 본질적으로 ‘듣는’ 것입니다. 듣는 기도를 훈련합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라는 것을 분명하게 인식해야 합니다.

듣고자 하면 들립니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즉각 말씀하시지 않고

하나님 마음에 들 때, 또는 후에 말씀하신다고 생각합니다.

매우 간접적이고 미래적으로 말씀하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현재 기도 중에 말씀하십니다.

매 과정마다 하나님은 계속 말씀하십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사귀는 것입니다. 사귀어서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사귐의 대화는.. 현재적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미래에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지금 말씀하십니다.

 

만약 내가, 하나님의 말씀하심을 못 듣는다면 ‘왜 못 듣는가?’ 반추해야 합니다.

못 듣는 것은 내가 하나님께 열린 마음을 갖지 않아서입니다.

내가 듣고자 하는 소리가 있기 때문에, 그 소리 아니면 안 듣는 것입니다.

 

기도는 무엇을 얻어 내는 것이 아니라, 그분께 의탁하는 것입니다.

그분의 어떤 말씀이든지 듣는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내게 말씀하옵소서. 주의 도를 보여 주소서. 내가 즉각 가겠나이다”

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태도가 중요합니다.

 

말씀을 조정하지 말아야 합니다. 말씀으로 말하게 해야 합니다.

내가 컨트롤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때 가장 기본적인 자세가 ‘기다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지속적인 관계로 끌어들이십니다.

 

생명의 풍성함이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 있습니다.

이런 기도를 드리는 사람이.. 풍성한 생명의 삶을 영위해 나간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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