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원의 노래 이사야 5:1~30 10.09.26.설교스크랩, 출처
이사야 5:24 “이로 말미암아 불꽃이 그루터기를 삼킴같이 마른 풀이 불 속에 떨어짐 같이
그들의 뿌리가 썩겠고 꽃이 티끌처럼 날리리니
그들이 만군의 여호와의 율법을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의 말씀을 멸시하였음이라”
▲가끔 농부들이 정부 수매정책에 반발해서, 자기가 가꾼 농작물을 갈아 업은 것을 봅니다.
농부들이 얼마나 화가 나면 그렇게 하겠습니까?
그런데 저는 어려서 그런 모습을 본 적이 있습니다.
할머니가 고추 농사를 열심히 지었는데, 돌림병 때문에 하나도 건지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눈물을 머금고 고추밭을 갈아 업던 것을 보았습니다.
그때에 할머니가 고추들을 끌어안고 우시더라고요. “아이구 내 새끼들”
고추를 얼마나 애지중지 키웠으면 “내 새끼들” 마치 자식을 잃은 것처럼 안타까워
하시겠습니까.
고추농사가 얼마나 어렵습니까? 일일이 모종을 심고 막대기에 매어 주고
수시로 풀을 뽑아 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온갖 정성을 기울려 키운 고추들이
병들어서 갈아 업게 되었을 때에, 얼마나 마음이 아프겠습니까?
▲오늘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슬픈 마음을 노래한 시입니다.
일명 ‘포도원의 노래’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포도원의 노래가 처음에는 기쁨과 설레임으로 시작하다가
뒤로 가면 실망으로 변합니다. 나중에는 무서운 분노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기쁜 노래가 슬픈 노래, 애가로 바뀝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포도원에 비유하셨습니다. 온갖 정성을 다하여 애지중지 키우셨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들포도를 맺자 심판하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은 어떨까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까?
우리는 과연 어떤 열매를 맺고 있습니까?
◑1. 하나님의 기대와 실망 (1-7절)
먼저 1, 2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포도원을 얼마나 정성껏 가꾸셨는가 잘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심히 기름진 산을 선택하셨습니다. 땅을 파고 돌을 제하였습니다.
극상품의 포도나무를 심었습니다. 외부의 적이 침투하지 못하도록 망대를 세웠습니다.
포도즙을 잘 짤 수 있도록 술틀까지 파 주었습니다. 얼마나 좋은 환경입니까?
4a절에 “내가 내 포도원을 위하여 행한 것 외에 무엇을 더할 것이 있으랴”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포도원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본래 애굽에서 노예생활 하던 별 볼일 없는 민족이었습니다.
좋은 포도나무가 아니라 질 낮은 잡목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일방적인 은혜로 구원해 주셨습니다.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으로 인쳐 주셨습니다(출19:6).
질 낮은 잡목을 극상품 포도나무로 품종개량을 해 주신 것입니다.
그들이 세상에서 가장 수준 높은 백성이요, 영광스러운 백성이 되도록
보배로운 말씀들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들을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땅으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우상을 숭배하던 가나안의 원주민들을 몰아내시고,
그들이 그곳에서 정착해 살 수 있도록 모든 환경을 예비해 주셨습니다.
시편 80:8절에 “주께서 한 포도나무를 애굽에서 가져다가 민족들을 쫓아내시고
그것을 심으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라는 포도나무를 가나안에 심으시고
이들이 장차 좋은 열매를 맺기를 기다리셨습니다.
1, 2년이나, 10년, 20년을 기다리신 것이 아니라 수 백 년을 기다리셨습니다.
충분히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기대감 속에서 소망 가운데 기다리셨습니다.
▲우리도 한번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과거에 어떠했습니까?
종자가 좋은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돌 감람나무와 같은 자들이었습니다(롬11:17).
본성이 부패하고 타락하여서 좋은 열매를 기대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일방적인 은혜로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구원해 주시고,
참 포도나무 되신 예수님께 접붙인바 된 인생을 살 수 있도록 축복해 주셨습니다.
우리를 타락한 세상에서 뽑아다가 말씀이 풍성한 UBF 교회에 옮겨 심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때마다 1:1 말씀, 일용할 양식 말씀, 파트모임 말씀, 주일예배 말씀,
수양회 말씀 등, 풍성한 말씀으로 채워 주셨습니다.
목자님들의 사랑과 섬김을 통해서 섬세하게 보살펴 주셨습니다.
때로는 우리를 키우기 위해서 적절히 훈련도 시켜 주셨습니다.
소감훈련, 기도훈련, 장막훈련, 전도훈련. 이런 훈련들은
나로 하여금 극상품의 열매를 맺도록 하기 위해서 잔가지를 잘라 주고
자극과 도전을 주는 수준 높은 사랑입니다.
또 때가 되매 베스트의 동역자도 허락해 주셨습니다.
사랑스런 자녀들도 허락해 주셨습니다. 요회도 맡겨 주시고, 귀한 양들도 보내 주셨습니다.
자,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좋은 포도원입니까?
교회의 포도원, house church의 포도원, 내 인생의 포도원. 얼마나 감사합니까?
이 모든 것들이 내가 만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은혜로 허락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이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우리가 좋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 가장 첫 번째 조건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본래 어떤 자였는데, 얼마나 쓸모없는 자였는데, 일방적인 은혜로 구원하시고,
이렇게 좋은 포도원에서 자라도록 축복해 주셨는가? 이 은혜를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이 은혜를 기억할 때에 한 눈 팔지 않고, 주님 안에 거하며
주님과 깊은 사랑의 교제를 나눌 수 있습니다. 그때 저절로 좋은 열매가 맺힙니다.
내가 특별한 능력이 없어도, 특별한 재주가 없어도,
주님이 주시는 은혜로 말미암아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내 안에 예수님을 닮은 인격의 열매, 성령의 열매, 전도의 열매, 생명의 열매가
주렁주렁 맺히게 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떠했습니까? 4b절을 보십시오.
“내가 좋은 포도 맺기를 기다렸거늘 들포도를 맺음은 어찌됨인고”
이게 웬일입니까? 좋은 포도 맺기를 목이 빠지게 기다렸는데,
당연히 좋은 포도가 맺힐지 알았는데, 들포도를 맺었습니다.
‘들포도’는 ‘시고 떫은 포도’ ‘맛이 없어서 도저히 먹을 수 없는 포도’를 가리킵니다.
원어적으로 보면 ‘썩은 포도, 악취 나는 포도”를 의미합니다.
좋은 포도를 맺도록 모든 조건을 다 배려해 주었건만,
전혀 예상치 못한 들포도를 맺었을 때에 하나님의 마음은 어떻겠습니까?
너무나 실망스럽고 화가 나셨습니다.
5절에 보면 하나님은 ‘이제 울타리를 걷어버리고 담을 헐어버린다’고 하십니다.
들짐승과 외적들이 와서 포도원을 다 짓밟게 하겠다고 하십니다.
더 이상 가지치기도 안 해 주시고, 북도 돋아 주시지 않습니다.
찔레와 가시가 자라서 가시밭이 되게 하십니다.
비도 내리지 않아서 포도원이 황폐한 땅으로 변해 버립니다.
하나님이 보통 화가 나신 것이 아닙니다. 쏟아 부은 정성이 컸던 만큼 분노도 컸습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하나님이 바라신 좋은 포도는 무엇이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맺은 들포도는 무엇입니까?
7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무릇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가 기뻐하시는 나무는 유다 사람이라
그들에게 정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포학이요, 그들에게 공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부르짖음이었도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바라시는 열매는 ‘정의’와 ‘공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정의로운 나라, 공평한 나라, 공법이 강물같이,
정의가 하수같이 흐르는, 그런 나라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암5:24).
하나님을 경외하고 백성들을 사랑하고 서로 돕는 가장 이상적인 국가,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 언덕위에 나라가 되기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정반대로 폭력과 포학이 가득하고 부르짖음이 가득한 나라가 되어 버렸습니다.
가진 자가 없는 자의 재산을 폭력으로 강탈하였습니다.
강자가 약자를 압제하여 여기저기서 못 살겠다고 부르짖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정의는 사라지고 불법이 판을 치는 나라가 되어 버렸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이스라엘을 심판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애지중지 가꾸었던 포도원을 황무지로 만들어 버리시겠다는 것입니다.
“화 있을진저” “화 있을진저” 8절 이후에는 “화 있을진저” 라는 말씀이
6번이나 나옵니다. 얼마나 화가 나셨으면 이렇게 분노하시겠습니까?
◑2. 화 있을진저 (8-30절)
그들이 어쩌다가 이처럼 쓸모없는 들포도 열매를 맺었습니까?
▲첫째, 탐심 때문입니다.
8절에 보면 “가옥에 가옥을 이으며 전토에 전토를 더하여 빈틈이 없도록 하고
이 땅 가운데에서 홀로 거주하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그랬습니다.
당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영적인 소원을 잃어버리고
물질과 소유에 대한 탐욕에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할 수 있는 대로 많은 집, 많은 토지를 갖는 것이 그들의 꿈이었습니다.
닥치는 대로 부동산을 매입하고 대궐같은 호화주택을 지어놓고 거기서 혼자 살았습니다.
그들은 영성을 상실하고 탐욕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사람이 탐욕에 사로잡히게 되면 눈에 뵈는 것이 없습니다. 감정적이 되고 포악해집니다.
저는 추석에 아버지댁에 가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아파트의 동과 동 사이 주차장에 벽돌담이 쌓여져 있고
노인정의 유리창이 깨지고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유를 물어보니 그 아파트에 소방도로가 나서 보상금이 나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보상금을 각 동이 어떻게 나누는가라는 문제 때문에 싸우고 난리가 났다는 것입니다.
보상금 문제가 나오기 전에는 서로 서로 부침개도 갖다 주고
노인들이 노인정에 모여서 함께 장기도 두고 오순도순 잘 살았는데
그 보상금 문제 때문에 완전히 원수가 된 것입니다.
노인들끼리 서로 치고 박고 싸워서 입원을 하고 소송을 하고 난리가 아니었습니다.
물질에 대한 탐심이 인심 좋던 가난한 동네를 완전히 생지옥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저는 이를 통해서 탐심의 열매가 포학이라는 사실이 이해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12:15절에서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고 하셨습니다.
골로새서 3:5절에 “탐심은 우상숭배의 죄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물질을 향한 탐심을 회개하고 주님을 향한 사랑, 타인을 향한 사랑에
열심을 내야 하겠습니다. 그리할 때에 우리 안에 사랑과 희락, 자비와 양선의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가 주렁주렁 맺히게 될 것입니다.
▲둘째, 쾌락입니다.
11절에 보면 이들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독주와 포도주를 마셨다’고 했습니다.
시도 때도 없이 파티를 열어서 환락을 즐기며 방탕한 생활을 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서는 조금도 관심이 없었습니다.
오직 놀고 즐기고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데만 정신이 팔려 있었습니다.
노아시대도 그러다가 홍수심판을 당했는데 이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사람이 쾌락을 추구하게 되면 반드시 방탕과 무절제, 정욕과 음란의 썩은 열매를 맺게 합니다.
14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스올, 즉 지옥의 입을 열어서 방탕한 자들을 다 삼켜 버리겠다’고 하십니다.
▲셋째, 거짓입니다. 18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거짓으로 끈을 삼아 죄악을 끌며, 수레 줄로 함같이 죄악을 끄는 자는 화 있을진저”
그 시대를 이끌고 있는 주류는 거짓이었습니다.
윗 사람이건 아랫사람이건 입만 벌렸다 하면 거짓말이었습니다.
악을 선하다 하고 선을 악하다 하고, 단 것을 쓰다고 하고,
쓴 것을 달다고 하고 뻔한 사실까지 왜곡시키셨습니다(20). 거짓말 공화국이었습니다.
당시 법관들은 폭탄주에 뇌물 주고받는 것이 관례가 되어 있었습니다(23).
그들은 그렇게 편법으로, 재산을 늘리고도 스스로를 지혜롭다, 명철하다고 자랑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거짓되고 교만한 자들을 심판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스스로 지혜롭다 하며 스스로 명철하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21
포도주를 마시기에 용감하며 독주를 잘 빚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22
24a절을 보십시오. “이로 말미암아 불꽃이 그루터기를 삼킴같이,
마른 풀이 불 속에 떨어짐 같이 그들의 뿌리가 썩겠고, 꽃이 티끌처럼 날리리니”
하나님께서 심판의 불을 내리셔서 다 태워 버리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마른 풀을 불 속에 떨어뜨리면 어떻게 됩니까? 순식간에 타 버립니다.
그처럼 무서운 심판이 임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앗수르와 바벨론 군사들을 보내셔서 철저히 진멸하십니다.
“그들의 화살은 날카롭고 모든 활은 당겨졌으며 그들의 말굽은 부싯돌같고
병거 바퀴는 회오리 바람 같을 것이며 그들의 부르짖음은 암사자 같을 것이요
그들의 소리지름은 어린사자들과 같을 것이라. 그들이 부르짖으며
먹이를 움켜 가져가 버려도 건질 자가 없으리로다(28,29)”
동물의 왕국에서 사자가 사냥하는 것을 보셨습니까?
눈에 불을 켜고 달려가서 얼룩말이나 영양을 사냥하는 것을 보면, 끔찍해서 볼 수가 없습니다.
실제로 앗수르와 바벨론 군사들은 사자와 같이 쳐들어와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무차별하게 죽였습니다.
앗수르 군사들은 산 사람의 껍질을 벗겨서 그 뼈를 산더미처럼 쌓아 두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들포도를 맺는 죄의 대가가 그렇게 무섭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을 우습게 생각해서는 큰 일 납니다.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컸던 만큼,
우리를 향한 정성이 지극했던 만큼,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악으로 갚을 때에,
하나님은 그 배은망덕의 죄를 철저하게 갚으십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라고 무조건 편들어 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시기 때문에 불의를 행한 자는 자기백성이라 할지라도
노를 발하시고 심판의 손을 드십니다.
우리가 두렵고 떨림으로 주안에 거하고 좋은 포도열매를 맺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알 때에 인생을 함부로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귀한 포도원에서 탐심과 쾌락을 좇아, 방탕하게,
거짓되게 살아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실 때에 가장 가슴 아프셨던 것이 무엇일까요?
24b절을 보겠습니다.
“그들이 만군의 여호와의 율법을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의 말씀을 멸시하였음이라”
이것이 핵심입니다. “여호와의 율법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였음이라”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이스라엘의 모든 죄의 뿌리가 무엇입니까?
바로 말씀을 버린 것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을 멸시하고 버린 죄가 얼마나 큰 죄인지 모릅니다.
말씀을 멸시하고 버렸다는 것은 하나님 자체를 멸시하고 버렸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3:1,2절에서 바울은 그렇게 말합니다.
“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냐? 범사에 많으니 우선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
세상에 수많은 나라, 수많은 민족들이 있었지만
하나님은 특별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맡기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것이 보통 일입니까? 얼마나 보배롭고 영광스러운 축복입니까?
그런데 그들은 그 귀한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고 버렸습니다.
신명기에 보면 모세가 마지막 세상을 떠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신신당부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6:5)”
“너는 말씀을 네 마음에 새기고 자녀들에게 부지런히 가르치고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고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집 문설주에 기록하라”고 하셨습니다(신6:6-9).
▲그들이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면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해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고, 자녀의 복, 토지소산의 복,
짐승의 복, 광주리에 복, 떡반죽 그릇에도 복, 들어와도 복 나와도 복,
꾸어줄지라도 꾸지 아니하며,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시며,
위에만 있고 아래에 있지 않게 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신28:1-13).
말씀이 모든 축복의 근원 source 입니다.
다윗은 이 비밀을 알았기에 시편 1편에서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그의 아들 솔로몬도 초창기에는 말씀을 사랑하고 말씀을 열심히 묵상했기 때문에
그의 나라가 더할 나위없이 풍성했습니다.
솔로몬의 전도서와 잠언은 솔로몬의 설교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전도서가 ‘설교’라는 뜻입니다. 얼마나 훌륭한 설교입니까?
솔로몬은 왕이요, 정치가이기 이전에 빼어난 설교가였습니다.
이는 솔로몬이 아버지 다윗 밑에서 열심히 말씀을 배우고 신앙교육을 받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집권 후반기에 그는 각 나라에서 데려온 예쁜 첩들에게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방탕한 삶을 살았습니다. 금은, 보화, 마필등 소유에 대한 탐심으로
마음이 변질되었습니다. 그가 결국 말씀을 놓아 버렸을 때에
나라는 두 동강이 나고 국운이 기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개인이든 국가든 말씀을 붙들고, 말씀에 순종하면
말씀이 주는 생명의 진액으로 말미암아 풍성한 성령의 열매를 맺고,
복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과거에 영국과 독일 등 유럽이 그러했고, 미국이 그러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보십시오. 왜 유럽이 몰락해갑니까? 왜 미국이 휘청휘청거립니까?
여호와의 율법을 버리고 말씀을 멸시했기 때문입니다.
찰스 스펄전, 요한 웨슬리, 디엘 무디등 기라성 같은 말씀의 종들이
메시지를 선포하고 교회마다 온 시민들이 모여서 말씀을 귀 담아 듣고
열심히 선교사를 파송했을 때에 유럽과 미국은 하나님의 축복이 흘러넘쳤습니다.
그러나 인본주의, 세속주의, 육신주의로 말미암아 말씀을 멸시하고 버리자
죄의 들포도를 맺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마약과 환락과 각종 범죄가 판을 치는 황폐한 나라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제는 경제불황까지 겹쳐서 부르짖는 소리가 끊이질 않습니다.
에덴동산에서도 보십시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계명의 말씀을 멸시하고
선악과를 따 먹었을 때에 부끄러운 죄의 열매를 맺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면 스스로 멸망의 구덩이를 파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귀히 여기고 경외심을 가지고
절대적인 자세로 말씀을 붙들어야 하겠습니다.
▲저는 지난 추석기간에 실미도 사건때 기간병으로서 살아남은 유일한 생존자
양동수 장로님의 간증을 듣게 되었습니다. 실미도에서 훈련병들이 들고 일어나서
자기들을 훈련시킨 기간병들을 다 죽였습니다.
18명의 기간병들을 총으로 쏴 죽이고 확인사살까지 해서 다 죽였습니다.
양동수 당시 하사도 총에 맞아 목에 관통상을 입고 쓰러졌습니다.
피가 분수처럼 쏟아지는데 살기 위해서 기어서 해변가로 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핏자국을 보고 훈련병이 총을 들고 다가옵니다.
그때 양하사의 머릿속에 섬광처럼 스치고 지나가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바로 다니엘서 6장 말씀이었습니다. 다니엘이 사자굴에 던져지게 되었으나
다니엘이 기도했을 때에 하나님께서 사자들의 입을 봉하게 하셨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는 그 말씀을 붙들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 병사의 눈을 가려 주시옵소서. 나를 발견하지 못하게 하옵소서”
그 병사는 계속해서 총을 들고 핏자국을 따라 뚜벅뚜벅 걸어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병사가 그를 보지 못하고 그냥 지나치더라는 것입니다.
사병이 그를 발견하지 못하고 지나치게 된 것도 기적이지만,
목에 관통상을 입은 사람이 살아나게 된 것도 기적입니다.
그 후 그는 간증집을 냈습니다. 책 제목은 <자넨 하나님이 살렸네>입니다.
그는 지금 중학교 교감선생님이요, 교회 장로로서 전국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살아계신 하나님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니까 기적이 일어나더라는 것입니다.
▲말씀은 이처럼 보배로운 것입니다. 양장로님만 말씀의 기적을 체험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구원받고 새 생명을 덧입게 된
기적의 주인공들입니다.
베드로전서 1:23절에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하였습니다.
어두움과 죄악 속에서 살던 나를 구원한 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정욕과 미움에 노예 되었던 나를 구원하여 정결한 삶을 살게 한 것은
바로 십자가 말씀입니다.
절망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던 나를 빛의 사자가 되게 하신 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세상 쾌락과 유혹으로부터 나를 지켜준 것도 바로 말씀입니다.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케 하리이까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갈 것이니이다(시119:9)”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원수 마귀 대적을 물리치는 성령의 검입니다(엡6:17).
이처럼 귀하고 보배로운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멸시하면 되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는 것은
마치 군인이 총을 버리고 전쟁터에 뛰어드는 것과 같습니다.
말씀을 멸시하고 자기 욕심대로 사는 것은
물고기가 물을 박차고 나와서 스스로 살아보겠다고 꺼들먹거리는 것과 같습니다.
말씀은 우리의 생명입니다.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빛입니다(시119:105).
우리가 이 말씀을 굳게 붙들어야 하겠습니다. 말씀을 힘써 사모해야 하겠습니다.
베드로전서 2:2절에 “갓난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오늘날 우리 모임이 이만큼 축복을 받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 믿음의 조상들이 말씀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붙들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임처럼 성경을 열심히 읽고 공부하고 가르치기에 힘쓴 모임이 없었습니다.
초기 기록에 보면 며칠 동안 성경만 읽는 성경읽기 수양회를 여러 번 했습니다.
한 말씀 붙들고 순종하기 위해서 수백번, 수천번 쓰기도 하며
뼛속 깊이 말씀을 새기고자 몸부림쳤습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말씀의 진액이 우리 안에 농축이 된 것입니다.
이것이 1년, 2년, 10년, 30년, 50년이 쌓이니까
이처럼 성령의 열매, 전도의 열매, 제자양성의 열매, 세계선교의 열매가 맺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와서 우리가 이처럼 보배로운 하나님의 말씀을 놓아 버리면
하나님께서 이 모든 축복을 다 거두어 가실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생명선으로 여기고 열심히 말씀을 공부하고, 묵상하고,
말씀대로 살고자 몸부림치면
풍성한 열매를 맺고 그 행사가 다 형통하게 될 것입니다.
그 사람은 하나님과 더불어 기쁨으로 포도원의 노래를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반면에 교만하여져서 말씀을 우습게 여기고, 말씀을 버리면, 반드시 망하게 될 것입니다.
피눈물을 흘리며 포도원의 애가를 부르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일생 말씀을 사랑하고 말씀을 붙들고 살아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풍성한 열매를 맺는 복된 인생들이 될 수 있길 기도합니다.
이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자손만대에 축복을 계승하는 저희들이 될 수 있길 기도합니다.
'분류 없음 > 2011'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일상 속의 부활 (0) | 2011.05.09 |
---|---|
여호수아의 작별인사 (0) | 2011.05.09 |
사업의 실패를 회심의 기회로! (0) | 2011.05.06 |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0) | 2011.05.05 |
쾌락의 지배를 벗어나야 / 정원 (0) | 2011.05.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