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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속의 부활

LNCK 2011. 5. 9. 21:16

www.youtube.com/watch?v=5APQ7-kjvPk&feature=youtu.be

◈일상 속의 부활                 요21:1~14                  11.04.24.설교스크랩, 출처, 정리

 

예수님의 부활을 둘러싸고,

성경을 읽다가도 늘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과 그 말씀을 나누고 싶습니다.

그런데 그 해답을 찾고 보니까,

그 속에 놀라운, 부활의 비밀이 숨어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문제 제기

 

제가 부활 사건에 대해서 이해가 안 된다는 내용은 이런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후,

이제는 자기들이 체포될 차례라고 생각한 제자들은, 한 곳에 깊이 숨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전해왔고

얼마 안 되어 예수님이 직접 제자들 앞에 나타나셨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은 부활 후, 두 번씩이나, 제자들 앞에 나타나셨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들이 왜 갈릴리로 돌아갔느냐.. 하는 것입니다.  ←문제 제기

 

예수님은 예루살렘 근처인 감람산에서 승천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부활해서 승천까지 40일인데,

그 기간에 그냥 예루살렘에 남아 있지,

뭐 하러 갈릴리에 내려갔느냐는 것입니다. 승천 때 곧 올라올 것을...

 

그리고 승천하실 때도,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행1:4

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면 갈릴리로 내려갈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물론 부활하신 예수님이, ‘갈릴리로 가라’고 명하셨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무서워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하시니라.  마28:10

 

어쨌든 승천 때 다시 올라올 것을, 왜 ‘갈릴리로 가라’고 하신 것입니까?

 

그래서 본문 요21:1~14절에서 사도요한은,

‘갈릴리로 돌아온 제자들’ 얘기를 쓰고 있는 겁니다.

 

▲왜 부활을 체험한 제자들이, 느닷없이 고기잡이로 다시 돌아갔습니까?

사도요한은 요20장에서, 부활 당일의 일과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주님의 얘기를 자세히 써 놓았었습니다.

 

그러고 나서는, 요21장에서, 느닷없이 고향으로 돌아와

다시 옛날 직업으로 돌아간 제자들의 모습을 그려놓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가진 의문이란,

‘아니 부활 같은 엄청난 사건을 접한 제자들이, 왜 자기들 고향으로 돌아갔을까?’

하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원래 11명의 제자들 중 7명이

어떤 이유에서인지, 옛날 일터로 돌아와 고기잡이를 하고 있는 겁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으니, 기운이 절로 나야 되는 것 아닙니까?

(혹자는 마28:18~20절의 대위임령이, 요21장 본문 이전 사건이라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성경이 정확하게 시간을 밝히고 있지 않으니, 그럴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어쨌든...)

 

그래서 당장 복음 전하러 가려고 안달하거나, 열심내야 되는 게 옳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지금 갈릴리에서 꾸물대고 있는 걸까요?

왜 제자들은 부활을 목격하고도, (또는 사명을 부여 받고도) 갈릴리에서 미적대고 있는가요?

 

 

◑답변

 

▲1. 제자들이 예수님의 십자가에 충격을 받아서, 갈릴리로 낙향했다는 설

제가 중학교 때, 알랑 들롱 주연의 ‘암흑가의 두 사람’이란 영화를 봤는데,

거기서 처음으로 기요틴(단두대)을 보고, 그 섬뜩함에 며칠 동안 잠을 못 잔 적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마찬가지로, 사람이 너무 충격적인 장면을 보면

한 동안 정신이 빠져 지내게 됩니다.

아무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큰 일을 맞게 되면, 곧 공황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예를 들면, 연례적으로 하는 건강진단을 받다가 갑자기 암이 발견되었다든지,

아니면 좌천돼서 엉뚱한 곳으로 발령을 받게 된다든지 할 때

사람들은 한 동안 멍~하니, 정신을 못 차리게 됩니다.

 

열 두 제자들의 경우, 갑자기 예수님의 죽음을 접했습니다.

물론 주님께서도 죽음을 예고하시긴 했지만, 설마 설마 했는데..

그게 현실로 닥치고 만 것입니다.

 

더군다나 참혹한 십자가형입니다.

그래서 충격을 받아서, 정신이 멍해져서, 갈릴리로 내려가서 물고기나 잡고 있었다는 ‘설’입니다.

 

▲2. 또 부활 사건을 통해서도 충격을 받았을 수 있습니다.

만약, 제자들이 부활을 믿었다면, 그것은 내세와 관계된 일이었을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은, 살아있는 사람 가운데서 일어났습니다.

 

복음서를 읽어 보면, 저자들이, 이 부활에 대한 반응을 열거해 줄 말을 찾아내려고

무진 애를 쓴 것을 봅니다.

 

놀람, 기이히 여김, 경악 등등의 단어를 써 보지만 그런 것을 다 동원해도

부활에 대한 반응을 제대로 전달하기는 불가능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제자들은 이런 일에 대해서 적응을 못하고 있는 겁니다.

 

지금 제자들의 문제가 뭐냐 하면, 돌아가셨던 예수님이

자기들 가운데 살아 계시다는 부정할 수 없는 증거들을 받았습니다.

 

두 번이나 눈 앞에 나타나셨잖아요.

이 부활은 전에는 결코 일어났던 적이 없었습니다.

이생에서의 부활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던 거예요.

현재적 부활이란 개념은, 그들에게는 너무나 거대한 개념인 거예요.

 

도무지 세상 상식에 대한 그들의 생각이, 들어맞지 않았습니다.

한 마디로 제자들의 사고력으로는, 그 사건을 감당할 수가 없었던 겁니다.

상상으로나 감정적으로나 그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허둥대고 있는 겁니다.

 

여러 말씀 드릴 필요 없이, 지금 이 자리에,

돌아가신 한경직 목사님이 육체로 나타나서 우리와 함께 예배드리는 상황이 벌어진다면,

그게 단순히 신기하고 기쁘기만 한 일이겠습니까?

그건 우리 사고력에 일대 혼란을 가져오는 엄청난 일이 됩니다.

 

적응이 안 되는 겁니다.

지금 예수님의 부활을 접한 제자들이 바로 그런 모습인 겁니다.

한 마디로 ‘제 정신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위의 두 설명은 타당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정답은 아니라고 봅니다. 정답은 다음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3. 제자들은 부활을 체험하고.. 자기 일상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부활이란 그 동안 ‘죽음 이후의 삶’이었습니다.

거기에 익숙하게 젖어 왔습니다. 즉 먼 미래의 사건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부활의 개념이 지금 ‘생존세계의 삶의 개념’으로

다시 만들어지고 있는 겁니다. 지금 현재의 사건이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특별한 사건을 그들의 평범한 삶 속으로 흡수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 부활하신 예수님이 자기들과 함께 하고 계심을 믿었던 것입니다.

가끔씩 직접 나타나셨지만, 나타나지 않으신 때에도, 부활해 계심을 믿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본능적으로 옛 일상으로 뛰어든 겁니다.

옛날에 예수님과 함께 계실 때와.. 지금이.. 달라진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물고기를 잡았다는 일은.. 사도직을 버리고 어부로 돌아간 것이 아니라,

그냥 먹거리/끼니를 해결하기 위해서, 잠시 그물을 잡았다는 뜻이 됩니다. 

 

더욱이 제자들의 삶과 사역의 기반은 ‘갈릴리’ 였습니다.

예루살렘은 명절 등 특별한 시기에만 올라갔습니다.

 

정리하면,

제자들이 갈릴리로 내려간 것은 - 그들이 일상으로 다시 돌아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자기들과 함께 거하던 그 장소와 그 생활로 - 다시 돌아간 것입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이, 과거처럼, 자기들과 함께 하신다고, 확실히 믿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간혹 직접 나타나셔서, 제자들을 격려해 주셨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성경을 계속 연구해 봅시다.

        만약 이 관점이 틀리면.. 다시 고치겠습니다.

 

▲제자들과 해변에서 식사하신 장면도, 바로 그런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부활 사건은, 특별한 사건이 아닌, 일상의 사건으로

그들 속에 각인시키시기 위해, 예수님은 그들과 식사를 나누신 것입니다.  

 

‘와서 조반을 먹으라’ 말씀하셨을 때,

그건 제자들이 평소에 듣던, 바로 그 말씀이었습니다.

우리 어머니들이 매일 아침마다, 일상적으로 같은 말을 하잖아요. '아들아, 밥 먹어라!' 

 

여기서 우리가 얻는 교훈은 바로 이것입니다.

<일상의 부활>을 살아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부활절에만, 예수님의 부활을 묵상할 것이 아니라,

오늘 가정에서, 교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과 교제하고, 같이 떡을 떼야 합니다.

 

사복음서의 부활에 대한 기사를 꼼꼼히 읽어 보십시오!

그 누구라도 복음서의 저자들은, 자기들이 기록한 부활 얘기에 대해서는

그 어떤 것도 증명하려 들지 않습니다.

그냥 우리들로 하여금 부활의 삶에 참여하고 실천하도록.. 초청하고 있습니다.

 

오늘 사도 요한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우리에게 예수님의 부활을 믿으라고 강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요한과 그의 여섯 동료들은, 예수님과 함께 해변의 아침식사에 참여합니다.

그렇게 일상 속에서 부활하신 주님과 동행하는 관계로 살았습니다.

 

오늘 주님께서 준비한 식사는 그저 ‘업무 중 식사’입니다.

특별한 식사가 아니라, 그냥 일상 중의 식사라는 뜻입니다.

 

오늘 우리가 일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매일 식사 시간에도, 주님과 함께 식사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휴식 시간에도,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쉬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제자들이 갈릴리로 내려간 이유’가 아닐까요?

그들은 부활을 너무나 확실히 확인했기 때문에,

과거의 일상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크게 달라진 게 없었으니까요!

 

다시 반복해서 말씀드립니다.

부활은.. 우리의 평소의 사고 범위 바깥에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그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부활을 일상으로 끌어오기 위해서

주님은 그들에게 working meal – 작업 중 식사- 을 준비해 주셨습니다.

본문 요21장의 해변가 식사는.. ‘최후의 만찬’처럼 특별한 식사가 아니었습니다.

 

제자들은.. 주님과 함께 '일상적 식사'를 하면서

부활하신 예수님이, 자기들의 일상과 함께 하신다는 것을 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바로 그 연장선상에 있다는 것입니다...

부활은 이벤트가 아니라 일상임을 알라는 것입니다.

 

영적인 시간들 뿐 아니라 우리가 삶을 영위해 나가는 모든 육적 분야에까지

부활은 세세하게 영향 미친다는 것입니다.

 

부활은 멀리 있지 않고 바로 내 옆에 있습니다.

우리를 그토록 사랑하시는 예수님은

이 시간, 우리의 일상 속에 부활의 주님으로 오셨습니다.

 

그 부활하신 주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회복과 소생의 기쁨을 주셨습니다.

 

그 은혜가 부활절을 맞이한 이 아침에 여러분의 마음에,

그리고 가정과 일터 위에 넘쳐나시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