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음성은 소리가 아닙니다. 내적음성입니다. 마4:4, 10:19~20
11.05.01.인터넷설교 일부 스크랩
◑하나님은 내적 음성으로 말씀하십니다. inner voice
▲주님은 음성으로 말씀하십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계3:20
우리가 그 부르시는 음성을 듣지 못 했으면, 문을 열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사람은, 다 그 ‘부르심’의 음성을 들은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영접한 다음에도, 주님은 계속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요10:27절에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예수님께서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현재(진행)형으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과거에 주님의 음성을 들었을 뿐만 아니라
현재도 주님의 음성을 듣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실에서, 신자들이, 주님의 음성을 못 듣는 이유
진정한 신자라고 그러면 날마다 주님의 음성을 실제로 듣습니다.
이것이 사실인데, 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은 주님의 음성을 한 번도 들은 일이 없다고 생각할까요?
그 이유는,
많은 사람들이 음성과 소리를 혼동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내적인 음성’으로 말씀하시는데,
자기는 ‘귀에 소리’로 들으려고 하니.. 듣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귀로 들리는 소리를 들은 적이 없기 때문에
자신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적이 없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
주로 사용하시는 방법은 귀가 아니라, 우리 영에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귀로 주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아니라, 영으로 주님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마10:19~20절에 보면 “너희를 넘겨 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치 말라
그때에 무슨 말할 것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그랬습니다.
여기에 보니까 ‘너희 속에서 말씀하신다.’ 그랬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속에 계십니다. 밖에 계신 것이 아니라
우리 속에 계시기 때문에, 귀로 들리게 말씀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영 안에 계시기 때문에, 우리 영에 직접 말씀하시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영에 직접 말씀하실 때, 그 소리가 없습니다.
영과 영의 교제이기 때문에, 영과 영의 교통이기 때문에 소리가 없습니다.
그냥 생각 자체를 우리의 마음속에 심어 넣어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영에, 내적 음성으로 말씀하십니다.
영은 천국입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우리 영에 천국이 이루어집니다.
마귀가 천국에 못 들어가는 것처럼, 마귀는 우리 영에 들어올 수가 없습니다.
마귀가 우리 영에 말할 수가 없습니다. 마귀는 혼에다 생각을 집어넣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 영속에 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
그 생각은 우리 영으로부터 올라오는 것입니다.
영 깊은 곳으로부터 생각이 올라옵니다.
그것이 주님의 내적음성이고, 그것이 주님이 우리에게 말씀하는 방식인 줄로 믿습니다.
◑내적 음성 분별법
그럼 내 속에 내적음성으로 들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내적 음성>을, 그저 <내 생각>과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요?
내 생각이 ‘주님의 음성’인 경우에는 다음 4가지가 동반됩니다.
이것을 통해서, 그것이 주님의 음성인지 아닌지 명백하게 분별할 수 있습니다.
▲1. 주님이 말씀하실 때는, 성령의 감동이 동반됩니다.
벧후1:20~21절에 보면 “먼저 알 것은 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 그랬습니다.
성령의 감동이 먼저 있고, 그 후에 예언의 말씀이 있었습니다.
왕하3:15~16절에서 보면 “이제 내게로 거문고 탈 자를 불러오소서 하니라.
거문고 타는 자가 거문고를 탈 때에 여호와께서 엘리사를 감동하시니
저가 가로되 여호와의 말씀이 이 골짜기에 개천을 많이 파라 하셨나이다.”
이것은 엘리야의 영감을 갑절을 받은 엘리사에 대한 기록입니다.
그런데 엘리사도 성령의 감동이 임하기 전에는 예언을 할 수 없었습니다.
성령의 감동이 임하고 난 다음에 비로소 예언할 수가 있었습니다.
주님의 음성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내적 음성이 들리기 전에, 성령의 감동이 반드시 먼저 있습니다.
▲2. 주님께서 말씀하시면 그 내용이 ‘계시적’입니다. *계시적: 생각이 갑자기 신비하게 떠오른다는 의미
우리는 말하기 전에 무엇을 준비하고 연구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너희를 넘겨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치 말라”
(이것은 설교에 대한 얘기가 아닙니다. 설교 준비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죠.)
이것은 핍박자 앞에 설 때에 대한 것인데,
예수님은 그 때 무엇을 말할까 염려치 말고, 미리 연구하지도 말라 그랬습니다.
성령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네 두뇌를 의지하지 말고, 성령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라’ 그런 말씀입니다.
그런데 꼭 박해를 받는 때가 아니라고 할지라도
설교나 대화중에 -성령의 감동으로- 미리 연구한 것이 아닌데,
미리 준비한 것이 아닌데,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말할 수가 있습니다.
생각으로 어떤 것을 받아서 말하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주님의 음성입니다.
주님의 음성은.. 말하기 전에 준비하는 시간에도 임하지만,
설교나 대화 도중에, 전혀 준비하지 않은 새로운 내용이, 또는 준비한 내용에 보태져서
내 속의 영으로부터 떠오르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의 내적음성입니다.
▲3. 주님의 음성은.. ‘마땅한’ 말씀이며, 듣는 사람에게 공명을 일으킵니다.
눅12:11~12절에 “사람이 너희를 회당과 정사 잡은 이와 권세 있는 이 앞에 끌고 가거든
어떻게 무엇으로 대답하며 무엇으로 말할 것을 염려치 말라
마땅히 할 말을 성령이 곧 그 때에 너희에게 가르치시리라”
예수님은 수다쟁이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마땅히 할 말만을 하십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말씀은 때에 맞는 말씀입니다.
잠15:23절에 보면 “사람이 그 입의 대답으로 말미암아 기쁨을 얻나니
때에 맞은 말이 얼마나 아름다운고?” 그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주님께서 주시는 말씀은 경우에 합당합니다. 잠언25:11절에 보면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쟁반에 금 사과니라.” 그랬습니다.
그러므로 때에 맞고 경우에 합당하기 때문에, 이것은 마땅히 할 말이고,
이것은 금 사과처럼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금처럼 귀하게 느껴집니다.
그 뿐만이 아니라, 듣는 심령에 ‘공명’을 일으킵니다.
이러한 공명에 대해서 신디 제이콥스는 이렇게 기술했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 우리 마음은
‘그렇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라고 외치게 됩니다.
우리 마음에 그 말씀이 공명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예언이나 말씀을 들으면
우리 속에서 공명이 이루어지고,
그래서 그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즉각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을 본능적으로 알 수가 있습니다.
▲4. 주님께서 말씀하실 때는 지혜와 구재가 나타나서.. 사람들이 깜짝 놀랍니다.
눅21:14~15절에 보면 “그러므로 너희는 변명할 것을 미리 연구치 않기로 결심하라
내가 너희의 모든 대적이 능히 대항하거나 변박할 수 없는 구재와 지혜를 너희에게 주리라”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 지혜가 임합니다.
주님이 말씀하실 때는 자신의 평소 지혜보다 훨씬 증가된 지혜를
스스로가 느낄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지혜롭게 하는 것을, 말을 들으면서 자기 자신이 놀랍니다.
또 다른 사람들이 놀랍니다.
그 뿐만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는 구재가 나타납니다.
즉, 말재주가 나타납니다.
구약의 모든 선지자들이 이것을 경험했는데 특별히 이사야가 경험했습니다.
이사야50:4절에 보면 “주 여호와께서 학자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핍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줄 줄을 알게 하시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신약에서는 베드로와 요한, 그리고 스데반이 이것을 경험했습니다.
행4:13절에 보면 “저희가 베드로와 요한이 기탄없이 말함을 보고
그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행6:10절에 보면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저희가 능히 당치 못하며”
이것은 예수님의 약속이 그대로 이루어진 대표적인 케이스입니다.
베드로는 공회 앞에서, 공회라 그러면 이스라엘의 가장 유식한 자들이 모인 곳입니다.
그 공회 앞에서 어부 출신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기탄없이 말을 했습니다.
스데반은 사람들이 그의 말을 능히 당해낼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두 사람에게 성령께서 지혜와 말재주를 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평소에 잘 말을 못하는 사람에게라도
성령이 임하시고 또 성령이 우리에게 말씀하시게 되면
조리 있게 말할 수 있는 능력이 주어집니다.
저의 경우에도 성령이 임하셨을 때와 그렇지 않을 때,
저의 지혜와 말솜씨에 크게 차이가 나는 것을
제 자신이 스스로 느낍니다.
이런 것들을 통해서, 우린 이것이 단순히 내 생각인지
아니면 주님이 나에게 말씀하시는 것인지.. 그것을 분별 할 수 있습니다.
위 4가지를 시금석으로 삼아서 우리 생각들을 분별해야 합니다.
이것이 내 생각인지, 마귀가 나를 속이려고 주는 생각인지,
아니면 내 속에서 주님께서 내적음성으로 말씀하시는 것인지..
올바로 분별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 의 재해석
▲마4:4절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
-이제까지 우리는 이것을 단순히 ‘성경말씀’으로 해석해 왔습니다.
예 ‘66권의 성경말씀’도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이 맞습니다.
떡은 단순히 성경이 아닙니다. 떡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이 아니고 ‘나오는 말씀’입니다.
시제가 현재(진행)형입니다. *‘나오는’ : 현재 중간태 혹은 수동분사
그러니까 지금도 계속 나오고 있다.. 라고 볼 때,
위 마4:4절.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의 본래적 뜻은,
66권 성경말씀도 되지만 (그렇다면 ‘나온’, 즉 과거시제를 써야 하지 않을까요?)
그보다는 ‘하나님의 현재적 내적 음성’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합니다. 주1)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은, <하나님의 내적음성>이라는 뜻입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고정관념을 가지고 성경을 읽습니다.
그래서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의미를 놓쳐 버립니다.
‘말씀’ 그러면 단순히 ‘그건 성경이지’ 이렇게 생각합니다.
마4:4절의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 ..
이것은 과거에 하나님이 하신 말씀(성경)이.. 그 일차적 뜻이 아닙니다.
물론 성경을 오늘날에 재해석 한 말씀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그 재해석도 ‘내적 음성’이 됩니다.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 이것으로 사람이 살 것이다.
- 다시 말하면, 내적음성을 못 들으면, 우리는 살 수 없다.. 가 됩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 즉 내적음성’을 듣는 것이 중요합니다.
물론 내적음성을, 자기 멋대로 잘못 듣는 사람들이 있어서, 조심스럽습니다만,
그 <참된 내적음성 분별법>은, 앞서 위에서 4가지로 설명했습니다.
▲양식은 날마다 먹어야 살듯이, 하나님의 음성도 날마다 들어야 삽니다.
하나님은 매일 백성에게와 각 사람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떡으로만 살 수 없으며,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살게 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은 그가 과거에 말씀하셨던 것이 아니라, 매일 매일 하시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날마다 밥을 먹어야 하는 것처럼
주님의 음성을 듣는 것 역시, 우리에게 일상화가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영적인 일용할 양식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날마다 먹어야.. 영적인 생명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날마다 먹어야.. 영적인 건강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영적으로 강해질 수 있으며, 성숙한 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이, 매일 아침에 만나를 얻기 위해서 광야로 나아갔던 것처럼,
우리는 날마다 영적인 만나를 얻기 위해서,
즉,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얻기 위해서
기도처로 나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주님과 교제하는 자리로 나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꼭 기도처에서만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지하철을 타고 가든지, 버스를 타고 가든지, 차를 운전하고 가든지,
삶의 어느 순간에든지, 우리는 주님 앞에 나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그분의 음성을 들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음성을, 주님으로부터 개인적으로 직접 들어야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우리에게 말씀하지 마옵소서. 모세를 통해 말씀 하옵소서.’
라고 전적으로 지도자에게 의존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우리는 그분의 자녀입니다.
그분에게 가서 ‘모세를 통해서 말씀 하옵소서.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하옵소서.’하면
주님이 슬퍼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와 친밀한 교제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 교제를 통해서, 우리는 직접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동시에 우리들은 목회자의 설교를 통해서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됩니다.
설교를 통해서 지식만 얻으면 죽습니다. 망합니다.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다.’고 했는데,
여기서 의문(문자)은 지식이고, 영은 내적음성입니다.
성경지식이 사람을 죽일 수 있어요. 생명력 없는 설교가 사람을 죽일 수 있어요.
바리새인들을 만들고, 회칠한 담과, 평토장한 무덤같이 만들 수 있어요.
그래서 설교가, 하나님의 음성을 전달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설교를 통해서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설교는 단순히 성경을 해석하고 설명하는 것이 되면 안 됩니다.
설교는 주님의 음성을 들려주는 것이 되어야 됩니다. 잘 전달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
주1) 마 4:4절은, 신8:3절을 인용한 것인데,
신8:3절의 히브리어 본문은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것"으로 되어 있다.
그것을 성경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풀어서 썼는데,
즉 원문에 없는 '말씀'을, 문맥을 따라서 끼워넣은 것이다.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것은 당연히 '말씀'이라는 것이다. 맞다.
이렇게 볼 때, 마4:4절, 시8:3절을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것'은
'성경말씀'으로 보기 보다는, (이것도 맞지만)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70인역도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레마'로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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