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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의 할례를 받자

LNCK 2011. 5. 19. 22:31

 

◈귀의 할례를 받자             렘6:10            06.05.26.설교(일부)스크랩

 


▲렘6:10 “내가 누구에게 말하며 누구에게 경책하여 듣게 할꼬?

보라 그 귀가 할례를 받지 못하였으므로 듣지 못하는 도다.


마7:6절에 “거룩한 것을 개에게 던지지 말고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조심하라.”고 했습니다.


고등학교 때, 그리고 신학교 다닐 때 하나님께서 말씀의 은사를 부어주시면서

제게 주신 말씀이 이 것이었습니다.

‘성령의 조명으로 혹은 성령의 계시나 감동으로 네게 알려주는 말들을

아무하고나 나누지 말라.’


처음에는 제가 부주의하게 아무하고나 나눴습니다.

말씀을 깨닫고 너무 가슴이 뜨거웠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그 얘기를 나눠주면 다 좋아할 줄 알았습니다.


다 받아들이고 다 은혜 받고 감동 받을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무슨 얘기하나?” 그리고 이상하게 보기도 하고 또 핍박을 하기도 했습니다.


(신앙 생활하는 사람 가운데 말쟁이들이 있습니다.

자기가 체험하고 받은 것, 깨달은 모든 것을

다른 사람하고 끊임없이 얘기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교회에서 문제꺼리가 됩니다.)



▲렘6:10 “내가 누구에게 말하며 누구에게 경책하여 듣게 할꼬.

보라 그 귀가 할례를 받지 못하였으므로 듣지 못 하는도다.”


귀의 할례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왜 중요할까요?

베드로가 오순절 날 성령 충만을 받고 나가서 말씀을 전할 때

많은 사람들이 마음에 찔림을 받았습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너희가 회개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이때 3천명이 그 말씀을 듣고 하나님 앞에 돌아왔습니다.


그 후 스데반이 성령 충만을 받고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돌로 쳐서 죽였습니다.

그때 스데반이 그 사람들에게 대해서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자들아”라고 말했습니다.


행7:51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려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도다.


베드로도, 스데반도 성령 충만해서 메시지를 전했는데

한 부류의 사람들은 회개하고 구원을 받았고

한 부류는 돌로 쳐서 스데반을 죽였습니다.

그런 차이가 난 이유를 성경은 “귀에 할례를 받지 못했다.”고 지적합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듣고 나를 알고 따르느니라.”

예수님의 양만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말입니다.


말씀을 전하면서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귀 있는 자들은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라고 말씀한 이유가 그것입니다.

교회 안에도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받아서 전하면

다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아멘 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고,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전해도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스데반에게 반응했던 것처럼 반응하려고 합니다.


사도 바울도 그것을 느꼈기 때문에

“내가 사람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내가 만약에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라고 말한 것입니다.


▲“보라, 여호와의 말씀을 그들이 자기에게 욕으로 여기고 이를 즐겨 아니하니” 렘6:10b


설교를 듣는데 욕으로 듣습니다.

이것을 이렇게 바꿔 말할 수도 있습니다.

‘설교가 일부 사람들에게 욕으로 들리지 않으면 잘못된 설교이다.’


설교가 늘 달콤하기만 하고, 늘 소망과 희망만 준다면 그것은 변질된 것입니다.

들을 귀가 있는 사람들에게는, 귀에 할례를 받은 사람에게는

설교가 꿀송이보다 더 달콤하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귀에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에게는, 설교가 욕으로 들리게 되어 있습니다.

똑같은 설교를 듣는데 부인은 은혜 받고 눈물을 흘리는데,

남편은 목사가 자기를 쳤다고 삐져서 집에 갑니다. 그런 부부들이 많습니다.


한 사람은 귀에 할례를 받고 한 사람은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설교를 들을 때 자기를 욕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듣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자체가 책망하는(치는)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성경 말씀을 제대로 전하면, 교훈적인 설교만 하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반드시 책망이 있게 되어 있습니다. 성경의 내용 자체가 그렇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잘못 안 것들을 바르게 교정시켜주는 것이 반드시 있게 되어 있습니다.


인신공격은 문제이지만

책망과 바르게 하지 않는’ 설교는 더 큰 문제가 있는 설교입니다.


베드로가 성령 충만하여 제일 먼저 한 설교가 말씀으로 그들을 치는 설교였습니다.

그래서 무리가 찔림을 받은 것입니다.

책망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찔림을 받겠습니까?

그래서 그들의 마음이 찔림을 받고 회개가 일어난 것입니다.


책망하는 설교를 하지 않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 지식만 쌓여가고 회개가 터지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회개를 하지 않고 삶이 변화되지 않는 것입니다.

인신공격은 하지 말되 ‘책망과 바르게 하는’ 설교는 해야 합니다.


진리 자체가 좌우에 날선 검이기 때문에

진리를 타협하지 않고 그대로 전하면

그대로 가서 사람을 찌르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을 찔러서 각성시키고 회개시키고 결단하게 만들고

변화시키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 진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너희가 거룩하여짐이니라.” 딤전4:5

하나님의 말씀으로 제자들이 거룩하여졌다고 예수님께서 여러 번 말씀하신 것입니다.


“진리로 우리가 거룩하여진다.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여 거룩하게 된다.”

이런 말씀들이 성경에 나와 있는 것입니다.


‘의인이 나를 칠지라도 그것을 은혜로 여겨야’ 합니다.  시141:5


그런데 왜 그것을 욕으로 여깁니까?

그것은 들을 귀가 없어서 그런 것입니다.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해서 그런 것입니다.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노하심을 격동한 것처럼

너희 마음을 강퍅하게 하지 말라.” 히3:15


그들이 광야에서 엎드러졌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함으로 가벼운 책망도 받아들이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강퍅하고 완악한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심판이 있습니다.


그들은 한 사람도 서지 못합니다. 그들은 모두 엎드러집니다.

광야에 엎드러져서 멸망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모두 엎드러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에스겔에게 “내가 너를 이스라엘의 파수꾼으로 세웠다.”고 하셨습니다.


나팔소리는 무엇입니까?  렘6:17

‘너는 네 목소리를 이스라엘 백성에게 나팔소리처럼 날려서 내 백성의 허물을,

그들의 죄를 고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들입니다. 그것이 나팔소리입니다.

마치 기상 나팔소리가 잠자는 군인들을 깨우는 것처럼

죄의 잠에서 깨어서 일어나라고 하는 그런 외침들입니다.

회개를 촉구하는 선지자들의 메시지입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백성들 위에, 교회들 위에 파수꾼이 필요하다는 것을 압니다.

왜냐하면 죄의 잠에 빠져 있기 때문에

그들에게 그냥 음악 소리 같은 설교가 아니고

나팔소리 같은 설교를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음악 소리 같은 설교를 해서 사람들을 즐겁게 하지 말고

사람들을 기쁘게 하지 말고

나팔소리 같은 설교를 통해서 영혼들을 깨워라.

죄의 잠에서, 사망의 잠에서 깨워라. 영원한 잠에서 깨워라.’


이것이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간절히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선지자들이 일어나서 나팔소리 같은 메시지를 가지고 나갈 때

몇 사람이나 듣겠습니까? 얼마나 그것을 원하겠습니까?

얼마나 그것을 듣고 깨어나겠습니까?


“그들의 대답이 우리는 듣지 않겠노라 하였노라.” 렘6:17b


이것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의,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사람들의 반응이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변한 것은 없습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비관하고 있을 것은 아니고,

우리는 철저하게 우리 자신이 죽음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통로가 되고

부흥이 일어나게 해야 합니다.


과거에 수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선지자들이 올 때마다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그러나 역사를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들을 통해서 도시가 변화된 사건들이 있습니다.


선지자들의 말은 사람들이 잘 받아들이지 않지만

강력한 부흥이 일어나면 영향력이 증대되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 선지자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