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아이 와 어른 고전3:1~3 스크랩글, 출처
◑어른은 어린아이를 돌볼 줄 압니다.
▶도처에 어린이들은 많습니다. 그들은 양육되고 자라야 합니다.
그러나 아무나 자녀를 양육할 수는 없습니다.
먼저 자라고 성숙되어야만, 자녀를 돌볼 수 있습니다.
사람은 육체의 차원에서 보면, 어른과 아이로 나눌 수 있습니다.
결혼해서 자녀를 낳고 기르는 사람은.. 어른이요,
아직 분가하지 않고 어른의 밑에서 자라고 있다면.. 그는 아이입니다.
그런 면에서 청년도 아이에 속합니다.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결혼하지 않으면 어린애다.’ 라는 말이 있는데,
아이를 낳고 키우는 고생을 해 보아야.. 비로소 어른이 된다는 말입니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녀를 낳고 기를 수 있는.. 성장된 사람이 있고,
아직 자녀를 낳거나 양육할 수 없는.. 어린아이도 있습니다.
교회의 많은 문제들은, 아직 성숙되지 않은 많은 아이들에게
많은 일들을 맡기고 요구하기 때문에 일어납니다.
그들은 사회적 위치와 경험이 풍부할지는 모르지만
영적으로는 아직도 어린아이입니다.
그들은 영적 성숙과, 주님께 대한 헌신, 복종, 자기 욕망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
주님의 음성을 듣고 인도를 받으며 영적인 분별력을 가지는 것 등에 대하여..
잘 모릅니다.
그들의 가치관은 아직도 타고난 본성에 가까우며,
세상적이고/육신적이며/자아중심적입니다.
그들의 목표는.. 아직도 주님의 영광이 아닌, 자신의 드러남입니다.
▶그러한 영적 어린이들에게 유감스럽게도 많은 일들이 주어집니다.
심지어 갓 태어난 아기의 양육이 맡겨지기도 합니다.
이것이 얼마나 가당치 않은 일인지요!
그러므로 그들이 인도자나 피인도자가 함께 구렁텅이에 빠지는 것은
하나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런 의미에서 초신자가 쉽게 시험이 들고 실족하는 것을
우리는 많이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어린이는 어린이를 양육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아주 명백한 사실입니다.
만약 그들이 함께 있다면 그들은 어떻게 할까요?
아주 간단합니다. 그들은 열심히 서로 싸웁니다.
6인 아이가 5살 아이를 돌본다고 합시다.
이것이 가능할까요? 물론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취향과 수준은 서로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그들은 싸우고 웁니다.
▶결혼하지는 않았지만 어느 정도 나이가 든 젊은이는, 아이를 돌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잠시 돌보는 것’과, ‘맡아서 양육하는 것’은 다릅니다.
잠시 돌보면서 몇 가지의 지식이나 기능을 가르칠 수는 있으나..
그것이 양육은 아닙니다.
아이의 성장에 필요한 것은 부모의 사랑이며,
교육학을 전공한 젊은이도 부모만큼 아이를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모성애란 결코 슈퍼마켓에서 구입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사랑으로 온전히 성숙한 성도만이
자녀를 사랑으로 잘 돌볼 수 있는 것입니다.
◑어린아이의 특징
▶1. 잘 싸웁니다.
어린아이들의 가장 중요한 특성중의 하나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서로 싸운다는 것입니다.
고전3:1절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어린아이들은 곧 육신에 속한 자들입니다.
즉 그들은 아직 영적으로 성숙되지 않았으며, 육적인 사고방식과 가치관으로 삽니다.
그들은 여러 가지 은사들, 방언, 예언, 신유, 이적 등을 체험하였으나
영적으로는 아직 낮은 단계에 있었습니다.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 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함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니" 고전3:2
그들은 어리기 때문에 말씀의 깊은 진리를 이해할 수 없었고,
그저 초보적인 수준의 말씀밖에 소화할 수 없었습니다.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고전3:3
▶2. 영적인 인도함을 받지 못합니다.
또 어린 아이의 특성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인도 받는 것에 대하여.. 거의 알지 못합니다.
그들의 관심은 항상 보이는 것뿐이요,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해서는 알 수도 없고,
알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저 누가 시키는 그대로 하면, 잘 믿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3. 자기중심적입니다.
왜 어린이들은 서로 싸울까요? 그들이 서로 원수를 맺었기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아무리 친하더라도 싸웁니다.
이는 그들이 상대방을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이기적이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이기적 욕망을 무엇보다 앞세우기 때문에
당연히 상대방과 서로 부딪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모든 어린이들은 이기적이며 서로 싸웁니다.
그들은 자기 밖에 모릅니다.
아기는 배고프면 웁니다.
‘엄마, 바쁘면 나중에 우유를 주세요.’
이런 아기는 없습니다.
‘'엄마, 피곤하시면 나중에 기저귀를 갈아주세요.’'
이런 아기도 없습니다.
어린 아기는 순수하고 아름답습니다.
그러므로 어리다는 것, 이기적이라는 것, 육신적이라는 것이
비난의 대상이 될 수는 없습니다.
다만 그들은 자라가야 하며 아직 아기를 낳을 수도 없고, 기를 수도 없으며
어떠한 일을 맡길 수도 없는 것입니다.
▶4. 매사에 비판적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교회를 오래 다니지만 이기적입니다.
사랑할 줄 모릅니다. 툭하면 남을 비판하고 비난합니다. 용서할 줄을 모릅니다.
자기에게 유익이 될 일이 아니면 하지 않습니다. 인색하며 또 교활합니다.
이것을 비난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그는 아직 어린아이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합니다.
그는 좀 더 자라야 합니다. 그의 신앙 경력이 얼마나 오래 되었든,
교회 안의 위치가 어떻든 그는 어린아이입니다.
신앙의 성숙여부는 삶과 인격의 열매로 분별하는 것이지
외적 조건으로 결정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육체의 연령은 시간이 흐르면 자연히 많아지지만
영적으로는 아무리 오랜 시간이 흘렀어도, 여전히 어린아이 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목표는 ‘성숙’이지, ‘축복’이 아닙니다.
신자들이 교회를 오래 다녀도, 성숙에 이르지 못하는 이유는,
신앙생활의 목표가 ‘복 받음’에 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영적 성숙’ .. 이런 것엔 아예 관심조차 없습니다.
지금 우리는 신학적으로 객토(갈아서 완전히 뒤집고, 새 흙으로 까는 것)작업이 필요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라가야 합니다.
이 땅에서 우리는 영적으로 성숙하기 위해서 존재한다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영이 열릴수록 그는 주님과 실제적인 교통을 할 수 있으며,
주님의 마음을 알게 됩니다.
그의 기도는 깊어집니다.
그의 기도는 단순한 하소연에서, 주님과의 상호간의 깊은 교제로 발전해 갑니다.
그는 점차 기다리는 기도, 듣는 기도,
하나님의 임재에 잠기는 기도 등에 대해서 배워가게 됩니다.
▶어린아이들은 무지합니다.
젊은이들은 날카롭고 논리적이고 예리합니다. 그들의 개념은 다 옳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직 영적으로 어린아이인 것입니다.
주님을 알아갈수록, 성장해 갈수록,
그는 날카로운 비판에서 점차로 사랑과 포옹과, 관용과 용서를 이해하게 됩니다.
그는 점차 자유롭고 자비와 긍휼이 넘치는 사람으로 변화되어 갑니다.
어린아이들은 꿈이 있습니다. 젊은이들도 비전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대부분 자기 자신을 위한 것 야망 입니다.
▶어른이 될수록, 자아가 소멸됩니다.
그러나 자녀를 기르는 어른들은 나이가 들수록
점차 의식에서 자신이 소멸되어 갑니다. 자신의 꿈도 소멸되어 갑니다.
점차로 그의 사고방식의 무게 중심은, 자신에게서 → 자녀에게로 옮겨갑니다.
그는 자신의 꿈보다 자녀의 꿈을 원합니다.
그는 자신의 행복보다 자녀의 행복을 원합니다.
그는 점차로 자신을 잃어버리며
서서히 희생과 포기로서 오히려 만족을 하기 시작합니다.
▶어른이 될수록, 자녀의 성공을 더 좋아합니다.
전과 달리 그는, 자신의 큰 성취보다, 자녀의 작은 성취로 기뻐합니다.
아주 박식하고 지혜롭던 사람이 자녀의 사소한 성공,
수학점수를 잘 받았다든지, 교내 백일장에서 입상했다든지,
이렇게 유치한 것에 대하여 감격하고, 그와 같이 유치해진 자신에게 놀랍니다.
어린아이들은 얻고 이기고 성취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어른들은 주고 주고, 또 주고 싶어합니다.
그는 잃고 싶고 희생하고 싶으며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주어도 아까워하지 않습니다.
결혼하지 않은 젊은이들은
일반적으로 이러한 희생과 자기포기에 대하여 알지 못하며
그러므로 그들은 어린아이인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경험하지 않은 세계를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어린아이는, 어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성숙한 어른은, 자녀를 기꺼이 떠나보냅니다.
결혼하는 날, 신부는 기쁨과 행복과 앞날에 대한 기대와 흥분으로 가득합니다.
그녀는 만면에 웃음을 짓습니다.
그러나 그날 밤 신부의 아버지는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그는 자다가 일어납니다. 그는 딸의 방문을 엽니다.
그는 아직도 딸의 체취가 가득한 이것저것을 만져봅니다.
딸의 옷가지, 책, 소품들 그리고 그는 딸의 앨범을 집어 듭니다.
추억이 담긴 딸의 사진들, 어릴 때의 모습, 돌 사진, 딸이 아플 때, 재미있던 순간들..
그는 어느새 흐느끼고 있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그는 중얼거립니다.
'내가 왜 이러지. 가장 행복한 날에.'
그러나 그는 압니다. 가장 큰 행복이 가장 힘든 고통일 수도 있다는 것을...
그는 그것이 인생인 것을 압니다. 모두가 가는 길인 것을 압니다.
그러나 그는 이제부터 한동안 뻥 뚫린 가슴을 안고, 새롭게 포기를 배워가야 하는 것입니다.
어느새 그의 뒤에 인기척이 나고 조용히 어떤 손이 그를 어루만집니다.
돌아보면 어느새 뒤에 서있는, 아내의 위로하는 음성이 들립니다.
"여보, 당신답지 않게 왜 그러세요."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아내의 눈가도 역시 젖어 있습니다.
그녀는 말합니다.
"이제 우리 둘만 남았군요."
그렇습니다. 그것이 인생입니다. 그러나 딸은 그것을 알까요?
아빠와 엄마의 마음을?
아마 잘 알지 못할 것입니다.
이해는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요.
그러나 사람은 경험하지 않은 것을 알 수는 없습니다.
세월이 흘러 그녀도 사위를 맞게 되면, 며느리를 맞게 되면,
그것이 어떤 것인지 느끼게 될 것입니다.
성장할수록 그는 비워집니다.
그의 소원은 자신의 행복이 아니라 자녀의 행복입니다.
자신이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자녀가 행복할 수만 있다면
그는 기꺼이 그 길을 갈 것입니다.
▶마치는 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 그들은 어립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기적입니다. 그들은 남에게 관심이 없습니다.
그들은 희생을 할 줄 모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전도하러 갔다가 오히려 싸우고 웁니다.
상처를 주기도 하고, 상처를 받기도 합니다.
일하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부름 받은 사명이 있으며
주께서 맡기신 그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먼저 충분히 자라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리하여 주님께서 사용하실 수 있는 그릇이 되어
자녀를 생산하고 따뜻하고 아름다운 사람이 되어
그들에게 사랑과 돌봄과 안식과 치유를 공급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정원 목사님의 '영성의 중심은 사랑입니다' 중에서
◑어떻게 자라갑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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