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물은 크기보다, 상징성이 더 중요
가끔 TV에서 가톨릭 방송을 볼 때가 있습니다.
한 번은 요한 바오로 2세가 나오고, (생전에 이 분의 행보는 '거듭난 크리스천' 같더라고요)
로마 바티칸 광장에 운집한 가톨릭 성도들이 나오는데,
땡볕에 모인 사람들을 보면서... '건물 새로 크게 안 짓나?' 라는 생각을 문득 해 봅니다.
또 바티칸의 성탄절은 12월이니, 그때는 쌀쌀할 것 아닙니까?
광장에 모인 성도들을 위해서, 성당 건물이 필요하겠지요?
만약 거기에 마땅한 부지가 없으면, 지하를 파고서라도 지으면 될 것 아닙니까?
서울의 명동 성당도.. 건물 크기로는 내세우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명동 성당이, 누구나 인정하는 한국 가톨릭의 1번지가 된 것은, 건물 때문이 아닙니다.
아마 명동 성당이 가지는 '어떤 상징성'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니 명동 성당도, 그 건물이 크지 않다고 해서.. 아무도 무시하지 않으며,
또한 건물을 혹시 새로 크게 증/개축한다고 해도.. 그 건물의 크기 때문에..
명동 성당을 우러러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건물은 그 '크기'보다는, 그 건물이 가지는 '상징성'이 더 무거운 것 같습니다. /편집자의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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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리교회와 갈릴리공동체 마12:46~50 11/05/19 설교스크랩, 출처
◑교회를 처음 창립할 때, 우리가 가졌던 정신
6월 첫째주일이 되면, 저희 갈릴리교회가 창립된 지 25주년이 됩니다.
25년 전, 이 교회를 시작할 때, 제가 특별히 생각한 몇 가지가 있었습니다.
▲1. 첫째는 교회당이 없는 교회를 만들어보자는 것이었습니다.
많은 교회당들이 주일 오전에만 예배를 드리고, 오후에는 비게 됩니다.
그러니 또다시 헌금해서 교회당 짓고, 피아노 사고 하지 말고,
그곳에서 예배를 드리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11시 예배만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두시 예배도 받으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2. 두 번째로 신문에 ‘이렇게 예수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을 모집합니다.’
라는 교인모집 광고를 내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마치 학생모집 광고를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그런 뜻에 동의하는 사람과 함께 기간을 일 년으로 정해서
일 년 동안 신앙생활을 해보다가.. 뜻이 맞으면 계속 함께 신앙생활 하고
아니면 떠나는 것입니다.
일 년 단위로 교인 모집광고를 내서, 교인들을 모아 교회를 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우선은 광고를 실어주겠다는 곳이 없었고
주위에서도 그렇게까지 하는 것은 너무 튀는 것이라고 말려서 하지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아직도 그때 광고를 냈어야 하지 않았는가, 아니 지금이라고
광고를 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아직도 교회 곳곳에 이 정신이 남아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교회는 몇 개월을 다녀도 등록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다른 교회에서는 한 번 나가면 집에 까지 따라갔다가
다음날 심방대원이 심방하여 등록을 강요합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는 몇 개월을 다녀도 누구 하나 쳐다보지도 않고
등록하라는 말도 하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 이유가 다녀보고 다닐만하면 다니라는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우리 교회가 쌀쌀하고 불친절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뜻을 세웠으면 그 방향으로 나가야 하는데,
친절하게 해서 교회에 등록하게 하는 것은 유치한 방법입니다.
▲3. 세 번째는 우리 교회는 교적부가 없습니다.
언제 떠나게 될지 모르는데
굳이 교적부를 만들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만들지 않았습니다.
한번 교인이 되면 영원한 교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언제든지 자신의 신앙고백과 다르면 교회를 자유롭게 떠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우리 교회가 자신의 뜻에 맞지 않는다고 떠나는 사람은
잡지 않습니다. 전화를 하거나 찾아가지도 않습니다.
이것 때문에 교회에 대해 섭섭하게 생각하기도 하고, 교만하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뜻이 맞지 않아서 떠나는 사람을 붙잡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교회는 함께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신앙생활을 하는 곳입니다.
뜻이 맞지 않는 사람을 잡을 이유가 없습니다.
가고 싶은 사람은 주저하지 말고 가라는 말은 절대로 교만해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 교회는 몇 명이든지, 역사 속에서 어떻게 신앙생활을 할 것인가 하는 것에
함께 동의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출발한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저의 이런 말을 듣고 그동안 갈릴리교회에 대해 궁금했던 것, 섭섭했던 것,
오해가 있었던 것들이 다 해결되기를 바랍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교회는 세 종류가 있습니다.
▲1. 지역교구 교회입니다.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지 않은 상황에서 교회가 없어 예배드릴 장소가 없고
교회가 없어 복음을 전파하는 곳이 없는 지역마다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자동적으로 싫으나 좋으나 그 교회를 다닌 것입니다.
지금도 천주교회는 지역마다 교회가 있습니다. 이것이 지역교구 교회입니다.
그래서 교회 이름도 구로동성당, 목동 성동, 명동성당 등
지역 이름을 따서 교회 이름을 짓고
그 동네에 사는 사람은 무조건 그 성당에 다녀야 합니다.
그래서 이사를 가면 예전에 다니던 교회를 계속 다니는 것이 아니라
새로 이사한 지역의 교회를 나가게 됩니다.
▲2. 교파교회입니다.
같은 지역에 장로교가 있더라도 감리교가 없으면, 그 지역에 감리교회를 세우게 됩니다.
한 지역에 여러 교파의 교회가 있어서 교파의 특성을 살펴보고
자신에게 맞는 교회를 나가게 됩니다.
우리나라에는 여러 교파가 있지만 거의 비슷해서 그 교회가 그 교회 같지만..
교파마다 특징이 있습니다. 자신에게 맞는 교파를 찾아서 다니는 것입니다.
미국교회가 그렇습니다. 옛날에 우리 교회도 그런 경향이 있었습니다.
▲3. 공동체적 교회
최근에 들어 교회의 숫자가 많아지면서, 같은 지역에 교회를 지으면서
각 교회마다 특색이 있는 교회, 다른 교회가 가지지 않는 자신들만의 신앙고백을
중심으로 모이는 공동체적 교회가 있습니다.
같은 교파에 속한 교회라도 생각하는 것이 다르고,
신앙고백이 다르고, 뜻이 다른 사람들이 모이는 공동체적 교회를 말합니다.
요즘 우리 한국 교회가 그렇고 그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속해 있는 장로교 규정에 따르면
새로 교회를 지으려면 먼저 있는 교회와 500미터가 떨어져야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 간에 교인쟁탈전이 벌어지고
서로 불편한 일이 생길 것이 염려해서 생긴 법입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는 아무런 구애를 받지 않고
누구든지 교회를 세우겠다고 하면 동의를 해줍니다.
얼마 전에도 젊은 목사가 우리 교회 앞에 '즐겁고 행복한 교회'를 세우면서
저한테 동의를 받으러 와서 흔쾌히 해주었습니다.
아무리 눈앞에 또 다른 교회가 있다고 해도
서로 지향하는 신앙의 목표가 다르고, 신앙고백이 다르기 때문에 문제가 없습니다.
우리 교회가 구로동에 있지만 구로동에 사는 사람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파주에서, 일산에서, 상계동에서 오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지향하는 신앙고백이 같고
우리 교회가 하는 모든 일에 동의 한다는 것입니다.
뜻이 같고 신앙고백이 같기 때문에 믿음의 공동체를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공감할 수 있는 우리가 예수를 믿는 사람으로서
이렇게 살아야겠다는 분명한 신앙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공동체적 교회도 필요합니다.
▲교회를 개척하기 전에, 생각해 볼 사안
지역교구 교회나 교파주의 교회 때, 지역에 교회가 없어서
예배를 드리고 싶어도 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복음을 듣고 싶어도 복음을 듣지 못할 때는 교회를 세우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교회를 다닥다닥 세우면서 저 교회나 이 교회나 다를 것이 없다면
교회를 세울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교회를 왜 또 세워야 합니까?
우리가 교회를 세우지 않아도 예배드릴 수 있고 말씀을 들을 수 있다면
또 다른 교회를 세울 필요가 없습니다.
만약 똑같은 교회를 또 세운다면, 인간관계 때문이든지
목사의 일거리 때문에 세우는 것에 불과합니다.
신학교에서 많은 목회자들이 배출되니까 갈 곳이 없어서
여기저기 똑같은 교회를 세우는 것입니다.
이런 교회를 다니려면 다른 교회를 다녀도 충분한데 왜 세워야 하는가? ..
하는 생각이 드는 교회가 많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제도 보다는, 공동체를 원하셨습니다.
우리가 함께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렇게 예수님을 믿어보자는 신앙고백을 중심으로 한 교회가 진정한 교회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꿈꾸셨던 교회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교회의 머리라고 말합니다.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님께서는 교회를 하나도 세우지 않으셨습니다.
아니 세우려고 했는데 실패한 것이 아니라
세울 마음조차 갖지 않으셨던 것을 성경을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성경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믿음의 공동체를 원하셨던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본문 마12:46~50절을 보면,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들의 모임을
교회의 모습으로 생각하셨다는 짐작을 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아무렇게나 세워져서는 안 됩니다.
물론 하나님의 말씀의 터 위에 세워지는 것이지만
무엇 때문이라는 구체적 신앙고백 위에 세워져야 합니다.
▲지역교회의 존재이유, 특성이 무엇입니까?
우리 교회는 예수님의 치유사업을 본받아
치유의 목적으로 세운 교회라고 하면 존재의 이유가 됩니다.
우리 교회는 날로 병들어 가는 지구 환경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창조질서를 다시 세우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 모여 교회를 한다면
그것도 의미가 있습니다.
날로 심각해지는 청소년 문제를 위해서 기도하고 선도하는 비전을 갖은 교회도
존재이유가 됩니다.
그러나 막연하게.. 다른 교회와 다른 것이 없이
열심히 전도하고 예배드리는 것으로.. 또 다른 교회를 세울 이유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교회는 분명한 이유를 가지고 세워야 합니다.
이 지역에 예배드릴 곳이 없다,
이 뜻을 위해 교회를 세워야 한다는 분명한 이유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갈릴리교회는 분명한 신앙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25년 전에 우리 교회를 세워야할 이유가 있어야 했고
지금도 왜 우리 교회가 존재해야 하는지 분명한 이유가 있어야 합니다.
다른 교회가 있음에도.. 우리 교회가 있어야 하는 존재이유와 의미가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 앞에서도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도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설교 제목이 ‘갈릴리교회와 갈릴리공동체’입니다.
우리는 별로 의미를 두지 않고 그냥 편리한대로
교회와 공동체라는 말을 같이 사용하지만
신학적으로는 굉장한 차이가 있는 말입니다.
교회는 보통의 교회이지만
공동체는 다른 교회가 흉내 낼 수 없고
다른 교회가 가지지 않은 우리들만의 특별한 존재이유 신앙고백을 가진 교회라는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교회는 갈릴리교회가 되어서는 안 되고
갈릴리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가 되어서는 우리 교회의 존재이유가 없습니다.
그런 교회는 우리 말고도 많이 있기 때문에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특별한 신앙고백이 있고
이 시대와 역사 속에서 우리가 해야 할 하나님의 뜻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마음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우리의 삶 가운데 나타나고
하나님과 모든 사람이 인정할 수 있는 신앙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갈릴리교회의 공동체적 특징 - 가난한 사람들을 섬기는 일
마25장에 보면 예수님은 가난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 갈릴리에서
배고픈 사람의 모습으로 병든 자, 나그네 된 자의 모습으로 오셨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갈릴리공동체는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는 것이
예수님을 돌보는 것이라는 것을 믿고 실천하면서 살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가난한 사람의 모습 속에서 주님의 모습을 발견하고
그들을 섬기는 것이 주님을 섬기는 것이고,
하나님나라에 갔을 때 내가 배고팠을 때 네가 먹을 것을 주었다고
칭찬 받을 것을 소망하고 사는 사람이 갈릴리교회의 교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는 가난한 사람을 섬기는 것을
가장 우선으로 여기고 가장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돈이 생기면 이들을 섬기는 일에 사용하고, 이들을 위해 봉사하고, 헌신하고,
이들을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 갈릴리의 신앙고백인 것입니다.
이렇게 살아보려고 모인 사람들이 갈릴리공동체입니다.
이 땅의 가난한 사람들이
이 땅에 존재하는 그리스도의 모습이라는 것을
믿고 섬기며 살아가려고 작정한 사람들이 모인 모임이.. 갈릴리교회입니다.
나는 아니라고 하는 사람은 갈릴리교회의 교인의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괜히 교회에 다니는 사람입니다.
◑창립 25년을 맞이하여,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려 합니다.
▲(서울에 교회가 이토록 많은데) 우리는 왜 또 하나의 교회를 시작하려고 했는가?
지난 25년 동안 우리 교회는 그렇게 살아보려고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이것이 처음 이 교회를 시작한 이유입니다.
갈릴리교회에서 첫 번째 발행된 1986년 6월 8일자 주보에 보면
‘한 자리에 서서도 열 개의 십자가를 셀 수 있는 이 수많은 십자가의 틈에
왜 우리는 또 하나의 십자가를 세우려고 하는가?’ 하는 이유가 실려 있습니다.
당시는 밤에 높은 곳에 올라가서 십자가를 세면, 열 개 정도의 십자가를 셀 수 있었습니다.
얼마 후에는 20개 쯤 셀 수 있었고,
요즘은 서울 시내 어느 곳에서든지 한 자리에서 30개 이상의 십자가를 셀 수 있습니다.
도대체 이 수많은 십자가 가운데, 우리가 또 세우려고 하는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교회를 세우면서 ‘우리는 왜 또 하나의 십자가를 세우려고 하는가?’ 하는 것을
우리 자신들에게 묻고 또 물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십자가를 세우는 분명한 목적이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 앞에서도 왜 우리가 또 하나의 십자가를 세우는지
분명한 대답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목회자들의 먹고 사는 일자리가 되어서는 안 된다 생각이었습니다.
▲지난 25년 동안, 우리 공동체적 특징을 살리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렇게 시작한 우리 교회는
지난 25년 동안 열심히 그렇게 살기 위해서 노력했습니다.
25년이 지난 지금, 그 결과가 무엇인가, 어떤 평가를 할 수 있는가.. 생각해 봅니다.
물론 모든 평가는 하나님이 하시고 사람들이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 스스로 우리 갈릴리교회가 하는 일들을 보면서,
우리들의 삶의 모습을 보면서.. 어떻게 평가를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이 교회는 무언가 세상의 다른 교회와는 다르다는 말을 들을 수 있는 교회인가
하는 것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저는 모든 평가의 기준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헌금이라고 생각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은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그 교회가 헌금을 어떻게 쓰는가 하는 것이
그 교회가 지향하는 바를 나타내는 바로미터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도 돈을 쓰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의 가치와 생각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에 돈을 쓰지 않는 사람은
거짓말을 하는 사람입니다.
돈을 쓰는 것을 보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알 수 있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을 하지 않는 목사는 없습니다.
교회가 사회의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 목사는 없습니다.
그러나 말로서가 아니라
그 교회가 헌금을 그 말대로 사용하는가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 갈릴리교회에 대해 여러 가지 평가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우리 교회가 처음 가졌던 갈릴리정신을 버렸다고 합니다.
그러나 구체적인 증거를 대야 합니다.
옛날에는 헌금을 가난한 사람을 위해 사용했는데, 지금은 그렇게 쓰지 않으니까
변했다고 하면 맞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갈릴리교회는 처음과 비교해서 어떻습니까?
목사인 제가 스스로 평가해볼 때 지난 날 우리에게 많은 유혹이 있었습니다.
사실 뜻을 지켜나간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 뜻을 변치 않고 지켜나가기 위해서는 많은 희생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편해지고 싶은 유혹을 잘 극복하고 그 뜻을 지켜왔는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 교회가 헌금을 다른 교회와 다르게 사용한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최근에 이르러 저는 걱정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도 이제는 지쳐서 쉽게 예수님을 믿고, 쉽게 교회 생활을 하고,
쉽게 봉사하려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일반 교회의 생각들이 교회의 이곳저곳에 들어와
점점 갈릴리공동체(긍휼사역 특징)가 아니라
갈릴리교회(일반적 교회)가 되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염려와 걱정을 떨쳐버릴 수가 없습니다.
저는 25년 쯤 되었으면 모든 교우들이 같은 뜻으로 변치 않고
우리의 뜻을 굳게 할 것으로 생각했지만 이것은 착각이었습니다.
계속해서 우리를 유혹하고 우리를 바꾸어보려는 사탄의 역사는 끊이지 않고
우리의 공동체 속에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25주년이 된 이 시점에 우리가 스스로 깊이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왜 이 교회를 시작했는가,
예배드릴 곳이 없어서 이 교회를 시작했는가,
무엇 때문에 이 교회를 시작했는가,
이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나는 어떻게 살아왔는가,
이 교회를 시작할 때 신앙의 고백을
우리가 온 몸으로 우리의 희생으로서 잘 감당했는가..
우리의 모습을 살펴보고 되돌아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교회가 수많은 ‘십자가’ 틈에 또 하나의 십자가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얼마 전에 우리 교회의 종탑의 십자가 네온사인을 꺼버렸습니다.
네온사인을 밝혀서 세상을 밝히는 것은, 우리 교회가 아니라도 할 교회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해야 할 일은,
우리의 삶으로 우리 교회의 신앙고백으로 세상을 밝혀야 합니다.
목사인 저 자신이 25년의 역사 속에서
되는 대로 관성대로 목회를 할 것이 아니라 초심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이 교회의 교인들도 그냥 편리해서, 가까워서,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해서 온다는 것이 아니라
정말 이 교회를 시작한 뜻에 내 삶을 던지겠다는 각오를 가지고.. 교인이 되어야 합니다.
갈릴리에서 가난한 자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을 뵈옵고
내가 가진 모든 것을 가지고 섬기고 헌신할 때
갈릴리교회가 세워진 이유를 분명히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최근에 이런 생각을 합니다.
"여러분 갈릴리교회의 교적부를 반납합니다.
갈릴리공동체의 신앙고백을 따라 온 삶을 드려서 헌신하며 희생하고 살 사람은
100명이든지 200명이든지 남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다른 교회에 가십시오."
라고 말하고 싶은 충동을 받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 사람이 많은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제가 이 교회에 목사로 남아 있는 한 저는
뜻도 맞지 않는 사람 5백 명 모이고, 1천명이 모여 큰 교회가 되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50명이든 100명이든 우리의 신앙고백을 따라
자신의 삶을 던지고 희생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
진정한 갈릴리공동체의 식구라고 생각합니다.
25주년을 맞이하여 이와 같은 새로운 각오로
우리 하나님 앞에 역사 앞에 사람들 앞에
우리 교회가 이 땅에 꼭 필요한 교회라고 말할 수 있는 그런 교회로 다시 세우는 일에
우리 모두의 마음과 믿음을 모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교회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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