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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양원 목사님, 625와 순교

LNCK 2011. 5. 31. 21:04

 

◈손양원 목사님, 625와 순교                      계2:10               11.03.24.

                                                                         손동희 권사 간증 녹취(3/3)

1940년에 신사참배로 감옥에 가신 손목사님은,

1945년에 해방을 맞이하여 5년만에 출옥하셨지만,

1948년 여순반란 때, 두 아들 손동인, 손동신이 순교했고,  

1950년 625때, 손양원 목사님은 순교하셨습니다... 이 부분을 아래에서 나누겠습니다.




◑저 손동희 (권사) 의 방황


제가 16살 때, 제 두 오빠 손동인, 손동신이 순교했고,  

제가 18살 때, 제 아버님 손양원 목사님이 순교하셨습니다.


▲저는 그 당시, 너무 힘들었습니다. 한참 사춘기의 나이 때가 아닙니까?

그때 저는, 두 오빠의 죽음에 충격을 받아서, 거의 정신병에 걸렸습니다.


병명은.. 제가 지었습니다. ‘총알 공포증’이었습니다. 강박증세이지요.

제가 앉았다가 일어서면, 자꾸 어디서 총알이 저를 향해 날아올 것 같아서,

너무 불안했습니다. 그래서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밤마다 환청이 제 귀에 들렸습니다.

총알 튀기는 소리가 들리고, 오빠들의 발자국 소리도 들려왔습니다.


당시에 저는 순천 시내 길거리에 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시내에 나가기만 하면, 전부 두 오빠들이 다니던 길거리였습니다.

방금이라도 오빠들이 여기저기서 걸어 나올 것만 같았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오빠들이 환상으로 나타나 보였습니다.

‘동희야, 울지 마, 나 여기 있어!’ 하고요.


그랬다가 환상이 사라지고는, 저기서 또 오빠의 환상이 나타났습니다.

‘동희야, 울지 마, 나 여기 있어!’


▲저는 아버지께 졸라서, 서울로 전학을 갔습니다.


‘아버지, 제가 순천에 있다가는, 진짜로 미쳐버릴 것만 같습니다.

도저히 길거리에 나가질 못하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저를, 좀 딴 곳으로 보내 주세요.’


그래서 아버지 손 목사는, 저를 서울의 이화여전으로 전학을 시켰습니다.

서울로 전학 와서 얼마 지나지 않아, 3학년 말이었습니다.

이때 625가 또 터졌습니다. 1950년 6월 25일, 주일 새벽이었습니다.

그들은 사전 선전포고도 없이, 한 날 한 시에 물밀듯이 남침을 감행했습니다.



◑625와 손양원 목사님의 순교

 

▲625때 피난을 거부하셨습니다.

아버지 손목사님은, 1945년 815해방 때 드디어 출옥하셔서,

625가 터졌을 때까지, 애양원에 다시 복직하여 섬기고 계셨습니다.


인민군이 내려온다는 소식이 들리자,

아버님의 친구들 여러 분이, 애양원으로 아버님을 찾아 왔습니다.

배를 타고 같이 피난을 떠나자는 취지였습니다.


그때 손양원 목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들이나 피난을 가시오. 나는 기왕 감옥에서 죽었을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815해방을 주셔서, 이렇게 다시 살아서 풀려난 것도 감사한데,

내 어찌 다시 피신하겠습니까. 그러니 당신들이나 가십시오.’

그러고는 손 목사님은 피신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피신하지 않으면.. 공산당에 붙잡혀 죽는 것은 기정사실 이었습니다.

‘여수 순천 반란사건과 그 진압 사태’가 일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던 시점에,

북한이 남침을 했으니,

‘여순 반란사건’의 진압 과정에서 많은 피해를 입은 좌익들이, 득세할 것이 뻔했습니다.


이 사실을 직감한 애양원의 나환우들은,

손양원 목사님을 붙잡아, 강제로 섬으로 피난 가는 배에 태웠고,

아버지는 그때마다 뿌리치고 배에서 내리기를.. 여러 차례 반복 했습니다.

                                               당시에 남도의 작은 섬들은, 625의 참화를 면했다고 합니다.

손 목사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들은 나를 이렇게 만들지 마시오.

이것은 나를 위함이 아니고, 나를 도리어 비겁한 자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손 목사님은 절대 피난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이 난국에 가장 급한 일이 무엇이겠는가?

양 먹이던 목자가, 내 양떼와 신앙을 지켜야지,

더구나 몸도 성치 않은 나환자 성도들,

이 불쌍한 양떼들을 버리고, 나 혼자 살겠다고 어디로 도망을 가겠는가!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아야 하리라!’
하시면서

나환자 성도들을 지키기 위해서, 손양원 목사님은 끝까지 피난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애양원에 공산군이 닥치기 1주일 전부터, 애양원에는 부흥회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하루 3번씩 종을 쳐서, 성도들이 모여서 함께 부흥회 예배를 드렸고,

맨 마지막 날 토요일에는, 전 성도가 금식과 철야기도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 부흥회 마지막 토요일날 설교본문은 계2:10절이었습니다.

이 설교가, 거의 마지막 설교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 다음 주 수요일 날 잡혀가셔서, 15일 후에 순교하셨기 때문입니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계2:10


그래서 이 설교는, 평소에 손목사님이 정말 가족처럼 아끼고 사랑했던

나환자 성도님들에게 ‘유언처럼’ 남겨졌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이 설교에서, ‘순교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예감을 주셨고, 기도로 미리 순교를 준비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때가 왔다. 순교를 각오하라.

우리가 이제껏 예수님의 이름으로 대접 받았으니,

이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순교할 때다.

잘 살려고 노력 말고, 잘 죽기를 원하라...’


이 마지막 설교는, 평소에 아버지 손 목사의 생활신조였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의 순교

1950년 9월 13일이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강대상에서 한참 기도드리고 있었습니다.

이때 공산당들이 애양원에 쳐들어 왔습니다.


그들은, 기도하시던 손목사님을 끌어내서,

손에 수갑을 채워서 끌고 가서, 여수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그 감옥에서 15일 동안, 뭇매를 맞으셨습니다.


공산당을 악선전했다며..

미국의 앞잡이 노릇을 했다며..

이런 저런 이유로 뭇매를 맞았습니다.


그러다가 9월 28일이었습니다. (1950. 9. 28. 서울 수복이 있었습니다. 아마 처형하고 나서 도망치려고...)

공산당은 손목사를 끌고 여수에서 조금 떨어진 미평에 큰 과수원이 있었는데,

그 과수원으로 끌고 가서, 다른 여러 인사들과 함께 총살, 순교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손양원 목사님은

48세에, 한 많은 일생을, 하나님께 순교의 제물로 자신을 바치셨습니다.



◑손양원 목사님 고난의 생애의 의의


그런데 손양원 목사님의 생애는

우리가 인간적인 관점에서 볼 때는 정말 파란만장한 생애였습니다.


그 분은 태어날 때부터 가난한 농사군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학교를 가려고 했지만, 학비가 없었습니다.

어려서부터 안 해 본 일이 없었습니다. 어려서부터 신문배달, 우유배달, 만두 판매,

그렇게 돈을 벌어서 야간 학교에 다녔습니다.


그리고 아내 정양순 사모와 결혼 후에는

애양원 나환자 촌에 찾아와서 나환자들과 일생을 같이 하셨습니다.


그렇게 손목사님은, 나환자들과 같이 하시다가

39세 나이에, 신사참배 반대로 감옥으로 끌려들어가서,

여수경찰서-광주구치소-광주형무소-경성구금소-청주구금소를 전전하셨습니다.

815해방까지 약 5년간 복역하시다가, 해방을 맞이해서 드디어 출소할 수 있었습니다.


만약 815해방이 없었더라면, 감옥 안에서 돌아가셨을 것입니다.

종신형을 언도 받았지 않았습니까.


▲1945년, 815해방으로 세상에 나오신 후, 약 5년을 애양원에서 지내셨습니다.

그러다가 이제 다시 행복하게 사는가 싶었는데,

1948년, 여순반란 사건의 여파로,

동인 동신 두 아들의 죽음을 뜻밖에 맞이해야 했습니다.


손목사님은, 이것을 믿음으로 이겨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손목사님은, 자신마저 순교의 재물로 기꺼이 하나님 앞에 드리셨습니다.


나는 이런 사실들을 모아서, 책을 만들었습니다.

<손양원 목사 옥중 목회>라는 책에.. 손목사님의 감옥에서 있었던 일들을 모아서 책으로 만들었고요,

<나의 아버지 손양원 목사> 라는 책에.. 손목사님의 마지막 순교에 관련된 기록들을

모아서 책으로 엮었습니다.


※손목사님이 순교하시기 직전 15일 동안에, 귀한 간증이 많은데,

그것은 오늘 간증에서 시간 관계상 생략했으니,

이 내용은 <나의 아버지 손양원 목사> 라는 책을 참조해 보시기 바랍니다.

 

     <나의 아버지 손양원 목사> 책은

     제일 먼저 영어로 번역되었고,

     그 다음에 일본어, 독일어, 핀란드어, 미얀마어, 브라질어로 번역을 마쳤고,

     지금은 스페인어로 번역 중에 있습니다.

 

저는 나름대로 한때 얼마나 아버지 손목사님을 원망 하였던지요...

‘왜 아버님은, 자기 처자식은 조금도 생각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신의 신앙만 고수하기를 그토록 애쓰셨는지...’


그로인해 우리 가족이 받아야 했던 고통 때문에...

당시 십대 학생이던 저 손동희 권사는, 아버지 손목사님을 무척 많이 원망했더랬습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니, 내가 그 이유를 알았습니다.

손 목사님은 감옥에 들어가실 때, 그 부친 손종일 장로께서 주신 성경구절을 꼭 쥐고 있었습니다.


그 성경구절은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자기 목숨을 얻으려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마10:37~39

이 말씀을 손목사님은 끝까지 붙들고 계셨던 것입니다.


저는 한때 ‘하나님은 없어! 하나님은 없어!’ 하면서, 얼마나 하나님을 원망 하였던지요..

한때 신앙적으로 방황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시대의 역사의 진상은, 어지러운 그 시대에는 잘 모릅니다.

많은 세월이 흘러가서, 지나간 날들을 되돌아볼 때,

그 때 역사의 진실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저는 이제야 깨달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우리 가정을 이렇게 하셨는지...

왜 두 오빠를 죽게 하시고,

아버님마저 순교케 하시고,

남은 우리 가족들 고생시키신 것...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을 점을 딱 찍으시고,

하나의 믿음의 표본을 만드시려고, 믿음의 모델을 만드시려고,

하나님이 그렇게 섭리하신 것을.. 뒤늦게나마 깨달았습니다.


주기철 목사님, 손양원 목사님

지금 우리 한국교회의 믿음의 모델이 되고 있습니다. 장기려 장로, 김용기 장로와 함께!

(성공주의와 목회자의 출세를 추구하는 모델이 나오거나, 따라가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밭에 씨를 심어보면 압니다.

흙속에 들어간 씨는, 그 씨가 반드시 죽어야만 그 결실의 열매가

30배, 60배, 백배를 맺습니다.

그 백배의 씨 각각이 또 30, 60, 백배를 맺으면.. 나중에는 천배, 만 배의 열매도 맺겠지요.


우리 두 오빠와 아버님, 또 많은 순교자들,

그들은 죽은 것 같지만, 죽은 것이 아닙니다.

그들 시신 안에는 한 알의 씨앗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 씨는 지금 싹이 나고, 움이 터서 많은 열매를 맺었습니다.

무수한 영혼을 깨우치는 한 알의 믿음의 표본이 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나타내시기 위해서, 그렇게 하셨다는 사실..

제가 뒤늦게나마 깨달았습니다.



◑후기


▲동인 동신을 죽인 OOO(본명 안OO)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1979년에, 양자 삼았던 OOO은, 죽기 15일 전에 저 손동희 권사를 찾아왔습니다.

그때 이미 병원에서 후두암이라는 사형선고를 받은 이후였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저를 찾아왔습니다.


그동안 아버님은 자기를 용서했지만,

나 손권사는 자기를 용서하지 못한 것을.. 그는 마음에 늘 부담 갖고 있었습니다.

제가 얼마나 자기를 증오하고 미워하는지도.. 자기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이제 자기가 죽어가면서, 인생의 마지막 날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때에,

저희 집으로 저를 찾아왔습니다.


그 힘없는 몸을 이끌고 간신히 저희 집으로 찾아와서,

제 방문을 열자마자, 쏜살같이 제게 다가오더니,

제 손을 붙들고 통곡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날 우리 두 사람은, 서로를 붙들고, 얼마나 슬피 목 놓아 울었던지요...


내 한 평생, 내 가슴에 이렇게 대못을 박았던 자가,

이렇게 마지막에 죽어가면서 울고 있었습니다.

그 빼빼마른 모습으로 제 앞에 와서 우는데,

저는 옛날의 그 아픈 기억들이 다시 확 되살아나는 것 같았습니다.


이때 나는 그가 얼마나 불쌍해 보이는지요...

미운 마음은 손톱만큼도 없었고, 그렇게 평생 미워했던 사람이,

이제는 불쌍한 사람으로 변해버렸습니다.

모든 것을 용서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자기가 마지막으로 용서를 구하러 온 것입니다.

제가 자기를 용서 못하는 것을 알고서, 일부러 찾아온 것입니다.

제 한을 마지막으로 풀어주려고 온 것입니다.


제가 오래도록 그를 얼마나 미워했던지..

저는 여고시절에, 길거리를 다니면서도 그에게 혼잣말로 저주를 퍼부었습니다.


‘네 이놈, 왜 내 두 오빠를 죽였어?

내 두 오빠를 살려내든지.. 아니면 네 놈이 자살해!

아버님도 두 오빠 죽고 나니까, 정신이 홀딱 나간게지,

어떻게 저런 놈을 양아들 삼겠다고...

저 놈은 가장 뜨거운 지옥으로 가야 내 속이 후련하지...’


그러나 오늘은, 자기가 죽음을 얼마 앞두고, 제게 와서 우는 모습은,

두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불쌍했습니다.

모든 것을 용서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용서해서 보내야지요...


사람은 누구나 죽음 직전에는 진실을 말하는 법이죠.

그가 마지막에 돌아가면서 제게 남긴 말이

‘동희야, 나는 지금 집에 돌아가며는 얼마 후에 천국에 간다.

내 죽어서 천국가면, 네 두 오빠께 무릎 꿇고 사죄하겠다.’

그리고 집에 돌아가서는, 정말 15일 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OOO의 아들이 목회자가 되었습니다.

자기 자식들이 2남2녀가 있는데,

큰 아들 안경선이 목회자가 되었습니다.


조선일보에 ‘내 아버지는 성자의 두 아들을 죽였습니다!’라는 큰 제목으로

신문 한 페이지가 통째로 다 나왔습니다. → 내 아버지는 聖者의 두 아들을 죽였습니다


안경선 목사는, 인터뷰하자고

기자가 한 번 찾아가도 거절, 두 번째 가도 거절,

세 번째도 거절, ... 결국 일곱 번째 요청 만에 할 수 없이 일간지에 인터뷰도 하고,

기독교TV에도 나 손권사와 같이 출현한 적도 있습니다.

그도 나중에야 그 사실을 알고서, 큰 쇼크를 받았다고 합니다.


▲마치는 말

지금 저 하늘나라에서는 아버님 손양원 목사님,

나의 두 오빠 손동인과 손동신

그리고 OOO오빠 모두가

이 시간에 간증하는 제 모습을 지켜보면서,

우리 여호와 하나님을 영원히 찬양하고 있을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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