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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없음/2011

손양원 목사님, 신사참배 반대와 그 고난

LNCK 2011. 5. 31. 11:23

◈손양원 목사님, 신사참배 반대와 그 고난      마10:37~39        11.03.24.

                                                                                   손동희 권사 간증 녹취(1/3) 1'~36'

 

◑초기 애양원에서


(시작 기도)

앞서 가신 순교자들은, 환란을 당할 때, 오히려 감사하는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저희도 그와 같은 신앙을 배우게 하여 주시옵소서...


▲다함께 마10:37~39절을 읽겠습니다.

이 구절은 저희 아버님(이하 손양원 목사)이 신사참배 반대로,

일본 경찰에 붙잡혀 감옥으로 들어가실 때,

저희 할아버님이, 손양원 목사님의 등 뒤에다 대고서,

꼭 이 말씀을 기억하라고, 주신 말씀입니다.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마10:37~39


▲애양원에서 나환자들을 지극히 사랑했던 손양원 목사

하나님께서 손양원 목사를 통하여 대역사를 이루신 곳은

여수 애양원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애양원은 여수와 순천 사이에 있는, 나환자 수용원입니다.  *한센병 환자


그 당시 애양원에는, 약 1천명이 넘는 나환자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1939년에 손양원 목사는 이곳에, 먼저 전도사로 부임했습니다.


애양원에 가시기 이전에는, 부산 감만동의 나환자촌에서 섬기시다가,

여수 애양원에 전도사로 부임해 가셨습니다.


손양원 목사는 나환자 성도들을 아주 사랑했습니다.

요즘 나환자들은, 치료를 잘 해서, 그래도 깨끗합니다만,

그 당시 그분들은, 외모가 보기에 끔찍한 분들도 꽤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환자 숫자도, 지금보다 훨씬 더 많았던 것 같습니다.


애양원에는 특별히 14호실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중증 나환자들을 수용하고 있었는데,

일반인들이 거기 문을 열어보면, 그 흉한 몰골을 보고, 깜짝 놀랄 정도입니다.

손양원 목사는, 거기 14호실을 특별히 자주 방문해서, 환우들을 늘 위로했습니다.


나환자들에게는 특별히 사랑이 필요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세상 사람들에게 받는 소외감, 부모 형제 처자식으로 받는 배척감..

이런 것들이 일반 사람들보다 훨씬 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애양원 나환자들을 위해서 손양원 목사님이 쓴 기도시가 있습니다.

이 기도詩를 보면, 손양원 목사가 환우들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 중 앞부분을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오, 주님, 나는 이들을 사랑하되

내 부모, 형제, 처자보다 더 사랑하게 하여 주옵소서.

 

이들은 세상에서 버림당한 자들이옵고,

부모, 형제, 사랑에서 떠난 자들이었고,

세상 모든 인간들이 다 싫어하여 꺼리는 사람들이오나,

그래도 나는 이들을 진정으로 사랑하게 하여 주옵소서.


만일 내 몸이 저들과 같이 추한 지경에 빠질지라도

(계속 저들을) 사랑하게 하여 주옵소서.

만약 저들이 나를 싫어하여 나를 배반할지라도

나는 여전히 저들을 사랑하여, 종말까지 싫어버리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만일 내가 여기서 쫓겨남을 당하여 나가게 될지라도,

나는 이들을 사랑하여, 쫓겨난 그대로, 남은 세월을

이들을 위하여 기도할 수 있는 참다운 사랑을 나에게 주옵소서.


▲애양원은 한동안 천국이었습니다.

1939년에 애양원에 부임하신 이후로, 시간이 흘러가면서,

손양원 목사와 나환우들 사이에는, 정말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사랑으로 계속 이어져 갔습니다.


그때부터 애양원에는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하루 종일, 여기저기서, 찬송소리, 기도소리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런 평화로운 세월이 흐르고 있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신사참배 반대로.. 손양원 목사는 투옥되었습니다.

1940년 9월 25일이었습니다.

이날 밤에, 느닷없이 일본 형사 두 사람이 나타나더니,

손양원 목사의 손에 수갑을 채워서, 끌고 가 버렸습니다.

끌려간 죄목은 <신사참배 반대>이었습니다.


신사참배는, 십계명 중에서, 제1계명과 제2계명을 어기는,

우상숭배의 죄였습니다.

당시는 일제시대 말기였습니다.


신사참배는, 우리가 지금 막연히 생각하는 그 이상으로,

바로 생명과 직결되는 문제였습니다.

신사shinto shrine에 절을 하지 않는 성도들은,

전부 붙잡아서 감옥에 투옥시켰습니다.


감옥에서는, 계속적으로 그 옥중성도들에게, 고문을 가했습니다.

그바람에 얼마나 많은 순교자들이 피를 흘리고 죽어갔는지요..


우리가 하나님을 절대 신으로 인정하는 만큼,

일본 제국주의자들도, 천황을 절대 신으로 믿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천황에게 절하지 않는 기독교 성도들을.. 극렬히 미워했습니다.


이 신사참배 문제 때문에, 문을 닫은 교회가 하나, 둘이 아니었고,

손양원 목사가 다녔던, 평양신학교도, 폐교조치를 당했습니다.


▲신사참배 반대로, 애양원 환우들도, 방황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손양원 목사는 그날부터 옥중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애양원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나환자들은 모두 목자 잃은 양떼가 되어서, 갈팡질팡 하며,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애양원에는 새로운 원장이 부임했는데, 일본인 ‘안도’라는 사람이었습니다.

새 원장은, 애양원에 신사참배 바람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만일 신사참배를 안 하려면, 나환자들은 애양원을 떠나라고 다그쳤습니다.


그러니 어떡합니까?

나환자들은 애양원을 떠나면, 그 몰골로 나가봐야

거지생활하기도 너무 힘든 시절이었습니다.

사회에서 나환자들을 무조건 배척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래도 나환자들 몇 명은, 자기들의 신앙의 절개를 지키기 위해서,

신사참배를 안 하고, 애양원을 뛰쳐나왔습니다.


그래서 저 하동군 옥정면 북방리 산속에 움막을 쳐 놓고, 거기에 기거하면서,

바가지를 들고, 이집 저집 구걸하면서 생계를 유지해 나갔습니다.

그러면서 신앙의 절개를 지켜나갔습니다.



◑부산으로 오다


▲우리 가족도 애양원에서 쫓겨나서 부산으로 이사오게 되었습니다.

안도 원장은, 애양원에 들어오자마자, 원장 사택을 비우라고 독촉했습니다.

우리 가족은, 그동안 정들었던 애양원을, 울면서 쫓겨 나왔습니다.

그리고 부산 범내골 산꼭대기 하꼬방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지금 아버님 손양원 목사가 감옥에 가 계시고,

남은 가족들에게 가장 급한 일은, <먹고 사는 생계 문제>였습니다.


당시에 저희는 7식구였습니다.

첫째 아들 동인은 18살, 둘째 아들 동신은 13살,

손동희 권사는 8살, 두 살 아래 막내 여동생, 또 막내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손동인, 손동신 두 아들이 간신히 찾아낸 일거리는,

통공장에서 노동을 하는 일이었습니다.

나뭇조각을 붙여서, 물통이나, 들통을 만드는 곳이었습니다. 요즘은 플라스틱 통이 나와서 사라졌죠.


그 공장에 어린 동인, 동신 두 아들이 취직해서, 밤늦게까지 일을 했습니다.

어머니는 산으로 들로 다니면서, 쑥과 산나물을 뜯어오는 일을 했습니다.


     아버님이 투옥되신 후에,

     이렇게 우리 가족은, 부산으로 쫓겨와서 얼마나 고생이 많았던지요..

     살림은 찢어지게 가난했고...

     그런데 그보다 더 힘든 것은, 감옥에서 고생하고 계실 아버님에 대한 우리의 염려였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힘들어 할 때면,

     아버님 손목사가 감옥에서 보낸 편지가 가끔씩 집으로 도착했습니다.


▲당시 손양원 목사께서 저희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 일부를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이 편지는, 손목사께서 아버님(저희 할아버지)께 쓰신 편지입니다.


아버님, 불효자 양원을 위하여, 조금도 염려하지 마옵소서.

한 덩어리의 주먹밥, 한 잔의 소금국,

그 진미는 그야말로 천상의 떡맛이올시다.


아버님은, 엄동설한 추위를 염려하시나

들의 백합화를 곱게 키우시고, 공중의 새를 먹이시는 우리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이요, 일하는 일꾼.. 밥 아니 먹이시겠습니까.


소자는 본래 양이 적은 사람이니, 이 밥도 만족하옵고,

또 키가 적은 사람이오니, 이 적은 이불이 내 발등을 덮었으니,

이만하면 만족이외다.


밤이 지나면 낮이 오고, 추운 겨울이 지나면 따뜻한 봄이 오는 것이오니

광명한 낮을 맞이하기 위하여, 어두운 밤을 겪지 않을 수 없고,

‘양촌가지’를 위하여, 엄동설한의 고생을 참고 견디지 않을 수 없겠지요.

                                                                          *빛 잘 드는(양) 시골 의 봄의 나뭇가지?

고난은 참으로 복입니다. 꿀같이 달게 받으사이다.

참고 견디기만 하면, 이보다 더 큰 복은 없는 법입니다.

 

불평이 많은 자는, 천하를 다 얻어도, 오히려 불평 할 것이고,

자족을 느끼는 자는, 한 줌의 밥과 한 잔의 물에도, 자족의 기쁨이 있으니

그러므로 모든 염려를 주께 맡기고, 범사에 기뻐하며 항상 즐거워하사이다.


근심은 만병의 근원이며, 즐거움은 백병의 양약이외다.

구름이 올라가면 비를 이루고, 이슬이 맺히면 서리가 되는 것처럼,

육신의 생각은 근심을 이루고, 근심이 맺히면 병이 되나니,

인생은 이것을 깨닫지 못하더이다...


이 외에도 손양원 목사께서 감옥에서 쓰신 편지가 지금까지 많이 남아있습니다.

그 편지 중에 가장 많이 언급하신 대목은,

우리 형제간은(3남 3녀) 일제시대 때, 신사참배를 거부하기 위해, 학교를 포기했습니다.

부모님이 우리 자녀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아버지 손양원 목사의 마음에 걸리신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편지마다 ‘학교에 못 가는 대신에, 독학을 하라.

너희들도 공장에 갔다 오면, 고단하겠지만, 틈틈이 책을 읽어라.’

그런 당부의 말씀이, 편지가 올 때마다 항상 적혀 있었습니다.


그래서 두 아들, 손동인, 동신은, 아버지 손양원 목사의 당부대로

공장에 갔다 오면 밤늦게까지 책을 읽는 모습을.. 제 손동희 권사가 보았습니다. 


그리고 두 여동생도 학교를 못 다니니까,

손동인 오빠가, 두 여동생에게 한글을 가르쳤습니다.


▲부산 범내골에서 살 때, 손양원 목사께서 큰 아들 손동인에게 보내신 편지입니다.


사랑하는 동인에게,

동인아, 아버지를 생각하며, 눈물로써 쓴 너의 편지,

(나) 또한 감격의 눈물로써 애독하였다.


아버지를 대신하여, 위로 할아버님, 어머님,

아래로 동생들을 거느리고,

가정의 중한 책임에, 연약한 어깨는 얼마나 무거우냐?


나의 간절한 부탁은, 할아버지를 잘 위로하여,

아버지가 못한 일을, 너는 잘 할 줄 안다.

먹고 입는 것이 귀해졌다 하여, 마음까지 잃지 않아야 하고,

음식을 잘 먹는 것보다, 마음을 잘 먹는 것이 더 낫고,

의복으로 몸을 단장하는 것보다, 선행을 옷 입듯 할지니라.


돈에 설움 당하고, 먹을 것이 없다하여, 돈과 밥을 더 가까이 할 것이 아니라,

더욱더 청렴을 따르는 것이, 도인의 태도니라.


평상시에는 누가 기뻐 안 하겠나?

고난 중에 기뻐함이 신앙생활이다.

고난을 피하려고 하지 말고, 도리어 감수하고 극복하라.


피하려고 애쓰는 자는 근심이 더해지고,

감수하는 자는, 진리 발견의 기쁨이 충만해지나니

고난을 감수하니 심중이 낙원이고, 만사를 극복하니 용사보다 더 강하구나.


지식에 대하여는, 비록 학교에 안 다녀도 얼마든지 배울 수 있느니라.

세계 대 부흥사 무디 선생도 '양화' 공장 직공이었고,                   *서양구두

웅덩이에 내다버린 요셉이, 애굽의 총리대신이 될줄이야 누가 알았으며,

나일 강물 갈대밭에 내다버린 모세가, 이스라엘의 구주가 될 줄이야 누가 알았겠느냐.


통 공장에 다니는 우리 동인이 동신이의 장래도

어떻게 될지 그 누가 알겠느냐?


그러므로 항상 근신하고 노력하여, 학식과 덕행에 힘쓰도록 하여라.

또한 죄를 범하지 말라. 사람이 죄를 범하면 죄의 종이 되어, 일생을 고통으로 살게 되느니라.


나는 무엇보다 너희들이 행여나 죄를 범할까봐, 늘 가슴에 염려된다.

행여나 마귀의 세력에 유혹될까, 아버지는 늘 생각하지 않을 수 없구나.


나는 지금 이와 같이 수금 중에 있어도

어릴 적부터 주의하지 않았던 습관과 죄악과 싸우고 있다.

행여나 내 죄가, 너희들에게까지 미칠까, 주님께 간절히 빈다.

 

죄는 곧 사망이니라.

싸우지 않으면 승리가 없고, 이기지 못한 자는 면류관도 없나니,

힘쓰는 자는, 주께서 도와 승리하게 하신다.


이렇게 손양원 목사는, 감옥에서 온갖 고생하고 계셨고,

자녀들은 자녀들대로, 생계를 꾸리느라 정말 고생하며 살았습니다.

참 이런 저런 세월이 어느 듯, 3년이 훌쩍 지나갔습니다...



◑3년 수감 후에, 안타까운 재수감


▲1943년 5월 17일, 출소일이 다가왔습니다.

손양원 목사가 애양원에서 밤중에 체포되어 집을 떠난 지, 3년이 차 갔습니다.

이 날은, 손 목사가 3년의 형기를 마치고, 출소가 예정된 날이었습니다.

저희 온 가족은, 이날을 얼마나 손꼽아 기다렸는지요...


손양원 목사도 이날을 손꼽아 기다려왔습니다.

이날 아침에, 저희 집 분위기는 떠들썩했습니다.


사모 아내는 너무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하였습니다.

그때 아내 사모는 36세 나이였습니다.


사모님은, 손목사님이 갈아입을 옷도 챙기시고,

자녀들에게도 깨끗한 옷으로 다 갈아입혔습니다.


이제 식구 모두는 서로 손을 맞잡고,

광주 형무소 정문 앞으로 갔습니다.

아버지 손양원 목사님이 나오기를, 눈이 빠지게 기다렸습니다.


배는 고프고, 목은 말랐지만,

아버지를 만난다는 그 생각 때문에,

배고픈 줄도 모르고, 하염없이 형무소 정문 앞에서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아무리 기다려도, 아버지 손목사님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5월17일은, 분명히 출소일이 맞았습니다.

출소를 약 1달 앞두고, 아내 사모님이 면회를 가려고 하자,

아버지는 편지에 ‘이제 곧 한 달 후면, 출소할 터인데, 뭐하러 먼 길을 면회 오느냐?

내가 출소하면 그때 반가히 보자’ 하시며, 아내의 면회를 못 오게 했습니다.

이 편지를 보면, 아버지 손목사도, 출소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하루 해가 기울고, 사방이 다 캄캄해지도록, 감옥 문은 열리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기다려도 아버지 손목사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날 우리는 집으로 돌아와서, 부산 범내골 산꼭대기 낡은 하꼬방에서

서로를 붙잡고 슬퍼서 한참 울었던 기억은.. 참 그때 우리는 너무 절망했습니다.


자녀들은 ‘아버지는 바보야’ 하여 울었습니다.

그냥 고개 한 번 숙이기로 하면,

우리도 남들처럼 행복하게, 온가족이 함께 오순도순 잘 살 수 있을 터인데..,

‘우리 아버지는 바보야!’ 하며, 저 손동의 (권사)는 고함치며 울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이 이 날에 출소하지 못한 이유를, 나중에 알게 되었습니다.

일본 간수들도, 손목사를 5월 17일에 출소시키려고, 다 작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5월 17일을 며칠 앞두고, 마지막 심사가 있었습니다.

 

‘손양원 목사, 그동안 고생 많았소.

이제 집 떠난 지 3년이 찼는데, 그동안 얼마나 처자식이 보고 싶었겠소?

그런데 3년이란 감옥 생활 동안에 많은 반성도 했을 터인데,

이제는 신사참배를 할 수 있겠지요?

그동안 감옥에서 지내느라 공연히 헛수고만 했소!’

 

그러자 손양원 목사는 이렇게 의연하게 대답했습니다.


‘헛수고는 오히려 당신들이 했소.

내가 신사참배를 했으면, 아예 처음부터 했지,

왜 어리석게 3년이나 고생 실컷 한 다음에, 이제 내가 신사참배를 하겠소?


내 신앙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소.

돌이킬 마음, 전혀 없소이다.


과거 역사를 보면, 우상숭배를 한 나라는 다 망했다.

그러니 일본도 멀지 않아 다 망할 것이다!’


손목사님은 평소에 성품이 대쪽 같았습니다.

자기 목에 칼이 겨누어져도, 바른 말을 직선적으로 해 버리는 성품이었습니다.


당시 1943년은, 한참 일본이 태평양전쟁에 열중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런데 ‘우상 숭배하는 나라 일본은 망할 것이다!’ 라고 고함을 질렀으니,

이 말은 들은 일본 간수들은, 약이 오를 대로 올랐습니다.


그래서 손양원 목사의 신사참배 문제를 놓고, 다시 재판이 열렸습니다.

그 재판 결과는, <종신형>이었습니다.

      

그 ‘종신형 언도 판결문’을 읽어보니, 대충 이런 이유가 적혀 있었습니다.

‘저 손 목사는, 출소하면, 다시 신사참배 반대운동에 힘쓸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저 손 목사만큼은, 절대 출소시키면 안 될 것이다.’


여러분, 말이 쉬워 보이지만, 종신형 판결을 받은 당사자와, 그 가족의 심정은 어떻겠습니까.

종신형 판결문을 받아든 손양원 목사는, 두 눈에서 눈물이 주루룩 흘렀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네 좋습니다. 나는 감옥에 있어도, 예수님과 함께 살 것이고,

밖에 나가도 예수님과 함께 살 것인데,

예수님과 함께 라면, 어딘들 상관없습니다.


기독교 신앙이란.. 고난을 통해서 더욱 단련되니,

나를 감옥에 가두면, 나에게 유익이요, 내게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아버님 손양원 목사의 신앙에는 <고난의 신앙>이 있었습니다.

‘고난은 신앙생활의 필수조건 중 한가지입니다.

고난 없이는 절대로 신앙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습니다.’

- 이것이 손목사님이 평소에 강조하신 ‘고난의 신앙’이었습니다.


지금 우리도 이것을 경험하잖아요. 저 손권사도 경험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평안하고 평탄할 때.. 기도를 잘 안 하게 됩니다.

사람마다 누구나 살아가자면, 역경에 부딪히고 고난에 부딪힙니다.

 

그 역경에 부딪힐 때마다, 우리는 그 역경에 빠져서 허우적대지 말고,

그 역경 속에 숨어 있는, 하나님의 섭리를 찾아내야 합니다.

‘주님은, 왜 이런 역경을 내게 주시나?’


생전 새벽기도 안 하던 사람도, 역경을 만나면,

새벽기도에 나가서, 그것도 맨 앞자리에 앉아서 부르짖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조용조용 기도해도, 울며 불며 기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들은 무슨 큰 고난을 당한 사람입니다.

 

손양원 목사가, 역경을 이길 수 있었던 힘이, 거기 고난에서 나온 것 같습니다.

고난을 통해서, 손양원 목사는.. 오히려 믿음이 더 강인해 졌습니다.

그 강건해진 믿음이, 또한 말할 수 없는 고난 속에서

손목사가 고난을 이겨내게 했습니다. 말하자면 고난의 선순환입니다.


오늘 우리들은, 신앙의 선배들의 이런 <고난의 신앙>을 본받아야 하겠습니다.


▲청주 구금소에서

아버님 손목사님이 처음으로 감옥에 끌려가실 때는, 39세이었습니다.

거기서 이 감옥, 저 감옥으로 5번이나 옮겨 다니셨는데,

그 중에 가장 고생이 많았던 곳은, 청주 구금소 생활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손목사의 주업은, 매일 재소자들을 전도하는 일이었습니다.

구금소 측은, 전도를 못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손목사님은 전도를 계속했습니다.


그래서 구금소에서 늘 성도들의 찬송소리, 기도소리가 울려 퍼지니

‘시끄러워 못 살겠다’는 불만이 이어졌습니다.

그래서 손목사는 독방에 배치되었고, 감식 처분이 내려졌습니다.


감식이란, 평소의 배식의 절반을 잘라서 주는 것인데, 밥 크기가 곶감만 했습니다.

안 그래도 작은 밥을, 또 반을 잘랐으니..

그걸 먹고는 살지도 못하고, 죽지도 못하는.. 그런 어중간한 분량이었습니다.


이때부터 손목사님은 영양실조에 걸렸습니다. 그로 인해 두 눈이 점점 멀어갔습니다.

저희 집에 오는 편지에 보면

‘여보, 나는 지금 눈이 점점 멀어가고 있소.

글씨를 제대로 쓰기도 힘드오...’ (당시에 편지의 글씨체가 삐뚤 했습니다.)


청주구금소에서 참 그런 고생을 겪으셨는데, 또 거기서 특히 고생스러웠던 것은,

독방 속에서 맞이하는 한겨울의 추위였습니다.

영하 10도를 밑도는 추위가 하루 이틀이 아니었고,

두꺼운 이불도 없었고, 불기도 없었습니다.


손발이 동상에 걸리고, 손톱 발톱 주위에 진물이 흘러나왔습니다.

거기에 독감까지 걸려서 사경을 해맸습니다.


청주구금소에서는, 손목사님은 걷지를 못했습니다.

구금소에서 가끔 조사를 받을 때가 있었는데,

그때도 걷지를 못해서, 들것에 실려가서, 조사를 받곤 했습니다.


한번은 손목사님이 실신해서, 까무러쳐 있었습니다.

아침에 간수가 순찰을 돌다가, 독방에 몸이 뻣뻣해 누워있는 손목사를 발견하고는,

얼어 죽은 줄 알고, 사람을 불러서 꺼냈습니다.


그런데 다른 곳으로 옮겨서 보니, 다음날 아침에, 손목사님이 눈을 뜨고 깨어났습니다.

‘아, 하나님이 나를 다시 살려 주셨구나!’


손목사는 침상에 누운 채로 이 찬송을 불렀다고 합니다.

‘내 주를 가까이 하려 함은, 십자가 짐 같은 고생이나,

내 일생 소원은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


이러한 추운 겨울이 지나고, 다시 봄이 되었습니다.

손 목사의 양쪽 귀에는, 알 수 없는 진물이 줄줄 흘러나왔습니다.

 

이 청주구금소 독방 속에서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요...

 

이 독방 속에서 손양원 목사님이 기도하시며 쓰신 기도시가 있습니다...


빈 방을 홀로 지켜 고적을 느끼나

성 삼위 함께 하시니, 네 식구 되었구나.

갖가지 고난이여, 올 테면 다 오너라.

괴로운 중에, 내 주를 체험하리라.


여보, 나는 솔로몬의 부귀보다, 욥의 고난이 더 귀하고,

솔로몬의 지혜보다, 욥의 인내가 더 아름다워 보입니다.

솔로몬의 부귀와 지혜는, 타락의 매개가 되었으나,

욥의 고난과 인내는, 최후의 영화가 되었습니다.


죄악으로 얽힌 육체의 껍질은 벗어야 하겠고,

하나님 자녀로서의 연단은 마땅히 받아야 하는 것이며,

지상에서 두 번 돌아오지 못할 세상 고난의 맛은

하늘의 천사도 부러워합니다.


부귀영화의 뒤끝은 다시 섭섭하나

고난의 뒤는 위로와 기쁨이 다음 차례가 되는 법입니다.

하물며 주 안에서 고난은 진리가 아니리요


오 주님, 나에게 있는 부모 형제 처자 기타 모든 것을 다 빼앗아 갈지라도,

오직 당신만을 향한 신앙심만은 빼앗아가지 마옵소서.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릴지라도, 신앙만 남아있으면,

모든 것을 다 가진 자보다도, 더 유익한 것이외다.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다


▲장남 손동인에게 군대 징집영장이 나왔습니다.

그때는 태평양전쟁 말기에, 일제가 한참 밀릴 때였습니다. (1944년 경, 해방 1년 전)

그래서 군 문제가 아주 엄격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일본은, ‘내선일체’를 주장하며, 조선청년들도 일본군에 내보냈습니다.


우리 가족이 두려워했던 것은,

일본 군대에서 매일 아침마다 시행하는 ‘신사참배’였습니다.

군대에서 명령에 불복종하는 것은,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신사참배 문제로, 가장인 손목사님도 감옥에서 이렇게 고생하고 계시고,

자녀들도 신사참배 문제로, 학교에도 못 가고, 집에서 독학하고 있는데,

지금 장남이 군대에서 신사참배 문제로.. 불복하다가 만약 변고를 당한다면..

우리 가정에 이만 저만 고통이 아니었습니다. 가중되는 고통이었습니다.


그래서 할아버지와 온 가족은, 장남 동인 군의 군대 문제를 놓고 금식기도에 들어갔습니다.

금식기도의 마지막 날, 온 가족은, 하나님께로부터 똑같은 응답을 받았습니다.

그 응답은 ‘일곱 식구가 산산조각 흩어져 버리고, 가정을 없애버리기로’ 했습니다. 

동인 군만 어디로 숨으면, 남은 가족들도 많은 고초를 당할 것이 뻔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할아버지 (손목사의 부친)는,

만주 하얼빈에 친척 집으로 가셨습니다.


손목사의 사모와 장남 동인 군과 막내는,

남해도의 깊은 산골짜기에 있는 ‘금식기도실’이 있었는데,

거기로 가서 숨었습니다.


차남 동신 군은, 하동의 산속 움막에 

애양원 식구들이 거기에 피신하여, 신사참배를 피하고 있었는데,

거기로 갔습니다.


손동희 권사와 제 동생 손동장은,

부산 외곽 구포에 있는 애린원이란 고아원에 보내졌습니다.

그래서 남은 7식구 가족들이, 모두 뿔뿔이 흩어졌던 것이지요.


▲애린원 고아원 생활

당시 저 손동희 는, 12살이었고, 제 아래 동생 손동장은 저 보다 두 살 아래 였습니다.

하루는 큰 오빠 동인이, 우리 둘을 불러서 ‘너희들은 고아원에 가야 되겠다’고 했을 때,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내 부모가 엄연히 살아있는데, 왜 내가 고아원에 가야하나..’

 

어린 나이에, 고아원 생활을 감당하기가, 쉽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기 싫다고 막 버텼습니다. ‘엄마, 나 고아원에 안 갈래요..’


아무리 사정해도, 어머니는 아무 말씀도 안 하시고, 울고만 계었습니다.

결국 우리는 고아원에 가야만 했습니다.


다음 날 큰 오빠 동인은, 어디서 큰 자전거를 빌려와서,

저와 동생을 뒤에 태우고는,

부산 구포 외곽에 있는 <애린원>이란 고아원으로, 저희 2명을 데려다 놓았습니다.


당시에 애린원은, 한정교 목사님이 운영하고 계셨고

한정교 목사님은, 손양원 목사님과 평양신학교 동기동창이었습니다.


‘며칠 후에, 오빠가 다시 찾아올게’ 라고 말하고는,

오빠 동인은, 고아원을 떠나갔습니다. 저는 그 장면이 아직도 기억에 선합니다.


졸지에 고아가 된 우리는, 너무 힘들었습니다.

밤마다 엄마 생각, 오빠 생각이 나서.. 잠을 잘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고아원에 오자마자 이름도 바꾸었습니다.

저는 ‘희야’로, 동생은 ‘장은’이로..

그래서 우리가 손양원 목사의 가족인 것을, 아무도 모르게 했습니다.

손동인의 징집 거부로, 그 가족을 찾을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고아원에서 살다 보니,

신사참배 거부로, 일본 경찰에 쫓겨 다니던 목사님들이,

애린원에 와서 보름씩, 한 달씩 피신하고 가시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 애린원에는

평양의 주기철 목사님의 큰 아들 주영진, 3남 주영해도 거기에 와 있었습니다. 

                                                       *관련글/ 순교자와 남겨진 그 가족 이야기 

손동희 권사 는 거기서 밤마다 부모를 원망했습니다.

원망이 얼마나 쌓였든지, 나중에는 부모에 대한 미운 마음까지도 들었습니다.

처음에는 부모가 그리웠지만, 나중에는 원망으로 변했습니다.


‘도대체 하나님의 계명이 무엇이기에, 내 아버지는 감옥으로 들어가야 하며,

내 엄마와 오빠들과는 헤어져야 하나.

어째서 내 부모님은 별나게 예수를 믿어서, 우리를 이렇게 고아가 되게 하나.’


이렇게 부모를 원망하면서.. 그렇게 세월은 고아원에 온지

어언 1년이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