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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 평강, 생명, 경건

LNCK 2011. 6. 10. 14:56

◈은혜, 평강, 생명, 경건으로 살려면         벧후1:1~8       08.03.14.설교스크랩



2절, 앎으로 은혜와 평강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 지어다.” 벧후1:2


▲은혜와 평강이 어디서 오는가요?

위 본문은 ‘하나님과 주 예수를 앎으로 온다’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다 은혜를 사모하고 은혜 받기를 원하는데

정말 은혜 받기를 원한다면

하나님을 알기를 원해야 되고, 예수님을 알기를 원해야 합니다.


이것은 <지식적으로 앎>이 아니라, <관계적으로 앎>입니다.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물었습니다.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이 질문은 ‘지식적으로’ 물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관계적으로’ 대답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나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마22:37~39


‘하나님과 주 예수를 관계 속에서 아는 것’은

-하나님께 기도하며 교제하는 것을 뜻합니다.

-주님을 전심으로 사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때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 지어다.’ 는 당연한 결과입니다. 벧후1:2


▲지식이 필요하지만, 지식적 앎이 아닙니다.

-말씀을 단순히 듣는데서 은혜가 오는 것이 아니고

-성경과 신학을 많이 아는데서 은혜가 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인격적, 관계적으로 알아 갈 때 은혜가 오고, 평강이 오는 것입니다.


한국 교회에 만연되어 있는 것처럼 ‘말씀, 말씀’이 아닙니다.

한국 교회는 어떤 면에서 보면 ‘말씀’이 우상이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신 성령도 무시해 버리고 ‘말씀 말씀’ 하고 있습니다.

점점 교리주의자들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주장하는 배경에는,

기독교 신앙을 ‘신념체계 belief system’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학이 올바르면, 자기가 잘 믿는 줄로 착각합니다.


물론 신학이 올발라야 하지만,

그러나 꼭 그렇다고 믿음이 좋은 것은 아닙니다!


신앙생활하면서 제일 중요한 것은 지식적인 ‘말씀’이 아닙니다.

신앙생활하면서 제일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장의 에베소 교회에서 보여주신 것처럼

처음 사랑을 잃어버리면 끝나는 것입니다.

말씀이 얼마나 바르든, 얼마나 열심이 있든, 

능력과 기적이 나타나든, 얼마나 전도하든,

하나님과의 첫 사랑을 잃어버리면 그걸로 끝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과 우리는『관계』인 것입니다.

신앙의 타락은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가, 교제가 끊어진 것입니다.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인격적/관계적으로 예수님을 점점 깊이 알아가는 것입니다.  요17:3


 

이 말씀을, 태어나서 처음 듣는 말씀처럼 들으십시오.

처음 들을 때, 올바로 들으면.. 그것이 평생 지속됩니다.


그런데 처음 들을 때, 만약에 잘못 들으면,

올바른 가르침을 다시 들을 때는,

처음 듣고 배운 것을 허물고, 새로 지어야 하기 때문에,

몇 배로 힘이 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입에서 이 말씀이 떨어졌을 때

태어나서 그 자리에서 처음 이 말씀을 듣는 사람처럼 이 말씀을 들으십시오.


그래서 신앙은 그 사람이 얼마나 성경을 잘 아느냐가 아니고

그 사람이 얼마나 하나님을 잘 아느냐(사랑하느냐),

그 사람이 얼마나 주님께 가까이 가 있느냐... 거기에 비례하는 것입니다.


 

3절, 앎으로 생명과 경건


“그의 신기한 능력을, 생명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자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1:3


▲또 <앎으로> 입니다.

위 3절도 참 사모할만한 말씀 아닙니까?

우리가 애써도 안 되고, 힘써도 안 되고,

노력해도 안 되고, 울어도 안 되고, 참아도 안 되는데,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이것을 주시는 통로가 뭘까요?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자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1:3


2절에 이어, 3절에 반복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을 알 때 생명이 우리 속에 들어오고,

주님을 알 때 경건이 우리 속에 들어옵니다.

생명의 근원은 주님을 아는 것입니다.


‘생명’은 주님을 아는데 달려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데 생명이 달려 있습니다.


‘경건’이 어디 달려 있습니까?

지식적으로 주님을 알기 때문에 경건의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경건은 하나님을 알고 예수님을 아는데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실제로 하나님을 알고, 예수님을 알게 되면.. 경건하게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을 아는 것이 곧 ‘경건의 능력’입니다. 다시 말하면 '교제'입니다.

 


4절,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1:4


여기서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이 뭘까요?

문맥상, 예수 그리스도요,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을 뜻합니다.


이어지는 8절에도, ‘아는 것’이 (2절, 3절에 이어서) 또 나옵니다.

벧전1:8,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


지금 이 단락 벧전1:1~8절에서 사도 베드로가 서신의 첫머리부터 강조하는 것은,

예수님을 더욱 인격적/관계적으로 알아가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입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이것이 ‘구원에 이르도록 점점 자라가는’ 것입니다. 벧전2:2



5~7절,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벧후1:5~7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자유의지>가 하나 됨으로써 주님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알게 해 주시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자유의지>가 하나 됨으로써,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50:50이 아니라, 주도적 입장은 ‘하나님의 은혜’에 있다고 봅니다.

그걸 무시하고, 인간의 의지만 강조하는 것은 ‘도덕주의, 율법주의’에 빠지게 됩니다.)


여기 보니까 “더욱 힘써라”, “공급하라” 우리에게 하는 말씀입니다.

이런 삶을 살도록, 이런 성품의 소유자가 되도록 더욱 노력하라는 뜻입니다.


그래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게 된다.’ 1:8

그래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된다...는데, 이게 무슨 말씀일까요?


우리가 이런 삶을 살아야.. 주님과 교제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예수님을 내 구주로 믿어!’ - 이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전부가 아닙니다.


그건 ‘사고체계로 믿는’ 것입니다.

인격적 믿음, 참 믿음은.. 교제/관계/사랑에 있고요,

구체적으로 본문에서는, 7가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벧후1:5~7


그냥 믿음 하나만이, 충분하지 않고요,

믿음에.. 덕/지식/절제/인내/경건/형제우애/사랑의 7덕목을 더하랍니다.

※여기서 ‘경건 godliness’은, ‘하나님 같음’을 뜻합니다.


하나님과 교제관계, 사랑관계, 기도로 대화관계에 들어간 사람은,

‘크게, 부자 되게, 성공하게’ .. 이런 토픽으로 하나님과 논의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것에 크게 관심이 없으시거든요.


대신에 ‘덕/지식/절제/인내/경건/형제우애/사랑’ 등을 토픽으로 삼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런 것에 관심 많으시거든요.


그래서 바울도,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고 말씀했습니다.  딤후3:5


그냥 ‘네가 요3:16절과 마16:16절 주는 그리스도시오.. 믿는 것으로 족하다.’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베드로가 권면한대로

우리가 주님을 더 깊이 알게 되고,

1:3절에 기록된 대로 생명이 우리 속으로 밀려들어오는 것입니다.


생명을 얻되 더 풍성히 얻는 역사가 거기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요7:38

하나님의 생명이, 성령을 통해서 우리 안에 강물처럼 흐르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적용 : 그래서 생명력이 넘칠 때 


생명력이 넘치면.. 죄를 이기기 쉽습니다.

생명력이 넘치면 육체를 이기는 것도 쉽습니다.

생명력이 넘치면 세상을 이기는 것도 쉽습니다.

거기에서 경건의 능력이 우리에게 생기는 것입니다.


누가 금을 보고 동을 원하겠습니까? 누가 금을 보고서, 은이 더 좋다 하겠습니까?

정말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정말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될 때

우리는 예수님을 알면 알수록, 생명력이 넘치게 됨으로써  1:2, 3

다시 말하면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어서 1:4

하나님을 알면 알수록.. 더 이상 세상 것을 원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알면 알수록,

돈에 대해서 무심해질 것입니다.

명예와 쾌락에 대해서 무심해질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쳐다봤더니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했다.

그래서 따먹은 겁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집니다.

마귀의 유혹은.. 보기에 흉하지 않고, 찬란하고 아름답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억지로 참고, 자기 허벅지를 송곳으로 찌르는 것이 아니라,

내 속에서 ‘생명’이 넘쳐흘러야 하는 것입니다.


마귀가 예수님을 높은 산으로 이끌어 가서

세상의 부귀와 영화와 모든 좋은 것을 다 보여 줬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단호하게 그것을 물리쳤습니까?

예수님께는 그것이 먹음직하게 안 보이고, 탐스럽게 안 보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하나님을 깊이 알고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정한 아름다움과 영광과 위엄을 분명하게 알고 계시기 때문에,

마귀가 보여준 세상의 부귀영화, 공명을 보니까.. 다 시시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는 그런 것들이 초연한 것들이었습니다.


여러분, 경건한 삶이라는 것은 노력으로만 형성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근본 비결이 어디 있느냐? 오늘 성경 말씀이 밝히는 대로

하나님을 아는데 있고, 예수님을 아는데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고 호세아 선지자가 말한 것처럼

여호와를 아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도 말했습니다.

“지혜로운 자는 그 지혜를 자랑치 말라 용사는 그 용맹을 자랑치 말라

부자는 그 부함을 자랑치 말라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 예수를 알기 위해서

세상의 모든 것을 배설물같이 여기노라’고 했습니다. 빌3:8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더 깊이 알아야

우리 속에 흐르는 하나님의 생명이 넘쳐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깊이 알아야

우리가 돈에 대해서/ 명예에 대해서/ 쾌락에 대해서/

세상 것, 땅의 것에 대해서 초연해질 때,  무시가 아니라, 초연, 초월입니다.

내 여력을 집중하여 영혼들을 사랑하는데 집중하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자신을 헌신하는 삶을 집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역의 열매는.. 거기에 비례해서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어디에 달려 있느냐.. 주님을 얼마나 아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주님을 아는 만큼.. 생명이 그만큼 넘치게 되고..

그래야 세상과 자아를 그만큼 버리게 되고.. 벧후1:5~7

하나님 나라에 열매가 그만큼 드려지는 것입니다.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시고

영광스러운 교회를 세우는 것’ 엡5:26, 27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를 만드는 것이

성도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여러분, 성경을, 자기가 보고 싶은 구절만 골라서 보지 마십시오.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지.. 한 번 작심하고서 성경을 읽어 보십시오.


예수님을 깊이 알아감으로 말미암아

점점 경건의 능력으로 온전해지고

흠이 없이 거룩해져서 영광스러운 교회가 되는,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께 걸맞은, 예수님께 어울리는 신부가 될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말씀은 굉장히 귀중한 말씀인데

이 말씀을 붙잡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