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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의 타락과 회복

LNCK 2011. 6. 17. 14:21

 

◈땅의 타락과 회복          사32:15,  요14:23         10.11.09.설교녹취

 

성경 전체 개요를 한 눈에 볼 수 있습니다. <땅의 타락과 회복>의 관점에서! 

 

 

▲개요

‘죽은 땅’에는 하나님이 거하지 못하신다.

그 죽은 땅에 예수 그리스도가 부어지면,

비로소 그 땅이 하나님이 '거하실 수 있는 거처'가 된다.

즉, ‘약속의 땅’이 된다.

 

그 땅에서는, 인간이 죄를 지으면, 땅이 인간을 쫓아내 버린다.

그런 쫓겨난 인간을 회복시키는 것이.. 그리스도의 복음이다.

그들을 회복시켜서

하나님이 인간과 함께 거하실 수 있는 거처가 된 것이.. 신약의 교회요, 성도이다.

 

그래서 바울은, 성도를 가리켜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이라고 말했다.

이 표현(성전)도 <땅, 거처>와 같은 맥락으로서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이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 것, 신앙생활이란

‘죽은 땅’에서 → '하나님이 거하시는 땅'으로서.. 땅이 회복되는 것이다.

 

 

◑땅은 모든 생명체의 모체

 

▲왜 성경이 ‘죽은 흙’에서부터 출발하는가?

왜 ‘더러운 땅, 흙’에서 출발하는가?

 

죽은 흙에는, 거기에 하나님이 거하실 수 없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 생기가 부어져서, 그 '죽은 흙'이 하나님의 거처가 된다.

 

그런데 거기에서 ‘죽은 흙’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를 설명하기 위해서,

창세기에서 인간의 설명은 ‘죽은 흙’에서부터 시작된다.

 

생기가 부어지지 않으면, 절대 살 수 없는 ‘죽은 흙’.. 이것이 인간의 본래 모습이다.

 

▲땅은 생명의 모체

창조 때의 땅은, 세상 모든 생명체의 모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땅으로 하여금 풀과 채소와 씨를 가진 과목을 내라고 명하셨다. 창1:11~

 

땅이 마치 무슨 능력이 있는 것처럼, 생명을 출산할 능력이 있는 것처럼

그렇게 명령하셨다.

그리고 인간도 ‘흙’으로, ‘땅’으로 만드셨다. (짐승도 ‘흙, 땅’으로 만드셨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땅은, 하나님께서 모든 생명체를 만드신 모체이다.

마치 땅이 모든 생명체를 다스리고 정복하고 있는 근본이다.

 

▲그래서 ‘땅(흙)’인 인간이 타락하자,

그 근본 모체였던 ‘땅’도 함께 저주를 받았다.

 

땅이 뭘 잘못했는가?

땅은 인간의 ‘은유’이다.

그래서 인간이 타락해서 저주를 받자, 땅이 함께 저주를 받았다.

 

반대로 ‘땅이 회복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거하실 수 있는 거처로서의, 인간이 회복된다’는 것과 같다.

 

그런데 그게, ‘죽은 흙’에 하나님의 은혜, 생기가 부어짐으로써만 가능하다.

-이게 바로 복음이다.

 

▲땅이 회복되려면, 먼저 사람이 회복되어야 한다.

롬8장에 가면, 그렇게 피조물들이

이 ‘땅의 회복’을 기다리는 피조물들이 탄식하며 뭔가를 기다리는데,

땅(의 회복)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들의 회복을 기다린다.

 

롬8:19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20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피조물이 허무한 것에 왜 굴복하게 되었는가?

-땅이 저주를 받음으로 그렇게 굴복하게 되었다.

 

21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위 구절은, 땅의 회복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회복을 통해서 이루어질 것을

설명하고 있다.

 

이렇게 인간과 땅의 상관관계를 잘 이해하고 있어야,

성경의 많은 부분이 풀린다.

 

 

◑사람이 범죄하면, 땅에서 쫓겨난다. 땅이 사람을 대적한다.

 

▲타락 전에는, 땅과 인간이 서로 화목했다.

인간이 타락하기 전에는, 인간과 땅 사이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땅은.. 하나님의 창조하신 뜻에 따라서, 풍성한 열매를 내었다.

땅이 생명을 발생시켰다.

 

그러한 ‘인간과 땅의 조화’를 가장 잘 보여준 곳이.. 에덴이었다.

에덴은.. 하나님이 인간과 함께 사시는 곳이었고,

땅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피조물을 다스리는 인간에게,

         아무런 어려움을 제공하지 않았다.

땅은 인간의 편에 서 있었다.

 

▲그런데 타락한 후에는,

땅이 인간을 거부하고, 땅이 인간을 대적하는 편에 선다.

땅이 인간들을 토해 내어버리는 일이 발생한다.

땅과 인간의 분열이다.

 

‘땅, 흙’으로 지어진 인간이, 땅으로부터 공격을 당한다.

땅이 가시와 엉겅퀴를 냄으로써, 인간에게 반란을 일으킨다.

땅이 인간과 전투하는 형국이 되었다. (이게 타락한 인간이 처해진 삶의 환경이다.)

 

그렇게 해서, 땅이 인간의 다스림을 받던 그 질서가 깨지고,

땅이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가시와 엉겅퀴를 내고,

인간들은 수고를 하고 땀을 흘려야 겨우 소산을 먹을 수 있는

그런 고통 속에 던져지게 되었다.

 

땅과 인간의 분열로 말미암아

아픔과 슬픔과 고통이, 이 땅에 오게 되었다.

- 이게 회복 되어야 한다. (그 회복이 구원이요, 복음이다.)

 

▲가인의 예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였을 때,

‘땅’이 그 살인자를 하나님께 고발한다.

‘땅’이 아벨의 피를, 품었다가, 증거로 고발한다.

땅이 철저히 인간을 대적하는 모습이다.

 

창4:10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11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12 네가 밭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땅은 죄를 지은 인간에게 효력을 내지 않는다. 12 네가 밭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땅은 죄인인 인간을 배척한다.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그래서 가인(죄인)은, 땅에서 떠돌아다닐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리고 땅은 두려움과 무서움의 장이 되고 말았다.  주1)

 

▲사람이 심판 받을 때, 땅도 함께 (홍수로) 심판 받았다.

 

창6;11 때에 온 땅이 하나님 앞에 패괴하여 강포가 땅에 충만한지라.

 

12 하나님이 보신즉 땅이 패괴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패괴함이었더라.

 

13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강포가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 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죄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

 

아담과 가인과 마찬가지로

노아 때도

사람이 범죄하였는데,  6:13

땅이 패역하였다고 말씀하신다. 6:12

 

그래서 하나님은, 홍수를 통해 ‘땅’을 멸망시켜 버리셨다.

(바다와 그 가운데 어족은, 멸망당하지 않았다.)

 

     땅의 기원은, 에덴이었다.

     그곳은 하나님과 인간이 함께 거하는 곳이었다.

 

     그러나 그게 안 될 때,

     하나님이 그 땅에서 떠나버리시고,

     그 땅은 죽은 땅이 되어서, 땅이 인간에게 공격을 해 온다.

 

▲사람이 범죄해서 하나님이 그를 떠나시면.. 그 흙(인간)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래서 하나님 없는 인간은 원래 ‘더러운 흙’이요, ‘똥무더기’였다. 삼상2:8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의 목적을

‘땅, 흙’인 인간이 하나님과 더 가까이 하고, 더 하나님을 모셔야 하는데 목적 삼지 않고,

그런 것에는 관심 없고,

‘땅’을 더 아름답게 꾸미고, ‘거름더미’위에 향수 칠하는데 관심을 기울인다.

 

하나님이 멀리 떠나시면, 함께 해 주시지 않으시면..다 더러운 흙이요, 똥인데..

 

 

◑약속의 땅

 

노아의 홍수로 심판 받은 땅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해, ‘약속의 땅’을 보여주셨다.

구원은.. 다른 말로 ‘땅의 회복’이다.

 

▲‘약속의 땅’을 약속 받다.

그 생명이 존재할 수 없는 죽은 땅에, 새 땅이 약속 된다. 

그게 약속의 땅, 가나안이다.

 

그곳에서는,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키고,

(다른 말로, 선악과 시험을 잘 치러내면)

하나님과 함께 거하면서

젖과 꿀의 풍요를 누리면서 살 수 있는, 그런 땅이었다.

 

가나안 땅을 정탐하러 들어갔을 때,

장정 두 사람이, 큰 포도송이를 막대기에 꿰어서 가져온다.

어떻게 그때, 그런 어마어마하게 큰 포도송이가 있었을까?

 

이것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선악과 시험만 통과하면, (언약을 잘 지키면)

땅이 그들에게 상상할 수없는 풍요를 낸다는 것을.. 모형으로 보여주신 것이다.

 

'약속의 땅'이란,

선악과만 안 먹으면,

생명나무 실과를 먹으면서 (창세기적으로 표현한 것임)

내가 너희와 함께 영원히 거할 것이다.. 라는 ‘약속의 땅’이었다.  promised land

 

     신8:1 내가 오늘날 명하는 모든 명령을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고 번성하고

       여호와께서 너희의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얻으리라

 

     7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로 아름다운 땅에 이르게 하시나니

        그곳은 골짜기에든지 산지에든지 시내와 분천과 샘이 흐르고

     8 밀과 보리의 소산지요 포도와 무화과와 석류와 감람들의 나무와 꿀의 소산지라

 

      9 너의 먹는 식물의 결핍함이 없고 네게 아무 부족함이 없는 땅이며

         그 땅의 돌은 철이요, 산에서는 동을 캘 것이라.

 

      10 네가 먹어서 배불리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옥토로 네게 주셨음을 인하여

           그를 찬송하리라

 

▲약속의 땅은 천수답

그런데 혹시 이런 생각 해 보셨는가?

지구상에 넓은 땅이 많은데, 왜 팔레스틴 그 땅만 오직 ‘약속의 땅’인가?

왜 ‘가나안’ 땅만, 약속의 땅이 되어야 하는가?

 

하나님은 가나안의 동서남북 경계까지 세부적으로 말씀하셨다. 민34:1~12

거기서 한 발짝만 벗어나면, 약속의 땅이 아니었다.

 

그 이유는,

약속의 땅은 반드시 ‘천수답’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신11:10 네가 들어가 얻으려 하는 땅은 네가 나온 애굽 땅과 같지 아니하니

거기서는 너희가 파종한 후에 발로 물 대기를 채소밭에 댐과 같이 하였거니와

 

11 너희가 건너가서 얻을 땅은 산과 골짜기가 있어서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흡수하는 땅이요  (비 안 오면, 흉년 되어 다 굶는다)

 

1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권고하시는 땅이라

연초부터 연말까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눈이 항상 그 위에 있느니라.

 

13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나의 명령을 너희가 만일 청종하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여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섬기면 (언약을 잘 지키면)

 

14 여호와께서 너희 땅에 이른 비, 늦은 비를 적당한 때에 내리시리니

너희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얻을 것이요

 

15 또 육축을 위하여 들에 풀이 나게 하시리니 네가 먹고 배부를 것이라

 

-이건 완전히 천수답이다.

하나님이 비 내려주시면.. 농사가 잘 되고

하나님이 비를 닫으시면.. 농사가 안 된다.

 

인간이 자기 유익, 행복, 평안에

그 어떤 기여도 할 수 없는 땅이.. ‘약속의 땅’이다.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만 순종하면,

내가 거기서 엄청나게 큰 포도열매를 주신다는 것이다.

젖과 꿀이 흐르게 하신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성도들도 모두 <천수답>이다.

그런데 젖과 꿀은 커녕,

먹을 물도 부족한 가나안 땅인데

하나님이 그런 허무맹랑한 약속을 하신 것이다.

 

-이게 오늘날 우리 현실이다.

오늘날 성도의 현실은 <천수답과 같다>는 것이다.

 

오직 하늘에서 주시는 비와 이슬로.. 농사짓고 사는 것이지 은혜로 사는 것이지

내가 물을 길어서 붓는 곳이 아니다. 자기 노력이 아니다. 그건 애굽이다.

 

▲성령이 부어지면.. 아름다운 땅이 된다.

그런데 사32:15절 이하로 가면,

그 열매 맺지 못하는 약속의 땅, 가나안 땅이

어떻게 풍요의 땅으로 변하는지가 명확하게 나오는데,

 

필경은 위에서부터 성신을 우리에게 부어주시리니

광야가 아름다운 밭이 되며 아름다운 밭을 삼림으로 여기게 되리라   사32:15

  

그 때에 공평이 광야에 거하며 의가 아름다운 밭에 있으리니

의의 공효는 화평이요 의의 결과는 영원한 평안과 안전이라  사32:16~17

 

이것이 구원의 현실이다.

우리는 가나안이다.

천수답 농사를 지을 수밖에 없는 척박한 땅인데,

하나님의 은혜의 비가 부어지면, 성신이 부어지고, 생기가 부어져야

                       필경은 위에서부터 성신을 우리에게 부어주시리니...

비로소 <존재, 풍성, 생명을 품은 자>가 된다는 뜻이다.

그 생명과 평안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 성령의 부어짐을 통해서만 성취될 수 있다. 그 이외의 방법은 없다.

자기 스스로 물을 퍼내지 않고, 하늘에서 떨어지는 물만 절실히 필요하다.

 

▲이것이 또한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 나오는 <좋은 땅>이 주는 메시지이다.

밭은 스스로 기경할 수 없다. 스스로 열매 맺을 수 없다.

좋은 씨가 심겨져서, 즉 성령이 심겨져서.. (어쨌든 위로부터 뭐가 심겨져서)

좋은 밭이 되는 것이다.

 

그것이 창2장에서부터 출발한다.

땅에 비가 와야(성령, 말씀 등 '하늘에서' 뭐가 내려와야) 초목과 채소가 나게 된다. 

창2:5 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경작할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그걸 예수님이 또한 이렇게 설명하신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요14:18

 

그날에는 (예수님이 성령으로 다시 오시는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요14:20

 

이게 바로 ‘땅’의 이야기다.

원래 ‘땅(사람)’은 스스로 전혀 열매를 맺지 못하는데,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이 그 ‘땅(사람)’에 부어지시면, 임하시면,

 

우리가 하나님이 거하시는 약속의 땅이 되는 것이다.  구약적 표현임

신약적으로는,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거처, 하나님의 성전>이 되는 것이다.

 

▲정리하면

성경은 계속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고 있다.

창2:5에서 ‘죽은 흙’에 비가 와야 하고,

그 ‘죽은 흙’에 생기가 들어가서 생령이 되고,

 

가인처럼 죄를 지으면.. 흙이 도리어 사람을 배반, 공격하고..

하나님도 결국 홍수로 흙과 땅을 심판하시고,

 

아브라함 때부터 하나님은 다시 ‘약속의 땅’을 주시고

그 약속의 땅은 ‘천수답’이다.

오직 하늘에서 은총이 내려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된다.

 

그런데, 약속의 땅에 여호수아 때 들어갔다가,

다시 범죄하니까, 그 땅에서 쫓겨나서 바벨론으로 갔다가,

나중에 회개하고, 다시 그 땅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 와중에 이사야는 이렇게 예언한다.

필경은 위에서부터 성신을 우리에게 부어주시리니

광야가 아름다운 밭이 되며 아름다운 밭을 삼림으로 여기게 되리라   사32:15

이렇게 땅이 다시 회복되는 것이다.

 

(지금까지 구약의 땅을 살펴보았고,

같은 개념을 신약에서 어떻게 설명하는지.. 아래에서 살펴보자)

 

 

◑하나님이 ‘땅’에 와서, 함께 하신다.

 

그렇게 하셔서, 땅을 회복시키신다.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 요14:23

 

지금 여러분 안에 성령님이 오셨는가?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로, 성령님이 오셨다.)

 

주님이 우리 ‘땅(흙)’에 들어오심으로써

내가 ‘약속의 땅, 하나님의 나라’가 된 것이다.

 

생기, 콧김, 성령에 의하여, 주님이 우리 속으로 들어오셨다.

 

창세기1장부터 계시록까지.. 성경은 그 이야기를 하고 있다.

                                                                  ★관련글 보기: 하나님의 나라는 심령천국 (강추)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 이야기’를 하고 있다.

땅의 타락과, 땅의 회복이다.

그 땅의 회복은..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처를 함께 하심으로써 이루어진다.

 

※성경을 무슨 <성공학, 축복비결>로 보는 것은, 큰 오류이다.

그것은, 비유하자면, <난중일기>를 보면서,

그 속에 나오는 무슨 <기상학, 인간관계학>을 연구해서 보는 것과 같다.

성경책의 차원을 다르게 보면 안 된다는 뜻을 설명한 것임.         <출처, 김성수 목사님 로마서강해 6강, 40'~57' 녹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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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살인자를 보호하신다.

하나님은 가인을 해치는 사람을, 벌을 7배나 받을 것을 말씀하셨다. 창4:15

 

아니, 하나님의 백성인 아벨이 죽을 때는,

하나님이 전혀 보호를 안 해 주시더니,

그런데 왜 생뚱맞게 가인을 보호하고 나서시나?

 

‘하나님의 보호’는,

이 땅에 우리가 죽지 않게 만드시는 것.. 이것이 ‘보호’가 아니다.

 

저희 둘째 아이가 물에 빠져서 죽어 가는데,

하나님이 그를 보호해 주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무관심 하신 것 같았다.

왜 하나님이 인간의 죽음에 무관심 하신 것일까?

 

‘죽음’은

살아있는 존재만 죽게 되는데,

원래 이 세상에는 다 죽은 존재였다. 하나님으로부터 끊어져 있었다.

그래서 그들이 죽는 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죽음이 아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죽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 뿐이다.

 

아벨이 가인에게 맞아 죽을 때,

하나님은 ‘아벨을 죽음으로부터 보호’하지 않으신 것은,

그 죽음이.. 영원한 죽음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하나님과 영원 편에서 보면, 인간의 죽음은.. 사실 별게 아닌 것이다.

인간 편에서 보면, 그 죽음이 그렇게 슬퍼 보이지만...

그래서 하나님은, 아벨이 죽을 때, 또한 제 아들이 물에 빠져 죽을 때,

가만히 지켜보고만 계신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인간의 죽음’보다 더 중요한게 있으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지키시는 분이지,

우리의 육적 목숨을 지키시는 분은 아니시다.

 

창세기 본문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가인을 보호하셨다’는데 초점이 있지 않고,

‘하나님을 버린 인간들은 어떻게 사는지 보라’는데 초점이 있다.

 

하나님은 분명히, ‘내가 너를 보호한다’ 라고 하셨는데

가인이 그것을 못 믿는다.

그래서 가인은, 자기 스스로 보호하기 위해서, 성을 쌓는다.

-이게 죄인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내가 보호한다’고 하는데도,

끝내 자기 보호 행위의 성을 쌓은 것이, 죄인의 실체이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가인의 후손들이 쌓은 성을,

홍수로 다 심판하셨다.  창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