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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이름은 ‘쏟아진 향수’ 라이언

LNCK 2011. 6. 21. 15:17

◈당신의 이름은 ‘쏟아진 향수’              아1:1~17             10.10.14.설교스크랩


제목 '쏟아진 향수'는, 아가서 1:3절에 나오는 구절, ‘네 이름이 쏟은 향기름 같고...'  에서 따온 말입니다.

 

 

▲도입/ 신앙생활이란.. 하나님과의 친밀함

지금 전 세계에는,

자신의 영적인 생활에서 지루해하며 교회를 다니긴하지만 열정이 없고,

삶에 영광이 없는 크리스천이 많습니다.

그런 와중에, 전 세계에서 <하나님과의 친밀함>이라는 운동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모세는 회막에서, 하나님을 대면해서 뵈었습니다.

사람이 그 친구와 이야기함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  출33:11


이때 모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참으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었사오면, 원컨대 주의 길을 내게 보이사

내게 주를 알리시고, 나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게 하시며, 이 족속을 주의 백성으로 여기소서. :13


성도가 하나님을 만나고 뵙게 되면,

<주님을 알게>되고, <주님과 친밀함>이 저절로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해서,

<주님과의 친밀함>을 모르는 상태에 있다면,

우리는 교회만 다닐뿐이지, 진정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아가서에는 세 부류의 사람들이 나옵니다.

-왕.. 예수님을 표현합니다.

-젊은 술람미 여인.. 성숙한 친밀한 교제관계에 있는 성도들, '신부'입니다.

-예루살렘의 딸들.. 미성숙한 신자들을 말합니다.


술람미 여인은 하나님과 깊은 관계에 있지만

예루살렘 여인들은 하나님과 깊은 관계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에

술람미 여인이 어떤 과정을 통과하고 있는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때로는 여인을 향해 대적하고 놀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 아가서의 끝 부분에 가면

이 여인들도 하나님과의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1:2절, ‘(왕이) 내게 입맞추기를 원하니, 당신의 사랑이 포도주보다 나음이로구나.’

예수님께서 우리 입술에 입 맞춘다는 것은 상징적 표현입니다.

술람미 여인도, 왕이 자기에게 입맞춤을 원한 것은,  Let him kiss me..

하나님이 얼마나 자기를 사랑하는지 보여 달라고 요청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입맞춤은, 여러분의 삶 가운데 ‘하나님의 만지심’ 입니다.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의 축복,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술람미 여인은 자신의 미성숙함 가운데서 마치 어린아이처럼

‘나에게 친밀함의 입맞춤을 해주세요.’  Let him kiss me..

주님의 임재와 영광으로, 자신 위에 임해주시기를 구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매혹되기 위해 만들어진 자입니다.

여러분이 물질적인 영역 가운데에서 경험하는 쾌감은

하나님 안에서 경험할 수 있는 영적인 쾌감의 그림자입니다.


사탄은 하나님께서 선한 의도로 만들어 주신 쾌락의 영역을 훔쳐 왜곡시키고

가짜를 만들어 내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서만 완전히 만족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필요나 원함은, 하나님으로만 만족될 수 있는 것입니다.


몇 가지 예로, 사람들은 매혹되기 원하기 때문에 오락이나 영화를 만들어냅니다.

사람은 매혹되기 때문에 오락을 좋아하는데

그것(매혹)은, 원래 하나님께로부터 매혹되는 즐거움으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짝퉁 매혹을 만들어내어서, 사람들을 유혹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인간적인 매혹에는, 확 끌림을 받는데,

하나님의 매혹에는.. 시큰둥합니다. 가짜 매혹에 더 매력을 느끼고 있습니다.

가짜 매혹은.. 오래 가지 못합니다. 또한 그 결과는 아주 참혹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에 매혹되기 원하는 갈망을 채워주시고

그것은 주님이 어떤 분인가에 대한 계시를 받을 때 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재가, 마치 변화산의 체험처럼 

전 세계 사람들의 눈에 영광을 보도록 풀어진다면

구원받지 못한 자, 불신자라도, 성도는 물론이고요, 그들은 다 매혹될 것입니다. 아멘.


또 우리는 성공에 대한 갈망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늘에 있는 왕족들입니다.

거듭난 자라면 하늘의 왕과 결혼한 왕족입니다. 이런 참 성공을 갈망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신부요, 아들과 딸들로서 그분과 함께 다스리는 자입니다.

그분과 함께 (사랑으로, 섬김으로, 희생으로) 통치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보통 사람이 아니라,

매우 매혹적이고, 매력적인 사람들임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왕의 사랑과 키스를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새로 결혼한 영국의 윌리엄 왕세자비가 아름다운 것은,

그가 왕의 사랑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왕의 키스를 받는 사람은.. 정말 매력적인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왕이신 하나님뿐만 아니라,

누군가가 우리를 즐거워하고, 좋아한다는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인류 가운데 한 갈망이 있는데

누군가 자기를 좋아하고 사랑한다는 것을 알기 원하는 갈망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으로 인해 만족됩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실 뿐 아니라, 좋아하십니다.

하나님께 사랑받는 사람이 될 때, 주변 예루살렘의 딸들도, 그를 사랑합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여러분이 지금 거하고 있는 미성숙함과 연약함 가운데,

여러분의 삶의 영역에서 죄가 있다하더라도

하나님은 여전히 여러분에게 완전히 매혹된 상태입니다.


여러분이 행하는 것이 어떠할지라도

그분은 권능이 있고 놀라운 분이시기 때문에

여러분의 실수와 미숙함이 그분에게 중요치 않습니다.


조건이 있는데.. 여러분의 마음이 주님께로 향해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주님께 향해 있다면, 주님은 여러분을 '신부'로 변화시키실 것입니다.


▲1:2b ‘당신의 사랑이 포도주보다 나음이라.’

하나님의 입맞춤의 이유 중 하나는

그 입맞춤이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이시키기 때문입니다.


이 여인은 왕이 자신을 만질 때

하나님의 사랑과 포용하심을 느끼고

그 여인의 마음에, 하나님이 실제로 자기를 좋아하고 즐거워하신다는 것을 깨닫고

마음이 열립니다.


그 전에는 자기 마음을 감추고 보호했다면

이제 주님이 나를 만지면 자신을 얼마나 즐거워하시는지 깨닫고

“사랑을 더 주십시오.” 라고 고백합니다.


‘그의 사랑이 포도주보다 낫다는 것’은

그 당시 포도주는 최고 중의 최고의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이 가질 수 있는 것 중에서, 포도주는 가장 비싼 것 중의 하나였고

최고의 즐거움을 주는 음식이었는데..


갑자기 그 여인은, 주님의 사랑이

이 세상이 줄 수 있는 최고의 것(포도주)보다도 낫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이 세상이 줄 수 있는 그 어떤 쾌락보다도

자신의 마음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 비교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또, 포도주는 마음을 즐겁게 하는 것입니다.

'그 어떤 것보다도 예수님이 제 마음을 만족하고 기쁘게 합니다.'하며

하나님의 사랑에 마음을 빼앗기기 시작합니다.


▲1:3a ‘너의 기름이 향기로워’

향, 향기는.. 감정, 애정을 말하는 것입니다.

저를 향한 주님의 애정이 제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향과 같습니다.

상상해보십시오. 방에 들어갔는데 누군가 방에 향을 뿌려놓았었다면

마치 향이 있는 안개 가운데로 들어가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이 여인이 하나님의 사랑에 완전히 사로잡힌 자입니다.


▲1:3b ‘네 이름이 쏟은 향기름 같고' 

여러분, 향수가 쏟아졌으니.. 얼마나 향기가 진동하겠습니까?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느끼시고,

내가 하나님을 어떻게 느끼는가에 따라.. 우리는 하나님과의 사랑에 빠집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느끼시는가에 대한 최고의 표현 중의 하나는

눅15장의 탕자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20절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 돌아 가니라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아1:2


아버지는 그에게 다가가 입 맞추었습니다.

그 위에 옷을 입히고, 그를 위해 잔치를 벌였습니다.


그래서 이 술람미 여인은, 이와 비슷하게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는 것입니다.

자신이 가치가 없다는 것과, 자신이 무엇을 행해서 얻는다고 생각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사랑을 그 위에 쏟아 붓습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하나님의 이름이, ‘나에게 쏟아진 향’과 같다고 고백합니다.

여인이 너무 사랑에 빠졌기 때문에, 그분의 이름을 ‘쏟아진 향(수)’으로 별명처럼 만든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그분의 임재가운데, 나온 표현입니다. 

우리가 주님과 깊이 사랑에 빠져서 주님의 이름만 들어도

임재를 느끼는 것을 경험해보셨습니까?


▲1:3c, 여인은 ‘그 (예루살렘) 처녀들이 너를 사랑한다.’고 고백합니다.

미성숙한 자들이라도, 예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될 때,

특별히 왕과 술람미 여인의 사랑을 보고, 너무 부러워서,

예수님과 사랑에 빠질 것이라는 것입니다.



▲1:4 ‘우리가 당신께로 달려가리라.’

왕에게 우리(술람미 여인과 예루살렘 딸들)를 이끌어 달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가 자신이 그것을 행할 능력이 있는지도 생각지 않고

그냥 왕에게 친밀함의 자리로 인도해달라고 구하고 달려갈 것이라고 합니다.


이런 방식으로 이곳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 삶 가운데 첫 번째로 추구해야할 것은,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것입니다.

열정입니다. 주님과의 친밀함입니다.

이런 친밀감의 장소를 향해, 우리가 함께 달려갈 것이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이와 같이, 모든 사역은 친밀감의 장소에서부터 시작되어야합니다.

여러분이 사역을 하고 있지만 하나님과의 친밀감이 없다면

이미 텅 빈 채로 달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 가운데 향기름이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바르게 행하고 바르게 말해도

주님의 임재와 기름부음이 없다면

일하고 일해도 열매가 없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이 여인은 하나님과 동행하려면 하나님이 친밀감 가운데에서

자신을 이끌어주심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 삶 가운데 주님께 우리가 인도를 받고

주님과 함께 달려 나가는 요소들이 있어야 합니다.


▲1:4b, ‘왕이 여인을 침실로 이끄셨다.’고 고백합니다.

침실(또는 작은 방)은, 왕과 함께하는 개인적인 장소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마음가운데에서, 왕과의 개인적인 관계를 가져야 합니다.


모든 사람들은 상대를 쳐다볼 때, 겉으로 드러난 삶을 보지만

저의 질문은 ‘내부의 친밀한 방’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개인적인 (일차적으로 마음의 방, 이차적으로 실제 방) 은밀한 처소, 침궁의 자리가 있습니까?


왕이 여인을 침궁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임재를 대면하는 특별한 장소를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임재와 영광이 있을 때에만

우리 삶에 임하는 시험을 견디게 하고, 여러분을 이기는 자로 만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물에서 세례를 받고 올라오실 때 성령님이 임하셨습니다.

기름부음이 임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그분을 만지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권능이 주어지고, 광야로 가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한 이후에.. 광야로 들어갔습니다.


여러분들 중 어떤 분들은 시험과 환난의 광야에 있습니다.

그 광야의 시험을 잘 통과하려면.. 먼저 기름부음이 있어야 합니다.

기름부음은.. 하나님과 은밀한 방(교제의 장소)에서 부어집니다...


▲1:5 ‘내가 비록 검으나 아름다우니’

하나님과의 친밀한 처소에서, 성도는, 자기가 얼마나 검은지를 깨닫게 됩니다.

검다는 것은 연약함과 미성숙함을 뜻하는데,

그녀는 자신이 삶에서 극복하지 못한 것이 있음을 깨닫지만

자신이 하나님께 아름답다는 것도 깨닫습니다.


대적이 성도를 낙심시키는 방법은

여러분들이 얼마나 나쁜 사람인가에 대해 말하는 것입니다.

‘네 친구들을 봐. 너의 친구나 주변 사람들은 너보다 훨씬 잘하고 있잖아.

네가 힘겹게 싸우고 있는 은밀한 죄가 저들에겐 없을 거야.’하는 말로 책망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경배할 때, 마음에 찔림을 가진 채로, 창피해하며 경배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예배하면서도

자신이 원하는 사람이 되지 못했기에 부끄러워하기 때문에

하나님께 자신의 마음의 일부밖에 드리지 못 합니다.


자신의 마음가운데 검고 연약한 부분, 부끄럽고 찔림이 있어서

스스로 책망 하는 마음은, 스스로를 보호합니다. 왕의 사랑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나는 사랑을 받을 자격이 안 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실수하고 죄짓고, 바르게 행하지 못함을 느낄 때

하나님께 달려가지 않고, 도리어 멀리 떠나갑니다.

마음가운데 하나님으로부터 피하여 숨습니다.


우리가 믿는 성도로서, 손을 들고 경배하며, 방언하고 찬양하지만

마음가운데는 주님으로부터 멀리 숨어 있습니다.

우리가 마음가운데 하나님께로 다가가는 것이 아니라, 점점 멀어지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어떻게 다루시는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술람미 여인은, 자신을 ‘게달의 장막처럼 검다’라고 말합니다. 1:5b

게달산 장막은.. 그 색깔이 아주 검었나 봅니다.

아마 검은 바다표범 같은 가죽으로 장막을 만들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그러나 여인은 ‘내가 비록 검으나 아름다우니’ 라고 고백합니다. 1:5

이 고백은,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 은밀한 관계에 들어갔다는 증거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누구든지, 왕의 사랑을 듬뿍 받는 여인은 똑같이 고백할 것입니다.

‘내가 비록 검으나 (죄가 많으나) 아름다우니..’


▲1:15, ‘내 사랑아 너는 어여쁘고 어여쁘다 네 눈이 비둘기 같구나’ 

왕은 이 여인이 깨닫길 원하여 ‘너 자신을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를 똑바로 쳐다 봐, (주목해)

(너 자신의 음성을 듣지 말고, 사단의 음성도 듣지 마라.)

Behold, 너는 어여쁘고 어여쁘다, Behold, 네 눈이 비둘기 같이 예쁘구나!       *behold : 주목해서 보다  

네 모습을 잘 봐봐!”           


왕은 두 번이나 behold 라고 말씀하시며, 여인의 관심을 집중시키십니다.


그 여인에게 아름답고 아름답다고 반복적으로 말씀해 주시지만

여인은 이 말을 받아들이는 것을 어려워합니다.

자기 자신을 더럽다고 느끼고 아름답다고 느끼지 못합니다.


그래서 왕이 말씀하는 것입니다.

‘내 말을 들으라. 네가 어떻게 느끼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를 어떻게 느끼는가가 중요한 것이다.’ 하시며 여인에게 가르쳐주십니다.


     여러분, 공원에 가셔서, 비둘기의 눈을 한 번 보십시오. 정말 아름답습니다.

     또한 비둘기는, 평생 하나의 상대와만 짝짓기를 하고

     상대가 죽게 되면 다른 상대와 짝짓기 하지 않습니다.


     왕이, 여인에게, 여인의 충성스런 마음을 보았다는 것을 칭찬한 것입니다.


▲1:16, ‘우리의 침상은 푸르고’

침상은 안식과 안정을 뜻하는데, 거절감이나 판단에 대한 두려움이 없습니다.

이 여인이 말하는 것은, 왕과 침상에서 안식을 취한다는 것입니다.


푸르다는 것은.. 풍성함입니다.

그녀가 하나님의 사랑가운데 거하고 있는데, 이것은 풍성한 사랑입니다.


▲1:17, ‘우리 집은 백향목 들보, 잣나무 서까래로구나’

그 당시 백향목과 잣나무는 가장 튼튼한 나무였습니다.

여인은 하나님께서 짓고 계신 집인 우리의 관계는

안전하고 강력한 것이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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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글에 (동전의 앞뒤면 처럼) 균형을 잡아야 하는 글          -출처-

 

나는 삶의 권위로서 성경보다는

개인의 체험을 받아들이는 관례가 만연한 현실에 반대하고자 한다.

 

오늘날 여러 화려한 영성들이

기독교의 성경을 현대적 상상력의 주변부로 무례하게 밀쳐놓았지만,

나는 성경을 다시 중심부로 이끌어 와

그리스도인의 삶을 깊이 있게 하는 텍스트로 세우고자 한다.


나는 권위 있는 성경이, 권위 있는 자아로 대치된 현실에 대항하면서

개인의 체험을 성경의 권위 아래에 두고자 한다.


나는 성경을 우리가 따라 살아야 할 텍스트로 우리 앞에 제시하고자 한다.


오늘날 사람들은 영혼에 대해 엄청난 관심을 가지고 있다.


교회 안에서는 영혼에 대한 이러한 관심이 영성 신학, 영적 리더십,

영성 지도, 영성 형성 등에 관심이 다시 쏠리는 현상으로 입증되고 있다.


그러나 성경에 대해서는 그에 상응하는 관심이 일고 있지 않다.


영성 신학, 영적 리더십, 영성 지도, 영성 형성은

개인적이고, 공동체적인 삶 속에서

성령이 하시는 일에 주의를 기울일 것을 요구한다.


그런데 이 일에 열을 올리는 사람들은 종종,

성령이 우리에게 주신 책인 성경에는 관심이 없다.


영혼에 대한 관심이

성경에 대한 관심과 조화를 이루게 하는 것은 아주 중요하고 긴급한 문제다.


대체로 기독교 공동체는

성경이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하신 권위 있는 텍스트라는 입장을 받아들인다.


내가 강조하고 싶은 사실은, 성경을 실제로 살아낼 수 있다는 것이다.

(영성을 강조하지 않아도, 성경만 올바로 사용하면 된다는 뜻인듯)

성경은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유일한 텍스트다.


성경은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다스리시고, 하나님이 복을 주신 세상을 계시한다.

그 세상에서 우리는 집처럼 편안함을 느끼고 온전함을 느낀다.


단지 성경을 읽는 것이 아니라 이 책을 먹으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