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 불만족의 이유 히11:15~16 스크랩 글, 정리
◑1. 집착의 무게 시16:11
▲오늘 나의 삶이 무겁고 힘들게 느껴진다면,
그리고 이미 처해 있는 상황을
편하게 받아들이기 어렵고 내 마음이 불편하다면,
지금보다 조금 더 나은 상황을 원하고 있다면,
그것은 집착의 무게 때문이다.
늪에 빠졌을 때 벗어나고자 발버둥치면 더욱 더 빠져 들듯이
이미 와 있는 상황을 내 것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원망하는 마음으로 삶을 살아가면 고달프고 힘들 수밖에 없다.
자기가 보고 싶은 관점에서 원하는 것만 바라보면
항상 부족한 것만 보일 수밖에 없다.
바라보는 각도를 조금만 달리하면
자신에게 이미 있었는데도 미처 알지 못했던
감사해야 할 부분들도 많이 보인다.
다 좋은 일도, 다 나쁜 일도 없으며
과거의 삶의 결과가 현재에 나타나는 것이
세상 살아가는 이치임을 알아야 한다.
내게 없는 것, 내게서 떠나는 것에 집착하지 말고
내게 있는 것, 내게 다가오는 것을 편안한 마음으로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여야만 한다.
좋고 나쁨을 구분하는 자체가 집착의 뿌리가 된다.
▲‘주님 한 분 만으로 과연 만족하는가?’
요즘 내가 나 자신에게 스스로 늘 묻는 질문이다.
‘나는 과연 주님 한 분 만으로 만족하는가?’
시23: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을 뿐만 아니라, 내 잔이 넘치나이다!
시16:11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주님이 주시는 평안, 주님이 주시는 기쁨, 능력
이런 것 말고도 뭔가 재력, 지위, 사람(인맥, 인연) 이런 것들을 필요로 한다면,
나는 지금 뭔가에 ‘집착’하고 있다는 증거가 된다.
◑내가 ‘집착’하는 것을 들춰내시는 주님 막10:17~22
▲부자 청년은 부를 지키는 능력이 있었다.
부모가 물려준 재산을 잘 지키는 것도 상당한 능력이다.
그는 겸손했다.
보통 부자라면 예수가 도리어
자기에게 무릎을 꿇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는 용기도 있었다.
니고데모는 밤에 몰래 숨어서 예수님을 만났지만,
그는 백주 대낮에, 예수를 찾아와 그 앞에서 무릎까지 꿇었다.
그는 또한 어려서부터 계명을 잘 지킨 사람이었다.
“선생님이여, 내가 이것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 (막10:20)
참 성실하고 남이 부러울 만큼 도덕성이 높은 사람이었다.
▲청년의 집착을 들춰내신 예수님
그런 흠잡을 데 없는 이 청년에게는
마음 속에 숨겨져 있는 집착이 한 가지 있었다.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라!
하늘 보화만 바라라! 그리고 와서 나를 쫓으라!” 막10:21
아브라함에게는 물질을 바치라고 요구하지 않으셨다.
물질에는 강하고 물질적인 집착이 없으니까...
대신 그가 집착하는 이삭을 바치라고 요구하셨다.
▲나와 하나님 사이를 방해하는 ‘나의 집착’은 무엇인가?
물질, 교만, 사람. 혹은 아름다움 美에 대한 추구인가?
나는 과연 하나님 한 분 만으로 만족할 수 있는가?
성경은 통틀어 그것을 강조하는데 말이다.
인간에게 적당한 명예, 재산, 가정, 이런 것은 필수적이다.
그러나 그런 것들에 집착한다면...
하나님은 반드시 그것을 들추어내시고
결국에는 그것을 앗아가실 것이다.
오늘 밤, 내 마음이 평안하고 감사한다면...
아무 집착이 없다는 증거요,
내 마음이 뭔가 불만족스럽다면...
내가 집착하는 우상이 있다는 증거가 된다.
◑2. 세상을 사모하는 마음 ←크리스천 불만족의 두 번째 이유
▲히11:15, 저희가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16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믿음의 조상들은, 위 본문에 ‘저희’
저희가 나온 고향을 생각하지 않았다.
‘저희가 나온 고향을 생각했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다’고 말씀한다.
아브라함만 갈대아 우르로 되돌아가지 않은 것이 아니라,
모든 믿음의 조상들은,
자기들이 나온 세상으로 되돌아갈 퇴로를 차단해 버렸다.
과거에 로마군대가, 적지에 상륙한 후에, 타고 온 배를 스스로 불태워버렸듯이...
오늘 크리스천인 내가 자꾸 무슨 불만족이 생긴다면..
그건 ‘세상적인 가치 기준’으로 자기를 바라보기 때문이다.
위 16절 말씀처럼 ‘더 나은 하늘 본향을 정말 사모하며, 되돌아갈 본향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기꺼이 이 세상에서 ‘나그네와 행인’의 길을 갈 것이다. 벧전2:11
▲히11:9~10, 그가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
위 구절은, 주체가 아브라함이다.
아브라함이 기꺼이 장막생활을 감당한 것은, 그는 도시를 떠나서 광야에 주로 살았다.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영어로 looking forward to (고대하다)이다.
오늘 우리는 자꾸 이 세상에서 성을 쌓으려 하고,
이 세상에서 큰 빌딩과 부동산을 소유하기 원하지만..
아브라함은, (그때 당시에도 지구라트, 우르에도 큰 성, 건축물이 있었지만.. 부러워하지 않고)
하늘의 하나님이 건축하시는 성을 바라보았다.
그러므로 그는 ‘장막 생활’에 만족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요즘 사람들은, ‘페라리, 포르쉐’ 같은 고급 승용차를 타고 다니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지만,
아브라함은 그런 것과는 아예 관심의 차원이 달랐다.
세상 사람들이 아무리 큰 빌딩을 세우고, 좋은 마차를 가져도
아브라함은 ‘쳐다보는 것을 아예 다른 차원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하나님이 건축하시는 하늘의 성을 고대하며 살았다.
‘지금 나는 무슨 차원으로 쳐다보고 있는가?’
내 믿음의 현주소와 수준을 말해주는 척도measure가 된다.
▲히10:34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산업을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이 있는 줄 앎이라.
히11:26,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오늘날 우리 가운데,
예수 믿는 믿음 때문에, 산업을 빼앗기는 것을.. 기쁘게 당할 사람이 있을까?
-북한이나 이란에는 있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 가운데,
핍박과 능욕을
자기가 가진 더 좋은 보화요, 재산이요, 부동산이라고 여기는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
이런 말씀의 도전(챌런지)에 대한
성도의 갈등, 몸부림... 그러다가 수용과 항복total surrender단계에 이르기 전까지는,
크리스천으로 우리의 갈등과 번민은.. 아마 그치지 않을 것이다.
크리스천이 된다는 것은 '차원'이 달라지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차원'이 달라지는 것을 거부하고, '세상 차원'을 떠나는 것을 계속 거부하다가는
결국 '영원 천국 차원'에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늘 '세상 차원'에 머물러 살다가
죽고 나서 갑자기 '천국 (영생) 차원'으로 재빠르게 갈아탈 수는 없다.
정말 구원 받은 성도는.. 평소에 '천국 차원'으로 살다가, 죽어서 '천국'에 가는 것이다. <이 단락, 편집자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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