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습니까? / 찰스 프라이스 - YouTube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습니까? 행19:1~4 찰스 프라이스 목사님 설교 녹취, 출처
◑본문 설명, 성령을 받지 못한 에베소 교회
▲다소 희한한 상황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에, 바울이 윗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
가로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가로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
바울이 가로되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대답하되 요한의 세례로라. 행19:1~3
지금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은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너희가 믿을 때에..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그리고 회개까지 했습니다. ‘회개의 세례를’ 행19:4
(아마 형식적 회개였을 것입니다. 진정한 회개를 했다면, 즉시 성령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을 받지는 못했습니다.
이것은 다소 희한한 상황입니다.
예수님을 믿기는 믿는데.. 성령은 받지 못한 것 말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 ‘성령을 통해서’ 되어지는 역사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예수를 믿는데도, 성령은 들어보지도 못했다는 것입니다. 19:2
▲그들이 성령을 받지 못한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바울이 에베소에 이르러, 신자들을 가만히 보니까,
그들에게 무엇인가 부족한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성경은 그들을 ‘제자’로 부릅니다. 19:1
제자에다가, 믿음도 있고, 세례도 받았고, 회개도 한 성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깨달은 것은,
그들에게 어떠한 <영적인 생명의 흔적>이 느껴지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신앙은,
그저 머리로 받아들이고, 믿는 것이었습니다. 아마 belief system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라는 질문을 던진 것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바울의 질문이
‘너희가 성령을 믿느냐?’로 하지 않고,
‘너희가 성령을 받았느냐?’로 질문한 것입니다.
이건 받아야 하는 거지, 머리로 믿는 차원이 아니란 것입니다.
그러자 에베소 성도들은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하였노라’고 대답했습니다. 19:2
이 말은 ‘우리는 그것(성령을 받는 것)이 가능한지도 몰랐습니다’ 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오늘날에도 이런 일은 얼마든지 벌어질 수 있습니다.
성령을 ‘받는 것’이 정말 가능한지도 모르는 일.. 말입니다.
▲그들은 ‘우리는 요한의 세례’만 받았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오순절 이전의 신앙생활인데,
복음의 핵심요소가 빠진 것이라 하겠습니다.
복음은.. 우리가 구원받고, 죄로부터 해방된 것뿐만 아니라 (회개의 세례)
영적인 새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성령의 세례)
심지어는, 성경에 능통했던 아볼로도,
요한의 세례만 알았지, 그 이상은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행18:24~25
그러므로 (에베소 교회 지도자) 아볼로의 가르침을 받았던 에베소 교인들이
성령의 세례를 알지 못했던 것은,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여러분, 오늘날에도 ‘회개의 세례’만 알고 신앙생활 할 수 있습니다.
‘죄의 고백과 용서’를 체험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복음의 절반만 깨닫는 것입니다.
복음의 나머지 절반은.. ‘새 생명, 즉 영적인 힘을 받아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온전한 복음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당신의 오늘 신앙생활에는
‘성령의 힘으로 인한 영적인 새 생명’을 느끼고 있습니까?
그 내적인 힘을 느끼지 못한다면.. 아직 성령을 못 받은 것입니다.
성령을 받았다고 해도.. 머리로 받는 것, 지식으로 받는 사람이 있습니다.
성령은.. 머리로 ‘성령이 내 속에 계신 것’을 아는 것, belief system이 아닙니다.
진짜 성령의 영적인 새 생명의 힘이, 실제로 내 속에서 느껴지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내 안에 살아계신다는 증거가 있습니까?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 요일3:24
위 구절을 보니까,
성도는.. 성령이 자기 안에 거하는 줄 안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교리 이런 것을 따지기 전에, 단순하게 따져 보십시다.
‘성령께서 내 안에 살아계신다는 증거, 흔적이.. 오늘 나에게 있습니까?’
그리스도는, 성령의 모습으로, 성령을 통해서
오늘날 성도 안에 살아계십니다.
그렇다면 그 증거는 무엇입니까?
그냥 머리로만, 신념 체계로써 믿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에 어떤 변화, 어떤 증거가 생겨났느냐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의 증거 3가지
이건 꼭 3가지가 아니라, 여러 가지가 될 수 있습니다만
저는 3가지만 설교해 보겠습니다.
▲1. 성령이 자기 속에 살아서 역사하는 성도는..
그리스도를 알고자(교제하고자) 하는 갈망이, 속에서 늘 생깁니다.
요15:26절에서, 예수님은 자신은 곧 하늘로 올라가시며,
대신에 성령이 내려오실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그 성령은 예수님에 대해 증거 하십니다. ‘그가 나를 증거 하실 것이요..’
성령은.. 예수님에 대해서 증거하는 영이십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자기 안에 있으면.. 자꾸 예수님께 끌리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속에서, 성령이 자꾸 그에게, 예수님에 대해 증거하시기 때문입니다.
자기 중심에 <그리스도>께서 왕좌에 좌정하셔서 다스리고 계시면
그가 성령을 받은 사람입니다. 성령은 그리스도에 대해 증거하시니까요. 요16:15.
(은사 역시 성령을 받은 증거가 되지만,
우선순위로 볼 때 ‘그리스도’가 앞섭니다.)
여러분, 성령님을 ‘성경 속에’ 가두지 마십시오. 이론과 지식이 아닙니다.
성령님은, 여러분 안에 생생하게 살아계시는 분이십니다.
그 생생하게 살아계심을 못 느끼면.. 못 받은 것입니다. 아니면 소멸되었거나..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고전2:14, 유다1:19
이런 사람은, 성령이 누구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조차 없습니다.
육에 속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불신자를 가리키지만,
본문의 에베소 교인들처럼, 교인 가운데도 있을 수 있습니다.
쉽게 ‘육에 속한 교인’이라 불러 봅시다.
‘육에 속한 교인’은.. 한 가지 증거가.. 예배가 무지하게 지루합니다.
찬송가에 5절이 나오면, 한숨이 나오고,
인도자가 ‘한 번 더 부릅시다!’ 라고 하면, 괴로워서 죽을 지경입니다.
설교는 따분하기 이를 데 없으며 (이들은 재미있는 농담 섞인 설교를 좋아합니다.)
따분하면서 긴 설교를 들을 때는.. 목회자가 증오스럽기까지 합니다.
그러면 교회를 안 다니면 되는데,
그냥 어릴 적부터 습관이 되어서, 자기도 모르게 다니는 것입니다.
▲저 찰스 프라이스는, 만 12살까지, 육에 속한 신자였습니다.
그런데 제가 12살 때, 우리 도시에 한 달에 한 번씩 '청소년 집회'가 열렸는데, Youth for Christ
하루는 그 집회에서 <부메랑의 그림자>라는 영화를 보았습니다.
호주에서 열린 빌리 그레이엄 목사님 집회를 배경으로 한 영화인데,
호주 오지에 사는 한 목장 주인이,
그가 어떻게 그리스도를 알게 되었는지에 관한 내용이었습니다.
그 영화가 끝날 즈음,
저는 제가 크리스천이 아닌 것을 깨달았고,
제 마음속에, 크리스천이 되고 싶은 소원이 생겼습니다.
영화가 끝나고, 어떤 분이 나와서,
‘크리스천이 되기 원하시는 분은 앞으로 나오십시오.’ 라고 초청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주섬 주섬 앞으로 나가기 시작했는데,
저는 너무 부끄럽고 창피해서, 앞으로 나가지 못했습니다.
그냥 제 자리에서, 그 영접 기도를 따라 했습니다.
그날 저녁 제게는, 무슨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무슨 눈물을 흘린다거나, 큰 떨림의 표징이 있은 것은 아닙니다.
그 집회건물을 빠져나와 집으로 돌아올 때도, 맹숭맹숭 했습니다.
그날 저녁, 제게 ‘거듭남’이 일어났는지.. 저는 확신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어떤 ‘극적인 체험’도.. 제게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날은 토요일이었고, 다음 날 아침, 주일에, 저는 평소대로 교회에 갔습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부모님을 따라 교회에 다니고 있던 터였습니다.
그런데 그날, 저는 제게 (어제 밤에)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목사님이 전하는 말씀이, 그날부터 제게 이해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와~ 우리 목사님이 갑자기 놀랍게 변화되셨네!’
이전에 제가 들었던 설교는, 그저 지루하고 재미없고 따분한 것이었습니다.
교회의 예배와 찬양과 설교는, 그저 의무에 불과했고, 심지어는 고통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청소년 집회 때, 제가 진정으로 예수님을 마음에 모신 이후로,
갑자기 설교말씀이 깨달아지기 시작했고,
세상에서 가장 지루한 성경책이, 살아 있는 생명의 말씀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목사님이 갑자기 변화된 게 아니라, 사실은 제가 변한 것이었습니다. 목사님은 늘 그대로였습니다.)
그 이전에 저는, 주일학교를 다니고, 여름성경학교를 다니면서
많은 설교를 들었고, 많이 배웠지만.. 예수님께 대한 어떤 갈망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영접하고, 성령을 받고 나니,
성경이 깨달아지고, 예수님에 관해 말씀을 듣는 것이 달콤해 졌습니다.
(이와 같이 성령의 사역은, 언제나 그리스도가 그 중심이십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더 알아가기 원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빌3:10
바울이 이전에 예수님을 몰라서가 아닙니다.
이미 예수님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위 본문에서, 바울은, 예수님을 더 깊이 알고자 했습니다.
그 이유는.. 성령님이.. 바울 속에서 살아서 계속 역사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성령을 받은 사람은,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깨닫게 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를 알아가려는, 교제하려는.. 열망이 있게 됩니다.
▲저는, 그리스도를 도외시하고, 성령만 강조하는 분들에 대해, 불안감을 느낍니다.
성령의 사역에는,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가 중심이 되시는데,
모든 것이 성령에게서 온 것이며, 성령을 위한 것이고, 성령, 성령 하는데..
자기 삶의 도움(기복) 차원에서 성령을 말하지,
그리스도에 관하여는, 거의 말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참된 성령의 역사가 아닙니다.
▲흥미로운 것은, 성령님은 자기 고유한 이름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성부 하나님은.. ‘엘로힘, 여호와’ 등의 이름이 있고,
성자 하나님도.. ‘예수, 임마누엘’ 이라는 이름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은, 창1장부터 등장하지만, 고유한 이름은 없고, 몇몇 명칭title만 존재합니다.
'성령 the Holy Spirit, 진리의 영 the Spirit of truth, 보혜사 counselor 등입니다.
그 이유는, 성령님은, 하나님과 예수님의 사역을 보좌한다는 뜻입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성령님께 주목하지 못하게 하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 주목하지, 성령님께 주목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그리스도를 닮으라’고 하지, ‘성령님을 닮으라’고 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성령님의 사역입니다.
성령님이 누군가에게 임하셨을 때,
그는 ‘성령님’에게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은 성도는,
이전에 멀게 느껴졌던 예수님(not 성령님)을, 이전에 지식적으로 알고 있었던 예수님을
이제 친밀하게 개인적으로 알고 교제하게 됩니다.
성령이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때문입니다.
▲2. 성령을 받으면 (예수님을 알게 될 뿐 아니라) 예수님을 닮아갑니다.
그래서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갈5:22~23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할 점은,
성령의 ‘꽃’이 아니라, ‘열매’입니다.
성령을 받지 못한 크리스천은,
겉으로는 꽃처럼 그저 화려하고 아름답게 보입니다.
그렇지만 잠시 아름다울 뿐, 그 꽃은 곧 시들며, 열매가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 받은 성도는, 겉이 화려한 게 아니라, 속으로 열매를 맺습니다.
저는 '열매'라는 점을, 좀 독특하게 해석합니다.
열매는 '배고픈' 사람에게 실제적인 도움을 줍니다.
성령의 9가지 열매.. 사랑, 기쁨, 평화, 오래참음, 자비, 선함, 충성, 온유, 절제는
그것에 배고프고 굶주린 이웃들에게.. 실제적인 도움을 줍니다.
사랑, 기쁨, 평화가 없는 이웃들에게.. 실제로 사랑, 기쁨, 평화를 나누어 줍니다. 주1)
크리스천은 그저, 밤늦게 쿵쾅거리는 음악 안 틀고, 주차 아무데나 하지 않고..
그런 나이스한 사람의 수준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세상에서, 사랑에 굶주린 사람들, 기쁨과 평화에 굶주린 사람들에게..
(아무도 열매를 주지 않는데) 그들에게 열매를 나누어 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닮는다는 것은.. 그저 흰옷을 입고 조심조심 걸어다니면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God bless you!'를 외치는 (외적으로 흉내내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인격을 닮아서, 정말 세리, 창기 같은 사람과도 멸시하지 않고, 같이 어울리며,
영적으로 병든 사람들에게.. 인격적으로 굶주린 사람들에게.. 인격적 열매를 나누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삶을 풍성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3. 성령을 받으면 (예수님을 닮아갈 뿐 아니라) 예수님을 섬깁니다.
아시다시피, 성령을 받기 전에, 제자들은 모두 이기적이었습니다.
십자가를 앞두신 예수님 앞에서,
서로 누가 크냐며, 서로 누가 높은 자리를 차지할 것인지.. 다투었습니다.
그러나 오순절 성령을 받은 제자들은,
자기 목숨의 위협을 불구하고, 예수님을 증거했습니다. 예수님을 섬겼습니다.
땅 끝까지 이르러 제자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베드로처럼, 감옥에 가더라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감옥에서 풀려나서도, 즉시로 예수를 담대하게 증거했습니다. 행4:8~13
▲마치는 말/ 저는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을 30년 전에 그만 두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말이 꼭 틀린 말은 아닙니다만,
저는 개인적으로 그 표현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따른다’ 보다는
‘동행한다. 교제한다. 동거한다’.. 이런 표현이 더욱 성경적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임하신 성도는,
예수님과 교제하고, 동행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멀찍이 떨어져 계셔서 따라가지 않고 <내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아주 오래 동안 다니면서도, 지금도 다니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교회에 대해 냉소적이고, 비판 일변도인 교인들도 있음을 봅니다.
저는 그 이유가, ‘육에 속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자기 속에 계신 성령님과 동행하는 사람은..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수 십 년을 교회를 다니더라도,
아직 예수님을 친밀히 느끼고, 교제하지 못하는 교인들은,
성령님을 개인적으로, 인격적으로 만나야 하고, 그러기를 사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에 대해 ‘지식적 믿음’은 있을지 모르나 ‘인격적 믿음’은 없는 것입니다.
어떤 미국 자매님은, 시카고에서 태어나고 자라면서, 평생 교회를 다녔습니다.
그 분의 남편이 일찍 돌아가셔서, 새로 영국 남자와 결혼하게 되었고,
현재 남편을 따라, 그 후로 영국에 와서 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컨퍼런스를 마치고 보니, 그 자매님의 얼굴이 완전히 변했습니다.
얼굴이 활짝 밝아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마음에 기쁨이 충만했습니다.
그 분은 ‘목사님, 저는 지금까지 이런 경험을 해 본 적이 없습니다.’ 라고 제게 말했습니다.
(40~50년) 평생을 교회에 꾸준히 다녔지만,
그 나이에 예수님을 비로소, 자기 인생에 처음으로, 인격적으로 개인적으로 만난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였던 것이지요. 성령을 받은 것입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녀는 자기가 일평생, 크리스천인줄 알고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저 찰스 프라이스는,
그분이 성령을 받기 전까지는, 진정한 크리스천이 아니었다고 봅니다.
그럼 그동안 예수를 믿은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그냥 일평생 ‘머리로만’ 예수를 믿은 것이지요.
‘인격적, 개인적’으로 믿은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당신은 믿을 때, 성령을 받으셨습니까?
그 증거는
-성령이 예수님을 계속 증거하시므로, 예수님을 더욱 깊이 알게(교제하게) 되고,
-예수님을 닮아가서,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되고
-예수님을 섬기는.. 증인의 삶을 살게 됩니다. 저절로, 자연적으로요!
.................................
주1)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은 성경은 성령의 열매들(fruits)이 아닌 단수(singular)
즉 열매(fruit)라고 말씀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서 갈라디아서 5장에 나오는 아홉 가지는 성령의 열매들이 아니라
한 열매의 아홉 가지 특성인 셈입니다.
성령께서는 한 가지 열매만 생산하시는데, 그 특징이 아홉 가지인 셈입니다.
성령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은 첫째 사랑, 둘째 기쁨, 셋째 화평 등등
이런 식으로 제 각기 다른 아홉 가지 열매를 맺으시고자 하는 것이 아니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한 인격을 내 안에서 만드시고자 합니다.
성령님께서 이것을 달성하시게 되면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이 갖추고 있는 아홉 가지 특성 전체가
자동적으로 우리 안에서 생겨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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