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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 개념이 부각되고 있습니다 Mike Bickle

LNCK 2011. 6. 21. 21:21

◈‘신부’ 개념이 부각되고 있습니다     계22:17       Mike Vickle 목사님 설교녹취 출처 36~51분


대세와 흐름과 트랜드를 읽어야 합니다.

그걸 못 읽으시면... 선두 그룹에서 뛸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신부’ 개념이 발달하고 있습니다.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계22:17


▲‘신부’라는 개념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왜 특별히 ‘신부’라는 표현을 썼을까요?

그리스도의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계시록의 본문은, ‘성령과 가족’  우리는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성령과 군대’  우리는 하나님의 군대입니다.

‘성령과 몸’ 우리는 하나님의 몸입니다. 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고, 다 맞는 말입니다만

특별히 ‘성령과 신부’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그 이유는,

(우리는 주님의 가족/군대/몸/편지/향기/제자이지만)

재림하시는 주님을 맞이할 때는, ‘신부’로 맞이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그리스도의 신부>가 대세입니다.

과거에 우리 교회는, ‘하나님의 군대’로서 성도의 정체성을 강조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리스도의 신부’로서의 성도의 정체성이 더 대세입니다.


왜 그렇게 변화되었을까요?

‘아마’ 재림이 더 가까이 왔다는.. 하나의 표징이라고 봅니다.

 

성도들이 전에는, 거의 쓰지도 않던

‘그리스도의 신부’라는 표현을,

이제는 ‘그리스도의 몸/군대/제자’보다도 더 쉽게, 자주 사용하고 있습니다.


오래 전에, 하나님께서는 제게

‘너 Mike Vickle는 교회가 그리스도의 신부임을 가르쳐라’는 감동을 주셨습니다.


그때 저는 ‘주님, 저는 그렇게 못해요.

왜냐면 제 아빠는, 권투 세계 챔피언이잖아요.

저는 터프한 가정에서 자랐어요. 신부 같이 섬세한 것은.. 제가 잘 몰라요.’

하면서, 처음에는 좀 거부했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제게 특별한 감동을 주셔서,

‘신부’에 대해 점점 더 연구하고, 제가 먼저 체험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아직 ‘신부 개념’이, 지금처럼 그렇게 편만하지 않았었거든요.


▲신부는.. 친밀함을 의미합니다.

과거의 저처럼, 오늘날 많은 남자들은

‘뭐, 제가 신부라고요? 저는 터프한 남자인데요?’ 하고 의아해 하실 것입니다.

(이건 남자 형제들보고, 여성스러워지라는 뜻이 아닙니다.)


‘신부’란 개념은,

특별히 <친밀함, 관계>를 나타내는 은유입니다.


‘아들’은 ‘권리’를 나타내는 은유입니다.

'아들' 개념도, 아버지와 친밀함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신부보다는 못하지요.

'아들' 개념은, 하나님의 모든 권리를 상속받는 자를 나타냅니다.


그 <친밀함>이란.. 특별히 감정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신부로서 느끼는 것입니다.


▲다윗은 큰 용사이면서, 신부였습니다.

어느 누구도, 다윗처럼 용맹스런 용사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구약에서 보면, 어느 누구보다도 하나님의 마음에 가까운 자였습니다.

‘하나님의 신부’였다는 뜻이지요.


그가 지은 시편들을 보십시오.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은 사람입니다.

그는 전심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했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처음에

‘저는 권투 세계챔피언 가정에서 터프하게 자라서, 신부에 대해선 잘 모릅니다’

라고 하나님께 불평했던 것은.. 아직 개념정리가 안 돼서 그랬던 것이지요.


용맹한 용사이면서, 하나님과 친밀했던 다윗을 생각해 볼 때,

‘신부’라는 개념은.. 남자가 여성화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하나님과의 친밀함, 감정, 가까운 교제를 의미합니다.



◑‘신부’ 개념은.. 재림이 다가올수록, 더욱 부각될 것입니다.


▲주님은, 신부의 신랑으로 재림하십니다.

이제까지 우리는, 재림하시는 주님을, <큰 능력을 가지신 백마를 타시고 오시는 용사>..

주로 이런 측면으로만 이해해 온 경향이 강합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를 갈망하고 원하는 신랑>이라는 개념은.. 많이 무시했습니다.


주님은, 여러분을 일꾼처럼 부리는use 데만 관심 있지 않습니다.

주님은, 여러분을 군대처럼 싸우는데만 관심 있지 않습니다.


신랑이신 주님은,

신부이신 여러분과 친밀한 교제를 원하십니다.


주님은.. 무조건 일벌레처럼 일만 열심히 하는 성도를 원하시는 게 아니라,

주님 마음에 친밀하게 가까이 다가오는.. 신부 같은 성도를 원하십니다.


▲과거에 우리는 <일꾼, 청지기> 이런 개념을 선호했습니다.

세계적인 분위기가 ‘열심히 일하는 사람, 근면한 사람’에게 높은 점수를 주었고,

그런 세상적 문화의 분위기에 발맞추어,

교회에서도 ‘일 많이 하는 성도가, 잘 믿는 성도’라는 개념이 강했습니다.


그래서 목회자나 성도나 선교사나

어떤 일에 자신을 혹사시키면 시킬수록.. 그의 경건성이 존경받았습니다.

물론 일면 사실입니다. 성도는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그러나 머슴처럼 일만 열심히 하는’것이.. 성도의 일차적 부르심이 아닙니다.

일차적 부르심은.. <관계>에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신부이며, 그의 아들이며, 그 분의 형상(거울, 반사체)입니다.


먼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진 가운데서

일은.. 그 다음에 열심히 할 분야입니다.


여러분은, 배우자가, 남편/아내에게는 별로 관심도 없이

밖에 나가서 일만 열심히 하기를 .. 원하십니까?


여러분은, 자녀가, 아빠/엄마와의 친밀한 관계에는 아무 관심도 없이

무조건 학교, 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하며, 공부만 하기를 원하십니까?


▲이렇게 <관계>를 깨닫게 되면, 일을 하는 차원이 달라집니다.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마음으로.. 일하며  건성으로 일하지 않고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 일하며  자기 업적을 위해 일하지 않고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일하며 

일을 많이 안 해도.. 스스로 자유롭습니다.  관계가 일보다 더 중요하니까요..


일을 하기 위해서, 교회 형제들과 다투지 않습니다.  일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관계입니다. 하나님은 일보다, 이웃과 관계를 원하십니다.

업적을 이루기 위해서, 가족들을 괴롭히지 않습니다.

                  주님과 관계에서 만족하는 사역자는, 가족을 자기를 위해 희생시키지 않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인정받고, 사랑 받기 위해서.. 일하지 않습니다.

이미 주님을 사랑하고 있는데.. 주님께 인정받으려고 애쓰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일은 하지만.. 아주 자유롭습니다. 성령 안에서요.



◑그래서 ‘경배와 찬양’이 더욱 활성화되고 있습니다.


주님의 재림이 가까울수록, 이 <관계, 신부>로서의 성도의 정체성은

앞으로 더욱 중요하게 부각될 것입니다.


재림이 가까워질수록,

주님이 얼마나 성도를 신부로서 기뻐하시고, 사랑하시는 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앞으로 미래에는 더욱 더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가.. 주님을 더욱 더 사랑하고, 친밀히 교제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주님을 <신랑>으로 이해할 때,

무슨 <신랑으로서의 역할, 기능 function>에만 초점을 맞추지 마십시오.

대신에 신랑의 하트, 마음, 감정, 친밀함에 초점을 맞추십시오.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우리를 부르신 것은,

하나님의 하트, 마음, 감정, 친밀함을.. 신부와 나누시기 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이 사실을 가장 중요하게 가르치셨습니다.

마22:37~39절에,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크고 첫째 되는 계명임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런데 사실 지난 20세기 교회는,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가장 중요한) 계명’임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가장 중요하게 부각시켜 강조하지는 않았습니다.


당시 시대사조가.. 모두 <성장, 성장, 일, 일, 근면, 성실>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회적인 분위기 가운데,

<주님을 온 맘을 다해 사랑해요!> .. 이런 개념은 좀 과장되게 표현하면

마치 게으른 배짱이의 변명처럼 무시를 당해 왔습니다.


역사에 어떤 ∽자 모양의 싸이클이 있어서 그런가요?

지금 21세기에는, 영성(감성적 분야)을 점점 중시하고 있습니다.

이성에만 치우쳐 왔던 서구사회도.. 점점 감성으로 돌아서고 있습니다.


어쨌든 기독교계에서도,

지난 세기에 <이성의 지나친 강조>로 무시되어 왔던

<감성>분야가 점점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습니다.


‘온 마음과 정성과 뜻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정말 가장 크고 중요한 계명으로.. 비로소 인식하게 된 것입니다.


▲지금 세계 기독교계가 변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재림이 가까울수록,

교회는.. 자기 자신이 주님께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점점 깨달아가고 있습니다.

성도는.. 자기 자신이 주님께 얼마나 사랑스런 존재인지를.. 점점 알아가고 있습니다.


<관계>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점점 인식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일>보다요!


일례로, 과거에는 큰 교회를 이루고, 많이 모이는 것을 .. 최고로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과거처럼 그렇게 큰 것만을 최고로 인정하지는 않습니다.

시대가 <감성 사회>로 변화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개개인/ 개교회도.. (비록 작아도)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 소중한 존재임을 깨달아가고 있습니다.

지금은 업적, 성취보다.. <관계>가 대세로 바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분위기에 맞물려 <경배와 찬양과 기도>운동이, 세계적으로 세차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 내용은 중보기도와 경배찬양의 부흥 을 클릭해서 보세요!



★<그리스도의 신부>를 잘 표현하는 추천 찬양 http://blog.daum.net/rfcdrfcd/75827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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