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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 거주자들처럼

LNCK 2011. 7. 1. 21:31

◈외국인 거주자들처럼        요17:15, 히11:13         출처보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히11:13

 

▲비정규직, 스패어 운전기사를 자처한 이유

지금부터 50년 전 이야기입니다.

류호준 목사의 아버지는 42살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평생 버스 운전수로 살았습니다. 

 

당시 내가 살던 시골 동네는, 한 시간 반마다 한번 꼴로 다니는 시외버스가 있었습니다.

5대가 전부였습니다.

 

아버지는 버스 운전수였지만, 정규직은 아니었습니다.

정규직 운전수가 휴무이거나 아파서 못나오게 되면

대타로 운전대를 잡는 대기 운전수였습니다.

당시에는 ‘스페어’(spare)라고 불렀습니다. 대기운전수란 뜻이었습니다.

 

저는 당시 어려서 왜 우리 아버지가 정식 운전수가 아닐까 하고 의아했습니다.

동네 친구들에게 창피하였습니다.

동네를 다니던 버스가 모두 5대밖에 안되었기 때문에

고정 운전수가 누구인지, 스페어 운전수가 누군지 다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아버지에 대해 한 가지는 확실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아주 신실한 ‘예수쟁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주일이면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 식구 6명 전부를 데리고 교회에 갔습니다.

걸어서 족히 40분 이상 되는 거리를

신작로와 논두렁을 타고 멀리 읍내의 교회까지 갔습니다.

 

당시 시골 동네에는 미신 숭배가 얼마나 많았는지

이삼일 걸러 동네 여기저기서 고사를 지내곤 하였습니다.

시골 동네에 거의 유일한 예수쟁이는 우리 아버지였습니다.

 

동네 사람들의 수군거림의 제 일호는 언제나 우리 아버지였습니다.

그런 그가 스페어 운전수 노릇을 하고 있었으니

어린 나의 자존심 역시 몹시 상했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스페어 운전수로 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거의 40년이 지난 얼마 전 저는 깜작 놀랄만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숙부(친척 어른)가 제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었습니다.

“너는 왜 네 아버지가 스페어 운전수로 있었는지 아니?”

“아마 고정적 자리가 없었거나, 아니면 운전 실력이 모자랐나 보지요”

하며 가볍게 웃으면서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숙부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아니야, 정규직 운전수로 일할 수도 있었는데

네 아버지가 스페어 운전수를 자원한 것이야.

이유는 단 한 가지, 주일에 교회에 가기 위해서였어.

주일성수(主日聖守)를 위해서였단다. 그렇게 신앙에 대해선 철저했단다.

 

당시는 정규직 운전수라도 일요일에 운행순번이 돌아오면

무슨 일이 있어도 운행을 해야 했지.

그러나 스페어 운전수는 못한다고 하면 할 수 없었기 때문이야.

 

일요일에 일을 못하겠다고 하니 다른 평일에도 일거리를 주지 않았지.

그래서 너희가 힘들게 살았던 거야.”

 

크리스천들이, 이 땅에서 외국인 거주자처럼 산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제가 알게 되었습니다.

 

※위 일화는, ‘주일성수에 관한 신학’을 설명함이 아니요,

그만큼 ‘크리스천으로서 세상과 구별되고, 신앙을 순수성을 지키려고 애씀’을 설명합니다.

 

 

◑크리스천의 삶의 두 가지 모델

 

기독교인의 삶을 굳이 모형론으로 하자면 2가지 모형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1. 순례자의 모델입니다.

순례자란 존 번연의『천로역정』(天路歷程, Pilgrim's Progress)에 잘 묘사되고 있는

주인공 ‘크리스천’의 모습입니다.

 

이 모델의 강조점은 이 세상과 결연한 결별입니다.

크리스천이라 이름 하는 사람이 ‘악한 도성’

-한글로 장망성(將亡城)으로 번역했는데, 그 뜻은 장차 멸망하게 될 마을이라는 뜻입니다.-

을 떠나 다른 세계에 있는 우리의 진정한 집으로 가는 과정을 그린 작품입니다.

 

이처럼 천로역정(순례자의 여정) 모델에 따르면

이 세상은 무엇보다도 위협이요 전염성의 근원이기 때문에

크리스천들은 전염되지 않고 깨끗하게 남아있어야 합니다.

 

세상은 악한 곳이고 이곳에서 하루 속히 떠날 준비를 해야 하는 것이고

가치 있는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이 세상과 철저하게 결별하는 것입니다.

 

천로역정 모델은 이미 롯과 그의 가족 이야기 안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그들은 악의 도시인 소돔에서 도망쳐 나와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 세상과 철저하게 단절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므로 천로역정 모델은 아주 성경적인 근거가 있는 모델입니다.

 

▲2. 기독교인의 삶을 대변하는 두 번째 모델로는 요나 모델이 있습니다.

구약의 예언자 요나를 기억해 보십시오. 여기에 중심무대는 악한 도시 니느웨입니다.

천로역정처럼 악한 도시가 중심무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요나에게 악한 도시로 들어가라고 명하십니다.

 

이야기의 끝부분에 나오는 요나의 모습이 어떠했습니까?

그 악한 도시가 멸망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요나입니다. 그는 기분이 몹시 상했습니다.

멸망해야 마땅한 그 도시가 망하기는커녕 오히려 사람들이 회개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불평과 불만으로 가득한 요나에게 하나님께서 탄원하십니다.

 

      ․ 내가 이 큰 도시를 관심두지 말아야 한단 말인가?

      ․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천진난만한 어린아이들과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겠느냐?

 

요나 모델 역시 성경에 근거를 둡니다. 예를 들어, 호세아를 보십시오.

하나님은 그에게 가서 음란의 여성을 취하여 아내로 삼으라고 했습니다.

이와 같이 요나도 니느웨라는 악한 도시 속으로 보냄을 받았습니다.

 

이 두 가지 모델 - 천로역정 모델과 요나 모델 - 은 서로 충돌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모델은 모두 성경적 근거가 있습니다.

 

이처럼 여러분 앞에는 두 가지 모델, 두 가지 방향이 있습니다.

이 두 가지 모델 중,

      ․ 하나는 도시를 떠나는 것이고,

      ․ 다른 하나는 도시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하늘 식민지 모델

 

어떻게 이 두 가지를 연관시킬 수 있습니까?

사도 바울은 이 두 가지 모델을 하나로 묶었습니다.

빌립보 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랬습니다.

그곳에서 바울은 우리 크리스천들을 가리켜 “우리는 하늘의 식민지입니다”라고 하고 있습니다.

 

   ․ 하늘 식민지(植民地, colony)는 해안 교두보와 같습니다.

   ․ 하늘 식민지는 상륙거점과 같습니다. 그곳으로부터 전선이 시작되어

      이 세상으로 밀고 들어갑니다.

   ․ 하늘 식민지는 전방 초소요 전진기지(outpost)입니다. (한국에 있는 미군캠프를 연상하세요)

 

   ․ 하늘 식민지는 다른 문화 한 가운데 떠있는 또 다른 문화의 섬입니다.

   ․ 하늘 식민지는 고국의 가치들이 보존되고 유지되고 다음 세대에 전수되는 곳입니다.

 

   ․ 하늘 식민지는 ‘외국인 거주자’(resident aliens)들의 독특하고도 유별난

      삶의 방식(라이프스타일)이 보존되고 배양되는 곳입니다.

 

▲크리스천들은 외국인 거주자들입니다. 크리스천들은 하늘의 식민지 거주민들입니다.

크리스천들로서,

   ․ 우리는 이 세상 문화에 대응하는 ‘대응 문화’(counterculture)를 형성합니다.

   ․ 우리는 다른 문화 한 가운데 떠있는 또 다른 문화의 섬입니다.

 

2, 3세기의 무명의 크리스천이 남긴 말을 들어보십시오.

그때에도 그랬겠지만 지금도 너무도 적실성이 있는 말입니다.

외국인 거주자들이 어떻게 행동해야하는지를 잘 보여주는 말입니다.

 

크리스천들은 다른 사람들도 구별됩니다만

국적이나 언어나 습관이나 풍습으로 구별되는 것은 아닙니다.

크리스천들은 자기들만의 도시 안에 살지 않습니다.…

모든 외국 나라와 낮선 땅들은 모두 그들의 조국입니다.

 

그러나 모든 조국은 그들에게 언제나 낮 설고 물 설은 외국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러듯이 그들도 결혼하여 자녀를 갖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자녀들을 내버리지는 않습니다.

 

그들은 공동의 식사 자리를 만듭니다만

공동의 침대를 갖지는 않습니다.

 

그들의 운명은 “육체 안에” 던져졌지만

그러나 그렇다고 “육체에 따라서” 살지는 않습니다.

 

 

그들은 이 땅에서 시간을 보냅니다만

그들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습니다.

 

그들은 정해진 법들에 순종하지만

모든 사람들에게 박해를 받습니다.

 

그들은 오해받고 살지만 그들은 정죄됩니다.

그들을 조롱받지만 축복합니다.

 

크리스천들로서 우리는 ‘외국인 거주자들’(resident aliens)입니다.

천국의 식민지 세상에 사는 거주자(colonist)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기도는

아버지께서 우리를 이 세상에서 데려가 달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이 세상 안에서 보존하고 보호해달라고 하신 것입니다.

 

“나의 기도는 하나님께서 너희를 이 세상에서 데려가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너희를 악에서부터, 악한자로부터 보호해달라고 하는 것이다” 요17:15

 

외국인 거주자들은 이 땅에 살면서 그들만의 관습과 억양과 행동양식이 있습니다.

그들은 그 땅의 본토인들에게 언제나 소외(왕따)를 당합니다.

 

      ․ 본토인들은 그들의 걷는 모습을 보고 웃습니다.

      ․ 본토인들은 그들이 말하는 억양을 듣고 웃습니다.

      ․ 그러나 외국인 거주자들은 그들만의 문화를 만들어 가며 삽니다.

      ․ 그들의 유래한 나라로부터 가져온 생활양식과 가치관을 갖고 삽니다.

 

그 땅의 사람들이 뭐라고 해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왕따를 당해도 웃어넘깁니다.

‘왕’을 따르는 사람들이 반드시 겪어야하는 과정으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왕을 따른 사람들은 원래 따로 노는 법이라고 하며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는 자기들의 속한 나라가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그 나라를 생각하면 마음에 울렁거림을 금치 못합니다.

그 나라에게 대한 그리움으로 눈물짓곤 합니다.

 

크리스천은 루이스(C. S. Lewis)가 잘 표현한대로 

“위로할 길이 없는 비밀 inconsolable secret”을 간직하며 사는 나그네요 순례자들입니다. 

 

▲세상이 편하게 느껴지면.. 나는 천국 백성이 아닙니다.

하늘의 식민지, 하늘이 전진기지에 사는 여러분이

혹시라도 이 땅의 사람들의 언어습관이나 사고방식이나 그들의 가치관을 보면서도

전혀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고 오히려 자연스런 것처럼 느껴진다면

여러분은 이미 이 땅에 상당히 동화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 땅의 사람들의 말투나 생각하는 방식이나

옷 입는 모습이 생소하거나 이상하게 보이거든

여러분은 아직도 외국인 거주자로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 점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시면서 사십시다.

 

 

◑나그네의 정체성은 ‘전쟁’

 

여러분들은 예전과 같이 지금도, 이 세상이 기독교인들의 삶의 방식에 대해,

외국인 거주자의 도덕성에 대해 전쟁을 선언하고 있음을 알 것입니다.

 

      ․ 예수 말고도 다른 구원의 길이 있다.

      ․ 좀 편하게 신앙생활하지 뭐 그렇게 살 이유가 있는가?

      ․ 세상의 가치관에 대해 어느 정도 타협하고 살아도 되지 않는가?    

      ․ 마약과 섹스도 자유다.

      ․ 낙태는 여성의 자유이다.

      ․ 모든 종류의 권위는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다

 

이렇게 외치는 세상 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람을 뿌렸더니 회오리바람을 거두고 있습니다.

 

      ․ 자기만족을 위한 신앙생활이 주류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 더 이상 예수쟁이라는 말을 듣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 익명(匿名)의 크리스천으로 남아있기를 바랍니다.

      ․ 자기희생이 없는 종교생활로 전락하고 있습니다.

      ․ 마약과의 전쟁에서 지고 있습니다.

 

      ․ 동네와 마을의 범죄율이 점점 높아져가고 있습니다.

      ․ 십대의 임신율이 높아져가고 있습니다.

      ․ 사방에서 낙태가 이루지고 있습니다.

      ․ 성에 대해 매우 자유분방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 더 이상 권위에 대해 순종하지 않는 시대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 대해 심각하게 반응하고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주님을 위해서라면, 우리의 왕을 위해서라면

우리는 기꺼이 ‘왕따’ 당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기도는

 

      ․ 우리에게 이 세상을 포기하고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

      ․ 우리에게 세상과 담을 쌓고 살라는 것도 아닙니다.

      ․ 이 세상에서 도피하여 산속으로 들어가라는 것도 아닙니다.

 

      ․ 이 세상에서 그분의 증인들이 되라는 것입니다.

      ․ 이 세상에 빛을 비추는 방식으로 그렇게 살라는 것입니다.

      ․ 이 세상에 빛을 비추는 방식으로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나의 기도는 하나님께서 너희를 이 세상에서 데려가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너희를 악에서부터, 악한자로부터 보호해달라고 하는 것이다” 아멘. 요17: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