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3편 모두 펀 글
◑1. 새 창조 이사야65:13~25 출처
사65:17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18 너희는 내가 창조하는 것으로 말미암아 영원히 기뻐하며 즐거워할 지니라.’
하나님은 예루살렘을 새롭게 하셨다. 부서진 곳을 고치는 수준이 아니시다.
무너진 곳을 다시 세우는 수준이 아니시다. 다시 '창조'하셨다. 다시 시작하셨다.
이전의 예루살렘이 아니다. 전에 있던 모든 것은 잊으시라.
기억도 하지 말라. 여호와의 눈에 가려졌다.
이제는 새것으로 시작하고, 이제는 새 이름으로 불리고,
“태초에” 아무도 없이 하나님께서만이 홀로 그렇게 시작하신 것처럼
예루살렘도 그렇게 시작(새 창조)하신다.
이름만 새로 붙인 것이 아니다. 이전의 모든 기록은 삭제다. 기억하지 않음이다.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사65:17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것처럼
‘새 하늘과 새 땅을 그리고 새 예루살렘을 창조하신다... 새롭게 시작하신다.
▲하나님께 ‘다시’라는 말이 어울리는 것일까 생각해봤다.
‘다시’라는 말은.. 실패하거나 의도하지 않은 결과가 있을 때 쓰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실패하시고 하나님께서 의도하지 않은 일이 있을 수는 없다.
그런데 하나님은 ‘다시’ 시작하시는 느낌이다. (창조)
잘 생각해보니 하나님께는 ‘다시’가 아니시란다. ‘새 것’이란다.
새 하늘 새 땅 새 예루살렘. 하늘과 땅 사이에 있는 모든 것이 새 것이다.
심지어는 하나님도 새 것(하나님)이다. 이전 일을 기억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시다.
새로운 하나님이시다. 새로운 하나님이 일하시니 모든 것이 새롭다.
▲오늘 나의 삶도 새롭게 하실 하나님을 믿는다.
하나님께는 모든 순간이 태초의 순간이며 모든 일들이 창조의 과정이다.
여전히 창조하시고 아직도 창조하시고 날마다 창조하신다. 그래서 새롭다.
오늘도 어제를 기억하는 오늘이 아니다. 하나님 안에서 새로운 날이다.
새로운 창조다. 새로운 예루살렘, 즐거운 성안에서 사는 새 삶이다.
새 하늘과 새 땅의 역사는, 오늘 내게서 매일 일어난다. 그러기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
오늘도 과거로 인해 즐거움과 기쁨을 잃어버리지 말고
새로운 삶에서 새로운 인생으로, 즐거움과 기쁨의 삶을 살라고 하신다.
하나님의 다스리시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에서
즐거움으로 가득한 삶을 살게 하실 하나님을 찬양드린다.
◑2. 사도들이 미리 한 말을 기억하라 유다서 1:17 출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의 미리 한 말을 기억하라.’ 유1:17
▲살아가다보면 기억에 남는 가르침을 준 사람들이 있다.
평생 지침이 되는 말이나, 현실적으로 고민하던 문제에서 도움이 되었던 가르침들이다.
중요한 갈림길에서, 힘겨운 일 앞에서,
깊은 내면의 문제에서 빛처럼 도움이 되었던 분들의 말씀을 기억한다.
삶의 경험에서 나오는 깊은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본문은 사도들이 미리 한 말을 기억하라고 한다.
이는 사도들에게서 전해들은 기억에 남는 말이다.
일차적으로 이것은, 성경말씀을 뜻하며,
부차적으로 이것은, 지도자의 교훈을 뜻한다.
이 말은 공동체 안에서 자신과 타인에 대해서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지 결정하는 지침이 된다.
▲아무리 언변이 좋아도 기억나지 않는 말이 있다.
유창하다고해서 남는 게 아니다. 때로는 멋 없는 말이 기억에 남는다.
왜일까? 말에는 무언가가 있다.
단순히 의사소통과 생각을 전달하는 도구 이상이다.
말은 진심을 담는다. 말은 사랑을 담는다. 말은 마음을 담는다.
기억에 남는 말은 언어 이상이다. 기억에 남는 말은 인격과 신앙에 도움을 준다.
그러나 아무도 기억에 남는 말을 억지로 만들 수 없다.
일부러 꾸며내는 순간에 말은 상품으로 전락하고 만다.
유행처럼 소비되고 말 뿐이다.
▲그러면 기억에 남는 말은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일까?
'사도들이 남긴 말'은 사도 자신을 위한 말이 아니었다.
사도의 말은 공동체와 성도의 유익을 위한 말이었다.
‘성도 수혜주의 원칙’에 충실했다고 해야 하나?
자신을 드러내는 도구로 사용했다면, 공동체에 유익함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본문에서 교회가 기억하고 지침으로 삼을 수 있었던 사도들의 말은
사랑과 긍휼에서 비롯한 말이었음이 분명하다.
누구라도 겸손히 받아들이며 마음을 모을 수 있었던 가르침이었을 것이다.
▲급하고 답답할 때마다 찾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반면에 만나지 못해도 평생 기억나는 사람이 있다.
사도들은 그런 사람들이다. 평생 기억해야 하는 가르침을 전해준 사람.
내게도 그렇게 기억나는 분들이 있음을 감사하며
능숙한 말솜씨가 아니라 진실과 사랑의 언어를 담는 사람이 되기를 다짐해본다.
◑3. 교회와 선교 행17:10~15 출처
10. 밤에 형제들이 곧 바울과 실라를 베뢰아로 보내니...
14. 형제들이 곧 바울을 내보내어 바다까지 가게 하되...
15. 바울을 인도하는 사람들이 그를 데리고 아덴까지 이르러...
데살로니가에 이른 바울 일행은 유대인의 회당에서 세 안식일에 복음을 전한다.
유대인들은 시기가 나서 바울과 실라를 잡으려고 했으나
데살로니가에 있는 형제들이 밤에 몰래 베뢰아로 보낸다.
베뢰아에서도 유대인의 회당에서 말씀을 전하는데,
이 소식이 데살로니가에도 전해져서
데살로니가에 있는 유대인들이 베뢰아에도 와서 무리를 소동하게 한다.
베뢰아에 있는 형제들이 바울을 먼저 내보내고 실라와 디모데는 남는다.
그렇게 바울은 형제들 덕에 아덴까지 이르게 된다.
베뢰아로 갈 때는 데살로니가 형제들의 도움을 받고,
아덴으로 갈 때는 베뢰아 형제들의 도움을 받았다.
사도행전을 통해서 새롭게 깨달아지는 사실은
선교란 '개인'의 영역이 아니라, '교회'의 영역이라는 사실이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복음을 모르는 베뢰아로 바울을 보냈다.
그냥 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사역에 필요한 것을 모아서 보냈을 것이다. 그리고 계속 기도했을 것이다.
베뢰아에 가서도 다른 도시(아덴)로 갈때는, 베뢰아 형제들의 도움을 받았다.
사도바울은, 형제들에게서 선교 장소와 선교의 길도 안내 받는다.
이것은 교회가 나서서 선교의 일을 진행하는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바울을 비롯한 전도일행들이 앞서지만,
배후에 있는 교회의 뒷받침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들이다.
교회의 숨은 헌신이 바울의 선교여행을 가능하게 했다.
교회의 숨은 헌신이 선교의 사역을 행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교회의 목적이며, 사도행전적 교회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단순히 주보에 몇몇 선교지를 돕는다는 식으로 교회가 선교를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없듯이,
우리교회에도 선교에 대한 숨은 헌신이 있을 때, 열매 맺는 선교의 사역이 가능하리라고 믿는다.
목회의 사역이 개인의 사역이 아니라면, 선교의 사역도 개인의 사역이 아닌 것이다.
홀로 맨땅에 헤딩하는 선교는 바울 시대에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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