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투예루살렘 비전의 선각자 시몬 조 롬11:29, 사54:1~5 출처보기
백투예루살렘 비전은, 1940~43년 사이에 받았는데,
그 비전이 3~5년 후에 즉시 이루어진 게 아니라,
즉시 다가온 것은 40년간의 고난과 순교이었고,
실제로 이루어진 것은.. 40년 이후였습니다. (1980~)
아래 글의 시몬 조는,
마치 밧모섬의 사도요한처럼 유일하게 살아남아서
1981년 석방 이후부터, 백투예루살렘의 비전을, 온 중국 전역에 전파했습니다. 40년 이후에 말입니다.
◑젊은 시절
시몬 조(Simon Zhao)는 30살의 젊은 나이였지만
노스웨스트 성경학교에서 일어난 백 투 예루살렘운동의 복음지도자로 임명되었다.
1940년도 시몬 조는 퀸(Qing) 왕조 때 정부 고관을 지낸
명망 있는 가문의 웬 물링(Wen Muling)이라는 젊은 여성과 결혼을 했다.
이들 부부는 소련과 인접한 중국 북서쪽 국경에서
중국 전역으로 복음을 전하는 소그룹을 이끌었으며
이들은 중국이 대외적으로 혼란을 겪던 어려운 시기에
국경선 부근에서 많은 군인들을 만나 복음을 전했다.
또한 산둥성(Shandong)에서 신장(Xinjiang)까지
인적이 없는 사막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걸어서 복음을 전했다.
▲시몬 조는 선양에서 기도하는 중에 첫 번째 비전을 발견했다.
기도하던 당시는 한겨울이었으며, 눈이 너무 많이 쌓여 문을 열수 없었다.
3명의 신도들은 중국 지도상의 신장(Xinjiang) 북서부에
하나님의 관심이 집중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후에 시몬 조는 난징으로 간적이 있는데,
그곳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신장 지역에 복음을 전하라는 비전을 받은
다른 그리스도인을 만나 함께, 사역하기로 결정했다.
첫 번째 그룹은 이미 떠나 신장에서 함께 사역하고 있었으며,
두 번째 그룹은 (시몬이 속했음) 난징을 떠나 산시(Shaanxi)를 경유하여 신장으로 여행하였다.
세 번째 그룹은 산동성 출신인 주 콘젠(Zhu Congen)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시몬 조의 일행은 천신만고 끝에 신장(Xinjiang)의 동부지역인 하미(Hami)에 도착해,
2년 전에 도착해 사역하고 있던 노스웨스트 성경학교 그룹과 합류했다.
1950년도 겨울에 시몬 조는 헤타인(Hetain: 신장의 서부에 위치한 마을)으로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 들어가기 원했다.
그러나 2주 후 공안은 그들에게 떠날 것을 명령하였고
그들은 그 곳을 떠나야만 했다.
이후 그들은 Kashgar에서 더 서쪽으로 떨어진 곳으로 옮겨갔다.
◑31년간 투옥
▲카쉬카르에서 체포, 투옥되다.
1950년은 그들에게 혼돈의 시간이었다.
복음이 반혁명적인 것이라고 주장하는 군인들에 의해 인계된 시몬은
영문도 모르는 채 체포되어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백투예루살렘 그룹의 각 멤버들은 각각 다른 기간의 형을 판결 받았다.
다섯 명의 지도자들은 매우 혹독한 판결을 받았으며
그 중 시몬은 사형을 면한 유일한 지도자였다.
그의 아내는 체포 당시 임신 상태였으나 곧 유산하였다.
그리고 그녀는 1959년 여성 수용소 감옥에서 죽었다.
하지만 1973년까지 그 누구도 시몬에게 그 사실에 대해 말해주지 않았다.
Kashgar의 강제노동 수용소에서의 몇 달간,
교도관들은 시몬의 신념을 훼방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들은 시몬이 기도하지 못하게 했고 기도하는 것을 보면 때렸다.
하지만 그는 기도를 멈출 수 없었고
아무도 보지 않을 때 몰래 기도하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
교도소 측에서는 그가 기도하는 것을 보지 못했으므로 그가 변했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전직 작가였던 그에게 공산주의 계도의 효과를 찬양하는 글을
교도소 신문에 기고하게 하였다.
그는 기사를 쓰기 시작했고 교도소 당국은 매우 기뻐했다.
그러나 그의 기사를 보고 속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교도관들은 매우 분개하였다.
그의 글은 바로 예수님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시와
그가 못 박히신 십자가의 스케치였다.
교도관들은 그의 등을 무거운 나무벤치로 때렸다. 무자비하게 때리며 발로 찼다.
지방관계당국은 그에게 더 오랜 기간의 형을 판결하였다.
▲시몬은 강제노동 탄광수용소로 옮겨졌다.
그곳은 대부분의 수용자들이 무자비하고 고된 일들로 인해 6개월 안팎으로 죽는 곳이었다.
그들은 작고 약한 사람은 결코 감당 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양의 석탄량을 요구하였다.
탄광에서 석탄을 캐는 것 뿐 아니라 등에 바구니를 매고
광산에서 그 석탄들을 운반해야 했다.
모든 수용자들은 일주일 내내 하루 14시간씩 일하였다.
음식은 빈약하고 고약한 냄새가 났고
여름에는 숨 막힐 듯이 찌는 듯한 더위에서 일을 해야 했다.
시몬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힘으로 기적적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탄광으로 들어 왔고
그들의 대부분은 시몬 보다 강한 사람들이었지만 몇 달 되지 않아 죽었다.
시몬은 그의 동료 죄수들에게 그의 신념에 대해 조심스럽게 증언하였다.
그리고 몇 명은 이를 믿게 되었다.
강제노동 수용소에는 몇 명의 목사들도 있었는데
당국에서는 그들에게 모두 다른 방과 다른 일을 주었고
시몬은 아주 잠깐 동안 그들과 만날 수 있었다.
그는 어떠한 방문자도 만나는 것이 제한된 상태였다.
그는 집으로부터 수마일 떨어져있는 무슬림국경 도시에서
아무도 그를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너를 결코 떠나지도 포기하지도 않는다.”는 하나님의 굳은 약속을 제외하고는
시몬은 매우 외롭고 버림받은 듯한 느낌이었다.
이 지역과 정반대 지역인 고향의 친척들은, 그가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여러 해 동안의 침묵의 시간이 지났고
이제 사람들은 거의 그를 생각지도 기도하지 않았다.
강제노동수용소에서의 가혹한 시간 동안 그는 하늘의 별을 보며
하나님이 그에게 비전을 주신 것과
그 비전은 예루살렘을 향해 동역자들과 함께 복음을 전하는 것이라는 것을 기억하게 되었다.
그 즈음 그는 아내와 뱃속의 아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하지만 다른 동역자들은 어떻게 되었는지 듣지 못했다.
조금씩 시몬은 백 투 예루살렘의 열정과 불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그러나 그에게 비전을 주신 하나님을 결코 부인하지는 않았다.
탄광에서의 고통의 긴 시간 동안 시몬은 거의 죽은 사람이 되었다.
▲강제노동 화학공장으로 옮겨지다.
그래서 당국은 신장의 다른 지역에 있는 화학공장으로 그를 보냈다.
상업적인 공장이었지만 그들은 노동의 주요한 공급원으로 사용되었다.
이 새로운 일은 매일 유독가스와 화학물질에 노출되어 있어
탄광보다 상황이 좋아진 것이라 볼 수 없었다.
일이 끝난 저녁에 감옥으로 돌아온 그는 혹독한 매질을 당했다.
교도관들은 죄수들로 하여금 서로 다른 사람의 행동을 보고하게 하여
서로를 좌절하게 만드는 새로운 계획을 세웠다.
당국은 그리스도인을 미워하였고, 특히 시몬은 이들의 손쉬운 목적물이 되었다.
혹독한 추위인데, 동료들은, 그가 난방이 되는 방에 수용되는 것을 반대했다.
그들은 그의 속옷을 벗기고 눈 내린 추운 곳에 그를 세워두었다.
그리고 문밖으로 그를 밀며 “너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했지.
너의 하나님한테 따뜻한 곳으로 보내달라고 기도하지 그래.”하며 조롱하였다.
처음 몇 분간은 추운 바람이 그의 살을 얼려 버릴듯 했다.
시몬은 주님께 자비를 구하며 울부짖었다. 곧 무언가 신비한 일이 생겼다.
그는 엄청난 온기를 느낄 수가 있었다.
그리고 마치 사우나 안에 있는 것과 같이 그의 땀이 온몸을 적셨다.
그의 발주의의 눈은 그의 몸에서 발산되는 열로 인해 녹기 시작했다.
그는 감방 안에 있는 동료를 불렀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의 눈으로
그의 몸에서 증기가 올라오는 것을 직접 목격하게 되었다.
그때와 같은 극적인 기적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혹독한 고통을 당했다.
수 백 번씩 그는 무자비하게 맞았다. 교도관은 신장지역의 지독한 무슬림이었다.
그 간수는 유독 시몬에게 잔인하게 굴었다.
그는 중국인들이 '돼지를 먹는 사람들'이라며 싫어했다.
후에 시몬은 그 간수가 그를 때린 것에 대해서 이렇게 묘사했다.
“그들은 나에게 마치 염소를 죽이기 직전에 둘러싸 달려드는 것처럼 대했습니다.”
한번은 그가 심하게 맞고 채여 두개골이 파열되고 의식을 잃은 채 바닥에 쓰러졌다.
무의식 상태에 있는 동안에도 그는 주님이 말씀하신
“내 사랑하는 아들아 내가 너와 함께 있다. 그리고 나는 너를 절대 떠나지 아니할 것이다”
라는 비전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다시 의식을 회복 했을 때 그는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알 수 없었다.
머리가 어지러웠고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조차 알 수 가 없었다.
그는 맞았던 머리 부분을 만져보았다.
그리고 기적적으로 머리상처의 피가 다 말라있고, 치유되어 있는 것을 발견 할 수가 있었다.
시몬은 그가 감옥 안에 있었던 31년 동안 거의 매일 맞았다.
오직 거의 마지막 몇 년 -그의 나이 60대- 동안만 육체적인 고문이 없었다.
감옥 안에 있었던 그 오랜 시간 중에, 그는 이런 시를 썼다.
나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겪었던
고통과 아픔을 경험하길 원했네.
옆구리의 창, 심장의 고통
나는 파라오의 전차를 타는 것보다,
나의 다리에 묶인 족쇄의 고통을 느끼길 원하네.
▲31만에 석방
1981년의 어느 날 감옥의 책임자가 시몬을 사무실로 불렀다.
복도를 지나 걸어가면서 그는 혹시나 나의 형량이 늘어나지나 않을까 염려했다.
감옥의 책임자는 시몬에게 앉으라 권한 뒤, 두꺼운 파일을 꺼내놓았다.
그는 담배를 태우며 몇 분간의 침묵이 흐른 뒤 이렇게 말했다.
“중국정부는 너에게 자비를 베풀기로 결정했어.
국가를 대항한 범죄에 대한 관용을 너에게 보여주겠다는 것이지.
나는 너를 풀어줄 권리를 가지고 있고 너는 이제 자유다.”
그 하나님의 사람은 얼떨떨하여 감옥에서 풀려났다.
그리고 이제 다시는 이런 경험을 하지 않기를 원했다.
◑석방 후 20년간 사역
"하나님은 자신의 언약을 신실하게 성취하신다"
▲1981년 시몬이 감옥에서 나왔을 때, 중국은 완전히 변해 있었다.
시몬은 감옥에 수감되어 있어서,
1976년 마오쩌둥이 죽기 전까지 있었던 광기의 문화혁명을 피할 수 있었다.
문화혁명당시 수 백 만 명의 사람들이 광신적인 홍위병에 의해 죽어야 했다.
시몬은 힘없는 노인이다.
그의 몸은 매질과 고문, 힘든 노동으로 인해 매우 쇠약해져 있었으며,
그의 얼굴은 30년 이상 험난한 감옥에서 고생한 것을 사투를 증명하는 깊은 주름이 있었다.
중국 전체의 아무도 그를 기억하지 못했다.
모든 사람들은 31년 전에 그가 죽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실제로 감옥에서 출소했을 땐, 아무도 자신을 기억하지 못했다.
시몬은 살 수 있는 작은 방을 구해, 중국의 서쪽 끝 카쉬카르로
겨우 갈수 있었다. 백투예루살렘 사명에 순종하기 위해서였다.
31년 만에 출소한 그는 무엇을 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시몬은 카쉬카르에 있는 작은방에서 몇 달 동안
약속을 지키시고 결코 포기하지 않으셨던 왕중의 왕이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하며, 조용히 있었다.
시몬은 예수님이 없이는 오래 전에 죽었을 것을 알고 있었다.
살아계신 예수님께서 그를 살아있게 지켜주시고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결코 포기하지 않도록 지키셨다.
시몬은 세상에서는 외로운 사람처럼 보였지만,
예수님은 잠언18:24절 (많은 친구를 얻는 자는 해를 당하게 되거니와
어떤 친구는 형제보다 친밀하니라) 에서 말씀하신 형제보다
더 가까운 친구로서 항상 함께 하셨다.
▲수개월이 지난 후 카쉬카르에 있는 그리스도인도, 마침내 시몬에 대해 알게 되었고
그의 증언을 듣게 되었다.
그들은 간단한 먹을 것과 성경을 주는 등
그들이 할 수 있는 것들로 시몬을 도왔다.
시몬에 대한 소식은 신장에 있는 교회로 퍼져갔다.
곧 복음으로 인해 31년 동안 하나님의 힘으로
믿음을 지킨 기적적인 사람이라는 소식이, 중국의 다른 지역까지 전해졌다.
▲한편 1960년대 말부터 하나님은 허난성(河南省)을 중심으로
수 백 만 명의 지하교회그리스도인에게 하나님의 마음을 넘쳐흐르게 했다.
허난성은 ‘중국의 갈릴리(The Galilee of China)’라는 별명을 가질 정도로
중국 지하교회의 부흥의 중심지로 알려졌다.
허난성의 수많은 가정교회 지도자들은
1940년대에 있었던 백투예루살렘비전에 대해서 들었었지만
선각자들에 관한 지식은 별로 없었다.
허난성 가정교회 지도자들은 31년간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석방된 선각자에 대한 소식을 들었을 때,
그를 만나기를 갈망하고 그로부터 배우기를 원했다.
결국 카쉬카르에서 사역하는 몇 명의 동역자들이 시몬을 만났고,
우리에게 (허난성 지하교회 그리스도인) 시몬에 대한 이야기를 알리는 편지를 보냈다.
카쉬카르에 있던 우리 교회의 일원들은, 시몬을 자신의 아버지와 같이 사랑하였다.
시몬과 아주 밀접한 관계를 가졌으며, 함께 기뻐했다.
시몬 조는 감옥에 있는 31년 동안 믿음의 동역자와 이별만을 경험했지만,
이후 하나님께서 그를 깊이 존경하는 정신적인 아들과 딸들을 주셨다.
카쉬카르 교회의 자매들은 그를 위해 음식을 하고 빨래를 하며 그를 도왔다.
마침내 허난성 가정교회 지도자들은 그를 직접 만나기 위해
중국 전역에서 버스와 기차를 탔고
결국 우리는 하나님의 겸손한 종으로 깨어진 그를 만나게 되었다.
그 당시 우리는 믿는 사람들을 격려하는 신문을 설립했었다.
시몬은 자신의 간증이 신문에 기사화되는 것을 거절하였다.
우리는 중국의 지하교회 그리스도인들에게 긴 고통의 시간을 통해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를 지켜주셨는지를 나눌 필요가 있다며 그를 설득했지만
그는 항상 “나는 나에게 관심이 집중되는 것을 원하지 않아요”라고 말하며 거절했다.
▲1950, 60, 70, 80년대까지 백투예루살렘 비전은 거의 나누어지지 않았다.
이 기간은 생존을 위해 힘쓰고 기도하던 중국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어둠의 시간이었다.
1990년 초 하나님께서는, 시몬에게 50년 전에 주셨던 백투예루살렘 비전을
우리들에게 다시 나누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려주셨다.
우리는 시몬을 설득하기 위해
드보라 자매를 시몬이 있는 카쉬카르로 보내었다.
시몬과의 (카쉬카르에서 허난성으로) 출발은 쉽지 않았다.
“하나님은 나를 서쪽 예루살렘으로 가라고 부르셨어요,
여기는 중국의 가장 서쪽인 신장입니다.
적어도 나는 서쪽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있어요.
그런데, 왜 내가 예루살렘과 더 멀어진 동쪽(허난성)으로 가야 합니까.
나를 카쉬카르에서 생의 마지막을 보낼 수 있도록 해주세요”라고 말했다.
드보라는 매우 고집 센 자매였다.
그녀는 시몬이 어디를 가든지 그를 따라다녔으며,
사랑하는 마음으로 예의를 갖추어 허난으로 가는 것이 어떻겠냐고 재차 물었지만
대답을 들을 수는 없었다.
그녀는 허난으로 가시는 것이 전투의 최전선에서 멀리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중국교회 가운데 다시 백투예루살렘의 비전이 다시 불붙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녀는 시몬이 백투예루살렘 비전을 나누어준다면,
수 천 명의 신실한 주님의 사람들이 예루살렘을 향해 전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득했다.
시몬은 자신이 그녀와 함께 허난으로 돌아가기 전에는
그녀는 결코 물러서지 않을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는 드보라 자매에게 완고한 고집을 주신분이
주님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백투예루살렘의 출발지(산시 성)인근의, 허난으로 돌아오다.
시몬이 동쪽으로(허난성) 돌아가는것에 대해 하나님께 기도할 때,
31년간 감옥 속에서 홀로 외로움을 견디고 고통의 시간이 지난 후
새롭게 치료하신 하나님께서 그에게 성경구절로 확인시켜주셨다.
이사야 54:1~5절
잉태치 못하며 생신치 못한 너는 노래할지어다. 구로치 못한 너는 외쳐 노래할지어다.
홀로 된 여인의 자식이 남편 있는 자의 자식보다 많음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네 장막 터를 넓히며 네 처소의 휘장을 아끼지 말고 널리 펴되
너의 줄을 길게 하며 너의 말뚝을 견고히 할지어다.
이는 네가 좌우로 퍼지며 네 자손은 열방을 얻으며
황폐한 성읍들로 사람 살 곳이 되게 할 것임이니라.
두려워 말라 네가 수치를 당치 아니하리라. 놀라지 말라 네가 부끄러움을 보지 아니하리라.
네가 네 청년 때의 수치를 잊겠고 과부 때의 치욕을 다시 기억함이 없으리니.
이는 너를 지으신 자는 네 남편이시라 그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시며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시라 온 세상의 하나님이라 칭함을 받으실 것이며..
시몬은 중국을 가로질러 허난으로 돌아오는 4일 동안
기차를 타고 오며 잠잘 수 있는 침대칸 자리를 마련할 돈이 없어
작은 공간에서 신문지 위에 웅크려 허난까지 도착했다.
시몬이 허난지역의 지하교회에서 사역하는 동안 능력이 충만했으며,
모든 사람들의 마음가운데 성령께서 주시는 감격이 넘쳤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눈물을 흘리며,
수많은 성도들은 선교사로의 비전을 가지게 되었다.
시몬의 더욱 열심히 사역을 감당했다.
그는 긴 흰머리와 수염을 가진 주님의 성자처럼 보였다.
시몬을 통해 많은 가정교회 지도자들은 백투예루살렘의 비전을 명확하게 알게 되었고
하나님은 백투예루살렘 비전을 완성하기 위해
지도자들 마음가운데 무거운 부담감을 주셨다.
시몬은 2001년 12월 7일, 사랑하는 주님의 성도들 사이에서
83세의 나이로 하나님께 돌아갔다.
▲그의 삶은 돌아보면 주목할 만하다.
그는 요셉처럼 하나님이 주신 원대한 꿈을 가졌었다.
그러나 그 꿈이 완성되기 전에 그는 31년간 감옥에 갇혔으며,
기나긴 침묵 속에서 모든 사람의 기억 속에서 그의 존재는 사라지는 듯 했다.
그는 침묵만 존재하는 감옥 속에서 있었지만
그를 향한 하나님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주님은 시몬에게 보여주신 동일한 백투예루살렘 비전을
중국의 수많은 그리스도인의 가슴속에 뿌리셨다.
감옥에서 나온 후 은혜가 풍성한 하나님께서는
시몬에게 20년간 사역할 수 있는 시간을 주셨다. (허난에서 약 10년간 사역)
중국가정교회 모든 그리스도인은 시몬 조를 주안에서 가장 존경했으며,
하나님은 시몬을 천국의 왕자처럼 지극히 높여주셨다.
시몬은 자신의 생을 마감하기 전에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는 롬11:29절을 깨달았으며,
자신의 전생애를 통해 하나님은 언제나 그분이 시작하신 위대한 계획을
마침내 끝내시며, 언제나 자신의 언약을 신실하게 성취하신다는 것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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