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휼이란? 마5:7 11.06.01.설교일부녹취 1'~15'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5:7
※성경 해석을, 문화적 배경으로 하기 이전에,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원칙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경적 의미의 긍휼이란?
‘긍휼’은 원래 하나님의 속성이다.
하나님이 죄인인 우리들을 불쌍히, 긍휼히, 사랑스럽게 여겨주실 때 쓰는 말이다.
우리가 위 본문 마5:7절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긍휼’이란 단어의 뜻을 정확히 알아야 한다.
예를 들어, 우리 주변에 깜짝 놀랄만한 선행을 하는 분들이 가끔 있다.
자기는 월세나 전세에 살면서, 수 억~수 십 억대의 거금을
고아나 독거노인을 위해서 기부하는 사람들을 본다.
그들은 정말 ‘긍휼’이 많은 사람들이다. 이들은 마땅히 존경받아야 하지만.
그런데 지금 본문에서 말하는 ‘긍휼’은
그런 인간적, 휴머니스틱 차원의 ‘긍휼’을 초월한다. ← 주 논지
이런 사실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라는 본문을 우리가 접할 때,
우리는 자기도 모르게 휴머니스틱 차원의 긍휼로 본문을 이해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면도 포괄적으로 내포하고 있겠지만,
그 휴머니즘 차원의 긍휼이.. 본문이 말하는 진의 眞意는 아니다.
일례로, 바리새인들도 얼마든지 구제를 많이 했다고 성경에 나와 있다. 마6:2등
오늘날에도 불교도, 회교도 가운데, 정말 구제를 많이 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성경 본문이 말하는 ‘긍휼’을 실천하고 있는 사람들인가?
아니다. 그건 휴머니즘 차원의 긍휼이다.
고전13:3절에,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고 말씀했다.
예수님의 사랑, 그 십자가의 사랑 차원에서 우러나오는 것이 아니라면,
휴머니즘적인 긍휼은.. 영 의미가 없지는 않겠지만
성경 본문에서 말하는 ‘긍휼’은 아닌 것이다.
정리하면, 본문이 말하는 ‘긍휼’은
휴머니즘 차원의 긍휼을 내포하지만, 그 개념을 초월하는(훨씬 뛰어넘는)
‘하나님의 사랑/불쌍히 여기심/긍휼’이라는 뜻인데...
성경적 의미의 긍휼, 또는 하나님의 긍휼이 무엇인지 해석하려면,
특별히 구약의 호세아서를 연구해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호세아서에는
구약성경 가운데 ‘긍휼’(라함, 헤세드)이란 단어가, 가장 빈도 높게 나오기 때문이다.
▲호세아서에서 말하는 ‘긍휼’은.. 창녀 같은 고멜을 품고 용납하는 긍휼
아시다시피 호세아서는, 하나님의 역할을 맡은 ‘호세아’와
이스라엘 백성의 역할을 맡은 창녀 고멜의 이야기다.
호세아의 헬라식 이름은 ‘예수’이다. 둘 다 ‘구원자’란 뜻이다.
즉 호세아서는, 예수님의 구원사역을 미리 예표하고 있다.
하나님은 호세아에게, 창녀 고멜과 결혼하라고 명하셨다.
그래서 자식을 낳는데, 그 자식들의 이름에 하나님의 저주가 담겨있다.
첫째는.. 로루하마..
이스라엘의 패역이 너무 심해서,
하나님이 결코 그들을 ‘긍휼히 여기시지 않겠다 no mercy’ 는 경고의 메시지였다. 호1:6
둘째는.. 로암미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다 not my people’는 뜻이다. 1:9
호세아서 2장에는, 그런 하나님의 저주가 더 확실하게 설명되어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을, 자기 정부情夫가 준 것으로 알고 있었다. 호2:5
그런 패역한 창녀와 그의 자손,
그게 바로 이스라엘인데,
내게 그들은 no mercy(로루하마)이며, not my people(로암미)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긍휼이 그 창녀에게 임해서
그 용서 받을 수 없는 창녀가, 하나님의 신부가 되는 것이 ‘구원’이고,
그에게 부어진 것이 ‘긍휼’이다.
-이것은 휴머니즘에서 말하는 긍휼과는 차원이 다르다.
▲계속해서 호세아서를 살펴보면,
이렇게 호1~2장에서,
하나님은 패역한 이스라엘에게 저주의 말씀을 퍼부으신 후에,
‘긍휼’의 말씀을 주시는데, 다음과 같다.
호2:23 내가 나를 위하여 저를 이 땅에 심고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였던 자(로루하마)를 긍휼히 여기며 (라함)
내 백성 아니었던 자(로암미)에게 향하여 이르기를 너는 내 백성이라 하리니 (암미)
저희는 이르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
이렇게 ‘하나님의 긍휼’이 호세아서의 大주제이다.
이 ‘하나님의 긍휼’이 호11장에도 잘 묘사되어 있는데,
‘내 백성이 결심하고 내게서 물러가나니, 비록 저희를 불러 위에 계신 자에게로 돌아오라 할지라도
일어나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 히11:7
-하나님이 돌아오라고 초청해도, 일어나서 돌아오는 자가 한 명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계속 구애하신다.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너를 향해 돌아서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 히11:8
-그래도 버리지 않으시고, 그 긍휼이 불붙듯 하다고 했다.
평생 창녀 짓만 하던 고멜에게,
값없이 부어지는 용서, 용납, 사랑, 회복... 이것이 바로 ‘긍휼’이다.
*한글성경에 인자, 인애, 사랑, 자애 등 여러 말로 번역되었다. 히브리어는 라함, 헤세드
▲정리하면
본문의 긍휼, 호세아서의 긍휼
이것은 휴머니즘의 긍휼이 아니다.
이것은 인간에게서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차원의 긍휼이다.
오직 하나님이, 고멜같은 죄인을 사랑하시고, 용납하시는 차원의 긍휼이다.
즉, 십자가 사랑의 긍휼이다.
물론 예수 안에서 거듭나고, 변화되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고 본받은 크리스천은,
이런 차원의 긍휼을.. 하나님을 본받아 베풀 수 있다.
그 극명한 예를,
우리는 ‘자기 두 아들을 죽인 원수를 양자 삼은’
손양원 목사님에게서 볼 수 있었다.
또한 고멜은 뭘 잘 해서 호세아(예수)의 신부가 된 것이 아니었다.
창녀 짓을 하다가, 결국은 정부에게 다 착취당하고, 노예시장에 팔렸다.
더 이상 갈 데가 없을 정도로, 갈 데까지 간 것이다.
그런데 호세아(예수)가
돈을 주고, 기어코 그 고멜을 다시 사 와서 아내 삼는다.
이것이 바로 ‘긍휼’이다. 그저 '구제' 차원이 아닌 것이다.
◑적용
▲진노 중에 하나님의 긍휼을 호소하는 하박국
하박국3:2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하게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수밖에 없는 죄인들에게
그 진노를 → 긍휼로 바꾸어 달라고,
하박국은 호소하고 있다.
여기서 ‘부흥’이란 단어는, ‘완전하게 살려내다. 다시 생명을 주다..’ 이런 뜻이다.
하나님의 진노로 인하여, 거의 죽게 된 자들을 위하여
호세아는 ‘하나님의 긍휼’에 호소하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진노 중에도 긍휼을 베푸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긍휼의 속성이 원래 그렇다. 진노 중에도 긍휼을 안 베푸실 수 없는 그 긍휼의 속성!
▲다윗도 하나님의 긍휼을 알고, 의지하는 믿음이 있었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 시51:1
▲그래서 ‘긍휼’을 구하는 기도가.. 가장 지혜로운 기도이다.
‘맹인이 외쳐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눅18:38
이렇게 ‘구세주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는 기도를
특별히 ‘예수 기도 Jesus Prayer’라고 한다.
다른 기도는 드리지 말고, 오직 이 기도문만
하루에 1백번 쯤 드리는 것이 좋다고 한다.
물론 그 의미를 음미하면서 기도드리는 것이다.
교회 역사를 보면, 많은 사람들이 이 단순한 ‘예수 기도’를 통해
주님의 큰 은혜를 받고, 진짜 긍휼히 여기심을 받고,
후에 여러 사람들에게 강력한 영향을 미쳤다.
나지막이 소리를 내서 ‘예수 기도’를 드려보시라.
반드시 주님의 긍휼을 얻게 될 것이다.
*관련글 : 새해에는 참 복을, 긍휼 *일단 여기까지 정리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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