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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와 민족을 위한 기도, 왜?

LNCK 2011. 8. 6. 20:22

◈나라와 민족을 위한 기도, 왜?               창18:22~33           11.06.26.설교스크랩



▲전쟁의 정당성 문제로 고민한 사람

1951년 1월 3일 이른 새벽 한국전에 참여한 영국 병사 데이비드 스트래쳔 David Strachan은

경기도 고양시 인근 들판에서 중공군과 대치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최전방 참호 속에 있었습니다.

갑자기 그의 코앞에 중공군이 불쑥 나타났고 그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총을 당겼습니다.


적병의 몸이 그의 머리를 스치고 참호 속으로 떨어졌습니다.

이 영국 병사는 자기보다 더 어려 보이는 중공군 병사가

바로 자기 밑에서 신음하며 4시간에 걸쳐 숨을 거두는 모습을 지켜보아야 했습니다.


한국전이 끝난 후 그는 영국으로 돌아가 전역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전역 수 십 년이 지난 어느 날 그는 영국 자택 침실에서 악몽을 꾸다가

그의 침실로 걸어 들어오는 생생한 어떤 인기척을 느끼고 깨어 일어납니다.

60년 전 그가 죽인 중공군이 피 묻은 군복을 입고 그의 발치에 서 있었습니다.


그 후 상당히 오랜 시간 자주 스트래쳔은 이 중공군 병사의 방문을 받아야만 했고

이로 인해 정신과 치료를 받게 됩니다.


정신과 의사는 그에게 한국 방문을 권합니다.

가고 싶지 않은 악몽 같은 한국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치료를 위해 한국에 돌아왔고

그가 기대한 한국과 전혀 달라진 새로운 한국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는 전쟁과 주검, 배고픔과 전혀 다른 번영한 한국을 처음에는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한국 방문도중 하루는 벨트 버클이 고장 나, 가죽 수선 집에 들어갔다가

그가 참전 용사임을 알게 된 주인은

감사의 인사를 건네며 수선비를 받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집을 나오면서 자기의 존재의 깊은 곳에서 솟아오르는 뭉클한 어떤 감동과 함께

자기도 모를 뜨거운 눈물이 그의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것을 경험했다고 합니다.

‘내가 결코 헛된 일을 위해 이 땅에서 피 흘려 싸운 것이 아닌 것’을 확인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후 중공군의 환영은 다시 나타나지 않았고

다시 그를 괴롭히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영국의 더 타임스지 서울특파원 앤드류 샐먼 Andrew Salmon 기자가 쓴

기사에서 읽은 글입니다.                            *관련기사 보기

 

그동안 스트래쳔이라는 병사를 전쟁의 고통이나 비극이상으로 더 괴롭혀 온 것은

소위 ‘전쟁의 정당성의 문제’였던 것입니다.

‘자신의 생명을 걸었던 이 전쟁에 과연 정의라는 명분이 있었는지,

또한 내가 청춘을 걸고 싸울만한 의justice가 있었느냐’는 물음이었던 것입니다.


▲전쟁을 앞둔 아브라함의 갈등

오래 전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도 유사한 갈등이 그를 괴롭혔습니다.


하나님은 소돔과 고모라성의 넘치는 죄악을 보고 심판을 작정하십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이 하나님의 결정을 두고만 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나아와 소돔과 고모라를 위한 중보의 기도를 드리기로 합니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그는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하기로 한 것입니다.

왜 그는 기도해야만 했을까요?

이 시간, 그의 중보기도를 살펴봄을 통해서,

우리가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해야 할 진정한 이유를 찾고자 합니다.


▲‘정의’가 빠진 우리의 <나라 위한 기도>

대부분 우리가 소위 구국 기도를 할 때

우리는 소극적으로는 다시는 6. 25같은 전쟁의 고통과 비극이 반복되지 않기 위해서,

적극적으로는 이 나라가 좀 더 번영하는 나라가 되어

잘 먹고 잘 사는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 기도에 참여합니다.


그것이 결코 잘못된 기도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우리의 기도의 이유가 그것이 전부라면

우리의 기도는 성경적이라기보다, 기복적이라는 비판을 벗어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해야 할

진지하고도 정당한 성경적 이유는 무엇일까요?


◑1.하나님의 의가 이 땅에 실현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아브라함을 괴롭힌 갈등은 하나님의 심판 자체가 아니었습니다.

죄 많은 소돔, 고모라는 심판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것은 정당한 심판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심판의 와중에서 의인도 함께 죽어야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공의에 어긋나지 않느냐는 물음이 그를 괴롭힌 것입니다.


본문 창18:25절을 읽어 보십시오.

“주께서 이같이 하사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은 부당하오며

의인과 악인을 같이 하심도 부당하나이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정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


그렇습니다. 본문을 관통하는 주제는 공의입니다.

아브라함은 의인이 악인과 멸망한다면 그것은 부당하다고

의인의 보존을 위해서도 심판이 보류됨이 공정한 일이 아니냐고 묻습니다.


사실 의인 10명만 있어도 소돔은 심판을 면했을 것입니다.

성서학자들은 유대인들에게 10명은 공동체를 의미하는 최소단위의 숫자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10명을 찾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비극을 통해서 우리는

거꾸로 의의 백성들이 일어나기를 기다리는 하나님의 소원을 확인하게 됩니다.


예수님도 산상수훈의 머리에서 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고,

산상수훈의 절정에서 다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를 구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공의는 하나님 나라의 우선적 가치입니다.


잠14:34을 읽어보십시다. 공의는 나라를 영화롭게 하고, 죄는 백성을 욕되게 하느니라”

그렇습니다. 공의는 성경에서 번영보다도 우선하는 가치입니다.


다시 6.25같은 비극이 이 땅에 되풀이 되지 않으려면

우리는 단순히 축복과 번영만을 위해 기도하기보다

이 땅의 백성들이 좀 더 공의를 갈망하고, 정의를 실현하는 국민이 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불의했던 우리의 죄악을 참으로 회개하는 것,

그것이 바로 나라를 지키는 일입니다.


◑2.하나님의 자비가 이 땅에 흘러야 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아브라함은 소돔 고모라의 심판,

특히 악인들의 심판에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습니다.

그 성읍 전체의 보편적 죄악상에도 변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의인의 보존을 위해서, 악인을 용서할 것을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자비를 드러내고, 그 자비로 그 땅을 적시는 길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창18:24절을 보십시다.

“그 성 중에 의인 50명이 있을지라도 주께서 그 곳을 멸하시고

그 50의인을 위하여 용서하지 아니하시리이까?”


지금 그는 용서를 비는 것입니다.

용서는 그의 자비의 성품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고

이 용서를 통해 아브라함은 그 땅의 백성들이

그의 자비를 알게 되기를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려 6번이나 용서를 탄원하지 않습니까?

의인 50명을 찾으면, 다시 45명을 찾으면, 40명을 찾으면...

이어서 30명, 20명 마지막에 10명을 찾으면 용서해 주십사는 것입니다.


예레미야애가 3:22을 보십시오.

“여호와의 인자(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우리가 아직도 살아있는 이유,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지금 아브라함은 죄 많은 소돔 백성을 용서하심으로

이런 하나님의 자비가 그 땅에 흘러가는 것을 보고 싶어 한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심으로 그의 공의를 드러내셨지만,

아브라함의 중보를 응답하셔서 롯을 구원하시고 그 백성을 보존하심으로

그의 자비를 또한 드러내셨습니다.


625 한국전쟁은 어쩌면 이 땅, 이 백성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의 드러냄이었지만

유엔의 참전 결의로 이 나라가 보존됨은 주의 용서를 비는

이 땅, 이 백성들의 기도에 응답하신 그의 자비가 아니었겠습니까?


6,25전쟁을 둘러싼 교회 동정을 기록한 문서들을 살펴보면

두 장소에서의 의미 있는 기도회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한번은 전쟁 발발 후 불과 81일 만에 낙동강까지 북의 침략에 밀린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 속에서,

3백여명의 목사님들이 부산 대신동 초등학교에 모여

일주일 동안 금식하고 회개하며 나라를 위해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때가 장마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화창한 날씨가 계속되어

B29기가 낙동강을 3일 동안 폭격하여, 낙동강 전선을 적이 넘지 못한 일이 일어났고,

이어서 부산으로 피난 온 교역자 250여명을 수용했던 부산 초량교회에서

여기에 숙식한 교역자들을 중심으로

민족을 위한 또 하나의 구국기도회가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이 기도회에는 당시 경남 도지사 초량교회 양성봉 장로님,

부산으로 피난온 이승만 대통령도 참여했고,

한상동 목사님이 중심이 되어 가슴을 찢는 회개운동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오늘날 초량교회 홈 페이지 이 교회 역사에 보면 당시를

“6.25사변으로 피난동포 수용, 국난 극복 수양회에서 통회운동을 전개하다”고 기록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9월 15일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 작전이 일어나

전세는 역전되고 극적으로 이 땅의 절반만이라도

자유와 번영의 땅으로 남는, 주의 자비와 은혜가 부어진 것입니다.


당시 부산의 지도자들은 이것이 기도의 힘인 것을 누구도 의심할 수 없었다고 회고합니다.


당시 기도회에선 초량교회를 창립한 베어드(배위량)선교사 부인이 작사한 찬송가가

가슴을 찢으며 반복적으로 불리워졌다고 합니다.


♬멀리 멀리 갔더니 처량하고 곤하며 슬프고도 외로워 정처없이 다니니

예수 예수 내 주여 지금 내게 오셔서 떠나가지 마시고 길이 함께 하소서♪


이 찬송은 민족을 버리지 말아달라는 애통의 기도였던 것입니다.

이런 기도가, 이런 중보가 당시의 나라를 지켰다면,

동일한 기도가 지금도 이 나라 이 민족을 위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한국전쟁 625의 진정한 정당성은?

 

다시 말해서, 한국 전쟁이 ‘정말 가치 있었던 전쟁’으로 역사에 자리매김 되려면?


저는 오늘 설교의 화두를 한국전 참전 영국 병사 스트래쳔의 이야기로 시작했습니다.

그는 더 타임즈 기자 앤드류 샐몬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한국 방문 경험을 회고하다가, 문득 기자에게 이렇게 반문했다고 합니다.

“주는 것(giving)과 사랑하는 것(loving)사이의 차이가 무엇이지 아십니까?”


그리고 이어서 자기의 질문에, 스스로 이렇게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둘 사이엔 차이가 없어요. 50년 전 나는 내 일생의 1년을 한국에서 바쳤어요.

나의 작은 공헌이 한국 사람들에게 어떤 도움이 되었는지 잘 모르고 살았지요.

다시 찾은 한국을 둘러보며 환대를 받았습니다.

한국은 모든 것이 최신식이고, 멋지고, 기운차고, 세속적이긴 하지만

모든 것이 번영하는 국가였습니다.


나는 한국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한테 감사하지 마세요.

내 인생을 가치 있는 인생으로 만들어 준 것은 바로 여러분입니다.”


이 영국 신사는, 오늘날 한국의 번영으로

그의 참전의 명분을 정당화 할 수 있었고,

그래서 오히려 한국인들에게 감사의 말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역사의 먼 후일(미래)까지

이 전쟁의 명분이 정당화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영국 병사가 찾은 명분 정도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역사상 유래가 없었던 비극적인 전쟁의 고통을 겪은 이 나라,

이 땅이 이 전쟁의 레슨을 받은 결과로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이 전보다 훨씬 더 진지하게 하나님의 정의에 관심을 갖고

정의의 실현을 위해 일하고 있으며


그리고 그동안의 우리의 불의함, 무자비, 이기심과 증오를 뉘우치는

진지한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고


그래서 이 땅에 죄를 사하시는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이 흘러갈 수 있다면

그때 비로소 우리는.. ‘이 전쟁은 필요했던 전쟁’이라고 회고하게 될 것입니다.


그 고백을 위해

정의와 사랑이 이 땅에 넘쳐나도록

기도하기를 쉬지 않는 우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시85:10 “인애와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을 맞추었으며”에 근거하여

기독교 철학자 니콜라스 월터스토프는

정의와 평화가 입맞추는 세상을 그리면서 이런 기도를 우리에게 제안합니다.


“오 하나님, 굶주리는 자들에게는 빵을 주시고

빵을 가진 우리에게는 정의에 대한 굶주림을 주소서”


저는 그의 정의를 위한 기도에 두 가지를 더 첨부하여

이렇게 민족을 위한 기도 제목을 제안하고 싶습니다.


“하나님, 북의 동포들을 어서 속히 빵과 자유의 굶주림에서 해방하시되,

남의 우리에게는 정의와 평화와 자비에 대한 굶주림을 주소서”


이런 하나님의 공의와 평화가 이 땅에 실현되도록,

그리고 하나님의 자비가 이 땅에 흘러가도록 기도하는 기도의 수원지로 쓰임 받게 되기를 희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