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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주신 4가지 복

LNCK 2011. 8. 4. 20:35

 

◈예수님이 주신 4가지 복                    고전1:30        11.06.05.설교일부녹취, 정리, 편집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의로움거룩함구속함이 되셨으니.. 고전1:30

 


◑1. 지혜


참고로, 공동번역으로 본문을 읽어보면 이렇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주신 우리의 지혜이십니다.

그분 덕택으로 우리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의로움)에 놓이게 되었고,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었고,

해방(구속함)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고전1:30


▲설교자는 본문의 지혜→의로움→거룩함→구속함이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것들인데, 순서적으로 기록되었다고 본다.


그래서 타락한 인간이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이.. 지혜이다.

자기가 구원 받아야 하며, 자기에게 그리스도가 필요한 것을 아는 지혜이다.


예수를 안 믿으면, 지혜가 안 생기는데,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엡4:18 

예수를 믿으면, 지혜가 생겨서,

자기가 의로움, 거룩함, 구속함을 받아야 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타락한 인간들은, 자연인의 상태는. 인간에게 제일 필요한 게 지혜이다.

구원의 주이신 하나님을 아는 지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다.



◑2. 의로움


인간은 모두 죄인이고, 그대로 두면 지옥행이다.

죄인인 인간에게 무엇보다 먼저 필요한 것은, 의로움이다.


▲의인도.. 계속 의롭게 살도록 애써야 한다.

 

겔33:13, 가령 내가 의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살리라 하였다 하자.

그가 그 의를 스스로 믿고 죄악을 행하면, 그 모든 의로운 행위가 하나도 기억되지 아니하리니

그가 그 지은 죄악 중 곧 그 중에서 죽으리라.

  

‘그가 그 의를 스스로 믿고’ 라고 말씀한다.

의인도 ‘나는 스스로 의롭다’며 교만할 수 있다. 자기 의로움을 믿는 것이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늘 경각심을 갖게 한다.

성도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게 된 의인들이다.

본문에서 말하는 구약적 의인보다, 훨씬 더 의로워진 사람들이다.


그러나 ‘믿음으로 의로워진 의인’도.. 늘 긴장해야 한다.

‘그가 그 의를 스스로 믿고’ .. 이것은 바리새인들이 잘 그랬지만,

신약의 의인들도 얼마든지 자기 의로움을 스스로 믿을 수 있다... 그러면 타락한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의롭게 된 의인들도,

즉 속사람이 변화되어 의로워진 의인들도,

늘 의롭게 살도록 힘써야 한다.  

(이것은 ‘행위구원’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에 대한 ‘성도의 마땅한 반응’이다.)


▲자기 의를 스스로 믿을 때.. 오히려 넘어지기 쉽다.

성도가 믿어야 할 것은, 예수님이지,

자기 의로움이 아니다. 겔33:13


이 '의'는 십자가의 공로를 믿음으로 얻는 것이기 때문에,

내가 의롭게 되었어도, 결코 자기 의로움을 자랑하거나, 교만할 수 없다. 무임승차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권고했다.

‘선 줄로 생각한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고전10:12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잠16:18


한 번 의롭게 되었다고, 다 끝난 것은 아니다.

그래서 본문은, 의롭게 된 자가 → 거룩함을 추구해야 한다고 권고한다.

 

본문 고전1:30을 순차적 단계로 해석하면 그렇다.

순차적 단계로 해석할 수도 있는 이유는, 순차적으로 쓰여 있기 때문이다.



◑3. 거룩함


구원론에서, 칭의의 다음 단계는 성화를 말한다.

많은 신자들이, 칭의에서 다 끝나는 줄 알고 있는데, 칭의 다음 단계를 추구해야 옳다.

 

조직신학의 구원론에서도 선택 - 칭의 - 성화 - 영화 이런 순서로 가르친다.

이것은 본문 고전1:30과 일치한다. 의로움(칭의) 다음에는 거룩함(성화)이다.


▲의롭게 된 자는, 거룩함을 추구하게 된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이루신 모든 공로로

의롭다 인정된 성도는, 거룩함을 추구해야 한다.

-그것이 본문 고전1:30이 강조하는 중요한 메시지가 아닐까?


그렇지 않고, 의로움에만 계속 머물러 있다 보면,

‘자기 의로움’에 빠지는 부작용이 생길 가능성이 높다. (위에서 살펴 보았다.)


※과거에 한국교회는 ‘이신칭의’만 강조하는 가운데,

고전1:30에서 '의로움'에만 머물러 있었던 적이 한때 있었다. 그 뒤에 나오는 '거룩함, 구속함'에는 아무 관심이 없었다.

지금은 많이 바뀌었다.                                                                                           *관련글 이신칭의와 그 오해


▲은혜로 거룩함을 얻은 성도는, 거룩한 삶을 추구하며 살게 된다.

물론 거룩함도, 믿음으로/은혜로 얻는다.

내 공로와 도덕적 고상함으로 ‘거룩함’을 얻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십자가에서 이루신 공로로.. 성도는 ‘거룩하게’ 인정받았다.


본문 고전1:30은, 믿음으로 얻는 거룩함을 말씀하지만, (하나님이 인정해 주시는 거룩함)

성경의 다른 구절에는 성도가 추구해야 하는 거룩함을 가르치고 있다. (자기가 힘쓰는 거룩함)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벧전1:16 등이다.

  

▲의롭게 된 자가, 자기 의에 빠져서 교만하면,

즉 거룩함을 추구하지 않으면.., 그 교만으로 인해 망한다.


성 프랜시스의 가장 큰 특징은 겸손이었다.

다른 성자들도 마찬가지다. 그들 성자들의 특징은 다 겸손이었다.

단순히 의로움이 아니었다.


지금 우리는 ‘거룩함’을 살펴보고 있는데,

그 거룩함의 특징 중 하나가 - 겸손이다... 를 살펴보고 있다. 


예수 믿는 성도들, 그 믿음으로써

의롭게 된 자는.. 의로움을 추구할 뿐만 아니라,

거룩함을 입고, 또한 거룩함을 추구하게 되는데,

다시 말하면, 늘 겸손한 것이다.

- ‘그래도 내가 누구보다 의로워, 내가 너희보다 더 거룩해..’ 하지 않는다.


그런데 가장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은 ‘사랑’이지, 겸손은 아니다. 마22:27

그래서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나타나셔서 ‘네가 겸손하냐?’ 묻지 않으시고,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3번이나 물으셨다.


이렇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몸통, 본질’이라면,

그 결과 ‘겉으로’ 나타나는 것이 겸손이다.


▲이신칭의에 너무 심취해서, ‘자기 의로움, 자기 거룩함’에 빠질 수 있다.

또는 극단적 신앙이 되어서,

‘하나님이 인정해 주시는 의로움, 거룩함’만 믿고서,

자기는 전혀 의로움, 거룩함을 추구하지 않고 살 수도 있다. 잘못이다.


누가 ‘하늘의 손과, 땅에서 손이 서로 악수해야 한다’고 표현한 적이 있는데,

하늘에서 의로움, 거룩함을 은혜로 거저 주시지만,

땅에서, 인간 편에서, 그 은혜에 감사해서, 자발적으로 의로움과 거룩함을 추구하는

‘믿는 성도의 반응/응답’이 나와야 한다. 이것은 행위구원이 아니다.



◑4. 구속함


의로움과 거룩함을 값없이 얻은 성도는,

구속함을 얻고, 또한 추구하게 된다.

이 ‘구속함’은.. 의로움보다, 또는 거룩함보다 더욱 실천적인 부분이다.


▲구속redeem이란, 값을 치르고, (노예를) 자유롭게 한다는 뜻이다.

예수님은 그 피 값을 치르시고, 성도를 자유하게 하셨다.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벧전1:18

  

그런데 예수님은, 에서만 우리를 구속하신 것이 아니라,

질병에서도 우리를 구속하셨다. 벧전2:24 

가난에서도 우리를 구속하셨다. 고전8:9 

저주에서도 우리를 구속하셨다. 갈3:13 


그래서 우리는 에서, 질병에서, 가난에서도.. 자유케 되었다.


여러분, 주위에 보면 늘 수영, 테니스, 자전거를 타는 사람이 있다.

그들의 특징은 수영, 테니스, 자전거에 능숙한 사람들이다.

잘 못하는 사람은, 아예 안하고.. 잘 하는 사람이, 더 열심히 한다.


같은 이치로

, 질병, 가난, 저주에서 구속된 사람은,

더 열심히 , 질병, 가난, 저주에서 구속된 삶을 추구하게 되어 있다.

 

이건 '행위구원'이 아니라, 믿음과 신앙을 삶에 적용하는 차원이다.

그래서 '구속함' 받은 성도가, '구속함'을 추구(적용)하며 살아가게 된다.

 

‘성도가 구속을 추구한다’는 말은,

자기가 , 질병, 가난, 저주에서 은혜로 구속된 사실을 알고서,

스스로 더욱 , 질병, 가난, 저주에서 자유롭게 살아가는 것이다. 노력한다, 힘쓴다.

 

마치 미인이.. 자기 외모를 더욱 아름답게 가꾸고,

공부 잘 하는 우등생이.. 더 열심히 공부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또한 아직 우리가 이 세상에서

‘이미 아직’의 현실 가운데 살고 있기 때문이다. already not yet


※참고로 여기서 가난, 부요함의 개념은.. 돈 없는 자, 돈 많은 자가 아니라,

(돈 없고, 많은 자의 기준을 정하기가 참 모호하다, GNP 5천불인가?)

 

돈에 매인 사람은, 가난한 자이고.., 돈을 다스리는 자는, 부요한 자이다.

그러므로 빈자도 부요할 수 있고... 부자도 가난할 수 있다.


▲어떤 설교자는, 칭의→축복 이런 단계로 나가버린다.

'거룩함, 구속함' .. 이런 것은 건너 뛰어 버린다.

그리고 ‘칭의’는 한 번 옛날에 이미 받은 것이니..

계속 ‘축복’만 반복해서 설교하는 것이다.


그러니 지혜의로움거룩함구속함이 아니라

지혜의로움축복축복축복으로 계속 나가는 것이다.


비록 성경에 ‘축복’이 나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추구해야 할 목적이 아니라, 따라오는 것이다.

하나님을 잘 믿으면.. 따라오는 부산물이다.

 

그러므로 강대상에서 ‘복, 복, 복, 복’ 하면 안 된다.

대신에 성경대로 ‘지혜, 의로움, 거룩함, 구속함’을 말해야 한다.

그러면 복은 따라 온다.

교회는 복 타령 하지 말고, 예수타령, 사랑타령, 거룩타령 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좋아하는 <물질, 성공, 건강의 복>은,

구약적 개념의 복이다.

그것은 복의 실체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복을 예표로 구약에서 보여주는 것이다.


오늘날 신약에 예수님이 말씀하시고, 바울이 말씀한 

복의 실체(그리스도, 영생, 신령한 영적인 복, 팔복 등)에는 별로 관심 없고,

구약적 복의 개념만 붙들고 강조하는 것은.. 기독교를 왜곡하는 것이다.

그건 샤머니즘적 기독교가 되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