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의 독특성 딤후3:16 Charles Price 목사님설교 녹취, 정리
The Marks of the Apostolic 1'~13'
저는 오늘, 설교의 중요성에 대해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1. 설교에 대해 반대하는 일부의 입장
▲오늘날, 설교가 필요 이상으로, 전반적으로 대우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설교’를 사실 높은 가치로 여기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아니, 높은 가치로 여김은 고사하고,
오늘날에는, 설교가 필요 이상으로 평가절하 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너나 나나 설교를 비판하고, 거부하는 분위기가 사회 전반적으로 팽배해 있습니다.
설교자가 조금 오만하게 설교한다 싶으면
사람들은 당장 ‘지금 나한테 대놓고 설교하는 겁니까?’ 하면서 거부반응을 나타냅니다.
이렇게 설교는.. 그 본질상 청중의 심기를 건드리기 쉽습니다만,
그런데 청중들의 반응이, 설교에 대해, 지나치게 예민하고 거부적이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일선 목회 현장에서, 목회자가 설교를 살살 할 수밖에 없습니다.
괜히 신자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할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다보면 또 무미건조해 지지요.
▲설교에 반발하는 입장1.
이런 현상은 과거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1857년 앤소니 트롤로프가 쓴 소설 <바체스터의 탑>을 읽어보신 분이 계실 겁니다.
이 소설은, 영국 성공회 신자들 간의 이야기를 다룬 내용인데,
이 책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지금같이 현재 문명화되고 자유화된 국가에서
그 어떤 것보다도 인류에게 고통을 주는 것은, 설교를 과연 들어야 하는지의 필요성이다.’
(설교자가 설교하고, 청중이 듣는 것이 꼭 필요한가? 꼭 필요하지 않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설교에 대한 반론과 반발은,
19세기 중엽, 그러니까 150년 전에도 작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런 트롤로프의 얘기가 나오게 된 배경은
아주 옛날에는 사람들이 모였을 때, 누군가 설교하려고 할 때,
그때는 뭐 교육받은 사람도 아주 희소했고, 참고할 책도 거의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때는 누군가 배운 한 사람이, 설교해서 가르치는 것이 필요했는데,
이제는 근대화가 되고, 문명화가 되었으니,
배운 사람도 많고, 책을 읽거나 가진 사람도 많게 되었으니,
옛날에 하던 방식으로 <누군가 꼭 설교를 해야 되느냐?>를 제기한 것입니다.
설교는 과거에, 사람들이 대부분 못 배웠던 시절의 유물이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19세기 중엽에 벌써 그런 반발이 있었다면,
지금 21세기에는, 그때보다 훨씬 더 많이 교육받았고, 사람들의 지식이 많으므로,
이제는 진짜 설교할 필요가 없게 된 것일까요? (물론 아니지요)
이제 사람들은, 정말 놀랍도록 교육을 많이 받았고, 지식도 엄청납니다.
그러니 과거 무식한 시대처럼,
누군가(설교자)가 ‘어떤 것을 믿어야 하며, 어떻게 생각하고 살아야 하는지..
설교를 통해 가르치고 지시할 권리나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 정도는, 각자가 다 알아서 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또한 내가 꼭 들어야 할 의무도 없으니.. ‘설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아마 이런 분위기는, 세속사회 속에서, 앞으로 더욱 더 팽배해 갈 것입니다.
▲설교에 반대하는 입장2.
오늘날 커뮤니케이션(의사소통)에 관한 학문이 발달하면서,
커뮤니케이션 학문적 관점에서 볼 때,
강의 (주입식) 형식을 따르는 설교는, 의사소통 방식 중에서 최악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설교를 반대합니다.
왜냐하면 주입식 강의(설교)는,
듣는 사람이, 아주 소량만 기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배우는 방식에는 크게 4가지가 있습니다.
듣기 listening, 그 문제를 토론해서 배우기 discussing,
주의 깊게 관찰해서 알기 watching, 문제를 자기가 연구해서 답을 얻기 discovering
그 중에 설교는 ‘듣기’에 속하는데, 제일 효과가 없는 교육방식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 말은 맞습니다.)
그래서 저희 교회는,
설교를 통해서 듣기를 하지만 listening
소그룹을 통해서 토론하기 discussing 와
이웃의 신앙을 관찰해서 배우기 watching,
또한 봉사에 직접 참여를 통해서
성도들이 복음 진리를 발견 discovering 하도록.. 여러분을 돕고 있습니다.
◑2.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교를 계속해야 하는 이유
위에서, 설교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입장을 잠깐 소개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설교가 계속되어져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1. 좋은 설교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말씀을 강해(자세히 풀어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좋은 설교에는 영적인 권위가 있습니다.
설교란, 설교자가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어 말하는 시간이 아닙니다.
설교자는, 본문 말씀이 증거하는 바를, 성실하게 전달해야지,
거기에 자기 개인적 소견을 보태어서는.. 안 됩니다.
제 Charles Price가 늘 소원하는 바는,
제가 이 강단에서 여러분께 설교할 때,
제 개인적인 생각을 전달하게 되지 않기를 철저히 바랍니다.
혹시나 제 개인적 소견이 전달되더라도, 여러분은 그것을 피하십시오.
※그런 점에서 어떤 정치적 자기 성향을, 설교시간에 말하는 것은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은 우파적 성향, 반대로 어떤 사람은 좌파적 성향을 설교합니다.
어느 편이 옳든지... 설령 그 특정한 성향이 정말 옳다 하더라도,
본문 성경이 그것을 말씀하지 않는다면.. 설교시간에는 말하지 마십시오.
설교시간은,
본문이 말씀하는 바를 성실히 전달하는 것이, 설교자의 사명이지,
본문에 없는 자기의 사견을 보태어서는 안 됩니다. ‘애드립’을 하면 안 됩니다.
※애드립: 연기자나 출연자가, 대본에 없는 말을 더하는 것.
물론 성경을 해석하다보면, 모호한 구절이 있고, 모호한 해석이 있습니다.
그때는 ‘(제 해석과) 다른 관점이 존재한다’고 말씀드리는 것이 옳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성령에 감동된 말씀입니다. 딤후3:16
설교는 ‘그 감동을 풀어내는 것’입니다.
보통 신자가, 그 본문을 읽을 때, 감동을 받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설교자는, 강해(exposition, 심도 있는 연구)를 통해, 그 감동을 찾아내서 전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감동적이지 못한 설교>는.. 뭔가 부족한 것입니다.
성경이 <성령으로 감동된/영감된 본문>이기 때문에,
설교는, 그 감추어진 본문의 감동/영감을 찾아내야 하는 것입니다.
마태, 마가, 베드로, 바울, 요한이.. 그리고 모세, 다윗, 선지자들이
오늘날 우리가 읽는 성경을 기록할 때, 맹송맹송하게 썼을까요?
아닙니다. 모든 성경은, 성령의 영감/감동으로 기록된 것입니다. 딤후3:16
그런데 신자가 성경을 읽을 때, 그때 그 ‘감동’이 그대로 전달되는 것은 아닙니다.
설교자는, 심도 있는 연구를 통해서, 그 ‘감동’을 발견해 내어서, 전달해 줘야 합니다.
그 작업은 설교자가 하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설교’입니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설교는 계속 되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만약에 설교에 감동이 빠지면,
각자 집에서 성경을 읽어도 되겠지요. 꼭 설교를 들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직 전통을 고수하기 위해서, 설교 시간을 배정하는 것이라면, 5분만 배정하면 될 것입니다...
▲2. 그래서 좋은 설교는, 반드시 성령의 기름부으심을 받아야 합니다.
기름부으심은,
성령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사람에게, 부어지는 것입니다.
성령의 기름부으심을 받아야,
성경에 원래 기록될 당시의 ‘감동’을
완전히, 또는 근접하게나마 찾아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자기가 찾아낸 ‘감동’을.. 온전히 청중에게 전달할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설교’와, 그 외 ‘강의’와의 차이입니다.
대학 ‘강의’에는.. 기름부으심이 필요 없습니다. 내용/지식을 설명만 잘 하면 됩니다.
강의하는 사람도.. 성령님을 전적으로 의지할 필요 없습니다.
사도행전에는 총 19편의 설교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설교 전문이 있는가 하면, 설교 요약도 있고, 설교 조각도 있습니다.
베드로가 8편, 바울이 9편, 스데반 1편, 빌립 1편, 총 19편입니다.
읽어보십시오. 그들의 설교가, 맹숭맹숭하게 했습니까?
무미 건조하게 전달했습니까?
아닙니다. 성령의 기름부으심 가운데, 설교가 되어졌습니다.
그래서 그 반응이 회개하든지/반발하든지.. 양방향으로 반드시 나타났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성령의 기름부으심이 없으면, 그것은 설교가 아니라,
인문학 강의 수준으로 전락하고 만다는 것입니다.
당신의 설교는, 기름부으심이 있는(하나님이 현장에 주관하시는) 설교입니까?
아니면 그저 성경이란 과목을 가르치는, 인문학 강의입니까? 여기엔 기름부으심이 없습니다.
설교는 준비과정에서부터, 기름부으심이 있어서, 말씀의 감동을 찾아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면 <백업 설교>가 되고 맙니다. *
'preaching backed up by Scripture'의 줄임말
<백업 설교>란, 목회자가, 자기가 말하고 싶은 내용을 설교하고,
본문이나 성경을 거기에 갖다 붙이는(백업하는) 것입니다. *Back up:뒷받침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냐, 아니면 '백업 설교'냐.. 둘 중 하나입니다.
설교자가 깨어있지 못하면, 위로부터 말씀을 받지 못하게 되고,
설교시간에 설교를 안 하고 건너 뛸 수는 없고, 결국 '백업 설교'를 하고 맙니다.
'백업 설교'는 설교가 아니라, 그냥 자기 의견이나 자기 주장입니다.
과거에 한 때, ‘설교는 설득 persuasion이다’는 말이 유행했습니다.
※국어에서 말하는 ‘설득’보다 더 강한 개념의 설득. 절로 고개를 끄덕일 정도로 논리정연한 설명.
그러나 지금은 ‘설교는 설득’이라고, 거의 말하지 않습니다.
대신에 설교는 ‘성령의 기름부으심’이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설교 현장에, 성령님의 강력한 지배가 나타나는 것이.. 설교이고,
아닌 것은.. 어떤 의미에서 설교가 아닙니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날에도 설교는, 여전히 꼭 필요합니다.)
▲3. 설교는, 하나님의 음성을,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설교를 듣고 나면, 딱 압니다.
‘아, 저건 인간의 음성이다/ 아니다. 저건 하나님의 음성이다.’
(사실 위 ▲1.2.3.은 모두 같은 맥락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음성’이 전달되면,
뭔가 듣는 청중에게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냥 아무런 결과가 없는 것.. 그것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음성’을 들었다는 반증입니다.
설교의 많은 문장들 중에서, 단 한 문장이라도,
설교를 들은 많은 청중들 가운데, 일부 청중들이라도,
반드시 설교는 ‘하나님의 음성’을 전달하고/ 또한 들었다면,
그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면, 사람은 반드시 변화됩니다.
회개하고, 순종하고, 찬양하고, 기뻐합니다.
기도하고, 봉사하고, 용서를 구하고, 이웃을 도웁니다.
(반대로 화를 내며, 분노할 수도 있습니다.)
설교를 들은 청중들 가운데, 아무 반응이 나타나지 않는 것은,
그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것이 아니라,
그저 ‘인간의 음성’을 들은 것뿐입니다.
존 스토트는 성경적 올바른 설교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크리스천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며, 자라고, 성장합니다.
교회에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설교를 계속 듣고도, 성장하지 않았다는 것은,
설교(하나님의 말씀)를 들은 것이 아니라, 인간의 말을 전파하고/들은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크리스천이 정상적으로 성숙하고, 성장하기 위해서는
‘설교’가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저 Charles Price는, 위 3가지 이유를
<오늘날에도 설교가 계속 되어져야 하는 이유>로 듭니다.
그것은 오직 설교만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설교가 아니고는, 그런 일들이 절대 일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많이 배운 사람이 그득한 오늘날에도,
설교는, 우리의 삶의 중앙에 분명한 자리를 잡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의 설교에,
위의 3가지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지.. 한 번 곰곰이 생각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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