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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같이 시험 받으신 예수님 / 오카와 쓰구미치

LNCK 2011. 8. 30. 09:41

◈똑같이 시험 받으신 예수님       히4:11~16         일본 야마토 갈보리 채플 녹취, 정리 

 

 

◑만만치 않은 인생살이에.. 동정하시는 예수님

 

▲히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전략)

저 오카와 목사는 세례를 줄 때, 이렇게 선포합니다.

“소자야 안심할지어다. 네 모든 죄가 사함 받았느니라!”

이렇게 하는 것은, 제가 혼다 코지 목사님으로부터 배운 것입니다.

 

제가 25살 때, 전도사로서, 도쿄 후카가와에서 목회를 하고 있었습니다.

아직 전도사인 저는, 세례식이나 성찬식을 집례할 수 없었습니다.

 

당시 청년 15명이 세례를 받기로 되어 있었는데,

일본의 빌리 그레이엄 이라 불리는, 혼다 코지 목사님께서

제 대신, 세례식을 집례해 주셨습니다.

 

목사님께서 성수聖水를 들고 서서

(목사님 목소리가 워낙 우렁차기도 하지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노라” 하고 성수를 머리에 부으신 후에,

“소자야 안심할지어다. 네 모든 죄가 사함 받았느니라!”라고 선포하실 때,

 

곁에 서서 세례식을 돕던 제가,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그때 충격이 지금까지 남아있을 정도입니다.

 

지난 40년 동안에, 그 선포 덕분에,

제가 얼마나 많은 힘을 얻었는지 모른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말씀 자체로 심령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는 힘이 있지만,

특별히 ‘말씀이 선포되어질 때’ 놀라운 능력이 역사합니다.

마치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 선포하셨을 때, 빛이 생겼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열심히 선포하십시다.

그때 듣는 사람들의 심령과 관절과 골수가 쪼개지는 역사가 나타날 것입니다.

 

▲히4:13,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의 ‘결산’을 받으신다는 말씀입니다.

위 구절의 ‘상관’을 NIV성경은 account(결산)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마치 회계결산을 하듯이, 조목 조목 작은 것까지라도 다 따져서

우리의 일생에 대해, 심판을 받는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두 가지를 반드시 알고 있어야 합니다.

-모든 인간은 반드시 죽는다는 것과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전자는 알고, 심각하게 여기고 있어도

후자는 알지 못하거나, 알아도 전혀 심각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사실 전자보다 후자가 만 배로 더 심각한 사실인데..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결산을 해야 할 때가 옵니다.

그래서 우리는 평소에 늘 회개하며 살아야 합니다.

 

※미리 미리 결산해 두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빚은 미리 미리 갚는 것이 좋습니다. 성경에 죄를 ‘빚’이라 기록합니다.

 

▲히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여기에, 예수님은 인간과 똑같은 시험을 받으셨다고 나와 있습니다.

 

저는 목회자로서, 평소에 이런 질문을 오래 동안 품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도대체 예수님께서는 왜 시험(삶의 질고, 고통스런 33년 생애)을 받으셔야 했는가?’

 

예수님은 30세 즈음에 세례를 받으시고, 공생애 3년을 사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는데,

제 짧은 생각으로는, 십자가를 지시는 게 목적이었다면,

예수님이 아예 30세로 ‘성육신’ 해서 나타나시지..

왜 어린 아기로 이 땅에 성육신 하셔서, 30년간 지지리 고생을 하셧나?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러 이 세상에 오셨다면, 공생애 3년도 필요 없습니다.

그냥 공생애 3년은 생략하고, 십자가만 1주일만에 단 번에 지시면.. 편하셨을 것 아닙니까!

 

 

왜 예수님은 무지하게 고생하시면서 힘들게, 30~33년이나 사셨느냐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주변에도, 이런 분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무지하게 오래 감옥에서 고통 받으시다가, 결국 순교하시는 분..

-순교가 ‘결론’이었다면, 그렇게 오래 감옥에서 고통당하실 필요 없잖아요?

 

오늘 우리 주변에, 오래 투병생활 하시다가, 결국 소천하시는 분,

결국 ‘소천召天(하늘의 부름을 받음)’이 결론이었다면, 결국 낫지 않을 병이라면,

한 두 달 시름시름 앓다가 소천하면.. 더 좋잖아요?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너무 오래 동안

무려 30~33년 동안.. 어쩌면 불필요하게 보이는 고난을 겪으셨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1주일만에,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만 하셨으면.. 구원이 완성되었을 것을.. 말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우리가 겪는 삶의 모든 괴로움(시험)을, 똑같이 다 받으셨습니다.

고독, 질병, 슬픔, 자괴감,

가난, 생활고, 가족 부양의 짐,

오해, 배신, 따돌림 당함.. 등을 모두 경험하셨습니다.

 

찰스 스펄전이나, 빌리 그레이엄은

이미 10대 후반 때부터 설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다면, 만약 예수님께서도, 십 대 시절부터 설교를 시작하셨다면,

그 귀한 말씀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전해졌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30세까지 기다리셨다가, 그제야 비로소 설교를 시작하셨습니다.

(물론 제사장이 성전에서 섬기는 나이가 30세부터라 하지만.. 말입니다.)

 

예수님의 아버지 요셉은

여섯 자녀를 남겨두고 일찍 세상을 뜨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그 후로 성경에 언급이 안 나옵니다. 또한 동생들 중에서 2명 정도는 일찍 죽었을 것입니다.

과거에는 흔한 일이었죠. 

예수님은 5식구를 책임져야 하는, 소년가장이었던 셈이지요.

그러니까 예수님은 30세까지.. 가족 부양하느라.. 아마 공생애를 시작도 못하셨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노동이 무엇인지.. 그 고통을 잘 아십니다.

왜냐하면 목수(또는 석수)로.. 일평생 노동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이 30세까지 공생애를 뒤로 미루신 이유는,

가족 부양의 이유도 있었지만, 그것보다 더 큰 이유는,

본문에 나와 있듯이,

히4:15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즉,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시기 위해서,  - 이 설교문 제목

예수님은 30년 동안이나, 공생애를 미루시고,

그동안 인간이 받는 온갖 시련을 다 체험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연약함을 동정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개역)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개정)

 

그래서 오늘날에도 예수님은, 당신의 모든 삶의 고통을 ‘동정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살해의 위협이 무엇인지 아십니다. 피해서 애굽으로 도망가셨습니다.

예수님은 홈리스가 무엇인지 아십니다. 이곳 저곳 정처가 없으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당신의 삶의 문제를 왜 즉각 해결해 주시진 않나요?’

-그건 지금 이 상황에서, 그 정황이 당신에게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성화에

 

그럼 예수님은 ‘당신의 삶의 문제를 나 몰라라 하며 방치하고 계신가요?’

-아닙니다. 예수님은 말할 수 없는 긍휼로, 당신을 동정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당신이 당하는 그 고통 가운데, 예수님이 함께 당하고 계십니다. 당신 속에서

 

주님의 목적은 ‘성도가 이 세상에서 문제 없이 평탄하게 사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목적은 ‘성도가 이 세상에서 1)사명을 감당하고, 2)성화되어 천국에 이르는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문제도 필요하고, 십자가도 필요하고, 고난도 필요하니까요...

특별히 주님의 사역은, 반드시 십자가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정복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러므로 성도의 삶에 고난은 필수적입니다. 1)사명을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처럼

단, '자기가 연약해서 당하는 고난'도 있습니다. 그래서 2)성화를 위해서도, 고난은 필수적입니다.

 

 

◑부모님의 신앙유산

 

저 오카와 목사는, 부모님을 생각하면, 늘 눈물이 흐릅니다.

저는 13세 되던 해, 11월 6일에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날 예수님을 믿고 구원 받았으며, 같은 해에, 제 자신을 주님께 헌신했습니다.

 

부모님은 저를 위해, 평소에 늘 열심히 기도해 주셨습니다.

(저를 두고서 직접 설교를 주신 것은 아니지만..)

 

저는 ‘이보다 더 가난할 수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비참하게 사시는 부모님(목회자)의 모습을 보면서,

13세 때 구원 받은 순간 ‘나도 목사가 되어야겠다’는 결심을 했습니다.

 

장래에 대한 보장은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나 부모님과 마찬가지로 찢어지게 가난하게 살더라도

전도를 쉬지 않으리라는 결심으로.. 지금껏 살아왔습니다.

 

부모님은 언제나 기도하는 분들이셨습니다.

돈도 없고, 인맥도 없었기에, 늘 기도만 하셨습니다.

 

부모님이 기도하실 때는, 언제나 무릎을 꿇고,

두 손으로 무릎 허벅지 위를 손바닥으로 아래위로 왔다갔다하며 쓸었는데요,

그 때문에 바지가 잘 닳곤 했습니다.

그래서 기도할 때 입으시는 튼튼한 바지가 따로 있었습니다.

 

부모님은 지금 다 소천하셨습니다.

지금 제가 기억하는 부모님의 모습은,

‘제 아버지나 어머니가, 성도들을 위해서 쉬지 않고 기도하시던 모습’입니다.

 

저는 잊을 수 없습니다.

아직도 그 기도의 목소리가 제 귓가에 생생하지요.

 

지금 두 분은, 천국에서도

저를 위해, 제 아내와 자녀들, 손자들을 위해

예수님 곁에 꼭 붙어서, 그 앞에 무릎 꿇고 엎드려서,

중보기도를 해 주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평소에 그렇게 하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지금도 부모님이 천국에서

살아생전의 그 모습으로 저를 위해 기도해 주고 계신다고 생각하면,

제 눈에서 눈물이 멈추지 않고 흐른답니다.

 

그래서 부족한 저도,

제 가족을 위해, 친척들을 위해, 성도들을 위해

매일같이 시간을 들여서 눈물로 기도하고 있습니다.

부모님의 기도 유산을 물려받은 것 같습니다.

 

성도 중에 넘어지는 사람이 생기면, 특별히 그를 위해서 더 기도합니다.

‘주님 그도 좋은 사람입니다. 부디 그를 버리지 배교하도록 마옵소서!’

 

▲목회자는..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히5:7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목회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예수님의 그 기도와는 강도와 수준이 다를지라도,

목회자도.. 통곡과 눈물로.. 성도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 목사의 본질입니다.

 

그 기도의 궁극적 목적은.. 그들이 구원을 받아, 천국에 가는 것입니다.

또한 신앙생활의 길에서 타락(배교)하지 않는 것입니다. 히6:4~6

※목회자의 중보기도가 성도의 ‘현세적 복’ 보다는, 일차적으로 성도의 ‘영혼 구원, 회개, 거듭남, 영생’이어야 합니다.

 

▲저는 예수님께 이렇게 여쭈어보고 싶습니다.

“예수님, 예수님은 어떻게 그렇게 열정적으로 사셨습니까?”

예수님이 성육신이 되기로 순종하셔서,

육신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신 것 자체가.. 감동적인 열정 그 자체입니다.

    ※내가 애완견을 사랑한다고, 애완견이 되시겠습니까?

      그것도 나중에 처참하게 도살될 개 말입니다. 보통 열정이 아니십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내 아버지가 열정이 넘치는 분이란다!”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나님의 마음이 그랬기 때문에,

그 마음이 아들에게 전해진 것입니다.

예수님은 울며 소리 지르고 싶을 만큼, 간절한 바람으로 인간이 되셨고,

똑같은 간절한 바람으로, 열정으로, 십자가를 기꺼이 자원해서 지셨습니다.

    ※우리가 제자양육을 하고, 자녀양육을 하는 것은.. 이런 열정을 전달해 주는 것입니다.

      전달해 줄 필요도 없습니다. 내가 열정만 갖추어져 있으면, 저절로 전달되는 것입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이, 인생을 열정적으로 살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그 열정.. 그것이 우리 제자들에게 전해졌습니다.

그렇다면 크리스천들은.. 세상을, 열방을, 이웃을.. 열정적으로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 머리가 좋든/나쁘든

내 재능이 있든/없든

예수님의 사랑은, 나에게 파도처럼 다가와,

내가 그 파도가 되어서, 세상을 열정적 사랑으로 덮치게 되어 있습니다.

 

▲마치는 말

여러분, 이 세상에서 시험이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시험을 받을 때, 걸려 넘어지는 사람이 있고,  stumbling block

그것을 발판으로 딛고 올라가서, 더 강해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stepping stone

 

히12: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예수님은 시험을 받으시되, 죄를 짓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시험을 받으신 것은.. 우리를 동정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①예수님처럼, 시험을 받지만.. 죄를 짓지 마십시오. 불평, 원망, 자포자기, 심지어는 배교

물론 목회자는, 그런 시험당하는 성도를 위해서 늘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②예수님처럼, 시험을 받아서.. 시험 받는 자들을 동정하는 자가 됩시다.

특별히 목회자에게 시험이 많은 것은.. 여러 시험을 받는 성도들을 동정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닥치는 여러 가지 시험들을

하나님이 내게 주신 발판/뜀틀 stepping stone으로 삼아서

영생의 사명을 감당하고, 그 길을 충성스럽게 걸어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