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께 포로된 바울 행26:12~23 출처보기
▲서론/ 3번이나 기록된 다메섹 도상의 회심 체험
바울이 예수님을 만난 일, 그리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중생한
바로 그 장면에 대한 이야기가 사도행전에 3번이나 반복해서 나옵니다.
성경에, 같은 사건이 3번이나 반복해서 설명된 경우는, 매우 드뭅니다.
①행9장에서는 누가의 객관적 증거로서
그 당시 되어졌던 일을 사건대로 해설 없이 기록했습니다.
역사적 사실로, 객관적으로 기록한 것입니다.
②두 번째는 행22장에 나옵니다.
사도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체포되고 많은 군중 앞에서
자신의 지난 체험을 이야기하면서 자기변호를 하는 중에
자신이 주님을 만난 경험, 자기 회심을 이야기합니다.
③세 번째는 행26장에 나타난 오늘의 본문말씀입니다.
바울이 베스도 총독과 아그립바 왕 앞에서 마지막으로 증거하는 대목입니다.
그가 유대나라를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하는 간증인 것입니다.
이 간증과 함께 생사의 문제가 결말이 나는 것입니다.
그렇듯 중요한 시간에, 그 결정적 시간에
다시 한 번 그는 이 기회를 복음 전하는 기회로 삼아서
짧은 시간이나마 자신이 체험한바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에 대하여,
자신에게 일어난 사건에 대하여 증거 하게 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이 있습니다. 앞의 세 가지 대목을 잘 대조해서 읽어보세요.
똑같은 사건에 대해서 기록한 이 세 대목을 보면
첫 번째보다 두 번째가 더 상세합니다.
그런가 하면 두 번째보다 세 번째가 더 확실합니다.
특별히 오늘의 본문(세 번째)에서는, 그 의미까지 더 확실하게 설명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사도 바울의 귀한 신앙 간증이 있습니다.
성경에는 3번 기록되었습니다만, 바울은 전도할 때마다 이 이야기를
수백 번, 수천 번했을 것이라고 우리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어디 가서 증거하든지, 이 말씀은 빼놓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신이 구원받은 체험에 대한 간증, 이 중요한 간증은
항상 반복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에게 첫인상, 첫 경험이 항상 뇌리에 오래 남는다고 합니다.
바울은 가장 중요한 순간, 가장 결정적 순간에 (자기의 운명이 걸린 재판석상에서)
그 많고 많은 이야기 중에서, 자기가 처음 만난 예수 그리스도와 첫 경험을, 간증하고 있습니다.
오늘 나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와 이런 (쇼킹한) 첫 경험이 있습니까?
‘너희가 받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라고 했습니다. 약4:2
자신은 강력한 회심체험이 없다고.. 그저 손 놓고 있지만 말고, 주님께 구해 보십시다.
나는 남들에게 강력하게 전할 수 있는 <간증, 회심체험>이 있습니까?
수 십 번, 수 백 번 반복해서 얘기해도 또 하고 싶은, 그런 <회심 체험>을 주님께 간구하십시다.
◑바울의 회심 체험
▲26:12절, ‘그 일로 대제사장들의 권세와 위임을 받고 다메섹으로 갔나이다.’
오늘의 본문에 아이러니가 하나 있습니다.
지난날 사울은 분명히 예루살렘에 있는 산헤드린 공의회에 책임자들로부터,
즉 대제사장과 권세자들로부터 사명을 받습니다.
보냄을 받습니다. 그래서 다메섹으로 간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는 분명히 사명을 가지고, 보냄을 받았습니다. 대제사장으로부터 말입니다.
‘보냄을 받는다’는 말은 헬라어로 '아포스톨로스'입니다. '사도'라는 말입니다.
‘특별한 사명을 띠어 보냄을 받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아이러니한 것은,
바울은 처음에 분명한 사명을 띠고 ‘대제사장의 보냄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도중에 예수를 만남으로 말미암아 회심(convert, 방향 전환)을 합니다.
방향이 완전히 바꾸어집니다. 그래서 이제는 예수님의 보냄을 받은 사람이 됩니다. 아이러니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예수 믿는 사람을 죽이러 가던 사람이
이제 예수 믿는 사람, 예수를 전하는 사람이 됐으니 말입니다.
문자 그대로 180도로 완전히 달라지는 생의 변화를 봅니다.
오늘날에도, 이런 일은 얼마든지 일어납니다.
큰 반대자일수록, 크게 회심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래서 아이러니라는 것입니다.
▲13절, “왕이여, 때가 정오나 되어”
지금도 그렇습니다마는 이스라엘 쪽은 사막이고 또 덥기 때문에
낮에 여행을 못합니다. 정오에 여행하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주로 아침이나 저녁에 여행합니다. 그리고 낮에는 될 수 있는 대로 쉽니다.
사막이 너무 뜨겁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이 사건의 시간이 정오입니다.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몹시도 서둘렀다는 뜻입니다.
이는 바울이 얼마나 극렬분자였던가를 말해줍니다. 그는 극성스러운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이 여행하지 않을 때, 그 뜨거운 때를 무릅쓰고
다메섹으로 재촉해서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굉장히 '악질'이지요.
그 먼 길을, 그 사막 길을 대낮에 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악을 쓰고 있는, 그런 장면에서 주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이 있어요. 이 '정오'라는 말은 바울이 얼마나 극악한 사람인가,
얼마나 서둘렀는가를 말해주지만
이에 반하여 오늘날우리는 신학적 의미로 이 '정오'를 소중하게 여깁니다.
왜냐하면 '정오'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밤이 아니예요. 잠자는 시간이 아니예요.
바울이 예수를 만난 것이 밤에, 비몽사몽간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일 밤에 그랬더라면 '꿈을 꿨나'하지 않겠어요?
환각 작용이 아닙니다. 정오요, 대낮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을 보면 밤중에 기도하기는 기도하는데 엎드려 가지고 졸다가 자다가,
이러다가 무엇 하나 보고서는 '아, 계시 받았다'하고 돌아가기 쉬운데
사실 그렇지 않아요.
이 사건은 '정오에' 이루어진 것이니까 분명한 거예요.
그런 의미로'정오'는 대단히 좋은 증거가 되고 있습니다.
▲14절a, "우리가 다 땅에 엎드러지매"
또 한 가지, "우리가"라고 말씀합니다.
이 사건은 공통적, 공동적으로 경험한 것입니다.
그 장면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공동적인 것과 개인적인 것이 구분되어 있습니다.
"하늘로서 해보다 더 밝은 빛이 나와(13절)"
-이것은 공동적인 것이지요. 다 같이 본 거예요. 다 같이 쓰러졌어요.
이게 중요한 거예요.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라는 말은
그 사건이 역사적 사건이라는 것을 웅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행9장에서는 '저들은 소리만 듣고, 보지는 못했다'라고 말씀합니다.
또 22:9에서 '사람들이 빛은 보면서도, 나더러 말하시는 이의 소리는 듣지 못했다' 합니다.
빛은 다 같이 보았지만, "사울아"하시는 소리는 사울만 들었어요.
그러니까 어느 부분에서는 공동적으로 경험을 했고
어떤 부분에서는 전적으로 개인적입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사도 바울 개인을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무릇 우리가 공동적으로 경험하는 것이 있는가 하면, 지명돼서 개별적으로,
지극히 개별적으로 경험하는 게 있어요.
신비로운 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적이고 주관적이라는 것을 또한 알아야 하겠습니다.
▲14절b,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주께서는 히브리말로 "사울아 사울아"하고 부르셨습니다.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 대단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여기에 바울로서는 대꾸하고 싶은 말이 있었을 것입니다.
"내가 언제 주님을 핍박했습니까? 나는 교회를 핍박했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했지, 예수님을 언제 핍박했다고 그러십니까?"
그러나 그가 스데반을 죽였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가서 내 이름으로 복음을 전할 때, 너희를 영접하는 것은 곧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 보내신 자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너희를 핍박하는 것은 곧 나를 핍박하는 것이니라'
주님을 위해 일하는 주의 종을 영접하는 것은, 곧 주님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주의 종을 핍박하는 것은, 어떤 이유로든 간에 곧 주님을 핍박하는 것입니다.
그 때에 주님께서 말씀하실 것입니다.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그 다음에 재미있는 말씀이 본문에 있어요. 이 말씀은 26장에만 있습니다.
▲14절c,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그 시간에도 예수님께는 대단히 유머러스해요.
바울은 지금 죽을 지경인데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입장에서는 좀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지만, 이스라엘사람들은 쉽게 이해합니다.
이 말은 당시의 속담입니다.
그들의 풍속 중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소나 말 등을 길들여 가지고
처음으로 밭을 갈든가 혹은 달구지에다가 멍에를 매어 가지고 갈 때,
짐승이 앞에 가고, 주인이 뒤에서 갑니다.
그런데 이 짐승이 아직도 길이 덜 들여져서 순하지 않아요.
그래서 주인을 골탕 먹이려고 가다가 뒷발질을 해요.
그 버릇을 고치기 위해서 주인은 두 가지로 방법을 씁니다.
하나는 송곳 같은 것을 만들어 뒤에다가 놓아두어서
뒷발질을 하면 딱 찔리게 만듭니다.
몇 번 찔리고 나야 이놈이 정신 차려서 뒷발질을 안 한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흔히는 가시채를, 가시나무가 엉긴 것을 둥그렇게 만들어서
뒷발 뒤편에 묶어놓습니다.
주인을 혼내려고 뒷발질을 하면, 영락없이 자기가 찔리거든요.
이 말씀은 바로 그 속담/풍습을 말하는 거예요.
“가시 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그렇지 않아요?
뒷발질하면 할수록 자기 손해지요.
그러니까 '얘야, 버둥거리지 마라. 내가 너를 붙잡았다. 고분고분해라,
딴 생각 하지 말고 따라와라. 뒷발질하다가는 네가 당한다'
이런 아주 유머러스한 말씀이예요.
그런고로 '행여 뒷발질할 생각일랑 하지 마라.
‘내가 너를 붙들었으니 그대로 따라 와’하고 딱부러지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참 당돌한 사람입니다. 이런 경황에도 반문합니다.
▲15절, "주여 뉘시니이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주여 뉘시니이까"
이렇게 확인하는 용기를 보면.. 바울이라는 사람, 참 대단한 사람입니다.
그런 경황이면 우리는, 확인 같은 것을 해볼 엄두조차 못내는 게 보통입니다.
그것이 자기 주변 사람의 소리인지, 천사의 소리인지, 마귀의 소리인지,
꿈인지 생시인지, 전혀 생각해보지 않고, 신비는 신비다, 하고 우리는 지나쳐 버리는데,
그럴 것이 아닙니다. 확인하는 제정신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는 내가 너희의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고전12:1
신령한 것을 알아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신령한 것, 다시 말하면 좀 이상한 것이라고 해서 무조건 따라가려고 하지 마세요.
▲16절a, "일어나 네 발로 서라."
9장에 보면 '다메섹으로 들어가라.
네가 이제 앞으로 할 일을 네게 말할 자가 있으리라' 하십니다.
그리고 아나니아를 보내십니다. 굉장한 일입니다.
바울의 의견은 전혀 묻지 않으셨어요. 오로지 명령만 하십니다.
'네 발로 일어서라, 다메섹으로 가라,
너는 앞으로 복음을 전할 사환과 증인이 될 것이다'라고 확실하게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그리고 도움이 필요한 때는, 도울 사람(아나니아)을 반드시 예비해 주시고, 보내주십니다.
혹은 내가 오늘, 누구의 아나니아가 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도움이 필요할 때,
반드시 꼭 필요한 사람을 붙여 주십니다.
▲16절b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사환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
사도 바울은 본래 다른 목적으로 가던 사람인데,
도중에서 예수님께 붙들렸어요. 완전히 포로 됐다는 것입니다. 너로 사환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
우리가 지금은 직업이 중요한 것 같지만,
예, 직업은 당연히 중요합니다. 그러나 먼저 예수께 붙잡혀서,
예수님의 사환이요, 증인으로서.. 자기 직업에 충실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대제사장의 (세속권세의) 보내심을 받은 직업인이 되는 것은
나중에 ‘내가 인생을 속아서 헛살았구나.’ 할 것입니다.
오늘 당장 나 자신을 돌아봅시다.
‘나는 지난 10년이 보람되었다. 후회 없다’ - 예수께 붙잡혀 사환으로 살았다는 증거입니다.
‘나는 지난 10년 세월이 아리송하다. 뭐가 뭔지 모르겠다’ - 직업에 충실하고, 돈을 벌었더라도,
헛되게 살아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내 삶이, 철저히 주님께 붙잡혀야 합니다.
누구 말대로 Divine Driven Life/ 하나님의 섭리로 쫓겨가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본문의 바울이 사환이요, 증인으로 살았던 것처럼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강권적으로 역사 하신 것입니다,
나의 어떤 자격을 보신 것도 아니고, 인물을 보신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 스스로 친히 강권적으로 역사 하신 것입니다,
온전히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이때부터 시작해서 내 일생 오늘까지, 내가 이렇게 감옥에서 고생하는 것,
죽거나 살거나 복음 전하는 것, 이 모두가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사람의 얘기가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역사일 뿐입니다'
-이것을 설명하는 것이 바울의 의도입니다.
◑바울의 구원론
오늘의 본문을 자세히 보면 17절로 18절에 <바울의 구원관>이 있습니다.
구원이 어떻게 이루어지느냐 하면
▲17절, "내가 너를 구원하여 저희에게 보내어"
-먼저 보냄을 받아야합니다. 보냄 받지 않고는 전할 수가 없어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롬10:14~15
보냄을 받아야 합니다. 보냄 받은 자를 통해서 우리가 복음을 듣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
▲18절a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돌아가게 하고'
-여기에 회심(conversing)케 하는 역사가 있습니다.
생각을 돌리고, 뜻을 돌리고, 생의 의미를 바꾸고.. 그것이 구원의 역사입니다.
그 다음에 오늘의 본문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18절b,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케 된.."
'죄 사함 얻고' - 예수 믿는 목적이 여기에 있어요.
예수 믿는 목적은 죄 사함 받는 데 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믿어 거룩하게 되어'
-성화, 믿어서 거룩하게 되고,
믿어서 구원받습니다. 확실한 구원론입니다.
▲18절c "기업을 얻게 하리라"
-이것은 하늘나라의 기업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바울의 구원론이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바울에게 명하신 구원론입니다.
◑이제 본문의 결론인 바울의 고백을 봅시다.
▲19절 아그립바 왕이여 그러므로 하늘에서 보이신 것을 내가 거스리지 아니하고..
‘I have no choice. 내게 자유가 없습니다. 나도 이럴 수밖에 없습니다.’
하늘에서 보이신 것을 내가 어찌 거역하겠습니까,
내게는 정말로 자유가 없습니다.. 라는 얘기입니다.
22:7, 10 "사울아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일어나 다메섹으로 가라"
가만히 보면 주님께서는 바울의 의견을 묻지 않으십니다.
그것으로 끝이에요. 도대체 아무의견도 묻지 않으십니다.
언제가 누가 이런 얘기해서 웃은 적이 있어요.
모세가 홍해를 건너가는데, 건너가기 전에 모여 가지고
갈까 말까 회의를 했더라면.. 못 건너갈 뻔했다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명령 앞에
인간의 의견은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바울은 지금 무엇을 말씀하고 있습니까?
‘이것은 내 뜻이 아닙니다. 예수께서는 내 의견을 물어 보시지도 않았습니다.
그대로 따르는 길 밖에는 없었습니다.’
-이것이 바울의 신앙이요, 바울의 고백입니다.
▲23절 “곧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실 것과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다시 살아나사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빛을 선전하시리라 함이니이다 하니라.”
이렇게 긴 이야기를 다시 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오늘의 본문 끝에서 암시되고 있습니다.
내가 경험한 일은 나 하나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게 나타나시고 하나님께서 내게 역사 하신 것은
나 하나만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온 이방사람, 온 인류,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함입니다.
직선적으로 말하면, 내가 이런 계시를 경험한 것도 어쩌면 당신을 위해서입니다.
당신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내게 이런 역사가 있은 것입니다.
모든 사람을 위하여,
모두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 사건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 사건은 사도 바울 하나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의 사건이지만, 사실 모든 사람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확실한 경륜과 목적이 있기에 되어진 일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설명하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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