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부와 궁핍에도 무덤덤한 사람 빌4:11~20 인터넷설교 스크랩, 정리
◑헌금을 받고도, 기분이 무덤덤한 바울
▲본문 빌4:11~20은,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에게 감사를 표현하는 내용입니다.
사도바울이 로마의 감옥에 갇힌(가택연금) 생활이 장기화됨에 따라
빌립보 교인들의 마음속에, 사도바울에 대한 염려가 싹트게 됩니다.
그래서 마케도니아 지방 전체가 어려움 속에 있는 가운데
이 빌립보 교인들이 자기들도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사도바울을 위해서 특별한 모금을 하여
에바브로디도 편에 사도바울에게 전달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빌립보서를 쓴 뒤에, 편지의 마지막 부분에서,
빌립보 교인들의 이러한 사랑의 배려에 대해서
사도바울이 감사의 뜻을 표하고 있습니다. 빌4:11~20
4:16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너희가 한 번 두 번 나의 쓸 것을 보내었도다
18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의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
▲그런데 헌금을 받은 바울이, 오히려 큰 소리 치며, 훈계하는 듯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사도바울의 감사가.. 정말 감사인지/아닌지 구분이 안 될 만큼
말투가 훈계를 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어려운 처지에 있는 것을,
빌립보 교우들이 불쌍한 마음이 들어서
자기들도 어려운 가운데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금을 해서 도와주었으면
그냥 “감사합니다. 잘 쓰겠습니다!”하면서 깨끗하게 끝냈으면, 제 생각에는 좋겠어요.
그런데 바울은, 어렵게 자기를 도와준 교인들에게
‘나는 풍부에 처할 줄도 알고, 빈곤에 처할 줄도 알며, 자족하는 일체 비결을 배웠다.’ 빌4:12
이런 표현을 잘못 들으면,
‘나는 자족한다, 나는 만족한다, 그러니 네가 도와주는 것이, 나는 필요 없다’
이런 얘기로 들릴 수도 있습니다.
도대체 어쩌자는 겁니까?
‘정말 내가 꼭 필요했는데, 여러분이 제 필요를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이렇게 표현이 나와야 당연하지 않습니까.
애써서 도와준 교우들에게 하는 말이,
‘나는 자족한다’ 그러면
만약 제가 교인 입장이라면, 얼른 도로 거두어버리고 싶을 것입니다.
▲물론 바울은, 교우들에게 감사를 표현합니다.
빌4:14, 그러나 너희가 내 괴로움에 함께 참예하였으니 잘하였도다.
지금 바울의 본심은,
‘너희가 내가 감옥 생활하는 것이 불쌍해서 모금을 해서 보내준 것은 정말 잘하였다.’
고 칭찬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속심정
본문에서 사도바울이 하고 싶은 말은, 아마 다음과 같습니다.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세상을 보는 관점,
여러분들이 갖고 있는 삶에 대한 자세,
그 입장에서 보자면 나의 지금의 삶은 괴로움일 것입니다, 그러니 도와 준 것은 잘했습니다.
그러나 만약 빌립보 교인들이여,
너희들이 보는 것처럼, 내가 감옥에 갇혀 있기만 해서 내 삶이 괴롭기만 한다면
도대체 우리 주님의 복음은 어떤 소용이 있는 것입니까?
감옥이라는 환경도
복음의 능력을 없애버리거나, 무효화 시켜 버리지는 못 합니다.
복음은 그야말로 문자 그대로 기쁨의 소리 아닙니까?
너희들이 보는 대로 내가 불쌍하기만 한 처지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나는 모든 일에, 일체의 비결을 배웠거든요!’
사실 바울을 감옥에 구금시킨, 주님의 섭리가 분명히 있었습니다.
그는 로마 감옥에 2년 정도 구금되는 시기에
<옥중서신- 에베소서/빌립보서/골로새서/빌레몬서>를 썼습니다.
그리고 ‘복음의 진보’가 나타났습니다. 거기서도 전도했다는 뜻입니다. 1:13
그리고 다른 형제들이, 더욱 담대히 복음을 전파하게 되었습니다. 1:14
그중에서도 <옥중서신>의 기록은.. 정말 탁월한 업적이었습니다.
이 내용은 설명을 안 해도, 여러분이 잘 아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감옥(가택연금) 가운데서도
어떤 형편에서든지 자족하기를 배운 바울은..
빌립보 교우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마냥 그리 비참한 처지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비참한 처지 가운데 있으십니까?
하나님이 필요해서, 그 환경으로 여러분을 인도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내가 처한 환경 가운데서,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하십시오.
무조건 ‘내 환경은 지금 너무 비참해!’
-이건 아마 빌립보 교인들이 가졌던 믿음의 초보적인 생각입니다.
대신에 바울과 같은 믿음을 가지십시오.
4:12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그래서 누가 당신을 불쌍히 여겨서, 도와주더라도..
그냥 바울처럼 무덤덤하십시오.
11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어떤 면에서 세상에 제일 한가한 사람이,
자기 먹고 살 것을.. 걱정하고, 염려하는 사람입니다.
사명자는.. 자기 먹고 살 것을 염려하지 않습니다.
대신에, 자기 사명과, 하나님의 나라와, 세상의 복음전파를 위해서.. 늘 염려합니다.
바울은.. 지금 자기 먹고 사는 것을 염려할 만큼.. 한가한 처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성의는 대단히 고맙지만, 제 관심은 그게 아닙니다!’ 빌4:14~18
이 얘기를.. 본문에서 하고 있습니다. 본문을 약간 비약적으로 보면, 이렇다는 것입니다.
◑신념체계의 충돌
▲가치관의 충돌을 경험하셨나요?
요즘 <문명의 충돌>이란 말이 유행인데,
예수를 제대로 믿으려면, 반드시 <가치관의 충돌>을 경험하고,
그것을 신앙과 믿음으로 극복해야 합니다.
예수를 믿으면서도,
<세상 가치관과 전혀 충돌되지 않게 믿는> 사람들이 수두룩합니다.
그건.. <세상 가치관>에.. 성경과 신앙을 자기가 끼워 맞춘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가 세속화 되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설교를 들어봐도,
세상 가치관에 성경을 끼워 맞춘 식의 설교가.. 수두룩합니다.
그래서 세상과 충돌하는 부분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건.. 본질은 바알 신앙을 갖고서, 껍데기는 ‘기독교’로 뒤집어씌운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진노하시고, 심판하실 것입니다.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의 예언들이.. 그런 점을 지적했습니다.
겉 형식은 ‘여호와 신앙’인데, 그 속 본질은 ‘세속주의’라는 지적이었습니다.
▲세속적 가치관이 주입된 사람의 예
동네에서 '아파트 장'이 서는 것을 구경하게 되었어요.
장난감 파는 아저씨가 한분 계셔요.
제법 큰 종이박스 안에, 장난감을 서 너 개 풀어 놨습니다.
배터리를 넣어 스위치를 켜면, 저벅저벅 앞으로 걸어갑니다.
그런데 상자 테두리에 막혔어요.
그러니까 그냥 그 앞에서, 계속 저벅저벅 제자리걸음을 해요.
그것은 이 장난감로봇에, 애초에 앞으로 가라는 명령만 넣어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로봇은, 배터리가 다 될 때까지, 자기 일평생 그러고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로봇이에요.
여러분,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 속에, 세상이 집어 넣어준 신념 체계, 가치 체계가 있어요.
검증되어본 적이 없는 신념체계가 내 머릿속에 들어오면
우리도 그 신념체계를 따라.. 평생을 저벅저벅 걸어가는 것이에요.
예를 들어서, ‘돈을 벌어야한다!’고
언제 누가 가르쳐준 명령체계인지 몰라요.
그러나 그 명령체계를 머릿속에 집어넣고, 평생을 저벅거리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살다보면, 돈을 못 버는 상황이 생길 때도 있어요.
그렇다면 ‘꼭 돈을 벌어야만 행복한 것은 아닐 거야’ 라고
한번쯤은 생각해 봐야 하잖아요?
사업에 5번 실패, 6번 실패해도
또 그 앞에서 돈 벌겠다고 저벅거리고 있어요.
저벅 저벅 저벅 저벅…
▲여러분, 돈 못 벌었다고 괴로워하십니까?
속지 마세요.
돈 못 벌은 것은.. 행복과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문제는
‘돈을 많이 벌어야 행복하다’는
여러분 머릿속에 고정된 신념체계 때문에
여러분의 삶이 괴로운 것이에요.
길가는 사람 100명을 붙잡고 물어보세요.
'여러분의 최대 행복의 조건이 무엇입니까?'
‘건강이다’ 그럽니다.
그런데 누가 그랬습니까? (이것도 세속적 가치체계에 세뇌된 것입니다.)
전 세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나폴레옹이
마지막에 세인트 헬레나 섬에 유배 되어서 죽기 전에 한 말이 있습니다.
‘내 평생을 다 꼽아 봐도, 행복한 삶을 살은 날은, 채 6일밖에 되지 못했다’
그런데 귀먹고 눈 먹고 말 못하는 3중 장애인으로 살았던 헬렌 켈러는
죽기 전에
‘오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세상을 살게 해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이렇게 감사, 찬양했습니다.
당신은 지금 행복하십니까? 금년의 삶이 행복하십니까?
그러면 당신은 참 크리스천이 맞습니다.
사도바울처럼, 헬렌켈러처럼, 삶에 일체의 비결을 터득하신 분이고,
예수님의 복음을 정확히 믿고 사는 분입니다.
그런데 지금 행복하지 않고, 금년의 삶이 괴로워서 못 견딜 지경이라면..
하나님이 잘못 된 것이 아니라,
당신의 신앙이 잘못된 것입니다.
바울처럼 ‘일체의 비결을 아직 터득하지 못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부터 ‘풍부에나 궁핍에나 일체의 비결을 터득하게 해 달라고’ 빌4:12
몇 달 동안 간절히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반드시 응답을 주실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헬렌 켈러가 행복했다면.. 당신은 반드시 행복할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 헬렌 켈러보다는.. 당신의 사정이 낫지 않습니까?)
.................
▲관점의 차이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십니다.
너무 힘이 드니까 자꾸 쓰러지세요.
예루살렘 여인들이 나와서,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님을 보면서.. 웁니다.
로마병정들은, 도저히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갈 수 없을 것 같으니까
구레네 시몬을 불러서, 그에게 십자가를 지우고, 예수님은 홀몸으로 가게 하십니다.
쓰러지셨다가 일어나셔서, 우는 여인들을 향해 말씀하십니다.
“예루살렘 여인들아 나를 위해서 울지 말고, 너희와 네 자녀를 위해서 울어라,
너희들이 보는 인생에 대한 관점과 자세로 보자면
나는 막힌 것이고, 패배한 것이고,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져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내가 보기에는 너희가 바로 지금 그런 처지에 있는 자들이다,
너희의 형편을 제대로 깨닫고 너희를 위해서 울어라,
십자가를 지고 통렬한 아픔과 괴로움의 길을 가지만
나는 참된 진리의 길, 행복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중이다”
예수님은.. 관점이 다른 것입니다.
세상적 관점과, 천국의 관점은.. 이렇게 극과 극으로 다른 것입니다.
세상적 관점에서 보면, 주기철, 손양원 목사님 등, 순교자가 제일 불쌍한 분들이지만,
천국 영생 관점에서 보면, 그들의 비참한 헌신이.. 가장 큰 상급이고,
그들이 가장 값지고 행복한 인생을 보냈고, 영원히 존귀를 얻을 분들입니다.
그걸 깨달은 사람이, 모세입니다.
그래서 그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는 신분을 포기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선택했던 것입니다. 히11:24~25
▲하나님의 잘못이 아니라, 당신의 관점이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선하시며,
하나님은 절대 한 치도 실수가 없으시며,
하나님의 섭리와 행하심은, 완벽하십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실수로.. 지금 괴로운 환경의 코너에 몰린 것이.. 결코 아닙니다.
당신이 아직, 하나님의 섭리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당신의 신념체계가 ‘세상적’이라서.. 그 섭리를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사도바울처럼 사십시다.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우는 삶!
그리고 자신이 다다른 밑바닥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하는 삶!
그런데 빌립보 교인들이 바울 자기를 도와주는 겁니다. 로마감옥에서 고생한다고..
바울의 심정은 그냥 덤덤합니다.
그들의 도움이 고맙기는 하지만, 그렇게 뼈저리게 고맙지는 않은 것입니다.
우리가 가져야 될 심정입니다.
환경에 일희일비 하지 마시고, 그냥 자기 사명의 길을 꿋꿋이 걸어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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