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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화나님

LNCK 2011. 10. 14. 16:34

◈하나님, 화나님          창12:17,  슥9:9~17          11.09.21.설교스크랩

 

 

내가 아까워하는 것(우상)들을

하나님을 더 사랑함으로 기꺼이 버릴 때,

하나님이 내가 버린 것들을.. 특별히 보호해 주신다는 내용..  

 

 

◑내가 내 우상을 버리면..

 

▲사건1.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바칠 때

아브라함이 백세에 낳은 이삭이, 아름다운 청년의 모습으로 성장했습니다.

그 아들을 아까워하지 않고 하나님 보시는 앞에서

번제단 위에 올리고 칼로 내려치려고 합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기겁을 하시면서 이삭이 아까워서, 뛰어내려 오셔서

이삭을 하나님이 접수 하십니다.

 

그때부터 이삭은 하나님이 끌고 가시는 거예요.

하나님이 끌고 가시는 겁니다.

 

이삭은, 성경의 기록에 의하면,

일평생 비교적 평탄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도 괴로움을 당했지만, 그러나 아브라함, 야곱, 요셉 등

다른 족장에 비교하면.. 제일 평탄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미국인들은, 자녀에게 ‘이삭’이란 이름 짓기를 좋아하고,

‘야곱’은 짓기는 지어도, 그렇게 많이 짓지는 않습니다.

그의 삶에 환란이 많았기 때문이지요.

 

어쨌든, 이삭의 남은 생애가, 그렇게 평탄했던 것은,

그의 아버지 아브라함이, 자기 우상이었던 이삭을 번제물로 바친 결과,

하나님이 그 이삭을.. 일평생 책임져 주셨다는 것입니다.   ←설교 주제

 

그리고 이삭에게 대적하는 모든 대적들은,

하나님이 그 대적들에게 ‘화나님’이 되어주셨습니다.

무척 진노하시고, 화를 내셨다는 것입니다. 블레셋 왕 아비멜렉에게

 

▲사건2. 아브라함이 애굽에 내려갔을 때 (창12장)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본토친척 아비 집을 떠납니다.

여러분 분명히 아세요, 아브라함을 오해할 때가 많아요.

 

팔레스틴에 기근이 있을 때,

아브라함이 믿음이 없어서 애굽으로 내려간 게 아니에요.

 

우리는 자꾸 오해합니다.

아브라함이 아내 사라를 버린 것은, 애굽에 내려갈 때가 아니라,

그가 ‘본토친척 아비 집을 떠날 때’, 이미 자기 아내를 버렸던 것입니다.

 

그 당시, 치안부재의 현장으로 떠나서 타향살이를 하게 될 때

재산이고, 아내고..

아브라함이 자기 힘으로 지킬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떠나려면

마음으로 아내를 먼저 버려야만.. 그게 가능한 겁니다.

(애굽에 내려가서, 아내를 버린 것이 아닙니다.)

 

아마 아내 사라에게 이렇게 사전동의를 구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갈대아 우르를 떠나서, 먼 곳으로 갔을 때,

당신의 아름다움 때문에, 강한 자들이 당신을 요구할 때

나는 당신을 내어줄 수밖에 없다,

당신 버릴 거 각오하고, 내가 지금 하나님 명령 받고 떠난다,

그러니까 당신도 이걸 이해해 달라’ 이렇게 양해를 구하고, 출발했을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명령이 아까워서(두려워서)

아내를 아까워하지 않고 버린 다음에, 출발을 한 것입니다.

 

자, 그런데 애굽 왕 바로 앞에 섰어요.

애굽 왕이 보니까 아름다워요, 달라고 그럽니다, 안 준다면 죽일 거예요.

 

바로가 아브라함을 왜 안 죽이겠습니까?

애굽의 백성도 아니고, 떠돌이 히브리인인데..

 

그런데 그날 밤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나타나십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의 아내 사래의 연고로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리신지라’ 창12:17

 

하나님이 화를 내십니다.

하나님이 바로에게 ‘화나님’이 되십니다.

그리고 그의 아내 사라를.. 기적적으로 보호해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일로, 부자가 되는 행운을 얻기도 했습니다.

 

지금 이 설교의 주제는,

성도가, 자기에게 우상이 되는 대상을

하나님을 제일 사랑함으로, 기꺼이 그 대상을 버릴 때..

하나님은 그 대상을(이삭, 사라)

책임지시고, 보호하시고, 돌봐 주신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잘 돌보지 못하는데 (그래서 바로에게 빼앗겼지만)

하나님이 발 벗고 나서셔서, 잘 돌봐 주신다는 겁니다.

대적들에게 막 화를 내시면서..,

 

▲사건3. 아브라함이 그랄 왕에게 곤경을 당할 때  (창20장)

하나님이 화가 나시는 장면(화나님)이 아주 노골적으로 표현된 것은

더 뒤에 창20장입니다.

이번에는 그랄 왕 아비멜렉과의 똑같은 사건이 벌어집니다.

 

그랄 왕 아비멜렉이 사라를 원합니다.

또 빼앗깁니다,

이미 마음에서 아내를 아까워하지 않고, 하나님의 명령을 따른 거예요.

 

이때 하나님께서 창세기 20장에 보면

‘네가 취한 여인을 인하여 네가 죽으리니, 그가 남 아브라함의 아내임이라’

 

내 종 아브라함이 나의 명령을 아까워해서

자기의 아내를 아까워하지 않고 버렸는데

 

아브라함이 아까워하지 않고 버린 아내 사라를 그랄 왕이 취했을 때,

하나님이 화를 내십니다. 하나님이 ‘화나님’으로 돌변하셨습니다.

‘네가 그 아내 사라를 취하려 했기 때문에, 네가 오늘 밤에 죽으리라

 

◑적용

 

여러분 이렇게 화내신 하나님 한번 보셨습니까?

내가 내 자식을

하나님께로 내 마음을 다 드리기 위해서, (이삭처럼) 아까워하지 않고 버렸는데

 

하나님이 내 자식을 아까워하시면서

내 자식에게 원수가 되는 환경과 사람에 대해서

화를 내시는 하나님(이를테면 화나님)을 만나 보신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을 아까워(사랑)하기 위해서

내 마음을 사업에 빼앗기고 기업에 빼앗기는 것이 너무 억울해서

사업을 버렸습니다.

내 마음에서, 기업을 버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기업을 아까워하시고 택하셔서

그 기업에 원수 되고 대적되는 환경에게 화를 내시면서 역사하시는 것을

경험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이 ‘화나님’을 경험해 보지 못하셨다면

우리는 아직도 하나님 앞에서 우리 삶의 현장에서 주어지는 문제들에 대해

정답을 맞히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돈 문제가 발생했다, 그럼 정답이 뭐라고요?

그 돈 문제를 잘 해결할 수 있기 위한 해답을 찾느라고 고민하고,

고심한 끝에 뭔가 방법을 강구해 내는 게.. 정답을 내는 게 아닙니다.

 

돈 문제 자체를 이렇게 할 것인가, 저렇게 할 것인가.. 답을 내는 게 아니라,

그 자체를 아예 마음에서 아까워하지 않고, 버리는 겁니다.

 

내가 아까워할 때 반드시 지불돼야 될 비용이 있지 않습니까?

내 애틋한 마음이에요. 그 마음이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고는, 돈 못 버립니다.

 

그러나 돈을 버려 보십시오,

돈 문제 만큼은.. 하나님이 책임져 주실 것입니다.

 

자식을 조기유학을 보낼 것인가 말 것인가,

보내는 게 답도 아니고, 안 보내는 게 답이 아닙니다.

 

보내건 안 보내건 문제가 아니라,

자식이라는 존재자체를 아까워하지 않고

내 마음에서 버리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자식문제에 대한 정답이라는 겁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단에 바치듯이

내가 내 마음에서 자녀의 우상을 버릴 때,

그 자녀는.. 이삭처럼.. 하나님이 그의 일생을 책임져 주시고,

그의 대적들에게는, 하나님이 ‘화나님’이 되어주실 것입니다.

 

 

◑본문 설명

 

오늘 본문은 유명한 본문이에요.

예수님께서 나귀타고 오시는 장면입니다.

스가랴 선지자가 그걸 예언하고 있어요.

 

▲다 포기하고 나귀를 타셨습니다. (아브라함이 다 포기했듯이)

왕은 왕이신데..

알렉산더는 준마 부케팔로스를 탔고,

삼국지에 나오는 관우가 탔던 적토마를 생각할 때.. 이거 기가 막힌 거예요.

 

나귀는 전혀 전쟁에 적합한 짐승이 아닙니다.

더욱이 나귀를 탈 바에야, 아예 걸어가는 편이, 위신 유지에 더 낫습니다.

나귀 타면, 탄 사람의 발이 땅에 닿을 정도입니다. (당나귀가 아닙니다.)

티코(소형자동차) 타느니.. 그냥 걷는 것이 차라리 더 낫다고 할까요?

 

이렇게 예수님은, 나귀를 타시고,

평화의 왕으로.. 입성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왕중의 왕으로서 가지신 모든 권리를 다 포기하시고,

초라한 나귀를 타시고, 평화의 왕으로 입성하셨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겸손하신 예수님의 대적들에게) ‘화나님’이 되어주셨습니다.

그 뒤에 이어서 슥9:13~17까지 쭉 읽어보면,

아니 갑자기 이게 뭡니까?

 

13절에 갑자기

‘내가 유다를 당긴 활로 삼고 에브라임을 끼운 화살로 삼았으니,

시온아 내가 네 자식들을 일으켜, 헬라 자식들을 치게 하며, 너를 용사의 칼과 같게 하리라’

 

14절을 보세요,

‘여호와께서 그들 위에 나타나서, 그들의 화살을 번개 같이 쏘아내실 것이며

주 여호와께서 나팔을 불게 하시며, 남방 회오리바람을 타고 가실 것이라’

 

15절은 극치입니다.

정말 '평화의 왕'하고는 정반대의 모습이, 아주 극치로 표현되는데

‘만군의 여호와께서 그들을 호위하시리니,

그들이 원수를 삼키며 물맷돌을 밟을 것이며,

그들이 피를 마시고 즐거이 부르기를 술 취한 것 같이 할 것인즉

피가 가득한 동이와도 같고, 피 묻은 제단 모퉁이와도 같을 것이라’

 

왜 주님은 평화의 왕으로 나귀타고 오시는데,

아버지 되시는 만군의 주 여호와 하나님은, 주님의 대적들에게, 전쟁을 수행해 주십니다.

 

(실제로 그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예루살렘은, 

나중에 로마에 의해 초토화 되고 말았습니다.) 

 

-헬라를 치게 한다,

-용사의 칼과 같다,

-그들을 호위하시며 물맷돌을 밟을 것이며,

-피를 마시고 즐거이 부르기를 술 취한 것같이 할 것인즉...

이게 다 무슨 말입니까?

 

예수님이 평화의 왕으로서, 나귀타고 가시면서,

자신의 모든 권리를 포기하시고, 겸손히 죽으로 나아가시자,

 

여호와 하나님은

정작 이렇게 무시무시한 전사의 모양으로 뒷배경이 되어주신 것입니다.

 

아! 여러분, 이거 우리가 모르면 신앙생활 제대로 못해요.

 

15절에 ‘만군의 여호와께서 그들을 호위하시리니 그들이 원수를 삼키며’

이런 성도의 참 권세와 능력을 갖게 되시기 바랍니다.

 

(후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