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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없음/2002~2003

겸손의 용기

LNCK 2011. 10. 28. 11:16

◈겸손의 용기                마21:1~17                출처보기, 정리


◑본문 설명


▲예수님의 단명을 자초한 2가지 사건

예수께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십니다.

많은 학자들이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들의 주장에, 저도 동의합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 가셨는데

유월절에 올라가서 모름지기 2가지 행사만 하지 않았더라도

예수님은 십자가에 돌아가시지 않았을 것이고,

또 몇 년 더 살아 계시면서.. 구원사역을 이루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일찍 돌아가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 라고 상황 해석을 합니다.


그 2가지 행사가 뭐냐 하면,

<나귀타고 입성하신 것>과, <성전 청결>입니다.


그런데 아래에서 살펴보겠지만,

그 2가지 행사가, 인간적 관점으로 보면 다 헛된 일이었습니다.


안 한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행사를 했지만.. 아무 결과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괜히 아까운 예수님의 목숨만 버린 것입니다. 인간적 시각에서 보면 그렇습니다.


▲1. 나귀타시고 입성

이건 정치적인 오해를 많이 받을 수 있습니다. 지금 로마가 통제하는 사회입니다.

정치적으로는 절대로 어떤 행사나 집회나 운동이 있을 수가 없어요.


그런데 ‘유대 왕의 대관식’을 하겠다니.. 이게 될 일입니까?

이 이벤트, 이 자체가 문제가 되는 거예요.

어떻게 이스라엘의 전통 풍속에 따라서

왕의 대관식 행사를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솔로몬도 나귀 타고 입성했습니다.

이렇게 하고도 무사하겠어요?


나귀를 타고 올라간다고.. 실제로 유대의 왕이 될 것도 아니요.

예수님이 진짜 유대의 왕이 될 것을 예상하시고, 나귀 타신 것도 아닙니다.

괜히 긁어 부스럼 아닙니까?


▲2. 또 하나는 예루살렘 성전을 깨끗이 한 겁니다.

이건 더 정면충돌 한 것이에요.


이 두 사건을 들어서 신학자들은 

‘예수님께서 나 죽여라’ 한거나 마찬가지라고 해석합니다.


대제사장들이 예수를 죽이기로 결정하고, 지금 기다리고 있는 그 소굴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가서,

‘만민이 기도하는 집을 어찌하여 강도의 굴을 만들었느냐’며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서, 내 몰았어요. 성전을 깨끗이 했습니다.


이건 무슨 일 입니까?

솔직히 말하면.. 이렇게 했다고 해서 성전이 깨끗해 졌습니까?

 

대부분은 그 다음날 또 여전히 거기서 장사 했을 거예요.

그렇다면 이 행사가 무슨 의미가 있냐고요..

예수님이 그때 성전을 깨끗이 했다고.. 성전이 영영 깨끗해지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행사를 한 것입니까? 이 이벤트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이제는 그것을 생각해야 됩니다. 왜 예수님께서 이렇게 하셨을까요?


이 위험한 일을.. 오해가 많은 일인데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이렇게 했습니다. 왜요?

그 분은 왕이시기 때문에...

왕 되심, 주 되심을 여기서 계시적으로 나타낸 것입니다.

 

그래서 정정당당하게 나귀를 타시고

호산나 만세 소리를 들어가며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셨는데,

아래에서 살펴보겠습니다만,

이것은 <겸손이 없이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주제


     예수님은, 겸손히, 십자가 지시는 자세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고, 성전 청결을 이루신 것이지,

     결코 호기나 만용을 부리신 것은 아닙니다. 



◑본문의 메시지 : 겸손해야 십자가 진다


▲왕은 왕인데, 겸손한 왕

그런데 나귀를 타셨습니다. 이건 겸손의 증거입니다.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마21:4~5


왜 말을 타시지 않고, 왜 백마를 타시지 않고?

왜 마차를 타시지 않고, 나귀 새끼를 탔느냐?

그것은 바로 겸손을 말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겸손왕권의 아주 오묘한 조화를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주1)

 

▲주제1. 참 권세는 겸손에서 나옵니다.

이건 상징적이며 그 속에 계시적 의미가 있습니다.

권세, 참 권세는 바로 겸손에서부터 오는 것이에요.


심리학적으로, 사회적으로도, 특별히 신앙적으로

모든 권세는 겸손한자에게 주어집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교만한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자에게 권능을 주신다’고

‘온유한 자가 땅을 차지한다’고...

겸손이 권세의 뿌리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 자신이 혹 어떤 시험에 빠진 일이 있습니까?

그 자체를 놓고 생각하지 말고, 깊이 자기 자신을 자성해 보세요.

그것은 겸손이 아니라, 교만에서 오는 욕심 때문입니다.


약1:14에서 사람들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가 가진 욕심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자기도 모르게 마음속에 자리 잡은 교만으로 인한 욕심 때문에

질투가 나오고, 번민이 나오고, 사건이 생기고, 시험에 빠졌어요.

이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또 한 가지, 우리가 부끄러울 일을 당하기도 하고, 혹은 비겁해 질 때도 있습니다.

왜 비겁해 졌냐고요? 그것은 교만 때문입니다.

교만은 뿌리가 없는 나무입니다. 그건 허세올시다.

그런 거로 시험에 빠져서... 부끄러워집니다.


겸손한자는 부끄러울 일이 없어요.

교만한 것만큼.. 부끄러움을 당할 수밖에 없고, 나약해 질 수밖에 없는 것이에요.


▲주제2. 참는 인내도.. 겸손에서 나옵니다.

여러분 많은 비난을 받고 있습니까? 그리고 잘 참을 수 있습니까?

그 참는 인내의 힘은 겸손에서 오는 거예요. 겸손한자만이 참을 수 있어요.

 

참지 못했다면.. 누구든지 교만한 사람이에요.

결국은 겸손하면 얼마든지 참을 수 있습니다.


또 겸손 뒤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소망이 있어요.

 

소망 없는 겸손이라면 그건 비굴함 이에요.

 


그러나 소망이 든든합니다. 앞이 보입니다. 미래가 보입니다.

영원한 세계가 보입니다. 그러면 넉넉하게 참을 수 있습니다.

겸손 할 수도 있습니다. 얼마든지 겸손 할 수 있습니다. 그게 문제가 되지 않으니까요.


▲주제3. 겸손해야.. 십자가를 집니다.

자 이제 오늘 이 성경말씀을 자세히 보십시다. 예수님께서 얼마나 겸손하셨습니까.

그는 하나님의 경륜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전체를 맡기고

저 앞에 있는 구속의 역사를 바라보면서

오늘 겸손하여 나귀 새끼를 타고 올라갑니다.


누가 뭐라고 하든지/ 말든지.. 예수님을 왕권을 이렇게 쉬이 하셨습니다.


삼상15장에 보면, 사울 왕은 스스로 낮출 때에 높이어 왕이 되게 했고,

스스로 자기를 높이고 교만하고 기념비를 세울 때, 그를 내려쳤습니다.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다윗을 세워 왕을 세웁니다.


우리는 다윗의 일생을 통해서, 겸손이 무엇인가를 배워야 됩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무척이나 기뻐 하셨습니다. 그걸 알아야 합니다.


오늘 성경은 예수님은 겸손하여 나귀새끼를 타시며,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길에 복종하는 바로 그 길에.. 겸손이 있는 겁니다.


겸손은 죄와 타협하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니에요.

불의 앞에 비굴해 지는 게 아니에요. 당당함을 말해요.

주님만 생각하고 단순한 마음으로 그리고 여유를 가집니다.

그게 바로 겸손이올시다.


보세요. 빌립보서는 말합니다.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자기를 비워 스스로 비웠습니다.

보세요, 다 알지만 모르는 것처럼.. 입을 다뭅니다.

할 수 있으나 할 수 없는 것처럼.. 잠잠합니다.


할 말이 많아요. 그러나 할 말 없는 것처럼..

얼마든지 의인이에요. 그러나 죄인인 것처럼

마치 저주받은 자인 것처럼.. 말없이 십자가를 지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저주받은 죄인의 모습으로 죽습니다. 이것이 겸손이에요.

그래서 빌립보서에서는 말합니다.

‘너희는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4. 겸손의 용기로, 사명 감당하시다.      

여러분 얼마나 겸손해 보았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그리스도에게서 깊은 겸손을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십자가 앞에 섭니다. 그리고 부활의 아침을 바라봅니다.

겸손과 온유 속에 엄청난 용기가 있습니다.

예수님만이 아는 용기가 있습니다. 이것으로 나귀를 타고 올라가신 거예요.


보세요, 십자가를 넘어서는 소망이 있기 때문에.. 용기가 있었던 거예요.

이걸 잊지 말아야 되고요.


또 한 가지는 많은 비난과 오해를 극복하고 있었어요. 참 오해가 많죠.

나귀를 타고 입성하면 로마 사람들은 정치 운동으로 몰아서

유태인의 왕이라고 죽일 거 아닙니까?

이런 위험함이 있지만도 계의치 않았어요.


     특별히 중요한 것은 제자들의 오해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를 때에 모름지기 예수님이 꼭 왕이 될 줄로 믿고,

     왕이 되면 한자리 하겠다고 떠났거든요.


     우편 좌편을 가리면서 까지 그러던 통에 나귀를 딱 타고 올라가니까

     ‘아이쿠 됐다. 이제는 때가 됐구나.’ 그리고 만세를 부릅니다.

     이제 세속적인 왕이 되는 줄 알고 만세를 부릅니다.


이런 사람들의 오해 예수님 개의치 않았습니다.

여러분 혹 여러 가지 비난을 듣습니까?

그거 다 면하려고 안 들으려고 한다면 아무 일도 못합니다.


여러분, 이리 비키고 저리 신경 쓰면 아무 일도 못합니다.

여러분 오해 받지 않고 되는 일 있어요? 이걸 잊지 말아야 되요.

정정당당하게 이것이 주의 길이라면 묵묵히 가는 것.. 그것이 겸손입니다.


그리고 겸손에서 오는 용기 오해가 있던지/ 없던지..

누가 뭐라고 하든지/말든지.. 주님은 나귀를 타고 올라가십니다.

그 심정은 예수님만 압니다. 아무도 모릅니다. 왜 이러해야 하는지를...


그러한 고독함을 극복하고 나귀를 타고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찬송을 부릅니다.


그때 제자들의 찬송, 어린이의 찬송 다 불안전 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한 그래도 그 찬송을 받으셨습니다.

“정신 차리고 불러라. 뜻이나 알고 소리 지르냐?” 그렇게 말씀하지 않았어요.


이게 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기 때문에

기쁜 마음으로 찬송을 받으시고

그걸 방해하는 사람들에게

‘돌이라도 노래를 할 것이다. 어린이의 찬송을 온전케 하실 것이다.’ 마21:16

예수님은 그들의 찬송을 기쁘게 수용하고 받아들였습니다.


그렇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습니다.


▲마치는 말

여러분 주님께서 나귀를 타고 올라가신 일을 생각할 때,


내게 이 같은 겸손이 있는가?

내게 이 같은 겸손에서 나오는 용기가 있는가?

내게 이 같은 겸손에서 나오는 충성이 있는가?

다시 한 번 물어야 할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주님의 깊은 마음을 이해하고

겸손의 용기로 행하면                 ←설교 제목

주님과 함께 영광을 얻게 될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주를 섬긴다하나

주의 뜻을 받기를 거부하고 주님을 믿는다 하나

부분적으로 믿고 내 뜻에 반대되는데 대해서는 불평이 많습니다.

주여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주께서 나귀를 타고 올라가시는 그 깊은 심정을 우리가 헤아리고

우리 또한 충성을 다하는 중에 주님을 영화롭게 할뿐더러

주의 고난에 동참하고 동시에 그의 영광에 함께 할 수 있는

주의 자녀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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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여러분, 우리가 ‘왕의 자녀들’로서, 다 ‘왕권’을 가진 하나님의 아들들입니다.

그러나 명심하세요!

겸손을 잃어버리는 순간, 그건 ‘왕의 자녀’가 아닌, ‘원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자기가 예수 잘 믿어서, 하나님의 은총을 받아서,

성공하고 잘 되었다고 자랑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겸손을 잃어버리는 순간..  ‘왕의 자녀’가 아닌, ‘원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자기 삶의 모든 면에서 ‘나귀’를 타야 하는 거예요.

‘백마’를 타려 한다면.. 그건 ‘왕의 자녀’가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