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온전성 고전13:9~10 02-04-07 설교스크랩
※성경 지식도, 신학도.. 은사의 일종입니다. 은사 받은 사람이 더 잘 합니다.
지식과 신학을 추구하되.. 그게 전부는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은사의 함정
수영장을 늘 다니는 사람이 있습니다... 수영에 자신 있는 사람입니다.
테니스를 늘 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도 어느 정도 하기 때문입니다.
은사도 마찬가집니다.
잘 하는 사람이, 그 쪽을 자꾸 더 계발합니다.
이것이 필요하지만.. 한 편으로는 또 ‘함정’도 될 수 있습니다.
그 옛날 고린도 교인들은 사랑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그저 은사에만 목말라 했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섬기기 위해서,
또는 다른 성도들을 섬기기 위해서 은사를 구했던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자기의 은사를 뽐내고 과시하고 싶어서
은사에 목말라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기 쉽습니다.
이런 고린도 교인들을 향해서, 사도 바울은 본문을 통해,
이제 더 이상 은사에 초점을 맞추지 말고
사랑에 초점을 맞추라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그 이유를 3가지로 말씀합니다.
첫째, 사랑은 영원하지만, 은사는 일시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고전13:8절 말씀입니다.
둘째, 사랑은 온전하지만, 은사는 부분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9∼10절
셋째, 사랑은 성숙한 것이지만, 은사는 초보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11∼12절
이 시간에는, 두 번째 사랑의 온전성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1.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고전13:9
※지식의 은사 포함한 모든 은사를 가리킴
본문에 "부분적"이라는 말씀이 세 번씩이나 사용되었습니다.
9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10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12절에도 "부분적"이라는 말씀이 다시 한 번 등장합니다.
12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은사는 부분적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사도 바울은 고전13장에서 "부분적"이라는 단어를 4번씩이나 반복해서 사용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은사는 결코 절대적이지 못합니다.
온전하지 못합니다. 부분적인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지금 ‘온전’과 ‘부분적’을 대비해서 보셔야 합니다. 사랑은 온전하고, 은사는 부분적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많은 것을 안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저 부분적으로 알뿐입니다.
▲‘지식’도 은사이며.. 그래서 ‘부분적’입니다.
신학자 중에서, 또 설교를 잘 하는 목회자 중에서도,
누구든지 ‘온전하게 다 아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사도바울도.. 부분적으로 알았습니다. :9 우리(바울 포함)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그래서 하나님은, 신약을 쓰시되,
바울 말고도, 베드로, 요한, 야고보를 감동해.. ‘온전하게’ 기록하셨습니다.
성경과 신학도, 배우면 배울수록
점점 더 모르는 것이 많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전8:2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
우리는 그저 부분적으로만 알뿐입니다.
▲부분적으로 아니까.. 예언(설교)하는 것도 역시 부분적으로 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예언’은 시간적인 의미가 아니고, 공간적인 의미가 강한 말씀입니다.
헬라어로 예언을 "프로페테스"라고 합니다. 여기서 영어의 prophecy가 나왔습니다.
"프로"는 영어의 before에 해당되며 우리말의 "∼앞에"라는 뜻입니다.
또 "페미"는 "말하다. 선포하다. 말해서 알게 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에서 말씀하는 예언은 문자적으로 "to speak before"입니다.
여기에 쓰인 before가 시간적인 의미라기보다는
공간적인 의미로 해석을 해야 타당합니다.
다시 말해서 예언은 무엇을, 시차적으로 미리 앞당겨서 말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그것을 들어야할 사람들 "앞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말씀하는 예언은, 오늘날의 설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할 백성들 "앞에서" 말씀을 전하는 것이 바로 예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부분적으로 아니까, 부분적으로 말씀을 전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평생을 달린 사도바울의 고백, ‘아직 온전히 이루지 못했다.’
빌3:8을 보십시다.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을 얻기 위해서
세상적이고 육체적인 모든 지식이나, 자랑거리들을 배설물처럼 버렸습니다.
넘어가서 12절 말씀을 봅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지금 사도 바울은 로마의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을 얻기 위해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서
그것을 일평생 추구해 왔습니다. (다메섹 도상 후 약 27년 경과 시점)
그러나 그렇게 오랜 시간(27년)이 지났음에서도
그는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전히 계속 '좇아간다'고 말씀합니다.
그는 지금 자기가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9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오늘 본문에 보면 사도 바울은 "우리가"라고 하면서
자신도 포함시키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신도 부분적으로 알고, 설교한다는 뜻입니다.
또 우리가 고린도후서 12장에 나오는 내용을 잘 알고 있습니다.
바울은 셋째 하늘, 곧 낙원에 이끌려갔던 신비한 체험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고후12:4
하늘나라의 놀라운 영광을, 인간의 한계 때문에,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
부분적으로 아니까 예언하는 것도 역시 부분적으로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의 지식과 예언이 부분적이라고 해서
그 자체가 틀렸다든지 잘못된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예컨대 우리는 우리 자녀들에게 "1+1=2"라고 가르칩니다. 그 자체는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 뒤에도 엄청나게 복잡한 수학들이 많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곱하기, 나누기, 분수, 미분, 적분, 기하학 등 엄청나게 복잡한 수학들이 많습니다.
우리의 지식과 예언도 그런 것입니다. 부분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틀린 것은 아닙니다. 온전하지 못하다는 뜻입니다.
▲왜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할 수밖에 없습니까?
①인간의 한계성 때문입니다.
우리는 유한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무한하십니다.
유한한 인간의 머리로 어찌 무한하신 하나님의 모든 진리를 온전히 이해할 수가 있겠습니까?
예컨대 우리 예수님은 100% 온전한 하나님이십니다.
아울러 우리 예수님은 100%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십니다.
이것을 인간의 이성으로 어떻게 온전히 이해할 수가 있겠습니까?
또 하나님은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십니다.
유한한 인간의 이성을 가지고 어찌 삼위일체의 신비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롬11:33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인간의 제한성 때문에, 우리는 그 모든 진리를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②인간의 타락성 때문입니다.
예수 믿고, 회복되었지만, 아직 온전히 회복된 것은 아닙니다.
천국에 갈 때까지는.. 우리는 인간의 유한성, 타락성을 어느 정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의 은사는, 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직분은
어디까지나 부분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온전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떠한 은사를 주셨든지, 어떠한 직분을 주셨든지 간에
이것은 결코 교만의 이유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감사의 동기가 되고, 겸손의 동기가 되어야 합니다.
내가 받은 은사와 직분은 어디까지나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가 명심하면서,
우리는 겸손하게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섬기고
또 성도들을 섬기는 자세를 취해야 마땅할 것입니다.
◑2.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고전13:10
전깃불이 환하게 비추이면 촛불은 꺼지기 마련입니다.
또 태양 빛이 환하게 비추이면 전깃불도 폐하여 지기 마련입니다.
마찬가지로 온전한 것이 올 때 부분적인 것은 자연히 폐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은사는 부분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결코 절대적이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니 내가 옳은 만큼, 우리는 다른 사람도 옳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살아야 됩니다.
나만 주장하고 나만 고집해서는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에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이라고 했는데
그것은 과연 어느 때를 가리키는 것입니까?
우리 개인적으로 말하면 육신의 장막을 벗고
우리의 영이 천국으로 인도함을 받을 때일 것입니다.
또 전체적으로 말하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름 타시고
영광 가운데 우리 모두를 새 예루살렘 성으로 인도하러 오실 때일 것입니다.
사실 천국에는 설교자가 필요 없습니다. 교사도 필요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보는 것처럼
하나님을 면전에서 뵈옵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천국에서는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해 주고
또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줄 필요도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음성을 우리는 직접 듣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아버지 하나님의 온전하심 같이 그때는 우리 모두가 온전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까지는 이 땅에서 은사가 필요합니다.
예언도 필요하고 지식도 필요합니다.
우리가 그것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잘 받들어 섬겨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은사는 결코 온전하지 못합니다. 부분적인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떠한 은사를 주셨든지, 어떠한 직분을 맡기셨든지
우리는 그것 때문에 교만해서는 안 됩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은 지극히 작은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겸손한 자세로 우리가 섬기는 일에 힘써야 할 것입니다.
◑3. 사랑은 온전합니다.
지금 사도 바울은 계속해서, 사랑과 은사를 서로 비교하고 있습니다.
은사는 부분적입니다. 사랑은 온전합니다. 사랑만이 온전한 것입니다.
그러면 사랑은 과연 어떠한 점에서 온전하겠습니까?
두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1. 사랑은 시간적인 면에서 온전합니다.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없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고전13:8
이 땅에서는 은사가 필요합니다. 은사는 이 땅에서만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천국에서도 영원토록 언제나 존재합니다.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천국은 빛과 사랑이 넘치는 나라라고 했습니다.
사랑만이 시간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2. 사랑은 공간적인 면에서도 온전합니다.
사랑이 존재하지 못할 영역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 삶의 어디에서나 소중하고 필요한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그래서 사랑만 있으면 어떠한 문제라도 근본적으로 쉽게 해결될 수 있습니다.
이미 작고를 하셨습니다만 우리나라의 대법관 가운데 김홍섭 판사라는 분이 계셨습니다.
겸손하시고 인품이 훌륭하신 분이셨습니다. 믿음도 깊으셨습니다. 주1)
여러분! 은사는 부분적입니다. 사랑은 온전한 것입니다.
그저 우리의 심령을 간지럽게 하는 은사나 직분에 연연해하지 마십시다.
우리의 심령을 언제나 풍성하게 하는 온전한 사랑에 힘쓸 수 있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마치는 말
은사는 부분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전부입니다.
전부를 소유한 사람은 사소한 부분을 떨쳐버리는 것을 개의치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새로운 한 주간을 우리들에게 허락해 주셨습니다.
힘써 사랑을 연습하십시다. 사랑을 훈련하십시다.
그리할 때 우리의 삶 속에서 절로 사랑의 꽃은 아름답게 피어나게 되고
사랑의 열매도 아름답게 열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는 가운데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형상을
점차 닮아가게 될 것입니다.
*관련글/ 사랑할 줄 아는 종
...............................
주1)
이미 작고를 하셨습니다만 우리나라의 대법관 가운데 김홍섭 판사라는 분이 계셨습니다.
겸손하시고 인품이 훌륭하신 분이셨습니다. 믿음도 깊으셨습니다.
그는 시간이 날 때마다 감옥에 찾아가서 죄수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위로하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별명은 사도 법관이었습니다.
그가 판결을 내릴 때면 언제나 그의 앞에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책과
육법전서가 나란히 놓여있었습니다.
그는 판결을 내리기 전 늘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당신이나 나나 하나님 앞에서 똑같은 죄인입니다.
그러나 내가 대한민국의 법관이기 때문에 대한민국의 법에 의해서
당신에게 판결을 내릴 수밖에 없음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가 가정법원에서 일할 때였습니다.
어떤 부부가 그에게 판결을 받기 위해서 그 앞에 섰습니다.
그들은 성격이 맞지 않아서 별거하다가
이제 이혼하기로 결정하고 판결을 받기 위해 그 앞에 서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들에게는 아이가 하나 있었는데
서로 그 아이를 책임지려고 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김홍섭 판사는 두 사람에게 이렇게 명을 내렸습니다.
"두 사람은 성경에 있는 사랑장인 고린도전서 13장을 앞으로 100번 읽으십시오.
그리고 한 달 뒤에 다시 만납시다."
이 부부는 김홍섭 판사의 명에 따라서
그때부터 하루에도 몇 번씩 사랑장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그들은 자신들의 문제가 어디에 있는지 비로소 깨닫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는 그저 문제가 상대방에게만 있는 줄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사랑장을 찬찬히 읽어 나가는 가운데
자기 자신에게 사랑이 부족한 것이 문제였음을 비로소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부부는 서로가 서로를 용서하고 또 용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다시금 화목하게 되었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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