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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다나엘에 관한 3가지 말씀 Charles Price

LNCK 2011. 11. 1. 20:48

 

◈나다나엘에 관한 예수님의 3가지 말씀        요1:45~51       찰스 프라이스 / 출처

※성경의 난해 본문인데, 가장 근접한 해석인 것 같습니다. 

 

◑1.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가라사대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요1:47

 

▲1. 나다나엘은 직설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참 이스라엘 사람’ .. 정직한 honest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구나’ .. ‘속이는 것이 없이 솔직한 사람이로구나!’

 

쉽게 말하면 ‘직설적으로 말하는 사람’입니다.

‘말을 돌려서 완곡하게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이게 잘못 오해하면 ‘비꼬는’ 표현이 될 수도 있지만,

지금 본문의 정황에서, 예수님은 나다나엘을 칭찬하신 것이 분명합니다.

 

누군가 아직 만나보지도 못한 사람을    지금 예수님은 아직 그를 만나지 못한 상태입니다.

이렇게 평가하는 것은.. 그에 대한 칭찬이 분명합니다.

 

▲왜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것일까요?

1:45~46절을 보시면,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나다나엘이 가로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가로되 와 보라 하니라. :46

 

나다나엘은, 직격탄을 날렸습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이렇게 직선적으로 표현하는 나다나엘을 보시고(아시고),

예수님은, 칭찬하듯이 그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요1:47

-말을 직설적으로, 정직하게 하는 사람이로구나!.. 하고 칭찬하신 것입니다.

 

▲사실 오늘날 우리 문화적 관점에서 보면, 나다나엘은 무례한 사람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는, 말을 너무 완곡하게 둘러서 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이 '나는 강원도 정선에서 왔다'고 말을 합니다.

그때 어떤 사람이, ‘그 산골짜기 출신입니까? 거기서 인물이 나겠습니까?’ 말한다면,

여러분은 아마 크게 화를 내실 것입니다.

 

그런데 나다나엘은, 그렇게 직설적으로 말했고,

예수님은 그걸 가리켜 ‘참 정직한 사람이다. 직설적이구나!’ 하고 칭찬해 주셨습니다.

 

왜 예수님은, 어쩌면 무례할 수도 있는 나다나엘에게 이렇게 관대하신 것일까요?

-그것은 ‘그가 사실을 말했기 때문’입니다.

 

나사렛은.. 거기서 아무 것도 선한 것이 나오리라 기대할 수 없는

산간벽지 외딴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나다나엘처럼) 너무 정직하게 직설적으로 표현하는 것도 문제가 될 수 있지만,

오늘날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아무도 사실을 정직하게 말해 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나다나엘처럼, 정직하게 말해주는 사람이..

우리 캐나다 문화에서는 정말 찾아보기 힘듭니다.

우리는 대부분 완곡하게 둘러서 말하는 언어습관에, 익숙해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키 작은 사람’은 ‘short person’이라는 말을 쓰지 않고

‘수직적으로 도전적인(도전받는) 사람 vertically challenged’라고 씁니다.

 

※미국 영화를 보면, 이런 것을 많이 느낍니다.

우리가 미국 영화에 나오는 영어를 알아듣기 힘든 이유 중 하나가,

그들은 항상 ‘빙 둘러서, 상처 받지 않게, 이해하기 어려운 표현을 섞어가면서’ 말합니다.

 

그러니까 한국인은 단순한 ‘해석’이 아니라, 그 해석의 ‘의미’를 알아들어야 하니까..

쉽지 않은 것이지요.

좋게 말하면 대단히 신사적이요, 정중한 언어생활입니다.

 

제 주장은,

오늘날 우리는 <너무 나다나엘처럼 직설적으로 말하지 않으니까>

여러 가지 면에 있어서, 진리가 타협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직설적인 표현들이 종종 등장합니다.

바울이 디도에게 쓴 편지를 보면, 이렇게 직설적으로 말합니다.

 

그레데인 중에 어떤 선지자가 말하되, 그레데인들은 항상 거짓말쟁이며

악한 짐승이며, 배만 위하는 게으름장이라 하니, 이 증거가 참되도다. 딛1:12~13

 

물론 오늘날의 그레데 (크레타 섬) 사람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더라도, 혹시 여러분 중에 고향이 크레타(그리스 령)출신들께는 양해를 구합니다.

 

바울은 자신에 대해서, 솔직하게 이렇게 말합니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롬7:18

 

▲타인데 대해 둘러서 말하는 사람은,

사실은 자신에 대해서도, 자신의 진실을 직면하지 않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사람이.. 자신을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보기란.. 정말 쉽지 않습니다.

그것은 <잔혹한 정직성 brutal honesty>가 요구됩니다.

 

종종 지도자가 잘못된 길로 나아가고,

또한 나 자신 역시 잘못된 길로 나아가는 이유가,

내 곁에 ‘나다나엘 같은 직언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다들 둘러서, 완곡하게 말하고,

항상 좋은 면만 얘기해 줍니다.
그러니까 자기의 진실을 직면하지 못하다가.. 결국 잘못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잔혹한 정직성 brutal honesty>란 말처럼,

자기 스스로, 또는 타인에게 정직해 지는 것은,

매우 잔혹하고, 잔인한 일입니다. 야수처럼 난폭한 언어의 도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우리 가운데 ‘계속 성장하는 사람’이 간혹 있습니다.

그의 비결은

‘자기 욕하는 사람의 말은, 곱씹어서 듣는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 말을 듣고서 ‘우울증’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그의 정직한 말을 듣고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정직하게 자신을 대면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오겠느냐!’는 말에 분노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사실이었거든요!

 

이와 같이 우리도, 사실을 듣고서, 분노하지 않는다면..

그의 발전 가능성은 무한하다..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중심의 진실함을 우리에게 원하십니다.

 

‘주는 중심에 진실을 원하십니다. 내 마음 깊은 곳에 지혜를 가르치소서.’ 시51:6

 

우리는 ‘잘못했다’고 말하는 대신에

‘부족한 선택이었다 poor choice’라고 말합니다만..

더 정직해져야 합니다.

 

여러분, ‘혼전 동거는 옳지 않다. 그것은 죄다’라고 말해야 하는데..

그것을 두고 ‘poor choice였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대신에 ‘그것은 죄다!’ 라고 말하십시오.

 

그러나 어떤 정죄나 판단이 아닌,

그가 돌이켜 올바로 세워지기를 바라는 사랑의 마음으로.. 그렇게 정직하게 말하십시오.

 

▲오늘날은, 아마 나다나엘 같은 직설자가, 주님께 인정받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늘 우리 문화 가운데서는,

이렇게 나다나엘처럼 직설적으로 말하는 사람은.. 정말 찾아보기 힘들거든요.

 

물론 그렇다고, 남에게 상처 주는 말을, 함부로 하자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나에게, 모두에게 꼭 보탬과 도움이 되는 정직한 말’이라면,

성령이 그런 감동을 주시면, (반드시 성령의 감동이 먼저 필요합니다.)

 

우리는 ‘미움/핍박/불이익 받을 각오를 하고’

반드시 ‘나다나엘’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그분의 영광을 위하여!

 

 

◑2.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는 것을 보았노라.

 

나다나엘이 가로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노라. 요1:48

 

▲무화과나무 아래 있던 나다나엘을 보셨다면, 오늘날 나도.. 하나님은 보고 계십니다.

NIV성경에는, 하나님(의 눈)이 우리를 살핀다, 보고 계신다는 구절이 88번이나 나옵니다.

매우 많이 나온다는 뜻이며, ‘하나님은 분명히 우리를 주목하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성경에 하나님의 눈에 띄인 사람들이 수두룩합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눈에 은총을 입었습니다.   창6:8 found grace in the eyes of the LORD

*주님은, 오늘도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십니다. 요4:23

*베드로는,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신다고 말합니다. 벧전3:12

 

*본문에서는, 주님은 나다나엘이 무화과나무 아래 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대하16:9는 각자 찾아보십시오.

 

*그런데 성경에는, 하나님의 눈은,

악을 행하는 자들의 악행도.. 다 보고 계십니다.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라는 표현이 종종 나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주목할 내용은 <무화과나무>입니다.

거기에 특별한 해석적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까요? 있다고 봅니다.

 

▲성경에 <무화과나무>는, 부정적 소재로 자주 등장합니다.

1. 에덴동산에서 아담은 범죄한 후에, 무화과나무 잎으로, 옷을 만들어 입었습니다.

   여기서 그 의미는 ‘인간이 자신의 허물을 가리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사회적 신분, 성공, 인간적 윤리, 세련됨으로 자기를 가립니다.)

   어쨌든 ‘자신의 죄를 가리는 인간적 노력, 시도’란 부정적 의미로 쓰였습니다.

 

2. 예수님이 길에서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저주하셨습니다.

   그 무화과나무는, 잎이 무성해서, 겉보기엔 생명이 가득한 것처럼 보였지만

   그 속에 열매가 없었습니다. 

   이것은 유대인과 유대종교를 비유적으로 지적하신 것입니다.

 

위의 두 가지 예를 들어서,

본문의 <나다나엘이 무화과나무 아래 있었도다>는 장면을 해석할 때,

-나다나엘은.. 뭔가 자기를 가리려는 시도를 하고 있었고, 모든 인간이 마찬가집니다만

 
▲나다나엘이 직설적으로 말했으니까, 예수님도 직설적으로 응수하셨습니다.

나다나엘이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 하니까,

예수님은 ‘너는 하나님으로부터 피하여 무화과나무 뒤에 숨어 있구나, 그렇지?’

하고 응수하신 것입니다.

 

화들짝 들켰다고 할까요? 나다나엘이 말합니다.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1:49

‘제가 무화과나무 아래 숨은 것을 아시다니, 내 본모습을 알고 계시는군요!’

 

※다른 복음서라면 몰라도, 요한복음은 특히 상징적 입니다.

(마치 그가 쓴 요한계시록처럼) 요한복음은, 4복음서 중에서, 가장 상징적 표현이 가득합니다.

그렇다면 ‘무화과나무’가, 그저 보통 나무가 아니라 ‘상징적’으로 해석함이.. 맞습니다.

 

 

◑3. 천사가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또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1:50~51

  

▲천사가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 무슨 뜻입니까?

1. 예수님은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중보자란 뜻입니다.

중보자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과 인간이, 다시 관계가 회복될 것을 말씀하십니다.

보통 이렇게 해석합니다만..

 

2. 창28장의 야곱의 체험과 연관해서 해석해 보면,

예수님은 나다나엘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들판에서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본 야곱은,

이스라엘 12지파의 조상이 되었다.

너는 앞으로, 천사들이 인자위로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이런 말씀을 통해, 예수님은=야곱과 동일시 시키셨습니다.

즉 예수님은 ‘야곱처럼 (영적) 이스라엘의 조상’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시작될, 12제자를 통해 이루실

‘새로운 영적 이스라엘’의 역사를.. 네가 장차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나는 야곱처럼, 그 조상이다.

 

실제로 나다나엘은 12사도의 1명이 됩니다. (바돌로매와 동일 인물)

요1:51의 예수님의 예언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실제로 요한계시록에는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그 성의 성곽에는 12기초석이 있고, 그 위에는 어린 양의 12사도의 열두 이름이 있더라.’ 계21:14

12제자로 시작된 예수님의 사역이, 12사도로 완성될 장면을 예언합니다.

 

.............................

 

 

참고로 나다나엘은 바돌로매와 동일인물로 보는데,

그 이유는, 12제자 명단을 보면 바돌로매가 언급되면, 나다나엘은 부재하고

나다나엘이 언급되면 바돌로매는 부재하기 때문입니다.

 

요21:2에 나다나엘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로 기록됩니다.

나다나엘(바돌로매)의 고향이, '갈릴리 가나'입니다. 

그래서 <갈릴리 가나 혼인잔치 기념교회> 건너편에는

<바돌로매 기념교회>가 세워져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