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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냥 쪽박이 깨져야 참 제자

LNCK 2011. 11. 3. 19:56

◈동냥 쪽박이 깨져야 참 제자            마8:18~27            출처보기


 

‘동냥은 못 줘도 쪽박은 깨지 마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내게 요구를 해 올 때,

그 요구나 간청에 대해서 도움을 주지는 못할망정, 그를 더 해롭게 하지 말라’,


또는 ‘혹 떼러 온 사람에게 혹을 떼 주지는 못할망정 혹을 더 붙이지는 말라’

그런 뜻이지요.


여러분, 한 마디로 말해서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구원을 주시기 위해 메시아로 오셨는데,

내가 그 예수님을 따라가는 참 제자가 되어서, 그 구원의 복을 받으려면,

먼저 ‘내 쪽박이 (매정하게) 깨지면서.. 그 복음의 복이 비로소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본문을 살펴봅시다.


◑1. 한 서기관


한 서기관이 나아와 예수께 아뢰되,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따르리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마8:19~20

 

▲한 서기관이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결단합니다. :19

서기관이 예수님의 제자그룹에 속했다는 것만 해도, 주1)

예수님의 전도활동의 쾌거(큰 수확)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에게 있어 가장 커다란 첫 번째 적대세력이

바로 바리새인과 서기관, 대제사장, 이런 종교지도자 그룹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와중에서 서기관 한 명이,

예수님이 어디를 가시든지 따르겠다는 제자로 결단했다는 것은

대단한 쾌거지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의 결단에 대해

그를 칭찬하시고, 환호하시면 좋은데.. 오히려 찬물을 확 끼얹어버리십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8:20


자, 이 짧은 대화 속에, 우리의 엄청나고 치명적인 신앙의 오해가 들어있다는 것이에요.


▲예수님을 통해, 출세를 원했던 서기관  

서기관은 예수님을 ‘랍비여!’ 하고 부릅니다,

‘스승님’으로 불러요, 그야말로 자기 스스로를 ‘제자’로 자처합니다.


‘제자’라는 것은, 지금도 그렇지만 스승을 통하여 자기를 완성하는 잡니다,

훌륭한 스승 밑에, 제자로 선택되면.. 그야말로 안정적인 장래의 길에 들어선 겁니다.


요즘도, 바르트, 밴틸 박사가 이미 죽었지만,                *Vantil: 기독교 변증가, 신학자

‘나는 바르트의 제자, 밴틸의 제자’라고 자처하는 분들이, 그 명성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성경에도 ‘가말리엘 문하’라는 말이 나오잖아요.

 

예수님은 서기관의 마음을 꿰뚫어 보셨습니다.

서기관은 사회의 지도층이고 안정된 기득권층입니다.

그에게는 사회적 존경이 따르고, 궁핍하지 않은 재정적인 여건이 주어져 있습니다.


서기관이 원하는 것은

이렇게 현재 내게 주어져 있는 안정된 형편을 기반으로 해서

그 위에다가 뛰어난 스승을 만나, 자기의 인생을 꽃피우려 하고 있습니다.


당시에 가말리엘도 있고 힐렐도 있고, 여러 랍비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는 중에 예수님은, 도저히 그 어떤 랍비도 행하지 못하는 기적을 행하시고

모든 사람이 놀라자빠질 권세 있는 교훈을 주시는 분으로서.. 알려지고 있었습니다.


그런 예수님을 자기의 평생을 따르며

자기인생을 성공시킬 디딤돌로 삼으려고 결단을 얘기할 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네가 지금 기존의 안정된 삶의 형편을 기반으로 해서,

나를 통해 주어지는 어떤 도움을 통해서, 네 인생을 꽃피우려 하느냐?


미안하지만 나는 머리 둘 곳도 없다,

나는 마음을 붙이고 편안히 쉴 장소 하나 없이 살아가게 될 텐데

그래도 나를 따르겠느냐?’ 하십니다.


‘네가 나를 따라오는 제자가 되려면,

이 세상에서는 마음 붙일 곳을 너에게 허락하지 않게 될 것이다,

 

네가 지금 갖고 있는 쪽박, 즉 지금 네 서기관의 형편조차도

네가 결코 마음 붙이고 있을 곳이 아니고, 그 모든 걸 다 버려야만

너는 나를 좇을 수 있을 것이다’


즉, 도움을 받으러온 서기관에게

도움을 주기는커녕

그가 갖고 온 쪽박(서기관 신분)마저 깨버리는 말씀을 해주고 계시는 겁니다.


‘나를 따라다니며, 너의 자아실현(성공)을 하고 싶다고?

여보게, 자네 서기관 신분도.. 말아먹게 될 걸?’


맞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자기 십자가, 자아의 죽음

그렇다면 ‘서기관 신분’도 다 내려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 서기관이 바로 오늘 내 모습입니다.

여러분, <심청전>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심청이 날마다 빌어온 밥이 한 쪽박에 오색이라,

흰밥, 콩밥, 팥밥이며, 보리 기장, 수수밥.. 갖가지로 다 있으니

심봉사 집은 끼니때마다 정월 보름(명절)을 쇠는구나!

 

구걸하러 다니다 보니, 심청이 쪽박에 오색 밥이 담겨있다는 겁니다,

집집마다 먹는 밥이 다르니까.


그러다 보니 동냥을 주는 집들은 한 가지 밥만 먹는데 반해서

심청이네 집은 그 쪽박에 오색 밥이 있다는, 그래서 날마다 명절을 쇤다는, 

참 비참한 현실을, 이렇게 해학적으로 웃음을 담아서 표현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쫓아다니는 이유가 뭐냐 하면

내 쪽박에 오색 밥을 담겠다는 거예요.


지금 기존의 현실의 형편에서,

주님으로부터 오는 권세와 능력을 통하여

‘이 쪽박에 오색 밥을 담아서 날마다 명절을 쇠겠다’고 하는 게

우리 신앙의 목표라는 겁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지금의 기존 현실에 뭘 더 보태주시려고 오신 분이 아니라,

우리가 마음을 붙이고 안식하고 싶어 하는 이 삶의 현실을

아예 마음에서 없애버리고, 깨버리고, 제거하려고 오신 분이라는 겁니다.


그러므로 내게 주어진 기존의 현실을 개선하려 하고

더 멋지게 꾸미려 하는 마음이 있는 한.. 나는 예수님을 좇아갈 수 없습니다.


※이런 설교를 들으시면, 반론이 생길 수 있습니다.

‘현실에 뿌리박은 영성이어야 하는데, 너무 비현실적이고, 몽상가적이다.’

‘예수 잘 믿으면, 복과 형통을 받기도 하는데, 너무 비관적으로만 본다’ 등입니다.


네 맞습니다. 기독교신앙은 현실적이어야 하며,

예수 잘 믿으면, 복과 형통을 주시기도 하십니다.

(특별한 소수의 예외 있음. 그리고 복의 정의를 신약적으로 생각해야 함)


그렇지만 차이점을 발견하셔야 합니다.

1. 지금 있는 처지에 그대로 있으면서 더 잘 되고, 복 받고, 형통한 것이 아니라

2. 지금 있는 처지에서, 회개하고, (쪽박이) 깨어지고, 변화된 후에, 십자가 진 다음에,

더 잘 되고, 복음의 복을 받고, 삶이 형통케 되는 것입니다.

그 차이점을 반드시 구분하시기 바랍니다.           *쪽박 : 달라 달라 구걸하는 것

 

'복음의 복을 받고, 삶이 형통하게 된다'는 뜻은,

물질적 복과 세상 성공, 출세하기 이전에

8복, 하나님 나라의 복, 하나님의 영광, 성령의 열매와 권세 등을 뜻합니다. 



◑2. 두 번째, 부모를 장례하려던 제자


마8:21~22. 제자 중에 또 한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


그 모든 사회 풍속과 율법에 반해서

주님께서 아버지의 장례에 참여하지 말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앞의 서기관의 상태가 사회적, 경제적 신분의 안정된 상태에서 쪽박으로 비유하셨다면,

이번 단락의 제자는 인간관계에서 쪽박을 차라고, 제시하신 겁니다.


▲제자가 되려면.. 과거 인간관계를.. 다 깨어버려라!

우리는, 예수를 믿어서, 주님의 복과 도움을 받아서,

기존의 내 인간관계가 더 잘 되기를 바랍니다.


사업관계, 부부관계, 가족관계, 친구관계 등 모든 면에서,

주님을 믿고 나서, 그 관계적 측면에서, 더 안정과 행복을 누리기를 기대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정확하게 뭐라고 하셨습니까?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다’

‘내가 아버지와 아들이 화평하게 하려 온 것이 아니라 서로 싸우게 하려고 왔다.’


그런 기존의 인간관계라는 쪽박을 깨시는 거예요.


※마찬가지로 추구하는 종착역은 똑같습니다.

‘인간관계가 회복되고, 복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종착역으로 가는 과정에서

1. 기존의 인간관계의 틀을 그대로 놓고, 그 위에 복과 도움을 받는게 아니라,

2. 기존의 인간관계를 틀을 회개하고, 깨어지고, 십자가 지고, 변화된 다음에,

‘인간관계가 회복되고, 복음의 복을 받는 겁니다.’


종착역은 같지만, 과정이 틀립니다.

무조건 부정적, 파괴적, 현실도피적 설교가 아니라,

참 복음적 복을 누리려면, 먼저 ‘돌이키고, 십자가에서 자아가 죽어야’ 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서,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예수님이 만나지기 이전에 내가 갖게 되는 이 땅의 모든 관계의 틀을

완전히 먼저 깨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그렇게 깨버리십니다.        * 파괴, 건설


▲내 행동의 원인은.. 인간적 관계가 아니라.. 주님과의 관계에서 발생한다.

영화에 보면, 카우보이들이 들판에 뛰어다니는 야생말을 잡아서

길들이는 장면이 나옵니다.


카우보이들이 막 줄을 돌리며 쫓아가다가, 그 줄을 던져서 말의 목에 감습니다.

그러면 뒤쫓아 오던 카우보이가 또 줄을 던져서 목을 감습니다.


그렇게 한 서너 사람이 야생마의 목에 밧줄을 감아가지고,

말에서 내려와 밧줄을 잡아당기며, 발버둥치는 야생마를 길들이기 시작합니다.


관계라는 게 그런 거예요.

자식이라는 밧줄이 내게 매어져 있고, 아내라는 밧줄이 내게 매어져 있고,

사회생활의 밧줄이 내게 매어져 있습니다.


내 생각과 내 행동의 이유를 유발시키는 자들입니다.

'관계'라는 것은.. 야생마의 목을 잡아당기듯이

나의 행동을 유발시키는 요인이 됩니다.

관계가 없는 사람은, 나에게 행동을 유발시키지 않아요.


주님께서 그 육적 관계를 다 깨버리시는 겁니다.

이제 너는 행동할 때에 나 때문에만 행동하라, 나 때문에만...


‘아버지를 장례한 후에 따르기 원했던 제자’에게

예수님은,

제자 이전의 모든 관계,

그 관계로 인해서.. 그가 행동하며 살았는데


이제는 모든 관계를 끊어버리고

오직 행동의 이유가 예수님으로부터만 나오도록 하는 것이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이전에는 자식이라고 하는 기본 틀이 먼저 있었고

나와 자식과의 관계가, 기본 틀이 되어서

이 쪽박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오곡밥’(축복)을 담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따르면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하면,

내가 십자가에서 죽어서, 내 마음이 모든 관계를 떠나버립니다.


실제로 가정이 깨지는 결과를 연출하라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이 십자가에서 죽어서, 부활 승천해서

하나님으로부터 내 마음이 풍족해지면서

거기서 예수님과 관계를 먼저 맺고 나서,


이제 자식 앞에 나가더라도, 예수님 때문에 자식 앞으로 나가는 거고,

예수님이 보내셔서.. 남편 앞에/직장동료 앞에 나가는 거라는 겁니다.


즉, 이제는 주님이 먼저 내 행동의 원인이 되어서 (인간 관계가 아니라)

마치 주님으로부터 파송된 자처럼.. 모든 사람들과의 관계가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주님을 따르는 제자의 길입니다.

 

거기에 참 생명, 영광, 능력, 에덴동산의 회복이 있습니다. 


......................... 더 읽으실 분 .......................


▲이어지는 본문과의 관계

마8:18~22 다음에는

‘풍랑 만난 배 위에서 잠을 주무시는 예수님’의 본문이 이어집니다.  8:23~27

마태는, 왜 이 사건을, 여기에 갖다 붙였을까요?


 

너무 아이러니 하지 않습니까?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신 뒤에

성경 전체에서 주무시는 모습을 유일하게 묘사한 부분이.. 바로 이어 나옵니다,

깜깜한 밤에 풍랑 만난 배 속에서, 예수님이 주무십니다.


마태가 보여주려 한 것이 무엇일까요?


예수님이 잠에서 깨어나서 풍랑까지 잠잠하게 하십니다.

모든 제자들이 놀랍니다, ‘이가 도대체 누구냐?’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이 땅에 머리 둘 곳을 찾지 아니하고

이 땅에서 맺어진 모든 인간관계보다.. 주님의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서 안식하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관계를 맺고, 아버지 때문에 행동할 이유를 찾아서 움직이시는 분은,


‘보아라, 이 땅에서 안정을 찾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이 땅에 풍랑이 일어도, 편히 잠을 주무실 수 있고,

 

풍랑과 바람도 잠잠하게 하실 수 있는 분이다,


너희도 지금 너희가 보듯이, 주님은 너희와 똑같은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이렇게 큰 격차가 있지 않느냐?’


‘그러나 나를 따르게 될 때에

너희도 이 세상에 머리 둘 곳을 찾고

이 세상의 쪽박 위에 하늘의 은혜를 담으려 하는 자가 아니라

 

너희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게 될 것이고,

하늘로 올라가서.. 이 세상에 풍랑이 일거나/안 일거나 상관없이

편히 잠을 잘 수 있을 것이고,


혹시 이 땅에서 일어나는 모든 풍랑과 모든 문제들을

하나님의 뜻을 따라 뚫고 나가는 자들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라는 이야기를..

이 <풍랑 만난 사건>을 통해서, 마태가 우리에게 해주고 있는 겁니다.  


...........................


주1) 

우리는 흔히 예수님이 어디를 가든 따르겠다는 서기관의 결단에 대해서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대답하신 것으로 볼 때,

서기관을 제자로 받아들이지 않은 것으로 압니다만,


그렇지 않은 것이 8:21절에 ‘제자 중에 또 한 사람이 이르되…’ 라는 기록을 볼 때,

이 서기관은 제자그룹에 속해 있는 걸 전제로 하신 말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