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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없음/2011

거듭나지 않은 사람의 타락한 본성과 위험성 Edwards

LNCK 2011. 11. 4. 19:44

◈거듭나지 않은 사람의 타락한 본성과 위험성    막7:21~22   조나단 에드워즈, 출처


 

※제/편집자의 짧은 연구에 의하면,

매 시대마다 부흥운동이 일어났는데, 모두 다 거듭남(진정한 본 어겐)을 강조한 부흥이었습니다.


16세기에 종교개혁이 일어나서, 루터와 칼빈이.. 거듭남을 강조하고, (유아세례, 모태신앙 배격)

17세기에 스코틀랜드 장로교, 청교도 운동이.. 거듭남을 강조하고, (루터교가 잠잠할 때)

18세기에 웨슬리, 에드워즈, 휫필드가.. 거듭남을 강조하고 (영국성공회가 잠잠할 때)

19세기에 스펄전, 찰스 피니가.. 거듭남을 강조했습니다.


그런데..

그 후에 부흥이 일어났는데, 거듭남이 강조되지 않은 때가 있었습니다.

19세기 말에, 무디의 부흥 때부터입니다. (더 깊은 연구가 필요합니다만..)

그래서 무디의 부흥은 ‘찬양의 부흥이요, 종말론 강조의 부흥이었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어쩌면 20세기의 부흥이, ‘무디의 부흥 전통’을 이어받은 것 같습니다.

성령의 역사에 의한 강력한 회심이 없이..

대규모 집회, 수많은 사람의 운집, 찬양의 부흥.. 이런 것이 ‘무디 때부터 시작된 유산’입니다.


더 깊은 연구가 필요합니다만..

대규모 집회, 수많은 사람의 운집, 찬양의 부흥.. 이것들이 꼭 부정적인 것은 아니지만,

성령의 역사에 의한 강력한 회심이 없는.. 새로운 부흥의 패러다임이, 무디 때부터 나타났던 것입니다.


(물론 무디는, 중간에 성령을 체험한 사람이었습니다만..)
지금 우리는 ‘무디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로, 강력한 회심을 강조하는 부흥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는 것입니다./편.

 


아래 설교는, 늘 <강력한 회심>을 강조하는

조나단 에드워즈 목사님의 설교입니다.

오늘날 이런 설교가, 실종되면 안 되겠습니다.



▶(오늘 설교는) 거듭나지 않은 사람의 타락한 본성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는 사람들의 본성은, 끔찍할 정도로 부패된 상태로 태어납니다.


최초의 사람의 상태는 고귀한, 신성한 작품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타락으로 인해 끔찍할 정도로 그 상태는 뒤틀리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탁월했던 창조물이.. 그토록 타락했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끔찍한 것입니다.

회심하지 않은 사람의 위험한 상태를 자세히 살펴보자면

다음과 같은 내용들에서 드러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 거듭나지 못한 사람의 타락상은, 바보 같은 눈멂과 무지로 드러납니다.


▲원래 사람은 (하나님과, 영적인 진리에 대해) 무지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이성과 이해의 능력을 주셨습니다.

이러한 능력들은 고귀한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는 이 땅의 저급한 다른 모든 창조물들과 구별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본성의 측면에서 그들보다 높임을 받습니다.

마치 천사와 같은 높임을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알아가고 영적인 것과

영원한 것을 알아가기에 적합하도록 창조되었다는 점에서 높임을 받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그러한 것의 목적을 이해하는 기능을 주셔서, 하나님을 알 수 있도록 하셨으며,

천상의 것들도 알게 하셨고,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것들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여기까지가 ‘타락’이전의 원래 모습이고요)


▲그런 사람이 ‘타락’ 후에 이제는, 하나님의 탁월성에 대하여 무지해졌습니다.

그의 이해력은 온통 어둡게 되었습니다. 그의 마음은 눈이 멀게 되었습니다.

영적인 것들에 대해서도 눈이 멀게 되었습니다.


이제 사람들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구원의 길과

자신들의 행복에 대하여 무지하게 되었습니다.

가장 밝고 선명한 빛 가운데 있다가 눈이 멀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행복에 이르는 길에 대하여 무지하게 되었습니다.

롬3:17은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한다.”고 말씀합니다.


사27:11은 “지각이 없다.”고 말씀하며,

렘4:22은 “내 백성은 나를 알지 못하는 우준한 자요 지각이 없는 미련한 자식이라.”고 말씀합니다.


렘5:21은 “우준하여 지각이 없는 백성이여, 이를 들을지어다.”라고 말씀하며,

시95:10~11은 “저희는 마음이 미혹된 백성이라 내 도를 알지 못한다 하였도다.

그러므로 내가 노하여 맹세하기를 저희는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고 말씀하며,

고전15:34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 고 말씀합니다.


불신앙의 영은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우세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존재와 또 다른 세상,

즉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없는 세상의 존재를 의심하는 괴상한 기질인 것입니다.


시53:1은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말씀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죄를 범할 때 하나님께서 보고 계시다는 것과

왜 그러한 죄를 범했는지 물어보실 것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신이 범하는 죄를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할 수만 있다면,

죄를 범하는 것에 염려하지 않고 더 대범하게 죄를 범할 것입니다.


시94:7~9은

“(그들은) 말하기를 ‘여호와가 보지 못하며 야곱의 하나님이 생각지 못하리라’ 하나이다.

백성 중 우준한 자들아 너희는 생각하라 무지한 자들아 너희가 언제나 지혜로울꼬!

귀를 지으신 자가 듣지 아니하시랴 눈을 만드신 자가 보지 아니하시랴.” 고 말씀합니다.


시73:11은 “말하기를 하나님이 어찌 알랴 지극히 높은 자에게 지식이 있으랴 하도다.” 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어리석게도

천국과 지옥과 같은 미래의 일들에 대해서는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러한 일들을 깨닫기보다는

모두 한 걸음으로 더 빨리 멸망으로 가는 모험의 길로 달려가는 것입니다.


▲그들은 어리석게도 영원한 것들의 중요성에 대하여 감각이 없습니다.

그들을 믿게 하고, 그들에게 다른 모든 좋은 것들보다, 영원한 모든 것이 더 좋으며,

이 영원함을 향하는 것이 행복한 길이며,


다른 모든 악한 것보다, 하나님의 진노 아래 영원히 있는 것만큼

비참한 것은 없다는 확신을 주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사람들은 세상적인 것들에 파묻혀 영적인 것들에는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고,

그러한 것들에는 무감각하다는 것을 자신들 스스로 충분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눅12:56은 “외식하는 자여 너희가 천지의 기상은 분변할 줄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는 분변치 못하느냐”고 말씀합니다.

그들은 악한 욕망들에 대해서는 아주 예민하게 반응하면서도

마땅히 최고로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들에는 무지한 바보와 같습니다.


그래서 렘4:22은 “내 백성은 나를 알지 못하는 우준한 자요 지각이 없는 미련한 자식이라

악을 행하기에는 지각이 있으나, 선을 행하기에는 무지하도다.”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짐승보다 더 무감각해 집니다.

악한 사람들은 스스로 자신들에게 있어서,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아주 저급한 짐승들보다 더 모르고 무감각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1:3에서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라고 말씀한 것과 같습니다.


렘8:7에서는 “공중의 학은 그 정한 시기를 알고, 반구와 제비와 두루미는

그 올 때를 지키거늘, 내 백성은 여호와의 규례를 알지 못한다.”고 말씀합니다.


◑2. 그들에게는 경건함이 없습니다.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보다, 자기를 더 사랑합니다.

롬7:18에서 말씀한 대로입니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그들은 어떤 선한 것이든 반대하는 것에 있어서 정함이 없습니다.


자연인들은 자신들의 마음속에

‘자기 사랑 Egoism’보다 더 높은 기준을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이런 면에서 그들은 마귀와 비슷합니다.

마귀는, 자신과 자신의 행복을 사랑하며, 자신이 비참해지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거듭나지 않은 자연인은, 주님을 절대 사랑하지 않습니다.

자연인들에게도 기회가 주어지면 그들은 도덕적이 될 수도 있고,

열심히 하나님께 기도도 하고, 구원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연인의 마음에는 선한 법칙이 없기 때문에

마음의 선한 실천도 할 수 없으며, 선한 생각도 선한 심령의 의향도 가질 수 없습니다.


특별하게는 그들 자연인 속에는, (혹시 선하게 살더라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없습니다.


그들은 조금도 무한히 영광스러우신 그분을, 그들의 호흡을 주관하시는 그분을,

모든 자비가 흘러나오는 그분을 사랑하지 못합니다.


그들이 자주 하나님을 높이는 일을 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얼굴을 하며,

하나님을 높이 찬양하는 것처럼 보여도

이 모든 것은 단지 외식 외에는 아무 것도 아닌 것입니다.


겉으로는 사랑스러워 보여도, 그들은 고작 회칠한 무덤 밖에 안 됩니다.

그것은 부패(putrefaction)와 악취(rottenness)외에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들에게는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사람들의 사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시고,

죽어가는 죄인들에게 고귀하신 은혜를 보여주신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그들은 태어나서 지금까지 세상의 구속자에게

어떠한 실제적인 경의를 표현하는 일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들은 한 번도 그들을 만드시고 그들을 살게 하시며, 움직이게 하시며,

그들을 존재하게 하신 하나님을 위하여 어떠한 열매도 맺어본 적이 없습니다.


▲거듭나지 않은 자연인은, 하나님께 순종, 복종하지 않습니다.

그가 비록 선한 평판을 받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자연인은, 즉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그들은 어떤 식으로든지, 자신들이 만들어진 목적에 부합하는

반응을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지금까지 모두 함께 헛되고 목적이 없는 삶을 살아온 것입니다.


그들은 아주 조금이라도

하나님의 계명에 신실하게 순종해본 적도 없습니다.


그분을 섬기라고 그들을 창조하셨건만,

그분에게 진실하게 순종하는 것에 대해서는, 손가락 한 번 까닥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도 외관상 하나님의 계명을 따르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은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복종하는 모습은 해본 적도 없으면서

그분에게 순종하는 것은 어떤 식으로든지 거부하였으며,

순종하는 것도 단지 두려움 때문에 하거나,

그들의 세상적인 관심사(축복 등)에 자극을 받아

그것을 이루어보고자 그렇게 할 뿐이었습니다.


▲자연인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줄 모릅니다.

착하고 나이스 하다 하더라도

자신들의 태도 중 어느 것 하나를 취해서라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본 적이 없습니다.


그들은 한 번도 사람들을 복종시키시는 하나님의 주권에 대하여

영광을 돌려본 적도 없습니다.


그들은 그분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그분의 거룩하심과 자비하심에 대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도 않습니다.


그들은 그분을 신뢰하는데서 실천하는 것, 즉 주님 한 분만으로도 충분하며

그분의 성실하심에 대해서 영광을 돌리지도 않습니다.


▲자연인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믿거나 신뢰하기에는 무언가 충분하지 않다고 보며,

마치 하나님을 거짓말쟁이처럼 생각하며 그렇게 대우합니다.


요일5:10에서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나니”

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늘 그들을 주관하시며, 그들은 그분의 자비로 살아있건만,

그들은 자신들의 전 일생 가운데 받은 하나의 자비에 대해서도

하나님께 감사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들은 이 세상에 오셔서 구원받을 기회를 주시려고 죽으신 그리스도에게

조금이라도 감사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그들의 마음의 문을 노크하실 때

그분을 영접해야겠다는 감사의 마음을 표시해본 적도 없습니다.


다른 곳에서도 아니고 그들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시며

단지 그들의 구세주로 대접해달라는 간청에도 불구하고

항상 그분에게 문을 닫고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욕구가 없습니다.

그들은 모든 삶 가운데 하나님이나 그리스도를 따르고 싶은

어떠한 진실한 욕구도 가져본 적이 조금도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스스로를 그들의 기업으로 주시고,

그리스도도 그들의 영혼의 친구로 주셨건만.. 그들은 그것을 싫어하였습니다.


그들은 한 번도 하나님이나 그리스도를

자신들의 기업으로 가지기를 바라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나 그리스도 없이 지옥에 가는 것을 피할 수만 있다면,

그분들과 함께 있느니, 차라리 그분들 없이 사는 것을 더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영광스러운 생각을 해본 적도 없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항상 이 세상의 것들을 가장 소중히 생각합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계명들에 대하여 모두 들었음에도,

하나님 앞에서, 늘 지극히 작은 세상의 유익이나, 죄의 쾌락을 더 좋아합니다.


◑3. 회심하지 않은 사람들은 그들 안에 있는 가공할 사악함 때문에 위험합니다.


▲1. 죄의 심각성을 모르며, 죄짓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죄는 끔찍한 본성 중의 하나이며,

무한히 위대하시며 무한히 거룩하신 하나님을 대적합니다.

(그러나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그 심각성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죄를 즐깁니다.)


인간의 본성 속에는 하나님에 대한 적대감과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과

하나님께 반역하는 것이 있습니다.

죄는 지극히 높으신 분을 대항하는 적과 같이 부상(浮上)합니다.


피조물이 창조주의 적이 되거나 마음속에

창조주에 대한 적개심과 같은 것을 품는 것은 위험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피조물 간의 차이를 생각해본다면

이러한 점은 더 확실해질 것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모든 피조물과 창조주를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마치 작은 먼지를 저울질하는 짓과 같이 부질없는 짓이며,

허영심의 발로 외에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죄 속에는 무한한 악이 있습니다.

우리가 죄 속에 있는 수많은 악을 볼 수만 있다면,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아주 작은 죄를 가진 사람이라도

위험한 상태에 있음을 깨닫도록 해줄 것입니다.


▲2. 자연인(교회 다녀도, 거듭나지 않은 자)들의 마음은.. 온통 죄로 가득해있습니다.

그들의 심령 속에 하나의 죄만 있다고 하더라도

매우 위험한 상태가 되기에는 충분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의 죄만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방식이 죄로 가득한 것입니다.

게다가 갖가지 정욕으로 가득합니다.

마음은 죄에 푹 잠겨 그 근본 자체가 부패하였고,

그 근본에서 죄로 가득한 모든 종류의 물이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흘기는 눈과 훼방과 교만과 광패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막7:21~22(본문)


마귀적인 심령 속에 정욕이 없는 사람은, 이 세상에 한 사람도 없습니다.

자연인들은 마귀의 형상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파괴되었고 마귀의 형상이 그들에게 낙인찍힌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주로 그들의 명성과 신용에 대한 염려와 관심을 기울이게 하시거나

교육을 통하여 사람들의 사악함을 은혜롭게 억제시키기를 즐겨하십니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라도 억제되지 않으면

아마 행치 못할 죄는 하나도 없이 죄가 왕성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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