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성령님에 대해서 질투하신다 약4:4~5 11.10.09.설교일부녹취 40'~끝
※앞서 하나님의 질투, 열심
,
하나님은 교회를 ‘질투’ 하신다,
하나님의 성전 재건의 열망, 질투 에 계속 이어지는 설교문
◑서론, 내가 세상을 사랑하면.. 성령님이 나를 질투하신다.
▲약4:4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여기서 ‘간음하는 여자들’은 성도들을 가리킨다. ('여자 신자'를 가르키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신부들’이기 때문이다.
야고보는, 세상을 사랑하는 성도들을..
‘간음하는 여자들’에 비유하고 있다.
즉,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따라 사는 사람이다. 요일2:16
▲약4:4b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되게 하는 것이니라.
두려운 말씀이다.
우리 속에 세상 사랑이 있는 채로 신앙생활하면,
하나님과 친밀함이 안 된다. 이건 당연하고,
두려운 것은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
예를 들면, 이런 뜻이다.
남편이 외도를 하는데, 자기가 아내에게 미안하니까..
아내 생일 선물로 보석반지를 사 주고,
결혼기념일에는 장미꽃 1백 송이를 선물했다.
그때 아내가, 그 선물을 받고 기뻐하겠는가? 친구에게 자랑하겠는가?
버젓이 드러내놓고 외도하는 남편에게, 그런 선물 받았다고, 아내가 기뻐하겠는가?
하나님도 마찬가지시다.
신부된 성도들이 ‘간음하고 있으면서’ (약4:4, 세상을 사랑하고 있으면서)
주일날 헌금 좀 두둑하게 드리고,
찬양의 입술로 봉사한다고.. 하나님이 정녕 그를 기뻐하실까?
그의 헌금과 헌신을 기쁘게 받으실까?
그러나 우리가운데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 정도면 신앙생활 잘 한다’고 여긴다.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오히려 그를 질투하신다.
그래서 그를 반드시, 세상에서 빼앗아 오실 것이다.
그런 과정에서, 그런 세상과 간음한 ‘여인’(성도)들에게는,
세상이란 연인과 결별하는.. 큰 아픔과 고통과 환란이.. 필히 주어질 것이다.
▲약4:5, 너희가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 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냐?
여기서 ‘시기’한다는 말은, *헬, ‘phthonos’
‘질투 jealous’와 혼용하여, 하나님의 질투를 묘사하는데 사용된다.
비슷한 말이다.
정리하면,
성도가 세상과 외도(간음)하면..
성도 속에 거하시는 성령이 시기(하나님의 질투)하신다.
그래서 성도는 작살나게 된다.
성도들이 괴로운 것은,
세상 사람들은.. 큰 죄를 지어도.. 잘~ 사는데,
성도들은.. 작은 죄만 지어도.. 작살 난다.
그 이유가 위 본문에 나와있다.
약4:5, 너희가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 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냐?
결코 헛되지 않다는 뜻이다.
◑본론, 하나님은 성령님에 대해 질투하신다. (열심내신다.)
▲1. 약4:5의 다른 각도의 번역
개역성경에서 ‘성령님이 우리를 질투하신다’ 라고 되어 있는데,
NIV성경의 각주에 보면
‘하나님이, 그 분이 우리 속에 주신 성령에 대해서, 질투하신다’
이렇게 번역할 수도 있다고 나온다. 저/설교자는 이게 옳은 번역이라고 생각한다.
영어성경 NASB도
Or do you think that the Scripture speaks to no purpose:
"He jealously desires the Spirit which He has made to dwell in us"?
‘너희가..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을 (↔성령이)
시기하기 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냐?’ 이런 뜻이다.
쉽게 예를 들어 설명하면,
아버지가 딸을 시집보냈는데, 딸이 시댁에서 구박을 받으면,
친정아버지가 시집 보낸 딸에 대해.. 질투/분노하게 되어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우리 속에 거하도록 두셨는데,
우리 각자가 성령님을 홀대하면, 즉 세상과 외도하면,
하나님이 성령님에 대해 질투/분노/열심내신다... 라는 뜻이다.
위 약4:5절을, 그런 식으로도 번역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약4:4절과 5절은 연결되어 있다.
5절 서두에 헬라어 접속사 ‘에ἤ’가 나온다.
성령님을 우리 속에 (시집보내듯이) 보내셨는데,
우리가 성령님은 무시하고, 세상과 외도하고 있으면,
하나님이 성령님에 대해 질투(열심)하시므로,
하나님이 폭발하신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신부인 우리가 세상을 사랑하고,
죄 가운데 행하는 것을 보시면,
내 속에 성령님이 크게 탄식하실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보신 하나님이, 성령님에 대해 질투하시므로,
얼마나 하나님의 질투를 가지고 분노하실까.. 이것을 볼 수 있다.
그러니까 저부터 먼저 두려운 것이다.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느냐?’
▲2. 누구든지 성령을 훼방하는 자는 사하심을 영원히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처하느니라. 막3:29
이 구절도, 하나님의 ‘성령님께 대한 질투’를 잘 볼 수 있다.
부모들 중에 ‘차라리 나를 건드려도, 내 자녀를 건드리면 용서 못 한다’
이런 마음이 들 수 있다.
예를 들어 말씀드린 것이다.
하나님도, ‘너희가 나를 건드리면.. 좀 참아주겠지만,
성령님을 건드리면.. 절대 용서 못 한다.’ 이런 뜻이다.
그래서 우리가 한 가지 꼭 기억할 것은, 하나님은 성령님에 대해 질투하신다.
←설교 주제하나님은 성령님에 대해 질투를 가지고 보호하시고, 뒷받침하신다.
특별히 성령의 기름부음에 대해서...
성경에 보면, 몇 가지 이런 예를 볼 수 있다.
성령님의 기름부으심에 대한 하나님의 질투!
▲3. 다윗은 사무엘을 통해 기름부음을 받았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윗 속의 성령의 기름부으심에 대해 질투하셨다.
-하나님은 질투/열심을 가지시고, 성령의 기름부음 받은 다윗을 보호하시고, 뒷받침해 주셨다.
그래서 사울 왕이 아무리 왕권을 총동원해서 다윗을 소탕하려고 했는데,
한 번도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4. 다윗.. 사울 왕의 기름부으심을 두려워하다.
다윗이 사울에게 도망하여 굴에 숨어있는데,
사울이 용변 보러 굴에 들어왔다.
다윗은, 사울의 옷깃을 조금 칼로 잘랐다. 왕의 옷이라서 옷깃이 길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이 일 직후에 다윗은 이렇게 뉘우친다.
그리 한 후에 사울의 옷자락 벰으로 말미암아 다윗의 마음이 찔려
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께서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 하고
다윗이 이 말로 자기 사람들을 금하여, 사울을 해하지 못하게 하니라. 삼상24:5~7
다윗은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가운데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성령의) 기름부으심에 관한 하나님의 질투를 깨달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두려워해서, 사울 왕 공격을 거부했던 것이다.
▲제 개인적 체험
오래 전에, 제가 미국의 세계적인 성령사역자가 사역하는 곳에 가 보았다.
그 전에 제가 그 분의 책을 두 권 읽었고, 아주 큰 감명을 받았던 터였다.
큰 스타디움인데, 거기에 사람들이 가득 차 있었다.
저는 늦게 도착해서, 강단에서 가장 먼 곳에 겨우 자리를 잡았다.
그날 예배시간에, 성령께서 제게 강력하게 임하셨다.
그래서 제가 관중석에서 일어나서, 그 옆 복도에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그 시간에 성령님이 너무 강력하게 제게 임했으니까!
그때 제 마음속에 성령께서 이렇게 분명히 감동하셨다.
‘저 사역자 위에 부어 있는, 내 기름부음을 건드리지 마라!
그러면 너 위에 있는 네 기름부음을.. 내가 건드리지 못하게 할 것이다!’
(다른 사람이 너를 건드리지 못하도록, 내가 보호할 것이다.)
아주 엄위한 마음으로, 그러한 감동을, 제가 그 시간에 받았다.
성령에 대한 하나님의 질투가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성령님’ 또는 ‘성령의 기름부으심’에 대해 질투하시기 때문에,
성령의 기름부음에 대해서.. 함부로 대적해서는 안 된다. 괜히 나만 깨진다.
저는.. 교우들이나 지도자들이 모여서,
어떤 사회적 이슈가 되는 일에 대해서, 또는 교계적 이슈가 되는 일에 대해
다함께 무리지어 비판하는 소리를 들을 때가 있다.
그러면 저도 거기에 끼어서, 한 마디 거들고 싶을 때도 간혹 있다.
그러나 내가 그분을 판단할 때, 자칫 잘못하면,
그분의 기름부으심(그분 위에 임하시는 성령님)까지.. 제가 판단할 수 있다.
그래서 더더욱 조심스럽다.
여러분, 제가 이 설교를 통해 말씀드리는 것은,
‘하나님은, 성령님에 대해서 질투하신다’는 것이다.
여러분이 그 점을 절대로 간과하지 않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설교를 전한다.
저는 그때 미국의 스타디온 집회에서
개인적으로 들은 성령의 음성에 대해 두려움이 있으므로,
또한 그것이 성경적이므로,
가급적 다른 사역자를 비방하지 않으려고 한다.
성령님이 내게 큰 감동을 주셔서 ‘의를 세우라’고 말씀하시기 전에는,
‘말’을 함부로 하지 않는 것이 성경적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모여서 ‘얘기’하는 것들도.. 가만히 들어보면
정말 하나님께 감동을 받아서 ‘의를 세우기’보다는
자기가 잘 알지도 못하는 일들을.. 괜히 입방아 찍는 일들이 많다.
그러므로 거기에 내가 괜히 가담하지 않는 것이.. 성경적이다.
◑하나님의 질투로 질투하는 성도가 되기를 소원한다
▲1. ‘하나님의 질투’로 질투한 엘리야
‘왕상19:10,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이 특심하오니’
‘열심이 특심하다’는 말은,
히브리 성경에 질투하다는 뜻의 ‘카나, 카나’가 두 번 반복된 말이다.
히브리어에 두 번 반복은 강조를 뜻한다.
'내가 질투하고 질투한다' .. 라는 뜻이다.
그래서 영어성경은 very jealous라고 번역했다.
이는 곧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나서
우상들을 숭배하는 작태를 보고.. 엘리야가 심히 분노(열심이 특심)한 것을 가리킨다.
이때 엘리야의 질투는
바로 ‘질투하시는 하나님’과 뜻을 같이하는데서 나온 질투/열심이다.
하나님의 질투가 그에게 부어져 있었다.
그가 850명과 대결한 것, 그리고 비가 오지 않기를 위해 기도한 것,
다시 비가 오기를 기도한 것,
그 모든 바탕에는 ‘하나님의 질투’가 있었다.
하나님이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신 중요한 요인도.. 그가 바로 ‘하나님의 질투’로 행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 않고 엘리야가, 괜히 '자기 질투'로 행했다면.. 자기만 박살났을 것이다.
▲2. ‘하나님의 질투’가 자기를 삼키신 예수님
예수님도 하나님의 질투가 있었다.
요2장에, 예수님은 성전을 청결하게 하시고,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짐승들을 내쫓으시고, 동전 바꾸는 환전상을 둘러엎으셨다.
이때 제자들은 '다윗의 질투(열심)을 기억해 냈다.
(즉 예수님의 성전청결은, 다윗 처럼, 하나님의 열심이었다는 뜻이다. 예수님의 개인적 열심이 아니라)
요2:17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이 말씀은 시69:9를 인용한것인데..
▲3. '하나님의 질투'가 자기를 삼켜버린 다윗 ('하나님의 질투'속에 풍덩 빠져버린 다윗)
시편 69편에 보면, 다윗은 자기 친척과 가족에게도 따돌림을 당하고,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았지만,
'주님의 집을 향한 열정'이 자기 속에서 불타고 있었다.
다시 말하면, 성전을 향한 '하나님이 주신 열심/질투'가.. 자기 속에 불타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아무리 가족, 친척, 가까운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아도.. 그 불은 계속 타올랐다.
우리도 이렇게, '하나님의 열심/질투'가 너무 커서, 나를 삼켜버리는..
그래서 아무리 핍박과 따돌림을 받아도.. 더욱 주님을 사랑하는, 그런 다윗 같이 되기를 소원한다.
69:8 친척에게 따돌림을 당하고, 어머니의 자녀들에게마저 낯선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9 주님의 집에 쏟은 내 열정이 내 안에서 불처럼 타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모욕하는 자들의 모욕이 나에게로 쏟아집니다.
▲4. 바울에게도 <하나님의 질투>가 있었다.
우리가 이미 살펴본 대로 고후11;2에도
‘내가 하나님의 열심을 가지고 열심내노니.. I am jealous with God's jealousy’
여기에 대해서는 이미 하나님은 교회를 ‘질투’ 하신다 에서 다루었다.
▲5. 비느하스의 <하나님의 질투>
비느하스가 단 칼에 두 사람을 찔러 죽였다.
그러자 염병이 그 자리에서 멈추었다. 민25:7~8
비느하스가 왜 이렇게 했는가?
하나님의 질투가 그 속에 있었다.
그 질투를 가지고,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 사이에 중재자가 된 것이다.
시106:30, 그 때에 비느하스가 일어서서 중재하니 이에 재앙이 그쳤도다
그래서 하나님의 진노가 돌이키게 했다.
▲정리하면
오늘날 기독교와 교회에 대해서,
이렇고 저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자칫 잘못하면, 그래서 판단과 비방의 죄를 지을 수 있다.
‘하나님의 질투’가 내게 임하지 않으면,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자기에게 유익하다.
그러나 ‘하나님의 질투’가 자기에게 강력하게 임한다면,
엘리야처럼, 비느하스처럼.. 목숨 걸고, 일어서야 할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질투'가, 나를 뒷받침해 줄 것이다.
예수님도 ‘하나님의 질투’로 성전을 청결케 하셨다.
저와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질투가 부어져서
그 질투를 가지고, 하나님의 보좌를 흔드는 중보기도를 드림으로써
이 시대에 엘리야, 다윗, 비느하스, 예수님 같은
귀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시기 바란다.
엘리야처럼, 예수님처럼, 다윗처럼, 바울처럼,
이런 하나님의 질투가 나에게도 부어지기를 간절히 소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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