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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세의 고통을 이기게 하는 성경교육

LNCK 2011. 11. 9. 11:22

◈말세의 고통을 이기게 하는 성경교육   딤후3:1~15      인터넷에서스크랩

 

◑말세는 사나운 고통의 때

 

몇 년 전에 지방선거에서, 한 후보자가 연설을 시작할 때마다 이런 말을 했었습니다.

"여러분 행복하십니까?"

 

정말로 행복은 인간의 삶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에는 행복을 물어야 될 상황이 아니라

고통을 점검해야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YTN에서 <뉴욕 타임지>를 인용하면서, 이런 내용을 보도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한국인들이 신경쇠약에 걸리기 직전이지만

사회 분위기 때문에 치료를 기피하고 있다.

이혼율이 급증하고, 학생들은 질식할 정도의 학업 부담에 시달리고 있으며

거친 직장문화는 과도한 술자리를 유도하고 있다.

 

특히 한국은 자살률이 세계 최고이지만

늘어나는 근심과 억압, 스트레스에 대한 심리치료는 거부하고 있다.

정신과에 가면, 정신병자라는 낙인이 찍힐 수 있기 때문이다."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딤후3:1

 

여기에서 고통은 ‘위협하다’라는 뜻을 가지 고 있습니다.      *헬, 할레포스

이 단어는 성경에 단 2곳에 나오는데요..

본문 딤후3:1과, 다른 한 군데는 마8:28에 나옵니다.

 

마8:28 "예수께서 건너편 가다라 지방에 가시매 귀 신 들린 자 둘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니, 그들은 몹시 사나워(할레포스) 아무도 그 길로 지나 갈 수 없을 지경이더라"

 

가다라 지방의 귀신 들린 자 두 명이, 몹시 사나워서

사람들이 그 길로 지나갈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고 말할 때,

몹시 ‘사나워’ 라는 이 단어가 본문의 ‘고통’이라는 단어와 같은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사는 이 말세는

‘고통스러울 뿐 아니라,

마치 (군대)귀신들린 사람이 몹시 사납게 위협하는 것과 같은 시대’ 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겉으로는 평화를 누리는 듯하지만

마음에서부터 왠지 모를 두려움과 불안함을 느끼곤 합니다.

 

뉴스를 보고 있노라면, 어디선가 다가오는 위협의 신호를 감지하게 되고

각종 사고와 사건들 속에서 점점 더 사나워져가는 세상을 보게 됩니다.

 

뉴스뿐입니까? 부모로서 내 뱃속으로 낳은 아이들을 보면서도

나도 어찌할 수 없는 사나움이 아이들 속에 도사리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부부가 함께 살아가면서, 갈등이 생길 때마다 남편으로서 아내로서

서로를 어떻게 할 수 없는 사나움이 있음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실로 말세는 ‘고통의 시대’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고통을 어떻게 이겨낼 수 있을까요?

 

부모 된 어른뿐 아니라, 더욱 큰 사나움 속에 살아가야 될 우리의 자녀들이

어떻게 고통을 이기며 살게 할 수 있을까요?

 

 

◑말세 때의 고통의 원인

 

우리는 고통의 원인이 무엇인지 알아봐야 합니다.

본문은 그 고통의 원인을 딤후3:2~5까지 18가지를 나열하고 있습니다.

이 18가지는, 고통의 현상이지만, 동시에 고통의 원인이기도 합니다.

 

딤후3:2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3:3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3:4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이런 것들은 우리가 생활 속에서 피부에 와 닿도록 느끼는 우리 시대의 이야기입니다.

2천 년 전에 기록한 성경이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너무나도 우리에게 사실감 있게 다가오는 말씀들인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왜 고통스러운지 아느냐? 왜 사람들이 몹시 사나워지고 있는지 아느냐?

사람들이 바로 자기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돈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자랑하기 때문이고, 교만하기 때문이고,

사람들이 비방을 서슴지 않기 때문이고

부모를 거역하기 때문이고, 감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다."

 

그중에서 이 시간에, 우리는 7가지를 한번 묵상해 보기를 원합니다.

 

▶1. 자기를 사랑하며

 

여러분 주위를 둘러보십시오. 사람들은 자기 사랑과 자기 절대화에 미쳐있습니다.

조금이라도 자존심이 구겨지는 것을 견디지를 못합니다.

 

우리 시대가 고통스런 상황 속에 사는 첫 번째 원인을 꼽는다면

바로 자기사랑입니다.

 

부부가 고통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부모와 자녀 사이가 고통하게 되는 까닭이 무엇입니까?

 

회사에서 우리가 수많은 고통에 직면하게 되는 원인을 살펴보십시오.

심지어 교회에서도 고통 하는 우리를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바로 그 깊은 뿌리 속에 자기사랑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내 주장, 내 감정, 내 의견, 내 자존심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걸 붙들고 부들부들 사는 우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자기사랑은 이웃사랑과 정면으로 대치됩니다.

하나님의 명령인 이웃사랑과 반대되는 자기사랑이야 말로

인간이 겪는 고통의 뿌리중의 뿌리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자기 자신을 꺾고 다른 사람을 먼저 사랑할 수 있다면

많은 고통을 줄일 수 있을 것입니다.

 

▶2. 돈을 사랑하며

 

요즘 사회이론 중 ‘통섭이론’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모든 사회의 현상들을 하나의 실로 꿰어보자는 것입니다.

가령 예를 들어 경제성장이라는 가치로 모든 것을 살펴보자는 것입니다.

 

경제성장이라는 이슈는 다른 모든 인간적이고 이상적인 이슈들을 잠재우고

국민들 속에 강력한 메시지로 꽂힙니다.

경제성장은 모든 가치를 제치고

우리 민족의 가장 높고, 가장 이상적인 가치로 군림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너희가 고통 받는 이유는 돈을 지나치게 사랑하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합니다.

돈이라면 뭐든지 오케이 되는 세상인데요, 악과 선의 구별이 모호해졌습니다.

 

이제는 "정직한가?" 라고 묻는 사람이 없습니다.

"경제적인가?" 라고 묻습니다.

 

돈이 되는가에 대한 관심은 모든 것을 삼가 시켜 버렸습니다.

돈벌이가 된다면 배반이든, 야합이든, 거짓이든.. 무엇이나 하는 세상이 되어버렸습니다.

 

경제적으로 모든 것을 주장하고 판단한 결과.. 고통이 줄어들고 있습니까?

과거보다 큰 차를 타게 되신 여러분.. 과거보다 행복하십니까?

과거보다 비싼 음식을 먹게 되신 여러분.. 과거보다 불안요소가 줄어들고 있습니까?

 

요즘 기후가 수상합니다. 비가 너무 자주 온 다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2011년7월시점

2008년도 기상청에서 이런 발표를 했습니다.

"과거와 달리 여름철 장마발생과 소멸시기가 뚜렷하지 않아서

2009년부터 장마예보는 폐지하고, 여름이 시작되면 우기로 명명한다."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을까요?

경제성장을 절대가치로 추구해온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이

환경을 파괴해서 이런 결과가 우리에게 도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속도는 점점 빨라질 것입니다.

그래도 경제성장의 전차는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아마 멈출 수 없을 것입니다.

 

돈 사랑의 불길은 더욱 더 강하게 타오르고 있습니다.

돈 사랑은 하나님 사랑에 정면으로 대치되는 것으로

성경이 그토록 심각하게 지적 하던 우상입니다.

 

▶3. 자랑하며  4. 교만하며

 

자랑과 교만은 번창하는 자본주의 광고시장과 어울려서

이제는 더 이상 죄라고 말할 수 없는 풍토를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자기를 드러내야 생존할 수 있고, 자기를 높여야 인정받는 시 대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잘 생각해 보십시오.

광고에 등장하는 좋은 이미지를 가진 탤런트들이,

정녕 우리를 위하는 자들입니까? 또는 진정 공익을 위하는 자들입니까?

 

그들이 광고로 보여주는 아름다운 장면들, 그들이 그토록 강력히 권하는 제품들..

이제 광고는 단순히 제품을 알리는 수준을 넘어서서

브랜딩이라는 개념 속에, 제품을 극도로 과장하는 일을 서슴지 않고 있습니다.

 

광고 경쟁의 사회는 자랑과 교만의 죄성을

더 이상 나쁘지 않은 것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아이들 에게 필요한 칭찬이

너무 무분별하게 남용되어 자랑과 교만을 부축이고 있는 것입니다.

 

▶5. 비방하며

 

비방은 매체를 통해서 날마다 보는 것이며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서 항상 경험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모였을 때 자신도 모르게 쏟아내는 비방은

진실과는 상관없이 사람들을 고통과 좌절 속으로 몰아붙이고 있습니다.

 

여러분 ‘태왕사신기’라는 드라마가 혹시 기억나시는지 모르겠어요.

극중 인물로 화천회의 대장로로 열연했던 최민수가

거짓말 모함을 저잣거리에 퍼뜨리면서 이런 대사를 한 적이 있습니다.

 

"백성들은 아무도 진실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다만 떠들 거리를 찾을 뿐입니다."

 

비방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삶의 유희였습니다. 짜릿한 쾌감이었습니다.

이런 까닭에 비방은 죄인들 속에 존재해 오면서, 많은 고통을 양산해 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십니다.

비방한 사람은.. 반드시 비방을 받게 될 것입니다.

        눅6:37 비판치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지금 우리는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원인’이 무엇인지 살펴보고 있는 중입니다.

이런 것들에서 빠져나와야.. 내가 말세에 고통을 가급적 면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6. 부모를 거역하며

 

아마 우리 시대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 또 하나를 든다면, 바로 부모를 거역하는 것입니다.

변화하는 시대 속에 빠르게 성장하는 자녀들은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부모를 무시하며 노골적으로 거역합니다.

 

부모들은 모든 것을 다해서 자녀에게 헌신하는데

자녀는 부모를 마치 종 부리듯 하고 있습니다.

부모의 말을 업신여기기를 밥 먹듯이 합니다.

 

자기가 집에서 왕처럼 군림합니다.

그러다가 세월이 흘러 부모가 힘이 없어지면.. 거들떠보지도 않는 것입니다.

 

‘부모에게 순종하라’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그러나 이 명령은 철저히 무시되고 있습니다.

 

‘순종하라’는 진리는 "내 맘대로 해!" 라는 망언으로 대치되었습니다.

인간의 인격성은 말씀의 울타리 안에서 그 빛을 발하는데

말씀의 울타리를 걷어차 버린 아이들은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것이 자유고, 자기의 마음대로 사는 것이 진리라고 생각합니다.

 

이로 인해서 가정마다 겪는 고통이

얼마나 큰지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7. 감사하지 아니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는 현상은 더욱 심각합니다.

얼마 전에 한 교회의 목사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국가에서 행하는 각종 복지혜택이

오히려 가난한 사람을 다 죽이는 것 같다고 하시며 탄식하셨습니다.

 

국가가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것은 잘 하는 일인데,

왜 이런 말씀을 하셨는가 여쭤봤더니

사람들이 가만히 앉아 있어도 기본적인 생활비를 주는데

뭐 아등바등 그러며 일하려 하겠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옛날에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서

피땀 흘려 노력하는 생존력이 넘치는 야성이 있었는데,

이제는 그런 야성을 찾아볼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해하지 마십시오. 돕는 것이 잘못됐다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들에게 주어 지는 각종 지원에 대하여

감사하는 마음을 찾아 볼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리어왕’에 보면 이런 대사가 나옵니다.

리어왕이 바람에게 한탄하듯 외치며 울부짖습니다.

"감사할 줄 모르는 자녀를 갖는 것은

뱀의 이빨보다 더 날카로운 고통이로구나."

 

감사할 줄 모르는 가정이나 사회는 더 큰 고통으로 빠져들고 마는 것을

우리는 피부로 감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1. 그러나 너는..

 

이런 고통의 시대를 살아가면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떻게 이 고통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평화를 누리고

평화를 전파할 수 있을까요?

 

여러분 딤후3:14절을 다시 한 번 더 읽겠습니다.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너는 네가 누구에게서 배운 것을 알며"

 

여기에서 ‘그러나 너는’ 이라는 말은

앞의 말에 대한 강한 대조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자기를 절대시 하고 자기를 자랑할 지라도 너는’ 이런 말입니다.

 

세상은 돈을 사랑할 지라도 너는,

세상은 자랑하고 교만하고 그래야만 생존할 수 있다고 부르짖을지라도 너는,

세상은 비방을 즐길지라도, 세상은 부모를 거역할 지라도 너는,

세상은 감사하지 못할지라도 너는...

이런 의미인 것입니다.

 

여러분 잊지 마십시오. 성도의 삶은 세상과 달라야 합니다.

사람들은 자기 사랑과 돈 사랑에 목숨 걸고 살지만,

우리는 이웃 사랑과 하나님 사랑에 목숨을 걸어야 됩니다.

 

사람들은 교만과 자랑이 생전의 기쁨인 것처럼 말하지만,

우리는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라는 말씀을 붙들어야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여기서 쑥덕 저기서 쑥덕 비방을 즐기지만,

성도는 서로를 존중하고 진심으로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부모를 멸시하지만, 성도는 부모에게 순종해야 되고

세상은 감사할 줄 모르지만, 우리는 지극히 작은 것에도 감사하는 자가 됩니다.

 

우리 모두 ‘그러나 너는’ 이라는 말씀을 경청하며 살 수 있게 되시기 바랍니다.

 

▶2.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너는 네가 누구에게서 배운 것을 알며" 딤후3:14

 

하나님께서 이 고통하는 이 세상에서, 우리에 게 주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입니다.

 

여기에서 ‘거하라’는 단어는 ‘끝까지 그 상태를 유지하며 머물라’ 의미입니다.

‘여기 저기 떠돌아다니지 말고, 한 곳에 둥지를 틀고 살라!

즉 거기에 이사해서 머물러 살아라..’ 이런 말입니다.

 

무엇에 머물랍니까?

바로 ‘배우고 확신한 이 일’, 바로 이곳에 이사를 가라는 것입니다.

 

▶3. 네가 누구에게 배운 것을 알며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너는 네가 누구에게서 배운 것을 알며딤후3:14

 

디모데에게 있어서 배우고 확실한 일은 무엇일까요?

이것은 누군가에게서 배운 성경을 말합니다.

 

그럼 디모데는 누구에게서 배웠을까요?

딤후1:5"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

 

디모데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외조모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로부터 배웠습니다.

외할머니와 어머니가 어떤 분이셨는지 우리는 자세히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디모데에게 믿음을 가르쳐 주신 분들이 바로

외할머님과 어머님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은 저절로 갖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시간이 흐른다고 해서, 철이 든다고 해서,

때가 되면 저절로 가지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누군가로부터 배우는 말씀을 통해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르치지 않으면 누군가 대신해 줄 것으로 생각하십니까?

물론 하나님께서는 얼마든지 그렇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부모로서, 내 자녀를 가르치지 않는다면

부모 된 책무를 제대로 감당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책망하실 것입니다.

 

특별히 디모데는 외할머니와 어머니로부터 무엇을 배웠습니까?

성경을 배웠습니다. 언제부터 배웠습니까?

대답을 안 하시는 군요! 어려서부터 배웠습니다.

 

성경을 배웠고 어려서부터 배웠습니다.

딤후3:14~15에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너는 네가 누구에게서 배운 것을 알며,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이렇게 되어있죠?

 

성경은 아주 어릴 때부터 가르쳐야 됩니다.

어릴 때부터라면 언제 부터 시작해야 될까요?

임신하면 시작하셔야 합니다.

가장 좋은 태교는, 말씀을 읽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면, 아기가 태어나면 매일같이

엄마, 아빠가 번갈아 가며 아기에게

엄마, 아빠의 목소리로 성경을 읽어 주는 것을 기대합니다.

 

▶무엇보다 자녀들과 함께 가정 예배를 드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러분 가정 예배가 왜 중요 할까요?

 

첫째는 삶의 우선순위를 자녀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가정 예배는 중요합니다.

엄마, 아빠는 바쁜 사람들입니다. 뭘 그렇게 바쁜지 늘 바쁩니다.

너무나도 바쁘지만 가정 예배를 드릴 때

자녀에게 어떤 메시지가 전달될까요?

 

아빠는 너무 피곤해서 집에 오면 쓰러져 자기 바쁩니다.

네, 너무나도 피곤한데도 불구하고 졸린 눈을 비비면서

아이들을 불러 모아 예배를 드릴 때

아이들에게 어떤 메시지가 전달될까요?

 

우리는 아이에게 살아계신 하나님을 소개하고 싶어 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전수하기를 원합니다.

근데 여러분 하나님은 살아 계신다고 수 백 번 말하는 것보다

 

아무리 피곤하고, 지치고, 힘들어도, 아무리 바빠도

가정 예배를 지속적으로 드릴 때

아이들 속에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것을 명확하게 심어줄 수 있는 것입니다.

 

삶의 우선순위를 보여주는 것만큼 강력한 메시지는 없습니다.

힘들면 힘들수록 아이들에게는 훨씬 더 강력한 메시지가

아이들 속에 들어가는 법입니다.

 

둘째는 기도와 기도 응답을 통해서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만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가정 예배를 통해서 구체적인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밥 잘 먹게 해 주세요. 숙제 먼저 하게 해 주세요. 아빠 일찍 들어오게 해 주세요.

엄마가 아침밥 꼭 차리게 해 주세요.’

뭐 등등의 기도 제목을 내 놓을 수 있습니다.

 

우리 집의 주된 기도 제목이었는데. 이런 기도를 구체적으로 하고 나서

그 응답을 아이가 받게 되면 어떤 생각이 들까요?

하나님은 살아 계시고, 하나님은 내 기도를 들어주시고,

하나님께서는 나의 삶에 관심이 있다는 것을 어릴 때부터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셋째는 가르침과 배움을 통해서, 부모의 권위를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서 중요합니다.

왜 우리 아이들이 머리가 굵어질수록 부모의 말을 잘 안 듣는 것일까요?

철이 들면 좀 나을 줄 알았는데, 철이 들면 들수록 부모의 은혜에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모를 은근히 무시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왜 그럴까요?

 

이것은 권위가 부재되어 있기 때문인데, 권위는 가르침과 배움에서 납니다.

하나님께서 자녀에게 가르치라고 그토록 강조하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구약에서도 말씀하시고 신약에서도 말씀하시고

아니 아이가 교회에서 배우고 학교에서 배우면 그만이지, 왜 부모가 또 가르쳐야 될까요?

 

부모와 자녀 사이에 올바른 권위가 세워져야 되고,

올바른 권위가 세워져야 인격적인 교정과 인격적인 돌봄이 가능한 것입니다.

 

‘찬아! 그렇게 하면 안 돼!’ 했을 때

‘예 알겠어요.아버지’ 하면 인격적인 돌봄이 가능합니다.

 

그런데 ‘왜요?’ 이러면 인격적인 돌봄이 안 되고 있는 것입니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날까요?

가르침과 배움을 통한 아버지와 어머니와 아이 사이에, 부모와 자녀 사이에,

올바른 권위가 확립되지 못했기 때문에

인격적인 돌봄이 불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며칠 전에 초등학교 3학년 교실에서 시편 119편 1절에서 16절 말씀을 암송했습니다.

모든 아이들이 성경 암송을 상당한 양을 하게 되는데요,

그 암송을 제가 가서 점검합니다.

 

점검하면서 함께 암송을 두 번 정도하고,

‘이 말씀 중에 어떤 말씀이 너희들에게 와 닿느냐?’

라고 물었더니, 한 학생이 손을 들고

자기에게 마음이 와 닿는 성경 구절을 암송한 뒤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교장 선생님! 이 말씀이 내 가슴을 뚫고 지나가는 것 같아요."

초등학교 3학년인데, ‘자기 가슴을 뚫고 지나가는 것 같다니..’

참 감격스러웠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은 영혼과 골수를 쪼갠다 이렇게 말하죠.

그게 실제로 말씀을 수십 번 아마 백번 넘게 암송하는 가운데,

그 말씀이 자기 가슴을 뚫고 지나가는 것을 아이가 경험하고

그것을 고백한 것입니다.

 

여러분 그것을 부모를 통해서, 자녀가 배울 수 있다면

그 느낌과 그 감격과 그 충격을 부모를 통해서 아이가 배우게 된다면

아이가 어떻게 부모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그 말씀에 순종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어긋날 수가 있겠습니까?.. (후략)

 

유영업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