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은 나를 개인적로 아신다 민1:1~54 출처보기
▲주제를 잘 설명하는 예화
캐나다는 10년 전에 인구가 2천5백만 명이었습니다.
그 당시 캐나다에 호수가 6백만 개 이상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캐나다에서는, 인구 4명 당 호수가 하나씩 있었다고 합니다.
그만큼 호수가 많다는 얘기입니다.
자, 그런데 이 6백만개의 호수가 있는데, 밤에 캐나다에 달이 뜹니다.
달이 뜨면 어떻게 됩니까? 6백만개의 호수마다 달이 비치게 됩니다.
모든 호수가 다 달을 담아내고 있습니다.
마찬가지에요. 하나님은,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을
절대로 이 군중 속에서 버려진 개인으로
아니면 한강 물에 떨어진 한 방울의 물처럼 생각하지를 않으신다는 것이에요.
모든 사람 한 사람 한 사람을
하나님은 1:1(일대일)로 개인적으로 묶고 계신다는 겁니다. ←주제
▲민수기의 인구계수를 한 마디로 설명하면 - 60만개의 괄호
약 60만 명이 개인적으로
(자기와-하나님) 이렇게 괄호 속에 개개인이 개인적으로 묶여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민수기 1~2장에 나오는 인구 계수census는
성경 지면상, 60만 인구의 모든 이름을 다 적어놓은 것은 아니지만,
민1:18 그들이 각 종족과 조상의 가문에 따라 20세 이상인 남자의 이름을 자기 계통별로 신고하매
위 구절을 볼 때,
각 사람이 한 사람, 한 사람씩 개인적으로 계수되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것을 다윗의 인구조사와 비교해 보면,
다윗이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서, 나라를 부강하고 견고하게 통치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업적, 또는 자기 과시를 위해서,
군사력의 크기를 확인하려고 계수를 하게 돼요.
신하들이 말렸습니다. “그러지 마시옵소서. 하나님이 안 좋아하시는 겁니다.”
그런데도 강행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80만+50만의 군인들의 숫자를 계수하게 되는데
이때는 다윗이 ‘군대장관들을 통해서’ 백성을 계수합니다...
각 개인의 역사와, 개인의 인격과
개인의 집안과, 개인의 종족이 아무 의미가 없고
다윗의 수하에 있는 사령관들이
다윗의 수하에 있는 군인들의 전체 숫자를 계수한 것입니다.
많은 숫자라는, 그 숫자에 의미가 있었을 뿐입니다.
한 사람 한 개인의 히스토리가 완전히 백지로 돌아가면서
한 사람의 그 많은 이야기 한 개인의 많은 역사가
전체로 묶어져서 다 하나의 숫자(80만)라고 하는
한 개의 단체로 환산되어버리고 맙니다.
그런데 민1장은 어떻게 계수합니까?
본문 민수기에서 사람을 계수하는 방법이 뭐냐 하면
민수기 1:2절과 3절에도 나와 있습니다마는, 특히 18절에 보면
‘각 종족과 조상의 가문에 따라, 20세 이상인 남자의 이름을 자기 계통별로 신고하매’
한 사람 한 사람의 개인의 이름을
그 사람이 어떤 집안에 속해 있느냐,
그 집안은 어떤 종족에 속해 있느냐,
그 종족은 어느 지파에 속해 있느냐,
그 지파는 누구에서부터 나왔느냐..
이렇게 한 개인의 역사를
일일이 따져서 한 사람 한 사람을 지명합니다.
그러다보니, 이 족보가 상당히 길고, 오늘 우리 입장에선 지루하기까지 합니다.
(반면에, 다윗의 인구조사는 우리에게 간단합니다. 단 한 구절입니다.
요압이 백성의 수를 왕께 보고하니 곧 이스라엘에서 칼을 빼는 담대한 자가 80만 명이요,
유다 사람이 50만 명이었더라. 삼하24:9)
그러나 민수기는, 전체 숫자가 아니라,
지파, 족속, 계열별로.. 조사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갓의 아들들에게서 난 자를 그들의 종족과 조상의 가문에 따라
20세 이상으로 싸움에 나갈 만한 자를 그 명수대로 다 계수하니..’ 민1:24
서두에 ‘캐나다의 6백만 개에 비치는 호수의 달빛’처럼,
하나님은, 모든 지파, 족속, 각 개인에게
일일이 관심을 갖고 계시며, 개인적인 친밀한 관계를 맺기 원하신다는 겁니다.
다윗이 계수한 방법은 무엇입니까?
백성 전체 80만 명을 하나의 그룹으로 묶습니다. 개인의 인격성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80만명을 전부 한 그룹으로, 단체로 하나님이 인도하셨습니까?
물론 아닙니다. 하나님은 개개인을, 하나님과의 개인적 관계로 인도하십니다.
모두가 다 단체로 ‘다윗의 부하, 다윗의 군대’ 그것이 아닙니다.
민수기의 계수는, 그것과는 정반대로,
개개인을 개인적으로 인도/교제하시는 하나님의 속성을 볼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요즘 우리도, 다윗 식으로 계수할 때가 많습니다.
“저 교회는 OO명 모인데, 저 교회는 OOO명 모인데!”
이렇게 말을 하면서, 모든 사람들을 도매금으로 취급해 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모든 교인을, 하나의 숫자로 환산해 버리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그렇지 않으십니다.
몇 명이 모이든지.. 그들을 개인적으로, 각자, 인격적으로 만나 주십니다.
▲여러분 혹시 <가을로> 라는 제목의 영화를 보셨습니까?
이게 삼풍백화점 붕괴사건의 이야기를 소재로 한 그런 영화입니다.
삼풍백화점 붕괴로 502명이 죽었습니다.
502명이 죽었다고 우리는 치부해버리고 말아요.
그 죽은 사람 중에 나와 연관된 사람이 없으면, 우리는 숫자로 기억을 합니다.
이 숫자로 기억되고 있는 망자들에 대한 아쉬움을 영화로 표현한 것이에요.
거기에 한 여자가 삼풍백화점에 들어가서 죽게 됩니다.
그 여자는, 자기 약혼자인 젊은 검사와 만나기로 한 날 대법원 앞으로 갔는데
이 약혼남이 일이 있어서, 약속시간보다 조금 늦게 됩니다.
그 남자가 ‘이왕 기다리려면 대법원 앞에 있는 삼풍백화점에 가서 쇼핑하라고’
그렇게 억지로 백화점으로 보내버립니다.
그런데 그 백화점에 들어간 사이에 백화점이 무너져 내립니다. 영화 이야기에요.
그래서 여자는, 영화 장면 속에서, 무너진 잔해에 갇혀 있다가.. 결국 죽게 됩니다.
무너져 내린 돌덩이 속에서 갇혀 있다가, 시간이 흘러 죽게 됩니다.
나중에 그 여자가 죽은 뒤에
이 약혼남이, 그 여자의 부모로부터 약혼녀의 수첩을 건네 받는데
그 수첩 속에, 자기 약혼녀가 자기와 함께 여행을 하려고 했던
여행 계획서가 쭉 나와 있습니다.
어느 지방에 어디를 방문하고, 강원도 어디를 방문하고.. 쭉 나와 있습니다.
그 약혼남은, 시간을 내어서,
자기의 약혼녀의 소망이었던 자기와의 여행지를.. 그대로 답습하며 걸어갑니다.
그 수첩에 써진 <여행 계획>대로 여행을 해나갑니다.
그런데 여행하는 장소에서 마다, 낯선 여자를 계속 반복해서 만나게 됩니다.
그 여자가 누군가 하면
그 약혼녀가 삼풍백화점 붕괴시 콘크리트 조각들에 갇혀 있을 때
바로 옆에 깜깜한데 보이지 않는 곳에 한 여자의 신음소리를 듣게 되는데
삼풍백화점에서 일하던 젊은 판매원 아가씨였습니다.
그 아가씨가 정말 극도의 공포에 시달리게 되는데
이 약혼녀가, 이 판매원 여자에게
자기의 여행 계획을 들려줍니다.
‘내가 여기서 나가게 되면, 내 약혼한 남자와 함께 이런 여행을 할 거야’ 하면서
그 공포에 시달리고 있는 판매원 아가씨에게 계속해서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공포를 달래 줍니다.
그리고 이 약혼녀는 죽고, 판매원 아가씨는 구조를 받게 됩니다.
그래서 그 참사의 현장 속에서 그 언니한테 들었던 이야기대로
이 판매원 아가씨는 여행을 합니다.
그래서 이 (수첩을 따라 여행하는) 약혼남과 함께
우연히 그 여정이 겹치게 됩니다.
둘은 서로 그 이유를 모르죠.
결국 나중에 그 이유를 알게 되면서,
이 판매원 아가씨는, 그 잔해 속의 ‘약혼녀’가 말했던 약혼 남자가
바로 이 남자라는 것을 알게 되고..
그러면서 두 사람은 또 다시 계속 여행을 하게 되는
아주 의미심장한 그런 영화가 하나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저 502명 죽었다는.. 숫자로만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영화에서 그 약혼남에게는,
또한 무너진 잔해 속에서 공포에 떠는 자기를 위한 배려로,
아름다운 여행 계획을 들었던 그 판매원 아가씨에게는,
그 ‘약혼녀’는.. 아주 소중한 한 인격이요, 한 생명이었던 것입니다.
예를 들면, 지금 지구상에 기독교인이 약 20억이라고 합니다. 가톨릭 12억 포함
그러면 하나님은 ‘20억명’ 단체로,
혹은 한국 기독교인 ‘1천만 명’ 단체로.. 이렇게 대하지 않으십니다.
마치 영화에서 약혼남과, 판매원 아가씨가
그 ‘약혼녀’를 소중히 대하듯이 보통 사람들은 그녀를 ‘희생된 502명’으로 대하지만
하나님은 우리 각자를
아주 소중하게 개인적으로, 인격적으로 대하시고, 그렇게 교제하기 원하신다는 겁니다.
▲많은 사람들은 나를 그렇게 봅니다.
태목사... ‘목사 중의 한 사람’으로 봅니다.
군중 속에 섞여 있는 사람으로 봅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은, 우리 아이를
대학 입시를 봐야하는 ‘한 명의 입시생’으로 봅니다.
일류대학에 못 들어가기라도 하면..
‘공부 못하는 많은 군중’ 속에 섞여 있는 그런 한 청년으로 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으시다는 겁니다.
군중 속에 섞여 있는 우리 아이 하나하나를 향해서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 아버지가 1:1(일대일)로 대면하시고
1:1로 관계하시기 위하여
우리 아이에게 접근해 계시고,
내 남편/아내에게 접근해 계시고,
생면부지의 낯선 한 남자에게, 한 여자에게, 길에서 스쳐간 한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그렇게 접근해 계신다고 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성경말씀에도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마18:10 삼가 이 소자 중에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저희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그 소자의 천사들이
하나님께 얼굴을 뵈오면서, 대면하면서, 일거수 일투족을 보고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자식을 대할 때, 가족을 대할 때, 또는 낯선 사람을 대할 때
절대로 그 아이(사람) 개인을 봐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그 아이 자신이 공부를 한다/ 안 한다,
그 아이가 어떤 재능을 갖고 있다/ 안 갖고 있다,
그 아이가 어떤 핸디캡을 갖고 있다/없다..
이렇게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그 아이는 지금 괄호 안에 묶여 있는 아이입니다.
어차피 모든 인간은 하나님과 괄호로 묶여서 살아갑니다.
(하나님과 대면하여 있다는 뜻입니다. 그의 천사라도 대면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그를 보시는 관점이 어떤 것이겠습니까?
하나님과 괄호로 묶여 있는 상태에서
하나님과 반목하고 살았느냐/ 하나님과 화목하고 살았느냐?
이 두 개의 역사로 나누어질 뿐입니다.
직장생활을 합니다. 돈을 법니다.
학교에서 가르칩니다. 학교에서 공부합니다.
주부로서 살아갑니다. 모든 삶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오직 하나의 역사입니다.
하나님과 반목하면서 돈을 벌고 살았느냐,
아니면 하나님과 화목하면서 돈을 벌고 살았느냐,
둘 중의 하나에요. 이 두 가지의 역사로 사람이 판단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람을 볼 때 오늘 하루 종일 누구를 만나든지
그 사람 개인을 봐서는 안 돼요.
가게를 하시면 ‘오늘 손님 한 사람 왔다, 두 사람 왔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손님 한 사람 한 사람이.. 각자 모두가 다 하나님과 묶여 있는 존재들입니다.
그들을 모두 하나님 대하듯이.. 극도로 존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네 이름을 호명해서 )너는 내 것이라 사43:1
※이 말씀은, 원래 민족적으로 적용되지만, 개인적으로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은 우리 각자의 머리카락 까지 세신다고 합니다.
................................
▲하나님이 당신만 사랑하시나? - 예, 당신만 사랑하십니다. (이 단락, 펀 글)
한 집사님이 최근에 자기 직장에 있었던 일을 간증하셨습니다.
전에 일하던 A회사에서, 여러 부서에서 몇 명을 뽑아 B벤처 그룹을 만들었는데,
이 집사님이 거기에 가담하게 되었답니다.
얼마 후 지금 일하는 더 좋은 C회사로 옮기게 되었는데,
그 B벤처 그룹에서 일한 경험 때문에 발탁되었답니다.
그런데 집사님이 B회사를 떠난 후, 그 회사의 벤처 그룹은 해체되었고,
자신을 고용하기로 결정한 현재 C회사의 간부 4사람은
은퇴를 하든지 전직을 해서, 현재 회사에 남아 있지 않다고 했습니다.
(집사님만 고용해 주고, 다 사라진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신을 새 C회사에서 일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B벤처 그룹도 만들어주시고
4명도 예비해 주신 것 같다고 했습니다.
이런 식의 간증을 들으면 거부반응을 느끼는 분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당신(그 집사님)만 사랑하시나?’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간증하신 그 집사님만 사랑하십니다.
온 우주에 집사님 한 사람밖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사랑하십니다.
영화로 말하자면 집사님이 주인공이고,
벤처 그룹의 멤버들이나, 새 회사의 4명의 간부들은
주인공을 위해서 출연한 엑스트라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엑스트라 중의 한 사람이, 또한 하나님의 자녀라고 할 때,
이 사람에게 초점을 맞춰보면 얘기가 달라집니다.
영화의 주인공은 이 사람이 됩니다.
그 집사님은, 이 사람을 위해, 출연한 엑스트라에 지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이 사람을 온 우주에 하나밖에 없는 것처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자녀 한 사람 한 사람을 주인공으로 하여
인생 드라마를 만들어가고 계십니다.
내 인생 드라마에서는.. 내가 주인공이고 이웃이 조연이지만,
이웃의 드라마에서는.. 그가 주인공이고 나는 조연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드라마는 모두 해피엔딩으로 끝납니다.
중간에 사고나 불행이 생기기도 하지만
이것은 드라마를 흥미진진하게 만들고, 해피엔딩으로 끝나도록 만들기 위한
하나님의 각색에 지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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