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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없음/2009

믿음의 선을 긋자

LNCK 2011. 11. 19. 20:14

◈믿음의 선을 긋자         단1:1~21            출처보기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진미와 그의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않게 하기를 환관장에게 구하니

하나님이 다니엘로 환관장에게 은혜와 긍휼을 얻게 하신지라”  단1:8~9



◑다니엘과 똑같은 도전을 받는 현대의 청년들


▲배경

남유다 요시아 왕이 죽은 후, 바벨론에 의해 세워진 꼭두각시 왕인 여호야김 왕이

애굽과 내통하려는 기미가 있자

바벨론에 새로이 등극한 느부갓네살 왕이 유다를 공격하여(1절) 정복한 후

다니엘을 비롯한 젊은 유다 왕족들을 볼모로 잡아갑니다(4절).


그 젊은이들에 관한 기록인 다니엘서는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정체성을 가진 젊은이들이

바벨론이라는 이방문화 속에서

어떻게 성공적인 신앙인의 삶을 살 수 있었는가에 대한 말씀입니다.


특히 그들은 바벨론의 궁전, 즉 세속문화의 중심부에서 일하면서도

그들이 가진 믿음의 정체성을 잘 드러냈습니다.


다니엘에게 있어서 바벨론은.. 오늘날 우리에게 ‘세속 사회속’과 같은 곳입니다.

다니엘이 그 세상 속에서 어떻게 믿음의 정체성을 지켜갔는지를 살피는 일은

오늘날 우리가 몸담고 있는 ‘세속 사회속’에서

어떻게 믿음의 정체성을 지켜갈 수 있을 것인가를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교훈이 됩니다.


느브갓네살의 두 가지 의도.. 예루살렘을 침공한 그는 두 가지 일을 합니다.

첫째, 자신의 승리의 표징으로 예루살렘 성전 기물을 가져다 자신의 신당에 둡니다(2절).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더 이상 그들의 신으로 인정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둘째로, 그는 이스라엘의 젊은이들을 바벨론으로 데려갑니다(4절).

여기에는 정치 사회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젊은이들에게 바벨론의 학문으로 훈련시키고

이름을 바꾸고 먹을 것을 줍니다(4-5절).

바벨론의 새 환경, 교육, 삶의 터전을 제공함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이스라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잃게 만들자는 의도였습니다.


그들로 하여금 더이상 이스라엘 백성으로서의 희망을 없애버리고,

바벨론이라는 새로운 문화가 제공하는 것으로

그들의 하나님께 대한 믿음의 정체성을 제거하자는 의도였습니다.


▲바벨론에 들어간 다니엘 같은, 오늘날의 청년들

바벨론에서 사는 그리스도인 젊은이들은 학교를 졸업하고

세상에 나가서 나름대로의 직장을 가지게 되면서부터 새로운 문화에 접하게 됩니다.


이것을 본문과 비교해본다면

다니엘이 바벨론의 문화 안으로 들어가는 것과 견주어볼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새로운 삶의 환경 속에서, 우리 젊은이들이,

하나님께 대한 믿음의 정체성을 어떻게 지켜갈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접하게 되는 바벨론 문화(세상 속의 문화)가

나를 새로이 교육시키고 삶의 장을 마련해 주는 동안

나는 새로운 세계관으로 길들여지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이라는 문제에 봉착하게 됩니다.

우리는 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 속에서 살아야 한다는

이중적인 삶의 형식을 가지게 됩니다.


이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세상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이므로

우리가 세상 안에서 사는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다니엘이 바벨론의 문화 속으로 들어간 것처럼

우리가 세상 속으로 들어가는 것 자체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며,

우리의 세상 속에서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뜻을 이루어가십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바벨론의 문화 안으로 들어가는 것,

즉 세상 안으로 들어가는 것

그리고 그곳에서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정체성을 가지고 사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상 문화, 바벨론이 우리에게 하는 일

첫째, 세상 문화가 우리에게 새로운 하나님으로 다가옵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예루살렘의 성전 기물을 자신의 신당으로 옮김으로써

이방 신이 하나님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보이려했던 것처럼,

세상의 문화가 우리들 삶에 하나님대신 주인 노릇하려고 다가옵니다.


둘째, 세속문화가 우리를 교육시킵니다.

왕이 이스라엘의 젊은이들을 갈대아 사람의 학문과 방언(5절)로 가르친 것처럼,

세속문화가 우리를 교육시킵니다.


이것은 단순히 세상에서 학문을 배우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학문도 하나님의 일반적인 창조질서를 찾아간다는 의미에서 큰 의미가 있습니다.

다니엘도 그들로부터 지혜를 배웁니다.


그러나 세상의 학문에는, 하나님의 창조 질서와 반대되는 세속문화의 교육도 있습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세상의 교육은 이념적으로는 인본주의이고

방법론적으로는 진화론적 접근입니다.

이러한 세속적인 교육으로 인해서 인간은 점점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가고 있습니다.


또 이것은 단순히 공교육만이 아닙니다.

그릇된 세속적 삶의 문화가 우리를 교육시키고 있습니다.

돈 쓰는 법, 대인관계, 도덕적 윤리적 가치 등이 무의식적으로 전달되는

각종 세속문화(대중매체, 사회적 분위기 등)에 의해서 교육되고 있습니다.


셋째, 더 나아가서 세속문화는 젊은이들의 정체성을 바꾸려 합니다.

왕은 이스라엘 젊은이들의 이름을 바꿉니다(7절).

일제시대의 창씨개명처럼, 이름을 바꾼다는 것은 정체성의 상실을 의미합니다.


더 나아가서 그들은 그곳의 음식을 먹을 것을 강요당합니다(5절).

다른 음식을 먹게 된다는 것은, 삶 전체의 완전한 변화를 의미합니다.


또 누가 제공하는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삶의 생계가 그곳에 종속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결국 세속문화는 우리가 살아야 할 곳이며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야 할 삶의 현장인 동시에,


우리의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정체성을 상실케 하는 현장이기도 하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세상 속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의 이중적인 현실이며 책임인 것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세상을 어떻게 바로 살 것인가에 대한 지혜가 필요합니다.


◑다니엘의 대응


▲1. 뜻을 정함, 선 긋기

이러한 바벨론 문화가 자신의 믿음의 정체성을 위협하자 다니엘은 뜻을 정합니다.

즉, 믿음의 선을 긋습니다.


우리들이 세상의 문화가운데 있지만, 그것들 중에서 우리가 거부해야 할 것이 있고,

그것을 거부하기 위해서는 ‘뜻을 정하는’ 일부터 시작됩니다.

다니엘은 믿음의 선을 긋기 위해 뜻을 정하고 이것은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그것은 왕이 제공하는 음식을 거부하는 것이었습니다.


다니엘이 바벨론의 교육은 받으면서도, 음식을 거부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한 사람의 음식이 바뀐다는 것은

그 사람의 정체성의 가장 마지막 부분이 바뀌는 것을 의미합니다.


외국에 오랫동안 나가 살고 있는 한국 사람들은

언어도 바뀌고 삶의 형태도 바뀌지만

고추장, 김치맛을 못 잊는 것입니다!


실제 많은 경우 외국에 나가 사는 사람들이

더 맵게 먹고, 전통 한국음식을 더 많이 먹습니다.

음식마저 바꿔버리면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은 완전히 상실되는 것입니다.


다니엘은 그들이 주는 음식을 거부함으로써, 비록 자신이 바벨론에 와서

그곳의 문화로 교육을 받고, 그곳을 삶의 터전으로 삼고 살아가고 있지만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진 사람으로서

자신이 가진 믿음의 정체성이 상실되는 결정적인 상황에서는 그것을 거부하고,

자신의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확실히 하겠다는

상징적인 의미로 음식 먹는 것을 거부한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문화 속에서 살아야 하는 정당성이 있습니다.

그 문화를 배우고 그곳을 삶의 터전으로 삼습니다.

그러나 어떤 때에 세상을 향해 선을 그어야 할 순간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진 사람으로서

나의 믿음의 정체성을 잃게 만드는 어떠한 상황에 직면했을 때

우리는 믿음의 선을 그어야 합니다.


그 상황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각 사람마다 다를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있습니다.

내가 어떤 행동을 함으로써 혹은 어떤 상황에 참여함으로써

그것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상실케 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그 시점에 도달했을 때.. 과감히 이로부터 믿음의 선을 긋는 일이 필요합니다.


▲2. 구체적인 행동에 옮김

다니엘에게 있어서 이것은

왕이 주는 진미와 포도주를 거부하는 구체적인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인간 생존에 있어서 먹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실제 굶어본 사람은 알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세상에서 선을 긋는 것은

우리의 중요한 유익을 포기하는 것으로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이 선을 긋기 위해 고난과 순교에까지 이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영적결단입니다.

우리는 자주 이웃 사랑과 검소한 삶과, 선교적 삶, 전도하는 삶,

의로운 삶, 경건한 삶에 대해서 이야기하지만

그런 것들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렇게 살려는 믿음의 선을 긋고, 그 영적 결단을 행동에 옮길 때

실제 그렇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3. 도움을 구함

다니엘이 음식을 거부하기 위해서는, 환관장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했습니다.

다니엘은 그에게 도움을 청합니다.


우리가 삶의 현장에서 때때로 믿음의 선을 긋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행동을 하기에는 상황이 너무 힘들다고 느끼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또 내가 그런 행동을 하면 다른 사람에게 공격을 당하고 어려움을 당할까봐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사실, 다니엘에게 있어서 음식을 거부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잘 먹고 왕 앞에 예쁜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 그의 임무이기 때문입니다(5, 10절).


이 과정은 환관장의 통제하에 있고,

만일 그 일이 잘못되면 환관장도 어려움을 당하게 됩니다(10절).


나의 삶 속에도 ‘환관장들’이 있습니다.

우리 현실 속에서 환관장은 직장 상사이기도 하고,

때로는 나의 가장 친한 친구나 가족일 경우도 있습니다.


그들 때문에 영적 결단을 내리는 일이 어렵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의외로 환관장이 다니엘을 도왔던 것처럼(12-14절)

우리가 영적 결단을 내리고 믿음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행동을 할 때

내가 가장 염려하던 사람으로부터 오히려 도움을 얻게 됩니다.


이런 일은 어떻게 가능합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 즉 그런 상황에 간섭하시는 하나님의 역사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환관장을 감동시켜 다니엘을 돕게 하십니다(9절).


우리가 희생을 각오한 영적 결단의 행동을 할 때

하나님께서 간섭하지 않을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4. 대안 만들기

한편 다니엘은 무턱대고 환관장에게 요청한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대안을 가지고 나아갔습니다.


‘열흘’(12절) 의미하는 바는

다니엘의 채식 요구를 시험하기에 충분한 기간이고

환관장이 의심하지 않을 정도로 적당한 기간입니다.


그 채식만을 먹기로 요구한 기간이 너무 길면, 이를 의심하고 허락하지 않을 것이고

또 하루 이틀이면 그 사이에 채식한 효과가 나타나지 않을 것입니다.


또 환관장의 입장에 서서 만일 채식한 결과가

진미를 먹은 것보다 더 건강한 것으로 나타나지 않으면

다니엘 자신을 처형할 것을 말함으로써 환관장의 입지를 세워줍니다(l3절).


여기서 다니엘은 우리에게 세상을 사는 그리스도인의 지혜가 어떤 것임을 보여줍니다.

세상의 문화와 환경 속에서 나의 믿음의 선을 긋고 이를 행동으로 옮기는 일은

말처럼 쉽지 않고 무턱대고 이뤄지는 것이 아닙니다.


다니엘은 무턱대고 행동하지 않았습니다.

환관장의 입지도 살리고 설득이 필요한 부분은 설득해 가면서

자신의 영적 결단을 실행에 옮깁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지혜가 필요합니다.


세상에서 믿음의 행동을 한다고 해서 막무가내로 행동해서는 안 됩니다.

세상의 문화를 인정함과 동시에, 하나님의 창조질서와 반대되는 문화를 극복해 나가기 위해서는

지혜와 구체적인 대안이 필요합니다.


세상은 우리가 믿음의 정체성을 지키기 쉬운,

또 쉽게 선을 긋는 행동을 할 수 없는 상황이 아닙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질문에 답하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세상을 극복하지 못하는 대부분의 이유는

대안이 없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삶의 현장에서 발생하는 비기독교적인 문제에 대응하는

대안을 만드는 일에 게을리했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세상을 설득할 만한 대안도 가지고 있지 않으면서

믿음의 정체성을 지키려는 노력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무턱대고 하다가 곧 실망하고 포기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5. 시련에 대한 대비

좋고 설득력이 있는 대안이 있다 할지라도

그런 영적 결단의 행동에는 시련과 위험이 따릅니다.


다니엘이 채식을 하겠다는 결단을 내린 이유는

그 결과가 분명히 좋게 나타날 것이라는 확신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확신 때문이었습니다.

다니엘은 목숨을 잃을 각오로 한 행동이었습니다.


우리의 세상 안에서의 믿음의 행동은 그 결과로 인정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몫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헌신의 대가는 항상 현실적인 유익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불이익 혹은 고난으로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직장에서, 대인관계에서 혹은 삶의 한부분에서

믿음의 선을 긋는 행동을 했기 때문에, 복음이 원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에

때로는 어려움을 당하고 모욕을 당하기도 합니다.

거기에는 아무런 현실적인 보상이 없을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처럼,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6. 믿음의 행동의 결과

그러나 하나님은 믿음의 삶을 사는 자신의 백성들이

세상에서 멸시와 고난을 당하게 내버려 두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승리를 얻게 됩니다.


본문에서 다니엘은 그가 기대했던 것 이상의 결과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의 얼굴은 더욱 아름답고 포동포동해졌습니다(15절).

그리고 그 결과 계속 다니엘이 원하는 삶의 형태(16절에 계속 채식을 먹게 됨)를

유지할 수 있게 됐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고난을 각오하고 세상을 향해 믿음의 선을 긋고 행동할 때

그 결과는 오히려 우리가 원하는 삶의 방식대로 계속 살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의 행동을 할 때

세상 안에서 혹은 직장 안에서 거짓말하지 않아도 되는,

이중장부를 쓰지 않아도 되는, 고객을 속이지 않아도 되는,

같이 어울려 술 담배를 하지 않아도 되는 삶의 방식을 유지할 수 없게 됩니다.

그리고 세상이 그것을 인정하게 됩니다.


또 다니엘은 그 결과 더 많은 지혜(17, 20절)를 얻게 됩니다.

바벨론 사람들의 전문분야인 ‘이상과 몽조를 보는 일’에까지 전문성을 발휘합니다.

(17절-나중에는 다니엘이 왕의 꿈을 해석해 줌으로써 바벨론을 다스리는 위치에까지 오르게 된다)

 

즉, 세상 사람들의 전문적인 부분에까지 그 영향력을 발휘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 속에 사는 그리스도인의 승리하는 삶인 것입니다.


▲7. 하나님 나라가 올 때까지

1:21절에 “다니엘은 고레스 왕 원년까지 있으니라”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고레스 왕 원년에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이스라엘이 바벨론으로부터 해방, 포로귀환이 일어납니다.


즉 다니엘은 이스라엘이 바벨론이라는 세속문화 안에 있는 전기간 동안

영향을 미쳤다는 말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세상 속에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하나님께서 기대하시는 바일 것입니다.


이 땅에 다시 하나님의 나라가 회복될 때까지

우리 그리스도인은 세상 속에서 영향력을 발휘하고

하나님 나라를 확장해가야 할 것입니다.


이 일의 시작은 다니엘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가 세상 안에서 믿음의 선을 긋는 일로부터 시작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