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의 학교 통과하기 눅1:5~16, 약1:4 07.10.28.설교일부녹취
◑1. 하나님이 오래 동안, 아무 응답이 없으실 때가 있는데,
그건 <기다림의 훈련과정>이다.
우리 삶 가운데 주님이 ‘기다리라’는 싸인을 주실 때가 있다.
주님이.. 가라/가지 말라, Yes/No .. 둘 중에 한 가지 응답을 주셔야 하는데..
오래도록 아무런 응답을 주시지 않을 때가 있다. 묵묵부답이시다.
그것은 보통의 경우 ‘기다리라’는 싸인이다.
그 (기다림의) 때에, 우리가 잘 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은, 그때 그 고비를 못 넘긴다. 자기 마음이 막 안절부절 한다.
그래서 기다리지 못하고,
자기 방식대로 일을 처리해 버린다.
결국은 실패하게 된다.
믿음에 있어서는 기다림에 대한 것은,
우리 신앙생활에 있어서 아주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우리 기도의 응답에 대해서.. 기다림을 배워야 한다.
-우리의 영적 성숙과 성장을 위해서도.. 기다림을 훈련받아야 한다.
-주님이 내게 주신 소명과 비전을 이루기 위해서도..
기다리라고 하실 때.. 인내하며 기다리는 능력.. 이것은 너무 중요하다.
내가 기도하는데도 불구하고, 그게 주님이 비전을 보여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즉 주님의 뜻이 분명한 데도.. 문이 열리지 않을 때가 있다.
주님의 뜻이긴 하지만, 아직 때가 아닌 것이다.
그럴 때는, 기다리는 순간을 잘 넘겨야 한다.
믿음으로 이런 사실을 깨닫고.. 자신을 훈련하시기 바란다.
기다림의 훈련을.. 할 수 있어야 한다.
◑2. <기다림의 학교>
마치 대학에 필수과정과 선택과정이 있듯이,
주님이 우리를 훈련시키실 때, 필수과정이 있는데,
그 중 하나는 <기다림의 학교>이다.
주님 앞에서 기다리는 것.. 그것을 배우지 못하면,
결코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숙하지 못한다.
주님께서, 어느 시기가 되면..
이 <기다림의 학교> 과정에
우리를 강권적으로 집어넣으신다.
그래서 이 과정을 이수하고, 통과하게 하신다.
많은 사람들이, 은혜를 받고 성령을 받아서, 주님의 일을 하는데,
자기 방식으로, 자기 스타일로, 자기가 원하는 때에 한다.
그 주도권, Initiative가 자기에게 있는 것이다.
그건 주님의 일을 한다는 명분으로.. 결국 자기 일을 하는 것이다.
목회를 하든지, 선교를 하든지, 사역을 하든지, 봉사를 하든지..
사람들이 열심히 하고, 심지어는 자기 집을 팔아서 하더라도..
기다리지 못하는 사람은..
그 주도권, Initiative가 자기에게 있는 것이다.
그건 주님의 일을 한다는 명분으로.. 결국 자기 일을 하는 것이다.
일을 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은.. 일을 안 하고 기다리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훈련할 줄 알아야 한다.
일례로,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850명을 물리친 것은.. 하나님의 사역이었지만,
그릿 시냇가에서 가만히 지내는 것도.. 똑같이 하나님이 주신 사역이었다. 왕상17:3
그래서 <기다림의 학교>를 통과하는 것이 중요하다.
내 마음에 강력한 응답이 없으면.. 그냥 죽치고 기다리는 것이다.
이 과정을 통과하지 않으면
주님이 주신 사명, 기도의 응답, 영적성숙이.. 내게 일어나지 않는다.
아래에서 살펴보겠지만, 사울 왕처럼, 제멋대로 일을 처리해 버린다.
그리고 하나님께 버림 받는다. 기다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쳇바퀴 도는 것처럼,
어떤 사람A는.. 순간은 열심히 하는데, 계속 쳇바퀴 도는 사람이 있다.
그 중에 결정적인 이유가.. 주님 앞에서 기다리는 것을 통과하지 못해서 그렇다.
반면에 어떤 사람 B를 보면.. 과정에 어려움이 계속 있지만,
그 어려움들을 타고 넘어가면서.. 주님 앞에서 계속 성장 발전한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는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다.
<기다림의 학교>를 통과한 사람이다.
그래서 마냥 기다리니까.. 뒤처지고, 더디게 가는 것 같은데..
아니다. 그는 계속 성장하고, 발전한다. 거의 실패하지 않기 때문이다.
◑3. 기다림의 한계점을 통과한 사가랴와 엘리사벳
여러분, <기다림의 학교>를 통과하기 어려운 것은
나의 인내의 한계를 넘어야 하기 때문이다.
보통 사람들은.. 자기가 정한 ‘자기 한계’가 있다.
그 한계 시간까지.. 주님이 응답해 주시면 좋은데.. 보통 주님은 아주 더디게 응답하신다.
그러면 사람들은.. 한 번 ‘연장 시간’을 정한다.
그 연장 시간 안에는, 주님이 반드시 응답해 주시기를 바라지만..
마치 주님이 자기를 배신한 것처럼 느껴진다. 여전히 주님은 냉담하시니까..
그래서 <기다림의 학교>를 통과하는 것이란,
아예 ‘자기 한계 시간’ 이런 것이 없어질 때야.. 비로소 통과, 합격하게 된다.
‘자기 한계’.. 이런 것이 없어지는 이유는, 그래서 그 과정을 통과하게 되는 이유는
그 ‘자기 한계’에 대해 너무 좌절했기 때문이다. 한 번도 그대로 안 되니까!
그런데 나중에 돌이켜 보면.. ‘역시 주님이 옳으셨다’는 것이다.
본문의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의인이요, 흠이 없는 사람이라고 했다.
눅1:6 이 두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인이니,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하더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다’고 했는데.. 약5:16, 벧전3;12
왜 주님께서는 오래 동안 믿음으로 간구했던 부부의 기도에
빨리 응답 안 해 주셨을까? 왜 주님께서 기다리게 하실까?
다른 사람(명목상 신자)의 기도는 더디게 응답 되는 것이 정상이라도,
의인이요, 흠 없는 이들 부부의 기도는.. 신속히 응답되어야 정상일 것 같은데..
왜 하나님은 지지부진.. 계속.. 그야말로 ‘한계점을 넘게’ 하실까?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어, 최상의 것을 주기 원하시기 때문이다.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그저 자녀를 달라고 기도했다.
그냥 자기 가문을 이을 보통 자녀, 남들 가정과 똑같은 자녀를 달라고 기도했다.
그래서 만약 쉽게 임신이 되었다면, ‘하나님 응답받아서 감사! 할렐루야!’ 했을 것이다.
그런데 주님은, 그냥 자녀가 아니었다. 남들 집과 같은 보통 아이가 아니었다.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이요, 많은 사람도 그의 태어남을 기뻐하리니..
이는 그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독한 술을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그들의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하겠음이라... 눅1:13~16
주님은, 그 가정에, 정말 큰일을 맡길만한.. 큰 자를 보내 주기 원하셨다.
그래서 그 의롭고 경건한 부부의 기도가.. 계속 지연된 것이다.
더 기도하라고! 또한 주님의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해서!
우리는.. ‘주님, 요것만 해결해 주세요!’
그런데 정말 주님의 사명자인 경우.. 그 기도는 묵묵부답.. 쉽게 응답 안 된다.
왜냐하면, 주님은 더 큰 것을, 최상의 것을 주시기 원하신다.
그래서 응답이.. 주님의 때까지.. 더디고 더딘 것이다. 사가랴와 엘리사벳처럼!
주님의 계획은
하나님의 사람, 사가랴와 엘리사벳을 통해서
예수님의 오실 길을 예비하는, 그런 놀라운 아이를 잉태, 출산하는 것이었다.
그런 정말 꼭 필요한 사람, 너무나 귀한 최상의 사람,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이보다 큰 사람이 없다’고 말할 정도로,
최상의 사람(세례요한)을 자녀로 보내주기 원하셨다. 그래서 오래 기다리게 하신 것이다.
우리는 종종 차선책만 따르려고 한다.
‘주님 요렇게요, 요것만 이뤄 주세요!’
‘아니다. 나는 너를 위한 더 큰 계획이 있다.’
‘주님 이 길만 열어주시고, 이 문제만 해결해 주세요!’
‘아니다. 나는 너를 위한 더 크고 놀라운 계획이 있단다.
그러니 내 때와 내 시간까지.. 너는 좀 인내해야 되겠다...’
<기다림의 학교>를 통과한 사람은,
주님의 때까지 기다려서.. 주님이 원하시는 사역을 이뤄내는 도구로 쓰임 받는다.
그렇게 통과하려면,
주님의 의도를, 주님의 계획을 이해해야 한다.
그런데 그 의도, 그 계획을.. 주님이 명확히 가르쳐 주셔도.. 우리가 깨닫지 못할 때가 많다.
아브라함에게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다의 모래 같이..’ 말씀하셨어도..
아브라함에게 갈등이 적지 않았다. 주님의 계획을, 당시에는, 온전히 깨닫기가 쉽지 않았다.
너무 현실은 정 반대니까... 그리고 주님의 크신 계획을, 인간의 머리로 다 이해하기 힘들다.
어쨌든 무작정 주님을 신뢰하는 것이다.
그리고 버티기로 나가는 것이다.
우리는 기도할 때.. 내가 원하는 때가 있다.
‘주님 이때까지 이루어 주세요, 주님 내 돈이, 내 길이 열리는 것이
꼭 이때까지 이루어 주세요.’
그런데 내 삶의 결정적인 것은, 대부분 내가 원하는 때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나를 기다리게 하신다.
<나의 한계>의 때까지 기다리게 하시고,
그 때를 훌쩍 넘어서.. 거의 포기할 때까지.. 계속 기다리게 하신다.
이때 믿음의 사람은.. 결코 실망하지 않는다.
특히 믿음의 단련을 받아서.. 경험 있는 사람들은 잘 버틴다.
그런데 대부분 사람들은 언제 무너지는가 하면,
자기가 버틸 수 있는 최대한까지 응답이 오지 않자, 사울처럼 무너지는데..
자기는 어쩔 수없이 그렇게 무너졌다고 변명하지만..
기다림에서 실패한 것이다.
‘주님 제가 기다릴 만큼 기다렸잖아요.
기도도 할 만큼 했잖아요.
세상적인 방법으로 돌아가지 않으려고 나름 애썼잖아요.
그런데 주님이 그때 응답하지 않으셨잖아요..’
이렇게 하소연 하더라도
결국은 다람쥐 쳇바퀴 도는 인생이 되고마는 것이다.
◑4. 기다림의 ‘자기 한계’를 극복 못한 사울 왕
여러분 사울 왕을 보시라. 삼상13장에, 블레셋과 전쟁에서,
만약 우리가 사울이라면, 내가 그 상황에 처했더라면,
우리도 십중팔구 사울처럼 행했을 것이다.
지금 촉각을 다투는 전쟁 대치 상황이다.
(전투에 앞서) 빨리 제사를 지내고, 백성들을 일치단결시켜야 할 상황이었다.
그런데 사무엘이 오지 않고 지체했다.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았다.
적들은 믹마스까지 점점 더 다가오고 있다.
그러자 사울은.. 무너졌다.
그는 기다림에 실패했던 것이다.
자기가 해서는 안 되는 제사를.. 서둘러 직접 집례하고 말았다.
이때 사무엘이 와서, 사울 왕을 책망했다.
그러자 사울은 항변한다.
‘당신은 정한 날에 오지 않고, 백성은 나에게서 흩어지나이다’ 삼상13:11
자기가 제사를 집례할 수밖에 없었던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주님의 뜻을 이루고, 이 기다림의 학교를 통과할 때,
외적인, 내적인 압력들이 우리를 넘어지게 한다.
외적인, 내적인 어려움들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내 경험, 내 방법, 예전에 내가 취했던 방법들로 자꾸 돌아가게 만든다.
부득이하여 그럴 수밖에 없게 만든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진노하시는 이유는 (사울을 정상 참작 해 주셔야 될 것 같은데)
'전쟁(사역, 목회, 선교)의 주도권/주권이 누구에게 있느냐?'
는 것이다.
사울에게 '전쟁의 주도권'은 자기에게 있었다.
그래서 기다리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이건 단순히 '기다림의 문제'가 아니라, 더 깊이 들어가보면,
하나님께 '주권'을 내어드리고, 맡기느냐/ 못 맡기느냐.. 그 믿음의 문제
이다.
기다림의 학교는 쉽지 않다. 어렵다.
그 부르심의 수준이 높으면 높을수록, 내적인, 외적인 압력이 굉장히 힘들다.
자연스럽게 포기하는 것이 맞는 것처럼 보인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주신 비전을.. 세상적인 방법으로 이루려 한다.
기다리지 못해서 그렇다. 그것은 성공 같지만.. 결국 실패이다.
내가 기업/사역단체를 세워서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데, 그 방법을 보면 세상 방식으로 한다.
그건 기다림의 학교를 통과한 것이 아니다. 그건 사울의 방식이다.
그가 십일조를 얼마를 드렸건.. 그가 하나님의 방법으로 세우지 않은 모든 일들,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는 것은.. 사울적이며, 자기 야망에 불과하다.
목적도 중요하지만, 방법도 하나님의 방법으로 이루어야 한다.
일이 쉽게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기다려야 한다.
이 기다림을 학교를 통과하는 것이 어렵다.
왜냐하면 즉시 응답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 삶의 결정적 훈련의 과정이 있다. 그것은 쉽게 안 이루어진다.
오랜 세월의 기다림 끝에 이루어진다.
우리가 보는 것은.. 그 일이 빨리, 쉽게 성취되는 것을 보기 원하지만,
주님은 다른 것을 보고 계신다.
그 성취 이면에 있는 주님의 계획들이 있기 때문이다. 즉 '나의 성숙' 때문이다.
우리 인생에, 우리 비전에,
우리 부르심에 결정적인 것을 이루는.. 기도의 응답들과 성취의 과정들은
절대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아주 느리게 이루어진다. 그래서 어렵다.
(결과도 중요하지만, 나의 영적 성숙의 과정 때문이다.)
▶다윗은 17세에 기름부음 받았는데, 왕이 될 거라고 기름부음 받았는데,
즉시 되지 않았다. 주님이 어떤 약속을 주시고 나서, 그게 즉시 이루어지지 않는다.
다윗은 13년의 고통을 허락하셨다.
사명이 크니까, 세게 훈련을 받았던 것이다.
이 기다림의 학교의 최고 과정을 맛보게 하셨다. 왕이 자기를 죽이려 했으니까..
그 <기다림의 학교>를 통과하는 과정에서
그가 만난 사람들 가운데, 좋은 사람들도 있었지만,
정말 악독한 사람들도 있어서, 그들 때문에 말 못할 고난을 당하기도 했다.
그런데 다윗은 잘 기다렸다. 중간중간에 외적, 내적 압력이 있었지만, 잘 기다렸다.
외적 압력은 사울이 쫓아오는 것이고
내적 압력은 다윗보고 이대로 있지 말고,
두 번이나 자기가 자기 스스로 하나님이 주신 꿈을 성취할 수 있는 자리에 이르지만,
즉, 스스로 사울을 죽일 수 있는 자리에 이르지만,
여러분 <기다림의 학교>에 절정은,
하나님이 보여 주신 일을 하나님의 방법으로 이루어질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다.
다윗은.. 하나님의 방법으로 이루어질 때까지.. 훌륭하게 기다렸다.
사울처럼 똑같이 대항해서 싸우지 않았다.
약1:4,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