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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판이 바뀌다

LNCK 2011. 11. 28. 22:17

 

◈표지판이 바뀌다          마12:38~42             출처보기


마12:38 그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주시기를 원하나이다.


3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여기서 말하는 표적이라는 것은 ‘싸인보드’라는 말입니다,

고속도로에 보면 <대전 100 Km> 이런 싸인보드가 세워져 있죠?

(이 길로 100Km 가면 대전 나옵니다)


그렇게 ‘뭔가를 앞서 미리 알려주는 간판’이라는 말이에요.

예수님이 병자를 고치시는 등 모든 기적(표적)은,

그 기적 자체에 의미가 있다기 보다는,

뭔가를 미리 알려주는 표지판(표적) 역할을 한다는 겁니다.


즉, 예수님의 기적은, 천국을 알려주는 표지판 역할을 합니다.


그러므로 서기관과 바리새인이

‘기적을, 표적을 보여달라’는 것은,

‘당신의 정체가 무엇인지.. 그 기적(표적)을 통해서 보여달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자기들이 그 ‘싸인보드’를 보면서,

예수님이 누구신지 파악하겠다는 거지요.

 

그런데 이게 이해가 안 됩니다.

본문 바로 앞에서, 눈이 멀고 귀가 먹은 사람을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고 낫게 해주십니다.


그때 바리새인들의 ‘바알세불의 힘을 빌어서 귀신을 쫓아낸다’는 비난에 대해서

예수님은 ‘내가 성령을 힘입어 쫓아내는 것이면

너희 가운데 이미 천국이 임한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12:28


그러므로 '예수님 안에 천국이 들어와 있다'고 하는 싸인이

바로 직전에 보여 졌어요,

그 외에도 수백~ 수천 건의 표적이 이미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왜 새삼스럽게 표적을 구하느냐 이겁니다. 그게 이해가 안 돼요.

-보고도 못 믿는 것이지요.

  아니, 아예 애당초 믿을 마음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진짜 하나님나라를 가져 온 자라면, 그 표적(싸인)을 보여 달라’

고 요구하지만,

사실은 ‘뻔히 보면서도 못 믿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은 천국을 향해 가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향해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천국 백성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표적을 보고도.. 못 믿는 것입니다.


고속도로를 달릴 때 부산이 300Km 라는 싸인보드(안내표지판)가 있습니다.

그 싸인을 왜 봅니까?

부산을 향해 가고 있기 때문에.. 그걸 쳐다보는 게 필요한 거예요.


지금 여수를 가고 있습니다.

여수가 250Km 남아있다는 이 싸인보드가, 왜 내 눈에 들어오는 겁니까?

지금 내가 여수를 향해 가고 있기 때문에.. 보는 겁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모든 표적들은 ‘천국을 보여주기 위한 것’인데,

‘천국’을 향해 가고 있지 않는 사람은,

그게 자기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꾸 ‘뭔가 새로운 것 보여달라’고 예수님께 요구한 것입니다.


여러분, <시크릿 가든>이라는 드라마 기억나시죠?

그런데 그 흔해 빠진 ‘신데렐라 스토리’에 SF(공상과학적) 요소를 집어넣었어요.


이 드라마의 특색을 결정짓는 ‘시크릿 가든’이 출현하게 되는 과정이

표지판이 바뀌면서부터 일어납니다.


주인공들이 제주도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산악 자전거’로 바이킹biking을 하게 되는데

높은 언덕에서 길게 험한 산길을 타고 내려가서

바닷가의 등대까지 가는 시합을 하게 됩니다.


남자 둘과, 여자 한 사람이 시합을 하는데,

첫째 남자가 지나가고, 두 번째 남자가 지나가면서

‘해변 길을 가리키는 팻말’을 어깨로 툭 치고 가는 바람에

그 팻말이 다른 쪽 길로 향하게 됩니다.


그런데 뒤늦게 쫓아오던 여자주인공이 그 바뀐 팻말을 보고

(해변 길이 아니라 방향이 바뀐) 숲속 길로 들어가면서 길을 잃게 되고,

여기서 남자 주인공이, 이 여자를 찾아 나서서

둘이서 ‘시크릿 가든’으로 들어가게 된다는 얘기에요.


어깨로 툭 친 바람에 안내표지판의 방향이 바뀌어버렸어요,

그 결과, 전혀 엉뚱한 곳으로 가버리게 된다는 겁니다.


분명히 이것은 등대, 해변으로 가는 방향을 나타내는 표지판이었는데

그 간판을 툭 치면서

등대가 아닌 전혀 다른 쪽으로 가는 표지판으로 바뀌어버리게 되었다는 거예요.

(드라마 '시크릿 가든'이 아니더라도, 영화에 이런 장면이 종종 나오지요?)
 

지금 우리 기독교가, 언제부턴가 표지판의 방향이 바뀌어 버렸습니다.

원래 기독교는 ‘천국’방향을 향해 가는데,

누군가 표지판을 툭 치고 지나가서, 표지판의 방향이 바뀌어져서


이제 오늘날 기독교 신앙에 입문한 신자들은,

그 표지판이 가리키는 방향에 따라서

‘천국’이 아니라 ‘세상’쪽으로 우르르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들은 지금 천국으로 가고 있는 줄 알고 있습니다.

표지판 방향이, 실수로 바뀌어 버렸다는 것을, 까마득하게 모르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너무 ‘현세적’이라서    (예수님은 ‘천국’복음을 가져오셨는데)

이 상태에서는 성경을 보면서

어떠한 예수님의 기적을 대하더라도.. 전부 표지판을 바꿔버리게 됩니다.


예수님이 앉은뱅이를 낫게 하시고, 시각장애인을 보게 하시고,

귀머거리를 듣게 하신 이 모든 궁극적인 이유가

(당사자들이 불쌍해서이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 성경에 기록되게 하신 이유가

그 기적이라는 표지판을 통해서

우리 마음이 이 세상에 대한 관심을 떠나,

전부 천국으로 가고 싶어서 안달이 나게 하시려고 행하신 기적들인데,


그 표적들을 보면서 다들 어떻게 바꿔버리느냐 하면

그 기적이 ‘이 세상현실에서 더 나은 형편’으로 나가는

표지판(세메이온, 표적)으로 다 바뀌어버린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아무리 예수님이 기적을 많이 보여주셔도

즉, 아무리 성경을 많이 읽고, 가르치고, 배워도,

하나도 표적(표지판)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걸 전부 ‘현세적 성공’에 관한 메시지로 이해해 버리니까요!


그래서 일부 교회에서 자주 가르치는 게 ‘비전’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비전.

 

그러니까 교회가 이 지구 위에 예수님께서 갖고 오신 천국을 드러내야 될 교회가,

 

지금 사람들의 마음을 천국으로 가게끔 만들어야 될 교회가,

 

그 천국을 모두 종결시켜버리고   (마치 천국-터미네이터처럼)    *터미네이터: 종결자

중간에서 전부 방향을 어디로 바꿔버립니까?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을 ‘이 땅 위에서 현세적 축복을 얻기 위해서다’

이렇게 현세적 축복에 핵심적인 액센트를 주고 있습니다.


병이 낫고, 사업이 형통하며, 부하게 살게 될 것이라는 것에

복음의 액센트가 들어있다는 거예요.


‘천국은 죽은 다음에 가는 것이고, 죽기 전에 우리가 이루어야 될 것은

이 땅에서 잘사는 것이다!’


물론 그런 ‘세상 축복’도 구약성경에 나옵니다만   구약은 신약복음을 설명하기 위한 배경입니다.

성경은 ‘세상에서 유복하게 사는 것’이.. 그 주제가 아닙니다. 부수효과는 됩니다.


유복하든지/비천하든지

복음이 강조하는 것은 ‘천국 생활(주님의 임재, 교제)’이며, 장래에 ‘천국에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초대교회 때 순교한 사람들은 잘못 믿었습니까?

250년을 카타콤에 들어가 사람들은 뭡니까?

12사도와 사도바울이 모두 순교했다는 것은, 또 뭡니까?


교회가 지금 복음을 오해하고 있습니다.

복음의 주제인 천국

모든 표적(표지판)이 지향하는(가리키는) 천국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에서 완전히 말살시키고 있는 거예요.


천국을 향하는’ 표지판을 ‘세상을 향하는’ 방향으로, 바꿔놓아 버린 겁니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표적들마저도,

‘세상을 향하는’ 방향으로 바꿔놓고 있습니다.


일례로 <앉은뱅이가 나은 표적>를 어떻게 설교하고 있습니까?

‘그러므로 이 땅에서 안 되는 일이 없다’ 이렇게 해석해 버리는 거예요.


이 기적을 <천국 복음 관점>에서 해석해 내고, 적용해야 하는 것입니다.

무슨 ‘세상 문제 해결’ 관점과 적용이 아니라요.


여러분, 기독교는 지상에 천국을 주려는 종교가 아닙니다.

 

물론 ‘현재 천국’이란 말은 맞지만, 이것은 주님의 통치/임재/교제를 가리킵니다.

‘(물리적) 지상 낙원’이란 뜻은 아닙니다.


지상의 어떤 좋은 상황보다도

하나님 아버지가 계시고

예수님이 승천해 계시는 그곳이 더 좋다고 생각해서

이 지상을 떠나 천국으로 마음을 보내게 하려고

주님께서 오셔서 천국의 싸인을 드러내신 겁니다.


내 마음에 천국을 갖는 것이지, 나에게 주님의 다스림이 임하는 것이지,

지상에 (물리적) 천국을 이루는 것이 아니에요.


어쩌면 (일부) 교회가 바로

그러한 천국 복음을

신자들의 마음과 관심의 영역에서 말살시키고 있는

반복음적 역할을 지금 아주 충실히 해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관점이 너무 현세적으로 기울어질 때, 그렇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기적을 대할 때.. 천국을 가고 싶다고 느끼고,

예수님 안에 들어와 있는 그 천국(임재/통치/교제)을

나도 내 안에 모셔야겠다고 생각하지 않고,

 

그 기적을 행할 능력이면, 내가 그 도움 받아서 

이 지상에서 나의 미래를 지상천국으로 만들어갈 수 있지 않겠는가?


이렇게 완전히 마귀의 종노릇하는 상태로

자기 스스로 신앙인이라 자처하며 살아간다는 것이에요.

 

(이런 현세적 관점의 사람들을 향해서, 예수님은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고 평하셨습니다. 마12:39

 음란하다는 것은.. 하나님을, 세상 우상과 바꿔버렸거나, 동시에 섬긴다는 뜻이지요. 약4:4참조)


※지금 마태복음을 3장부터 계속해서 <천국>이란 주제로 해석해 나가고 있습니다.

  매우 흥미롭습니다.

 

...................................


▶(펀 글) 집에서 잠깐 기도하는데, 주님께서 이런 내적 음성을 주셨습니다.

‘나의 자녀들이 회복되기 원한다. 나를 바라보게 하라!’


‘네 설교를 통해서, 성도들이, 나를 바라보도록 노력하라.’

주님께 마음을 드리라는 것입니다.

설교를 들어도, 주님께 마음과 시선이 가지 않는 경우가, 너무 많으니까요!

 

‘여기에 참 회복이 있기 위해서, 청년들의 회복이 있어야 되는데,

그걸 너무나 주님이 원하시는데,

그러기위해서는 청년들의 영적인 눈이

나를 바라볼 수 있도록 설교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유창한 말이 필요 없습니다. 제 마음이 먼저 주님을 바라보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주님, 저부터 주님을 바라보게 해주세요..’

(주님을 바라볼 때, 하나님의 나라가 내게 임합니다.)


 

▶(펀 글) 유명한 수도사가 온다는 말에

사람들이 구름 떼처럼 몰려들어

수도원은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가득 찼습니다.


마침내 수도사가 와서 자리를 잡았는데

밤이 되도록 아무런 강론이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그것도 가르침 중의 하나라고 생각하고

수도사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오기만을 참고 기다렸습니다.


밤이 되고 달이 뜨자

수도사는 아무 말 없이, 그저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켰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달을 쳐다보지 않고

수도사가 가리키는 손가락을 바라봤습니다.


인간은 쉽사리 이런 어리석음을 범합니다.

어느 유명한 설교자가 오면, 구름같이 몰려들지만,


정작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께 집중하지 않고

그 사람의 말에 빠져 있습니다.


저는 종종 반성을 합니다.

강론이나 강의를 열심히 준비하는 것이.. 과연 무엇을 위한 것인지.

내가 칭송 받기 위한 것인가,

그저 청중들에게 한때 용기와 격려를 주기 위한 것인가?


아니면 진정 하나님을 찬미하게 하기 위한 것인가?

진정 하나님을 바라보게(생각하고, 경배하고, 음성 듣고, 알아가게)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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