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 예수님의 예표 창15:5~6, 롬1:17 11.03.27.설교일부녹취 Ro#22. 12'~22'
기독교 신앙은, 머리로 뭘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지금까지 머리로 뭘 믿는 '개념'적 측면에서 접근해 왔다면,
앞으로는 (친밀한) 관계적 측면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믿음은.. 친밀한 관계입니다.
◑아브라함의 번성의 의미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생육과 번성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주시는 장면이 나온다.
의로우신 하나님에 의해, 의가 어떤 이(아브라함)에게 주어지는 장면이다.
창15:5,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6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자손의 생육과 번성의 개념이 나온다.
하나님으로부터 아브라함에게 약속이 주어지는데,
하늘의 별과 같은 생육과 번성의 약속이 주어진다.
‘네 자손이 이렇게 생육하고 번성할거야’ 하면서 하늘의 별을 보여주신다.
생육과 번성은 단순히 애를 낳고,
그것이 사람이 많아지고 하는 그런 차원을 훨씬 뛰어 넘는다.
하나님의 자손에게 필연적으로 일어나야 할 생육과 번성은,
그 자손이 상징하고 있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번성’이었다.
갈3:16에 ‘그 자손은 여럿이 아니라, 예수 한 사람 가리킨다’고 했다.
갈3:16,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그 생육과 번성은, 예수에게서 가장 먼저 일어나야할 것이었다.
단순히 자손의 숫자가 많아지는 것이기 이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 즉 구원받는 백성의 생육과 번성’이었다.
원래 첫 번째 아담에게 생육과 번성의 명령이 주어졌다.
그는 실패하고, 마지막 아담이 그 생육하고 번성을 성공해 낸다.
그런 과정에서 아브라함 시대에는, 아브라함이
두 번째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으로서
‘생육과 번성’의 언약을.. 자신의 삶을 통해 이뤄내고 있는 것이다.
그 생육과 번성이 어떻게 성공되어졌는가?
그 주인공, 열매가 교회(하나님의 자녀들)이다.
그 교회가 어떻게 생육하고 번성되었는가?
예수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이었다.
그러니까 하나님 자손의 생육과 번성의 전제는,
그가 죽는 것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에서, 이삭을 바친다.
모리아 산은, 나중에 골고다 언덕이다.
▲아브라함의 죽음을 통한 생육과 번성
아브라함의 자손, 그 자손을 생육하고 번성시키겠다는 것은,
먼저 ‘나는 너를 죽이겠다’는 뜻이다.
‘나는 널 죽여서, 의인 만들어서, 너로부터 내 백성을 생육, 번성 시킬거야!’
이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이게 성경의 전체적 원리니까!
지금 아브라함은, 예수님의 대역을 하고 있는 중이다.
(예수님께서 복의 근원이 되시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신다.
그게 마지막 아담으로 오신, 예수님의 생육과 번성이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에서 백세 낳은 아들의 심장에 칼을 들이댄다.
자신의 육적 자아의 죽음과 동시에, 한 편으로 자신이 죽는 것이었다.
예수님의 죽음의 예표였다.
그전 까지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언약 성취의 과정에서 계속 참견을 했다.
‘하나님, 내가 죽으면 안 되니까, 내 마누라를 팔아서라도 내가 살께요.
왜냐하면 저를 통해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되어야 하니까요,
내 후손이 하늘의 별처럼 많아져야 하니까, 제가 도와드릴게요,
제가 죽으면 안 되니까요!’ 하면서
마누라를 자기 대신 팔아먹은 것이다. 죽게 내몬 것이다.
그건 아브라함의 인간적인 희생이었다.
그렇게 참견하고 나섰다가 아내를 2번이나 팔아먹었다.
거기에다 이스마엘까지 낳기도 한다. 자기가 뭔가 언약성취를 도우려고 한다.
(그러다가 아브라함이 성숙한 후에, 아브라함은 이제 '죽는 편'을 택한다.)
그런데 모리아 산에서는 이삭이 죽으면,
백세에 겨우 낳으면 애가 죽으면 이제 언약 성취가 안 되는데도 불구하고
그 아이를 죽인다는 것은,
‘아~ 이 언약은 하나님이 성취하시겠구나!’ 이걸 믿음이라 그런다.
이게 육적 자아의 죽음이고, 자기 부인이다.
그래서 모리아 산에서 아브라함이 죽는다. (이삭의 번제물 바침을 통해)
거기서 그렇게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죽여냄으로 말미암아
그가 복의 근원이 되고, 그가 예수, 의로운 자의 모형이 되어서
거기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생육하고 번성된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의를 선물로 받은 의인들은,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육적 자아의 죽음을 경험한 것처럼,
자기 육적 자아가 죽는 것이다.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그런 지향성으로 끌려간다.
성도들이 절대로 잘난 척 못하도록 하신다.
그러니까 믿음과 함께 그 동전의 앞과 뒤처럼 꼭 붙어있어야 하는 것이
바로 자기죽음/자기부인/자기 십자가이다. ‘내가 죽어야, 생육하고 번성하는구나!’
▲‘하나님의 의’가 드러나 있다. - 즉, 하나님 편에서 의무를 다 하시다.
자 그러한 자기 부인, 그게 생육과 번성의 필연적 전제이다.
그러니까 지금 하나님은
복의 근원으로
즉, 이 땅에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으로 살고 있는 아브라함에게
‘난 널 죽여서 너의 죽음에서 비롯되는 그 하늘의 복을,
내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어서, 그들을 생육시키고 번성시킬 것이다.’ 라는
언약성취의 확약을 하고 계신다.
‘내가 그 생육과 번성의 언약을 반드시 이루어내고 말거야!’
그렇게 하나님의 언약이, 하나님에 의해 성취되는 것,
하나님은 그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 속에서,
당신의 약속은 반드시 지켜내는 그걸 의라고 한다.
그게 의이다. (justice, righteousness를 더 자세히 설명하면, 실제로는 이런 개념이다.)
관계가 요구하는 그 의무를 성실하게 완벽하게 수행해내는 그 상태가 의이다.
그러니까 지금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의를 행하고 계신다.
즉, 하나님 편에서, 관계적 의무를 충실히 수행하고 계시는 것이다.
(인간 편에서 아브라함은,
그걸 믿었고, 또한 독자 이삭을 드리는 것으로
자기 관계적 의무를 충실히 이행했다.)
‘난 너를 죽여서, 역사 속에서 이 아담 안에 들어있는 널 죽여서,
반드시 널 내 백성으로 만들어내고 말거야!’ 하는 약속을 하셨고,
하나님 편에서, 그 언약적 의무를 충실히 수행하셨다.
그게 하나님의 의다.
아브라함은 ‘네 맞습니다.
제가 거기에 뭘 보태겠어요? 맞습니다. 하나님이 다 하실 겁니다.’
이렇게 받아들이는 거 하나님의 의를 그냥 몽땅 받아들이는 거
그래서 실제로 독자 이삭을 드리기까지 했다.’
이것을 인간(아브라함)의 의라고 한다. 그게 의인이다.
※적어도 우리가 ‘창세기 아브라함의 하늘의 별과 같은 <생육과 번성>을 말하고,
<모리아 산>에서 이삭을 바친 것을 거론할 때,
‘그래서 부자 되었다. 영토가 확장되었다. 자녀가 많아져서 거부巨富되었다’
이런 관점으로 거론하는 것은.. 성경을 완전히 거꾸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복음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다른 복음’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의’란 무엇인가?
▲‘의’라고 번역된 헬라어 ‘디카이오수네’는 *히브리어 ‘차다크’
그 단어를 영어 성경은 justice(정의) 혹은 righteousness(의, 옳음) 이라고 번역하는 바람에
우리 개역도 그런 의미에 따라서 ‘의’라고 번역했는데,
사실 그런 개념은, 헬라 철학의 영향 아래 있던 서방의 성경번역가들에 의해서
그 개념의 진의가 약간 잘못 전해져 내려왔을 수도 있다.
이 ‘의’라는 단어 ‘디카이오수네’는
헬라 철학자인 플라톤은 이 단어를 ‘justice(정의)’란 뜻으로 잘 사용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덕스러움 virtue’ 이라는 뜻으로 잘 사용했기 때문에
성경에 쓰여진 ‘의’ 디카이오수네 가
마치 인간의 ‘정의’나 ‘덕스러움’ 또는 ‘올바름right’ 정도로 번역된 것인데..
단순히 justice나 righteousness가 아니다.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나 플라톤이 쓰던 의미이다.
그렇게 서방의 의의 개념은 rationale(근거, 레셔널)에 가깝지만,
동방의 의의 개념은 relation(관계)에 가깝다.
▲성경은 원래 헬라어를 쓰던 동방사람에 의해서 기록된 것이지,
헬라 즉 서방문화권에 의해 기록된 것이 아니다.
동방의 히브리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 ‘디카이오수네 (의)’라는 개념은
그러한 인간의 덕스러움과 선한 의지를 가리키지 않고, ‘관계’의 용어다.
관계를 맺고 있는 두 대상이
그 관계가 요구하는 의무를 성실하게 수행해내는 아름다운 상태가
‘디카이오수네’이다.
본문 롬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있다’는 것은
‘복음에는, 하나님이 관계적 의무를 잘 감당하고 계신다.'는 뜻이 되겠다.
위에서 아브라함의 예를 살펴보았는데,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관계에 있어서, 그 언약적 의무를 잘 수행하고 계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의’이다.
아브라함은 그 ‘하나님의 의’를
믿음을 통해
수여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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