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램, 갈망 고전16:22, 벧전2:2 설교2편조합
◑무엇이 진정한 저주인가? 고전16:22 출처
사도바울은 고린도교회 사람들에게 편지를 마치며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고전16:22
이것은 아주 과격한 인사입니다.
오늘날 이렇게 인사를 하고 메시지를 전하는 사역자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 전혀 과격한 메시지가 아닙니다.
이것은 사실입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모든 저주가 오며, 실제적으로 저주 가운데 있는 것과 같습니다.
▶진정한 저주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주를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주를 향한 뜨거움이 없는 것입니다. 가난이 저주가 아닙니다.
질병이 저주가 아닙니다.
주를 향한 뜨거운 심장, 갈급한 마음, 눈물과 탄식이 사라진 것..
그것이 바로 저주의 상태입니다.
어떤 사람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그 사람은 도둑질을 했어요] 하면..
[나쁜 사람이구만] 할 것입니다.
[그 사람은 거짓말을 하고 욕심이 많아요] 하면.. [나쁜 사람이구만] 할 것입니다.
[그 사람은 강도질을 했고 간음을 했고 남을 때렸어요] 하면..
[나쁜 사람이구만]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주를 갈망하지 않아요] 하면..
[그건 그럴 수도 있지] 할 것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그건 저주받은 상태야!].. 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신자들의 보편적인 인식상태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말합니다.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을 지어다..’
그것은 바로 저주를 받은 상태입니다.
그리스도를 향해서 미치지 않으면,
가슴이 터지지 않으면,
그것은 병든 상태이며, 비극의 상태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돈이 없어서 걱정하고, 취업을 걱정하고
미래를 걱정하고, 질병을 걱정하고, 관계를 걱정하는 이들은 많지만,
자신의 비참한 영적상태,
영적 가련함에 대해서
가슴을 뜯으며 신음하는 이들은 찾기 어렵습니다.
목숨을 걸고 주를 구하는 이들은 찾기 어렵습니다.
이 시대가 보편적으로 병들었기 때문입니다.
주를 향하여 주리고 목마르지 않은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미치도록 사랑하십니다.
그분은 십자가에서 우리의 이름을 부르며,
외치고 절규하고 피를 쏟으며 돌아가셨습니다.
그분은, 지금도 그분의 마음을 보여주시고 가까이 다가오셔서
자기와 교제할 사람을 찾으십니다.
그분의 가슴은 지금도 짝사랑으로 갈급합니다.
그분은
‘나를 사랑하는 자에게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요14:21
그러나 오늘날 그분을 찾고, 그분께 굶주린 이들을 찾지 못하시므로
그분은 슬퍼하시며, 상한 심령으로 우리를 조용히 기다리십니다.
그분의 피에, 당신의 피로 대답하십시오.
그분의 절규에 당신의 절규로 대답하십시오.
교양 있게, 우아하게 기도하지 말고 당신의 진액을 토하십시오.
눈물과 통곡과 포효하는 탄식으로, 찢어지는 가슴으로, 그분을 구하십시오.
주를 찾으며 해산의 수고를 하십시오.
부디 그 뜨거운 가슴을 되찾으십시오.
세상의 성공과 남들이 알아주는 것과 편하게 사는 것..
그런 것들이 무슨 가치가 있습니까?
잠시 후면 썩어질 것들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오늘 날 많은 교회가, 많은 성도들이 눈물을 잃었습니다.
그리움을 잃었습니다.
영혼이 차갑게 병들고 감각이 마비되었습니다.
그래서 주님 안에서 누리는 그 희열과 영광의 세계에 대해서 모릅니다.
그리하여 세상의 영광을 추구하며 자아의 영광을 추구합니다.
이처럼 그리스도를 갈망하고 미치지 않는 이들은
자아의 영광을 구하며, 육욕과 세상의 욕망의 포로가 되어, 비참한 인생을 살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실패입니다.
주를 향한 미칠 것 같은 갈망이 식었다면,
눈물이 식었다면..
그것은 실패입니다.
잠을 자다가 깨어 주의 임재가 그리워
미칠 것 같아서 절규하며 그분을 찾아 헤맸던
술람미 여인의 심장을 우리는 가져야 합니다.
◑갈망은 바램과 다르다. 벧전2:2 08.09.28.설교일부녹취
수많은 신자들은, 변화되지 않는다.
예수 믿기 시작해서, 조금 자라다가, 영적 성장이 멈춰 버린다.
왜 변화가 멈추는가? 무엇이 문제인가?
그 속에, 자신은 주님을 갈망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갈망(갈급함)이 아니라,
‘그렇게 되기를 원합니다’ 하는 정도의 바램 밖에 없기 때문이다.
바램 갖고는 내 심령이 깊이 변하지 못한다.
여러분, 바램은 갈망과 다르다.
▶존비비어 목사님이 쓴 책 <거룩한 열정>에 보면,
한 미국 목사님의 간증이 거기에 실려 있다.
이분이 예수 믿고 나서, 여러 가지 죄를 다 끊었는데,
단 한 가지, 그분을 계속 괴롭히던 나쁜 습관이 있었는데,
목사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담배를 피우는 것이었다.
몰래 한 개비 피우는 게 아니라, 하루에 2갑씩 피워대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분은, 담배와 씨름하며 금식도 해보고, 온갖 일을 다 해보았다.
심지어는 성도들에게 기도부탁도 했다.
그런데도 2년이 지나도록 담배가 끊어지지 않았다.
‘이 죄짐은 내가 평생 짊어지고 가야돼나?’
어느 날 그 교회에 집회가 있었고,
한 불신자가 참석해서, 예수님을 영접하고, 자기에게 기도를 받았는데,
나중에 간증하는데, 그 분은 그날부터 담배를 딱 끊었다고 한다.
그런 간증을 듣자, 그 목회자는 속에서 분노가 일어났다.
‘하나님 이럴 수 있습니까? 주님, 목사는 차별하시는 겁니까?
저 사람은, 그날 처음 믿자마자, 담배가 끊어졌는데,
왜 저는 지난 2년 동안 금식하며, 담배를 끊으려고 그렇게 애를 썼는데,
왜 끊어지지 않았습니까, 무엇이 문제입니까?’
그때 그 목회자에게 성령의 내적 음성이 들렸다.
‘너는 아직도 그것(담배)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왜 변화되지 않은 줄 아느냐?
너는 그것을 끊기를 바랄 뿐이지, 진짜 끊어져야 되겠다고 하는 갈망이 없기 때문이다.’
라는 뜻이다.
담배를 끊겠다는 바램은 있었지만, 갈망은 없었다는 것이다.
그 음성이 자기를 때렸다.
그 목회자는 그 자리에서 회개했다.
‘제가 이것을 피기를 즐겨하면서도, 끊기를 바램 정도로 가졌던 것을 회개합니다.’
그 자리에서 담배가 끊어졌다고 한다.
▶여러분이 주님을 깊이 만나셨더라도, 영적 성숙이 없다면, 무엇이 문제일까?
여러분이 갈망인줄 알고 있는데, 사실은 바램 정도이다.
신앙생활하면서, 주님 뜻대로 살려고 하면서, 죄를 끊으려 하는데,
바램 정도 갖고 있으면서, 사실은 자기가 주님을 갈망하는 줄 알고 있다.
‘왜 나는 깊이 변화되지 않고,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을까?’
이런 바램은 있지만, 마음 속 깊은 곳에 갈망은 없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보통 이렇게 신앙생활 한다.
-안정된 삶을 좋아하고, (도전이나 모험은 피한다.)
-돈이 많아지는 것도 좋아하고,
-내가 좋아하는 취미생활도 그대로 하고, 취미를 무조건 죄라고 할 수는 없으니까
-사람의 인정받는 것도 좋아한다.
-그리고 주님 사랑하는 것은, 이것들보다 조금 더 좋아한다.
그러면서 자기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안다. 주님을 따르고 싶다고 한다.
세상 것을 다 좋아하면서, 다른 것들을 다 좋아하면서,
거기에 조금 더 강도를 보태서.. 자기가 주님을 제일 좋아한다고 말한다.
이건 갈망이 아니라, 바램 수준이다.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것, 안정된 삶, 내 욕심거리들.. 다 좋아하고,
그 상태에서 주님을 조금 더 좋아하는 것.. 그걸 갖고 ‘주님을 최고로 사랑한다’고 말한다.
자기가 스스로 그렇게 믿고 있다.
여러분 이것은 갈망이 아니라, 이것은 바램이다.
이것 갖고는 자기가 깊이 변화되지 않는다.
바램과 갈망의 차이는.. 둘은 강도가 틀린다. 그 소원의 정도가 틀린다.
바램 정도로 신앙생활하면, 아무리 오래 지나도.. 깊이 변화되지 않는다.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내가 주님을 더 사랑하는 것은 맞다.
그런데 세상 것들을 (특별히 죄가 아닌 것들, 취미생활 등을) 다 사랑하면서,
거기에 보태서 주님을 조금 더 사랑하는 것 갖고서
별로 자기 신앙의 영적 성숙이 일어나지 않는다.
여러분, 갈망이 뭔가 하면 바울이 갈망을 갖고 있었는데,
빌3:7~9절을 보시라.
주님을 아는 게 가장 고상한 것이다.
그러니까 다른 모든 것은, 다른 것 사랑하는 마음은 힘을 잃어버리고
배설물과 같이 여겨지고, 자기 안중에 없어진다.
여러분, 이것이 갈망이 주는 결과이다. 주님을 바램 정도가 아니라,
‘남들보다 조금 더 바램 있는 것을 가지고, 내가 주님을 갈망한다’고 믿지 마시라.
‘다른 신앙인보다 내가 주님을 조금 더 찾는 것을 가지고
내가 주님을 갈망한다’고 여기지 마시라. 그건 바램이다.
아니다. 진짜 갈망이 들어오면,
바울이 고백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가장 고상해서,
다른 것들을 (죄가 아니지만) 배설물같이,
그것을 사랑하는 마음이, 내 속에서 힘을 잃는 것이다.
▶갈망하십니까? 아니면 남들보다 조금 더 바램을 갖고 신앙생활 하십니까?
주님을 갈망해야 변한다.
어떤 사람이, 바램을 갖고 있으면 안 변한다.
똑같이 성령의 감동에서 나온 말씀을 들어도,
똑같이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있어도,
한 사람은 계속 성장하는데, 주님을 계속 사모하게 되고 그러는데
다른 사람은 가다가.. 그만 또 제자리로 돌아온다.
무슨 차이인가?
똑같이 말씀을 듣는다.
똑같이 사모하는 것처럼 보인다.
똑같이 임재 가운데 예배에 참석한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진짜 변화되는데, 어떤 사람은 중간에 멈춰 버린다.
‘왜 나는 이렇지?’
그 차이는, 갈망 때문이다.
갈망이 없으면,
말씀을 그 자리에서 들어도, 주님의 어떤 음성을 들어도,
그 자리에서 마음이 움직이고, 울 수도 있다.
그런데 그것이 집에 돌아가서, 내 생활 가운데, 내 영혼을 흔들지 못한다.
심령에 깊은 갈망이 없기 때문에,
너무 얕기 때문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열매를 맺지 못하고, 성장하지도 못한다.
▶갈망은 위험을 극복한다.
오늘날, 주님을 바라는 사람은 많은데, 주님을 갈망하는 사람은 정말 드물다.
그런데 주님은, 당신을 간절히 갈망하는 사람을 찾고 계신다. 대하16:9
사슴이 시냇물을 갈급할 때는,
웅덩이 주위에 맹수들이 우글거려도, 그 웅덩이에 가서 물을 마신다고 한다.
왜냐하면 갈급하기 때문이다. 사슴은 목이 타면, 쉽게 죽는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주님을 갈망하는 사람은,
어떤 위험한 일이 닥쳐도,
주님이 자기에게 맡기신 사명을 포기하지 않는다.
자기에게 손해가 되고, 자기에게 피해가 되는 줄을 뻔히 알면서도,
그 십자가의 길을 계속 간다.
주님을 바램 정도가 아니라, 갈망하기 때문이다.
▶갈망은 자기 한계를 극복한다.
예수님을 만나러 왔던 부자 청년은
영원한 것에 대한 실제적인 관심이 있었다.
그래서 주님을 찾아왔다.
그는 어려서부터 바른 신앙생활한 사람이다.
자기가 어려서부터 계명을 다 지켰다고 했다.
주님은 그에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고 하셨다.
그걸 다 내려놓고 나를 좇으라고 하셨다.
그 청년이 예수님께 나아온 것은,
자기 바램이었지, 갈망은 아니었다.
예수님이 그의 '한계'를 툭 건드리시자,
그는 금방 포기하고 말았다.
여러분, 진정한 갈망을 가진 성도는,
자기 한계를 극복하고, 뛰어넘는다. 중간에 포기하지 않는다.
자기 한계 앞에서 좌절해서 되돌아가지 않는다.
▶갈망은.. 젖을 갈망한다.
벧전 2:2, 갓난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여러분, 종말이 가까울수록, 우리의 사명은,
순전한 젖 pure milk 을 공급하는 것이다. 오늘날 그게 너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모하는crave 자에게 주실 것이다.
crave는.. 갈망하듯이, 간절히 사모한다는 뜻이다.
젖 달라고 우는 아기에게.. 그것을 거부할 부모는 없다.
주님은.. 아기처럼 젓을 사모하는 우리들에게.. 반드시 젖을 공급해 주실 것이다.
그러면 공급받은 순전한 젖 pure milk으로
많은 사람들을 먹일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에는 ‘순전한 젖’을 찾아보기가, 점점 힘들어지는 시대를, 우리가 살고 있기 때문이다.
'분류 없음 > 2011'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태복음의 예수님의 마지막 설교 (0) | 2011.12.07 |
---|---|
풍족하게 시작해서, 빈 손으로 돌아오다 / 룻기 (0) | 2011.12.04 |
하나님의 사랑, 은혜의 중간 과정 (0) | 2011.12.02 |
나그네의 무덤 (0) | 2011.12.01 |
주님이 주시는 쉼은? (0) | 2011.12.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