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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족하게 시작해서, 빈 손으로 돌아오다 / 룻기

LNCK 2011. 12. 4. 21:25

 

◈풍족하게 시작해서, 빈 손으로 돌아오다!       룻1:21      인터넷설교스크랩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나로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룻1 :21

 

※신자들은 보통 기독교 신앙을 ‘꼬리 되지 않고, 머리 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을 해 나가다 보면 ‘머리로 시작했다가, 꼬리로 끝나는’ 면을 경험합니다.

그걸 룻기 식 표현으로 하면, 풍족하게 나갔다가 빈 손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룻1:21 

무슨 의미일까요? 왜 그럴까요?

 

 

▲다 잃고 실패한 후에 비로소 ‘내 삶을 간섭하시는 하나님’을 만난 나오미

나오미가 하나님을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진 것처럼’ 경험했습니다.

어떻게 경험했는가요?

 

하나님이,

자기 남편을 죽이고, 두 아들을 죽이는 모습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나오미는 남편과 자식의 죽음을 하나님의 간섭으로 보았습니다.

 

남편이 죽고 자식이 죽는 것은, 나오미에게만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수많은 사람들에게서도 일어나는 흔한 일들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은 남편이 죽고 자식이 죽는 것을

하나님의 간섭하심으로 보지 않습니다. 그저 우연으로 봅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죽는 것은, 모든 인간에게 일어나는 다반사이기 때문입니다.

이게 이방인들이 바라보는 세계관입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모든 사건은, 우연히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간섭하심으로 일어난 것이라고 봅니다.

 

나오미는 자식이 죽고 남편이 죽은 것을 일컬어

‘내가 풍족하게 나갔는데 여호와께서 빈손으로 돌아오게 하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곧 여호와께서, 자기 남편을 죽이고 자식을 죽였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나오미는, 과거에 추상적으로만 알던 하나님을

모압에 내려가서 실상으로 알게 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오미는 모압에서 빈손이 되어 돌아오게 된 것은

신앙적인 면에서는 축복입니다.

왜냐하면! 관념으로만 알던 하나님을 실제로 만났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나오미는 자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은

모두가 하나님의 간섭하심이라는 것으로 믿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나오미는 엄청난 은혜를 입은 것입니다.

남들은 모르는 하나님을 나오미는 알기 때문입니다.

 

고통을 통해.. 추상적 하나님에서, 실상적 하나님으로 알게 되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깊이 안다는 것만큼 큰 복이 어디에 있을까요?

하나님을 깊이 알수록.. 감사의 깊이가 깊어지고, 신앙이 성숙해 집니다.

 

우리가 살면서 감사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하심을 읽어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하나님은 우리 주변에서 수많은 사건과 사고들을 통하여서

‘나 여기 있다’ 고 알려 주어도

우리가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이 둔하여서..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사실을 알게 하시려고

자기 백성들에게 자꾸만 사건을 일으키시는 것입니다.

 

과거에 <사랑과 영혼 Ghost>이라는 영화를 보면

죽은 애인이 살아있는 애인에게 ‘내가 늘 함께 한다는 것’을 알려주려고

어떤 사건들을 자꾸 일으키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산 애인(데미 무어 분)은 모릅니다.

 

전 그 모습을 보면서.. 우리가 하나님에 대하여 그러하다고 느꼈습니다.

하나님은 수많은 일들을 통하여 계시하고 있는데.. 우리는 모르고 삽니다.

 

햇빛을 쬐이며 비를 맞으면서도

그 비와 그 햇빛이 우연히 주어지는 것이라고 무덤덤하게 지나쳐버립니다.

그러니 우리나 이방인이나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추상의 하나님이 아니라

실상의 하나님을 알게 하려고 간섭을 하십니다.

 

하나님이 간섭 하실 때마다, 우리에겐 고통으로 다가옵니다.

이걸 룻기와 나오미를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풍족한 나를, 빈손으로 만드시는 하나님 (이런 면도 반드시 있습니다.)

 

나오미는 살고자 모압으로 내려갔습니다.

모압으로 내려 갈 땐 풍족하게 내려갔습니다.

 

그러나 모압에서 망하고 맙니다.

집안에 기둥이라고 하는 남편과 두 아들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타관객지에서 집안에 남자가 없다는 것은, 죽은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그러니 모압에서 보호자가 없이는, 낯선 타지에서 더 이상 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나오미는.. 모압에 가서 만난 하나님은 풍족하게 나갔다가

빈손으로 돌아오게 하는 하나님임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을 떠날 때는 “나오미” 라는 ‘기쁨’으로 나아갔지만,

다시 돌아 올 때는 “마라” 라는 ‘슬픔’의 여인이 되어 돌아 왔습니다.

이는 성도는 하나님을 떠나서는 망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나오미가 간증하는 하나님이, 지금 우리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나오미를 통해서 우리에게 말해주고 계십니다.

 

‘너희들 나 떠나면 죽는다!’

‘나를 떠나면 반드시 너희를 빈손으로 돌아오게 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아버지 집을 떠나면 탕자처럼

아들이 아니라, 종이 되어 돌아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죄인인 내 생각과, 거룩하신 하나님의 생각은.. 완전히 다릅니다.

신앙생활이란?

‘내 안에 있는 어그러진 하나님 상을 바꾸는 일’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죄 아래서 태어났습니다.

죄 아래서 태어났기 때문에, 죄 가운데 알게된 하나님을 섬기고 있습니다.

 

죄 가운데 알게된 하나님은.. 나를 무조건 도와주시는 하나님입니다.

내 소원을 들어주고!

나만 사랑해 주고!

내가 하는 모든 일을 옳다고 인정해 주는 하나님입니다.

 

마치 아이가.. 자기가 하는 모든 것을 인정해 주고, 자기만 예뻐해 주는 엄마만

좋은 엄마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아이들은.. 자신이 하는 모든 일이

엄마의 뜻과 다르다는 것은, 전혀 생각하지 않아요.

자기가 하는 일이 다 옳다고 여겨요. 전부 자기 중심적인 생각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이런 하나님을 섬기고 있습니다.

‘나의 소원을 무조건 들어주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통하여서 알려 주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소원을 도리어 빼앗아 가시는 분’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 간에 충돌이 일어납니다.

이사야 55:8~9을 봅시다.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다고 합니다.

내 길과 너희 길이 다르다고 합니다.

 

어느 정도 다른가 하면 ‘하늘과 땅 만큼이나 다르다’고 합니다.

이건 전혀 다르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다른가 하면

우리가 복이라고 여기는 것은.. 화禍이고,

우리가 저주라고 여기는 것이.. 축복이라고 하십니다.

 

예레미야의 증거를 보십시오.

렘29:11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하는 생각이라”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에게,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 가라고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 뜻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슨 말이냐!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기 때문에, 우린 바벨론으로 잡혀 갈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자 예레미야가 말합니다.

‘이 사람들아! 너희들 눈에는 바벨론으로 끌려가서 포로 생활하는 것이

재앙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그것이 하나님이 주는 평안이고 소망을 주는 것이라’고 합니다.

 

무슨 생뚱 맞는 말입니까?

아니 지금 (일부가 이미) 포로로 잡혀 가서, 개 고생을 하는데 평안이라니요?

 

어디가 평안으로 보입니까?

육적으로는 고난이지, 절대로 평안 일수가 없어요.

 

이건 마치 엄마가 아이를 징계하면서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아이 입장에선 매를 맞는데, 어찌 사랑이라고 이해가 되겠습니까?

 

아이에게 있어 사랑은

자기가 무슨 짓을 해도, 엄마는 무조건 자기에게 ‘오냐 오냐 OK’ 해 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크면.. 나중에 커서 자기 밖에 모르는 짐승처럼 변할 것입니다.

 

지금 선지자들은 이 말을 우리 성도들에게 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생각이, 우리 생각보다 높다고 합니다.

 

여기서 ‘높다’는 말은 궁극적으로 ‘옳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생각은 그 끝이 저주이고 멸망이지만.. 하나님의 생각은 축복이고 생명입니다.

우리는 죽을 짓을 하지만.. 하나님은 살게 하십니다.

 

내 인생을 내가 책임지고자 하면.. 고난이 심합니다.

산다는 것이 어려운 이유는.. 내 삶에 내가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내 인생을 책임져야 한다는 것만큼.. 힘들고 어려운 일이 없어요.

 

내 인생은 내 마음대로 산다고 하지만, 이 만큼 힘든 삶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다 내가 책임을 져야하니까 힘이 드는 겁니다.

 

그럼에도 우리 죄인들은.. 누가 자기 인생을 간섭하면, 극도로 싫어합니다.

이는 스스로 왕 노릇하고자 하는 죄성이, 자기 안에서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갓난아기도, 자기를 간섭하면 울어버립니다.

그냥 자기 뜻대로 도와만 주고, 간섭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인간들은.. 하나님이 우리 인생을 책임져 주겠다고 하시면

반발합니다. 싫다고 합니다.

 

왜? 내 인생은 간섭하느냐고 길길이 날 뜁니다.

내 인생은 내가 책임지겠다고 합니다.

그러니 죄인의 인생은 일평생 고단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나오미는 자기 인생을 자기가 책임지고자 모압으로 내려갔습니다.

자기 꾀로 기근을 피해보고자.. 떡이 있다고 하는 모압으로 내려간 것입니다.

 

그러나 떡은 고사하고, 도리어 가진 떡도 다 빼앗기고 맙니다.

탕자처럼 다 빼앗기고 나니 아버지 집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슬픔의 여인’이라는 마라의 이름으로, 예루살렘으로 돌아옵니다.

 

그런데.. 결국 의지 할 것이 없이 다 빼앗긴 것이..

이방나라에서 고향으로 귀향하게 만든 전화위복이 된 것입니다. 이사야 55:8~9

 

나오미는 아버지 집을 떠나 큰 고난을 겪고서야

비로소 참 하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은, 나를 빈손으로 만들어서도

기어코 자기 땅으로 인도하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다 빼앗기고 나서야, 비로소 하나님의 사랑을 보게 된 것입니다.

망함이 망함 아니라, 도리어 복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 것입니다.

 

호세아서를 보면 ‘아골 골짜기를 소망의 문을 삼았다’고 합니다.

호2 :15, 거기서 비로소 그의 포도원을 그에게 주고,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 주리니

 

아골 골짜기란 죽음을 상징합니다. 지옥 같은 환경을 말합니다.

그곳에 처할 때에, 비로소 우리가 소망을 갖게 된다는 뜻입니다.

천국은.. 지옥에 처할 때만 보입니다.

 

내가 약할 때.. 하나님이 보입니다.

다 빼앗기고 나야.. 하나님을 바라보게 됩니다.

이게 죄인의 속성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이 이방나라에서 뿌리를 내리지 못하도록

자꾸만 흔들어서 빈손으로 만드십니다.

세상을 의지 할 것이 지푸라기도 없게 만드십니다.

 

예수님이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듯이

성도들도 뿌리박지 못하도록 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성도를

이 세상에 강함으로 두지 않고.. 약함으로 두십니다.

 

바울이 강함을 달라고 할 때 하나님은 대노하십니다.

‘야! 이 놈아! 네가 강하면, 내 능력이 네게 머물 수 없다’고 하십니다.

 

네가 약할 때.. 내 능력이 네게 머문다고 하십니다.

우리가 약할 때.. 하나님의 능력이 내게 머무는 기회가 됩니다.

 

세상에서 사면초가가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을 비로소 간절히 찾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는, 고난이 내게 유익이고, 복이라고 하는 겁니다.

 

하지만 우리는, 고난을 복이라 여기지 않습니다.

도리어 원망합니다.

‘예수 예수!’하면서도 말이에요.

 

그러니 우리의 신앙은 늘 허상이고, 관념이고, 추상일 수밖에 없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야! 나는 믿음이 없는 자이구나! 나는 순 엉터리구나!’

내 믿음은 허구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을 이용하고자 하는 자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이 일어납니다.

‘주여 긍휼을 베풀어 주옵소서!

주의 은혜가 아니면 나는 살 수가 없습니다!’ 라는 고백이 나오게 됩니다.

 

신앙생활은..

어떤 이들의 말처럼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니 나중은 창대해 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 말이 맞으려면.. (창대해 지기까지) 그 중간에

엄청난 고난과 낮아짐의 시간이 있고 난 후에야.. 그 말이 맞습니다.

 

도리어 신앙생활은

‘네 시작은 창대하다가 나중은 미약하게’ 되어 갑니다.

 

※그런 엄청나게 긴 시간을 지나고 나면,

(물질의 사명자, 권세의 사명자인 경우) 나중에 창대해 질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적 기준으로 창대해 지지 않았다 하더라도,

자기 믿음과 영적 성숙에 있어서는, 모든 성도이 반드시 창대해 집니다.

 

세상 것을 움켜잡는 것이 아니라 빼앗기고 버리게 됩니다.

세상에서 높고 강한 자가 아니라, 도리어 약하고 천한 ‘작은 자’로 살아가게 됩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머리로 시작하여서 꼬리로 마감하게 되어 있습니다.

큰 자로 시작해서, 작은 자로 성숙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나는 망하고 그리스도만 흥하게 됩니다.

 

우리 몸에서 그리스도만 존귀케 됩니다.

내 것은 다 빼앗기고 예수님의 것으로 채워지게 됩니다.

 

신앙생활은 마치 우리 인생과 같아요.

 

무슨 말인고 하니, 어머니 뱃속에서 나올 때는 온 세상을 움켜잡을 듯이 나와서

죽을 때는 빈손으로 가는 것과 같습니다.

 

젊었을 땐 영웅호걸이 되지만

늙어서는 스스로 몸 하나 가누지 못하는 신세가 됩니다.

이게 흙으로 돌아가야 하는 죄인들의 인생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신앙도 처음 은혜를 받았을 땐

‘주여, 세계를 주시옵소서!’

‘주여 내게 한국을 주옵소서!’

‘울산을 주옵소서!’ 라고 합니다.

 

그러나 신앙의 경륜이 쌓여 갈수록

‘주여 난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는 죄인입니다!’

‘울산은 고사하고 내 몸뚱이 하나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라고 점점 자기를 비우게 됩니다.

 

처음엔 내가 의로운 자인 줄 알았는데

가면 갈수록 나 같은 죄인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내 죄의 깊이를 알고 탄식하게 됩니다.

복은 고사하고, 저주 받아야 할 자라는 것을 절감하게 됩니다.

 

그러니 나오는 것은 ‘주여 불쌍히 여겨 주소서!’ 라는 고백뿐입니다.

‘주의 은혜가 아니면, 난 설수가 없습니다!’ 라고 하게 됩니다.

그러니 ‘머리로 시작하였다가 꼬리로 끝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걸 나오미 식으로 말하면 풍족하게 나갔다가 빈손으로 오게 된다는 말입니다. 룻1 :21

탕자로 말하면 아들로 나갔다가 종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이걸 ‘천국엔 거지로 가는 곳’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내 의義가 하나도 없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긍휼(또는 하나님의 의)로만 가는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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