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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없음/2011

양과 이리

LNCK 2011. 12. 7. 16:16

◈양과 이리          마10:16,  갈4:29~31      편집한 글

 

 

▲전제 : 내 속에 도 있고, 염소도 있다.

양과 염소..

누가 양이고, 누가 염소입니까?


그게 최종적으로, 주님의 심판대 앞에서 ‘양과 염소’로 분리한다고 하니까..

아직 우리는 최후 심판대를 거치지 않았으니까..


지금 이 글에서는

‘누구를 양이다’

‘누구를 염소다’ 이렇게 딱 나누지 않고,


내 속에 ‘양’같은 속성도 있고, ‘염소’같은 속성도 있다는,

그렇게 ‘내 속에 둘 다 있다’는 관점에서 보기로 합니다.


이렇게 볼 수 있는 것은

사도바울이 탄식하기를

자기 속에 ‘육적인 나’와 ‘변화된 나’가 서로 싸우고 갈등한다고 했으니..


우리 속에 ‘양’같은 성품도 있고, ‘염소’같은 성품도 있어서

둘이 공존한다는 전제는.. 그렇게 볼 수도 있습니다.


물론 다른 각도로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예정과 작정에 의해,

양과 염소를.. 무 자르듯이.. 딱 나누어 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 글에서는,

‘한 사람 속에 양과 염소가 공존하고 있다’는 전제로 보기로 합니다.


사실 현실적으로도 ‘누구를 딱 양이다. 염소다!’

이렇게 우리 인간은.. 그에게 딱지를 붙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아니니까요.


그리고 ‘누구를 염소다!’ 이렇게 딱지를 붙이는 것은..

자칫 잘못하면 ‘무례’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염소가 양을 보고,

적반하장으로 ‘염소’ 딱지를 붙이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보통의 경우, ‘양’은 남에게 나쁜 딱지를 안 붙입니다.)

 

또 사도바울도, 행9장 이전까지는.. 명백하게 염소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다메섹 체험을 한 이후로는.. 명백하게 양으로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누구를 보고, ‘염소다’라고 단정할 수는 없겠습니다.

그렇게 해서도 안 되고요!

 

지금까지 <양과 염소>를 살펴보았지만,

아래에서는 비슷하게 <양과 이리>의 관계를 살펴보겠습니다.

 


◑본론 : 양을 이리 가운데 보내시는 이유


▲선한 목자는.. 양을 이리 떼로부터.. 지켜주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이리는.. 그야말로 맹금류입니다.

몸집도 송아지만 합니다.

만약 산에서 이리를 만나면.. 사람도 당장 물어 뜯겨 죽습니다.

(실제로 문학작품에 그런 소재가 많이 나오잖아요.)


그런데 연약한 양이

그 험악한 이리떼 가운데로 보내지는 것은.. 이건 자살행위나 다름없습니다.


우리의 의문은

‘왜 굳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내시느냐?’는 것입니다.


그냥 양은 양떼들 끼리.. 그 속에서 편안하고 안전하게 살게 하시고,

이리는 이리 떼들끼리.. 자기들끼리 무리지어서 편하게 살면 될 것 아닙니까!


더욱이 예수님은, 자신을 ‘선한 목자’라고 하시면서,

평소에 자기 양떼를.. 이리, 사자같은 맹금류로부터 지켜 보호해 주신다 는데..


‘선한 목자’께서

양을 지켜 주시기는커녕

왜 양을 이리 떼들 속으로.. 오히려 내보내시느냐는 것입니다.


이건 선한 목자가 할 일이 아니라, 삯꾼이나 해야 될 일이잖아요?


▲1. 여러 가지 답이 있겠지만, 그 중에 한 가지 답은

<이리를.. 이리로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내세요.

이는 양들을 통하여서.. 이리를 들추어내고자 함입니다.


마7:15에,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고 했습니다.

(위에서 ‘거짓선지자’라고 해서, 교역자만 해당되는 것 아닙니다. 모든 신자가 다 해당됩니다.)


이리가.. 평소에 양의 옷을 입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평소에 자기가.. ‘이리’인줄 모르는 것입니다.

자기가 ‘양’인줄 압니다.


실제로 세상 사람들 거의 대부분은

자기를 선한 사람으로, 양처럼 생각하며,

자기 스스로 자기를 사나운 ‘이리’로 여기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을 향하여

‘너희 아비는 마귀이며, 너희는 마귀에서 났다’고 말씀하십니다. 마8:44

 너희는 이리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리가.. 이리로 드러나는 때가 있습니다.

이리가.. 양을 만날 때입니다.


아무리 발톱을 감추고 있더라도,

양을 만나면.. 이리의 속성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마치 뱀파이어가 피를 보면, 자기 몸을 비트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러나 뱀파이어는.. 실존하지 않습니다.


지금 이 글을 읽으면서,

특정인 누구를 지목하시면 안 된다고.. 서두에 미리 말씀드렸습니다.


우리 각자 속에

‘양’적인 속성도 있고, ‘이리’적인 속성도 공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쨌든 1대지의 요지는,

‘선한 목자’께서, 자기 이미지와 정반대로

양을 이리 가운데.. 자살특공대처럼 내보내시는 이유는,


‘이리의.. 자기 속에 감추어진 이리적 정체성드러내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이리를.. 회개시키기 위함인 것입니다.


이리는.. 양을 만나면.. 반드시 공격하게 되어 있습니다.

반드시.. 자기 감춰졌던 공격성을 드러내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공격함으로써..

이리는.. 자기가 이리임을 깨닫게 되고 (이제껏 양 인줄 알고 살았는데)

회개의 자리로 나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모든 이리가 다 회개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이리는 그 공격 대상을 가리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자기 부모도, 자기 자녀도.. 무차별로 물어뜯습니다.


나중에 후회하고 돌이키더라도, 물어뜯을 때는, 전후 사정을 보지 않습니다.

그들은 마귀에게서 났고, 그들(우리)의 아비는 마귀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해당하는 일반적인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시험 들지 맙시다.)


예수님도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 돌’이 되셨지만, 즉 stepping stone이 되셨지만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 때문에 혜택을 받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도리어 시험에 든 사람도 많았습니다.


그들에게는 아래 구절이 적용됩니다.

롬9:33,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그들은 예수님(양) 때문에, 오히려 걸려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stumbling stone이 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양)하고 부딪혀 보니까..

그들의 속성(이리적 속성)이 드러난 것입니다.


예수님하고 부딪히지 않았더라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기를 양으로 내어주시면서.. (남을 죽이지 않고, 자신을 죽이셨습니다.)

그들의 이리적 속성, 그들의 마귀적 속성, 완악함을.. 드러내시고, 공개하시면서

그들을 회개로 인도하기 원하십니다.


아니, 자기가 이리고, 마귀인줄 알아야 회개할 것 아닙니까!

자기기 선한 양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어찌 회개하겠습니까!


▲2. 또 한 가지 답은 <양을.. 십자가에 죽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리들이 양을 죽여주어야 해요.

그래야 십자가 사건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죽여주어야만 하듯이

지금도 염소들이 양을 죽여주어야 해요.

(특정인이 아니라, 내 속에도 염소적 속성, 남을 죽이려는 속성이 있습니다!)


그래야 창세전 언약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교회(내) 안에는 두 부류의 신자가 섞여 있는데,

마치 아브라함의 집에 이스마엘과 이삭이 있습니다.

이것도 내(교회)안에 있는 두 속성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육에 속한 이스마엘은 강한 자이고.. 약속으로 난 이삭은 약해요.

이스마엘은 염소이고.. 이삭은 양이에요.


육으로 난 자가.. 영으로 난 자를 죽입니다.

그러나 그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갈4:29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교회 (내)안에서 계속하여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

내가 육체에 계속 지는 가운데서.. 회개하게 되고, 낮아지게 되고,

나는 이리니까.. 양이신 예수님의 의만 간절히 의지하면서 (이것이 믿음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의와 공로를 힘입음으로써.. 승리하는 것입니다.    *관련글 주님의 역사는 '뒤집기'


그런데 이게 현실 공동체에서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깨어있지 못하고, 기도하지 않는 공동체는

육에 속한 자들이 주류로 자리 잡아서

그 조직의 법을 가지고, 힘없는 자들을 핍박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또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래서 '양을 이리 가운데 보내시는 이유'는 

1. 이리가 이리로 드러나게 되고

2. 양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면서.. 거기서 부활의 기적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11장의 두 증인이

바로 교회 안에서 죽임 당하는 다는 사실을 잊지 마세요.


▲3. 내 속에 <양 같은 속성>도 물론 있습니다.


하나님은.. 내 속의 이리 같은 속성을 자꾸 드러내게 하셔서,

나로 하여금 회개로 인도하시고

결국은 <양 같은 속성>이 점점 승리하도록.. 나를 성화시켜 가십니다.


갈4:30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계집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 (하나님이 '이리'를 점점 죽여 가십니다.)

계집종의 아들이 자유하는 여자의 아들로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이처럼 우리 인생은, 내 뜻대로 살아지지가 않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을 하나님이 주관하시기 때문에

우리 (이리, 육적 자아) 뜻대로 인생이 살아지지가 않는 것입니다.


제가 만약에 제 뜻대로 인생을 살라고 하셨으면.. 목사 안 합니다.

재벌이 되든가 권력가를 지향할 것입니다. (되든지, 못 되든지.. 그런 방향으로 지향해 나갑니다.)


설령 목사가 되었다고 하여도.. 이런 목사 노릇 안 합니다. 이게 뭡니까?

하나님이 제 인생에 개입하지 않았으면

저도 세계 제일의 교회를 지향했을 것입니다.

저도 누구 못지않게 야망이 크고 욕심이 있어요.

(되든지, 못 되든지.. 그런 방향으로 지향해 나갑니다.)

 

그런데 주님이 계속 ‘나의 이리 같은 인생’에 태클을 거시는 겁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면서 점점

이제는 ‘스스로 양 같은 인생’이 되려고.. 기도하며 애씁니다.

참 생명은.. 이리 같은 인생이 아니라.. 양 같은 인생에 있거든요!


제가 앙앙 거릴 때마다 하나님이 뭐라고 하시는 줄 아세요.

‘야! OOO이, 이게 너에게 딱 맞는 역할이다!’


처음에는 그걸 거부하고, 부인해 보기도 했지만,

세월이 지날수록 가만히 생각해 보면.. 정말 그 말씀이 딱 맞아요!

그래서 감사하게 됩니다. ‘맞습니다. 주님이 옳으십니다!’


그래서 (모든 성도가 가게 되는) 십자가의 길이 멍에인 것입니다.

우리 목에 짊어진 멍에는 우리가 벗어 낼 수가 없습니다.


벧세메스로 가는 두 마리 암소에게 법궤가 짊어졌듯이

우리에게도 언약이라는 법궤가 짊어져 있습니다.


그럼 그 언약이 우리 인생을 소 고삐 끌듯이 끌고

우리가 원치 않는 길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코뚜레를 꿴 소는.. 도망가면 갈수록.. 자기 아픔만 더 가중되어요.

그러니 그냥 순종하고 사는 게.. 덜 아픔 당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