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을 내게로 가져오라 마14:16~18 스크랩 글, 편집
▲본문 설명 ; 제자들은 현실적이었습니다.
배고픈 무리를 앞에 두고 예수님은 ‘먹을 것을 주라’
제자들은 ‘줄 수가 없습니다’라고 하는 쟁론을 볼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무리를 마을로 보내어 사 먹게 하자’고 한 말이나,
빌립이 ‘이백 데나리온의 떡으로도 부족하다’고 대답한 말은
예수님께서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하신 말씀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는, 아무리 해도 가능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의 대답이 틀린 것이 아닙니다.
빈들에서.. 큰 무리에게 먹을 것을 준다는 것은.. 도무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리고 갑자기 2백 데나리온의 떡을 구할 수도 없다는 말도 맞는 말입니다.
큰 무리는 여자와 어린이 외에 오천 명이라고 했습니다. 마14:21
그렇다면 여자와 어린이까지 모두 합치면.. 2만 여명이 될 것이라 추산합니다.
제자들이 ‘무리를 마을로 보내자’고 한 것은
먹을 것을 줄 수 없으니까.. 집으로 돌려보내자는 말입니다.
빌립이 말한 2백 데나리온은 어느 정도의 돈이 되는지 계산해보면,
식사대용으로 1인당 1천원 정도의 빵을 먹인다고 계산하면
2만명 분은.. 무려 2천만원입니다.
돈도 돈이지만.. 2천만원어치 빵을.. 갑자기 어디서 조달하겠습니까?
그러니 현실적인 제자들의 대답은.. 지극히 정상적이라 하겠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시험하신 것은?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 것을 아시고 빌립을 시험코자 하심이라. 요6:6
예수님은.. 빌립을 포함한 제자들을 시험하시고자 하셨습니다.
더 좁혀서, 빌립의 무엇을 시험하고자 하신 것입니까?
예수님은 본문의 제자들과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시고자 하시는 것입니까?
단순히 배고픈 무리를 기적으로 먹이시는, 예수님의 능력을 보여주시고자 하시는 것입니까?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이 5병2어로 2만명을 배부르게 먹이고도
12바구니가 남았다는 것(능력)에 초점을 둡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지금 제자들에게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시고자 하지 않습니다.
제자들의 ‘할 수 없다’는 부정적인 생각을 버리라는 교훈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긍정적/부정적 사고.. 이것도 초점이 아닙니다.
‘부정적 사고를 버리고, 긍정적 사고를 갖자’ .. 그것도 요점이 아닙니다.
초점은.. 주님의 뜻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 것을 아시고 빌립을 시험코자 하심이라. 요6:6
‘친히 어떻게 하실 것을 아시고’ 라는 말은
‘예수님은 무리들을 먹이실 뜻이 있으시다’는 것입니다. 다 계획이 있으십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할 수 없다’는 대답으로 일관한 것은,
그들의 판단이 ‘현실적’이라는 데는.. 아무 잘못이 없지만,
‘주님의 뜻과 의중을 묻지 않았다’는 점에는.. 명백한 잘못이었습니다.
제자들이 ‘할 수 없다’는 부정적 생각에 지배당했던 것은,
주님의 뜻보다는.. 자기 판단력만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주님의 뜻’을 고려했더라면..
제자들이 그 상황을 무조건 부정적으로만 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정리하면..
현실이 아무리 부정적이라도 (긍정적도 마찬가지입니다만)
부정적/긍정적 현실 판단보다 더 우선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뜻과 의중’입니다.
예수님은 ‘친히 어떻게 하실 것을 아십니다.’
그렇다면, 즉 주님의 뜻이라면.. 부정적 현실은.. 큰 장애가 되지 않습니다.
주님은 어떻게 해서든지.. 주님의 뜻을 이루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적용/ ‘영적인 양식’으로 생각해 봅시다.
예수님이 ‘5병2어의 기적’을 베푸신 이유도,
그 목적은.. 예수님이 생명의 떡 되심을 보여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즉 ‘육적인 양식’보다는, ‘영적인 양식’에 그 초점이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 현실은.. 본문처럼.. ‘많은 무리들이 주린 상태’입니다.
생명의 양식을 먹지 못해서.. 기진맥진해 있는 징후가.. 사방 도처에서 보입니다.
예수님은 ‘친히 어떻게 하실 것을 아십니다.’ ←주제1
그것은, 많은 무리를 먹이시는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은
‘그것이 이 많은 사람들에게 얼마나 되겠습니까?’라고 여전히 현실적이었지만,
예수님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실 수 있음에도 불구하시고
아이의 작은 헌신을 사용하셔서.. 놀라운 기적과/구원역사를 창조하셨습니다.
주님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오늘날.. 굶주린 무리를 먹이는 것이 주님의 뜻이라면..
주님은 어떤 계획을 갖고 계십니다.
그 가운데서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을 찾고 계십니다. ←주제2
무조건 ‘안 된다. 불가능하다. 집에 다 돌려보내자’는 부정적(상식적) 판단보다는
단순한 믿음을 가진 한 어린아이에 의해서
놀라운 역사가 벌어진 것입니다.
어른들은 ‘다 안 된다’는 상식적 판단을 갖고 있었는데,
아이라서, 뭘 몰라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한 아이는 ‘된다’는 믿음의 판단을 갖고 있었습니다.
아이가 우연히 자기 도시락을 내밀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아래 말의 뉘앙스를 보십시오.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졌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습니까?’ 요6:9
위 말의 뉘앙스는
그저 아무 생각 없이 도시락을 내민 것이 아니라,
‘어쩌면 무리들을 먹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일말의 믿음이 섞인 표현입니다. 그렇죠?
그게 안드레의 믿음이든지 요6:8
아니면 어린 소년의 믿음이든지 정확하게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이 모든 일은.. ‘한 아이의 도시락’에 의해 촉발ignite되었다는 것입니다.
▲정리하면
지금 사방에 무리들이, 영적인 양식에 굶주려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어떻게 하실지 아십니다.’ 요6:6
이 말은.. 주님은 ‘먹이실 의향이 있으시다’는 것입니다. ←주제1
그런 가운데 제자들을 시험해 보십니다.
제자들은 대부분 ‘안 된다. 불가능하다’로 일관했습니다.
너무 현실적 판단이 명석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의 해결은.. 엉뚱한 데서 촉발되었습니다.
‘작지만 어떻게 해 보면 되지 않겠나?’ 하는.. 한 어린아이의 믿음이었습니다.
오늘 우리 사회에는,
암암리에 부정적인 판단이 사방에 팽배해 있습니다.
이때 ‘어린아이의 믿음’, 또는 '어린아이 같은 믿음'이 필요합니다. ←주제2
주님은 반드시 ‘먹이실’ 것입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제자들은 한 아이가 떡과 물고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것이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예수님께 가져오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내게 가져오라”고 하셨습니다. 마14:18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한 아이’가
큰 문제를 해결하는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종종 실수하는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뭔가 큰 사람이 큰 일을 한다’는 공식입니다.
자꾸 ‘큰 사람’ 탓으로 돌리지 마십시오.
‘작은 사람’들이.. 가만히 있으니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마14:16 ←주제3
우리는.. 예수님만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지만,
예수님은 친히 어떻게 하실 것을 아십니다. 요6:6
여전히 우리는.. 예수님만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습니다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마14:16
여전히 우리는.. 예수님만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습니다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것(어린아이의 믿음, 헌신)을 내게 가져오라..’ 마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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