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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없음/2012

‘계명’과 ‘계명을 주신 분’은 분리되지 않습니다

LNCK 2012. 1. 4. 10:05

‘계명’과 ‘계명을 주신 분’은 분리되지 않습니다                요일2:3~5

https://www.youtube.com/watch?v=PKatvSONsdg

 

 

요일2:3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4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5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케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저(주님)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 ‘나는 그분을 안다’ 하면서, 그분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는

거짓말쟁이고, 그에게는 진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그분의 말씀을 지키면,

그 사람 안에서는 참으로 하나님 사랑이 완성됩니다.

그것으로 우리가 그분 안에 있음을 알게 됩니다.”

 

계명을 거스르는 것은 단지 계명만을 거스르는 것이 아닙니다.

계명을 주신 바로 그분을 거스르고 거부하는 것입니다.

적어도 그분을 적극 따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 가운데는,

계명계명을 주시는 분과 분리하는 마음과 태도가 있습니다.

 

그것은 ‘당신이 하라’는 대로 하지는 않았지만

‘당신을 거부하거나 반대하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와 같지요.

 

정말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매우 궁색합니다.

변명이고 합리화일 뿐입니다.

 

사랑을 하지 않으면,

다시 말해서 주님을.. ‘머리로 알기만 하는’ 정도라면

계명도.. ‘머리로 아는 것으로 그치고’ 지키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렇게 사랑하지 않는 앎이란

저 아프리카에도 사람이 산다는 것을 알고,

그 아프리카 사람도 우리와 같다는 것을 아는 것과 진배없습니다.

 

나는 여기서 나로서 살고, 그는 아프리카에서 그로서 살 뿐입니다.

알지만 관계가 없습니다.

알지만 거리가 있습니다.

당연히 만남도 하나 됨도 없습니다.

 

이에 비해 사랑한다는 것은,

그것도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불가분리적입니다.

 

아무리 꽃이 아름다워도.. 그가 없는 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하늘을 사랑한다 해도.. 그를 제쳐놓고 사랑할 수 없습니다.

 

무엇을 봐도 그것 안에 그가 있고,

무엇을 해도 그가 원치 않는 것 내 할 수 없습니다.

 

그가 싫어하는 것을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반대로 그가 좋아하는 것을 어찌 아니 합니까?

 

또 이렇게 얘기할 수도 있습니다.

그가 무얼 좋아하는지 아는데.. 어찌 그것을 아니 하고

그가 무얼 싫어하는지 아는데.. 어찌 그것을 할 수 있습니까?

 

사랑 없이 아는 것은 알아도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있지만

사랑으로 아는 것은 아는 대로 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사랑의 강제입니다.

사랑하는 그가 강제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내가 강제하는 것입니다.

사랑이 그가 원하는 것을 내가 하도록 강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계명이고,

그 계명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이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한.. 사랑을 사랑할 것이고,

미움을 사랑치 않는 한 미워할 일도 없고

무관심 할 수는 더더욱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미워하지 않으려 애쓸 필요 없습니다.

사랑을 사랑하면 됩니다.

아주 쉽습니다.       

 

 

◑천 년 동안의 왕 노릇        계20:1~6          

 

일명 ‘고통의 학교’에는 4학년 과정이 있다고 합니다.

1학년 과정은, 고통은 결코 피할 수 없는 것임을 깨닫고 인정하는 과정입니다.

고통을 피하려고 하면 점점 더 괴로워집니다.

‘고통도 인생과 신앙생활의 한 면으로 여겨야지!’ 마음먹으면 훨씬 나아집니다.

 

2학년 과정은, ‘이 고통을 참고 견디리라’하는 단계입니다.

고통에 절망하지 않고 소망을 품고 인내하는 과정입니다.

 

3학년 과정은, ‘나는 이 고통을 이길 수 있다’고 말하고 살아가는 과정입니다.

고통에 대해서 보다 더 적극적으로 대하는 단계입니다.

 

4학년 과정은, 마침내 ‘이 고통은 나에게, 우리(가정, 교회, 민족)에게 축복의 통로이다.

현재는 물론이고 미래를 위해서도 그렇다’ 고백하는 단계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고통을 당하며 살아갑니다. 인생을 바르게 살려 하고,

신앙생활을 진실하게 해보려 하는 사람일수록 더욱 고통을 겪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통의 과정인 인생에서, 고통의 학교에 입학해

차근차근 4학년 과정을 거치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마크 트웨인의『왕자와 거지』를 잘 아실 것입니다.

거지와 잠시 신분을 바꾼 왕자는, 거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멸시와 천대와 학대를 받습니다.

 

신분을 되돌리는 일에 어려움이 생기지만,

그러나 왕자는 슬퍼하되 깊이 절망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왕자인 것을 누구보다 가장 잘 알기 때문입니다.

충실한 신앙인은 바로 그와 같아야 합니다.

고통이 있는 인생이더라도 스스로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분명히 깨닫고 살면,

슬픔을 딛고 인내로 견뎌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약속하십니다. 세상 종말의 때에, 고난을 당할지라도 굴하지 않고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은,

천년왕국에서 ‘천 년 동안 왕 노릇’하게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현재가 주님이 다스리시는 ‘천년 왕국’입니다. 무천년설, 이게 맞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 때문에 때로 고통을 당하거나 불이익을 감내해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주의 재림의 그날, 하나님께서 은혜의 상급을 주실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누리는 축복이 아닌 하나님의 나라에서 누릴 축복을 소망으로 삼고,

죽도록 충성하는 신앙생활을 하시기 바랍니다.

 

 

◑‘나는 아니요!’           요1:19~27

 

옛날 로마제국 때의 일이다.

다른 나라와의 전쟁에서 승전한 개선장군들이 로마로 입성하면

백성들이 모두 몰려나와 연도에 늘어서서 환호성을 지르며 맞이했다.

그때 로마로 입성하는 장군들은 노예 한명을 마차의 뒤에 숨겨 들어왔다.

 

그 노예는 백성들이 환호할 때마다 장군의 뒤에서

"너는 신이 아니다! 신이 아니다!"라고 외치는 역할을 하게 했다는 것이다.

 

백성들의 환호성을 들으며 신이 된 듯한 착각에 빠져 잠시 도취되어있는 사이

개선장군의 공로를 치하하던 황제도

바로 그를 경계 1호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사실을, 그들은 깨달았기 때문이다.

 

세례요한은 3번 자기부정을 한다.

"나는 ....아니다."   그리스도가

"나는 ....아니다."   모세가

"나는 ....아니다."   엘리야도 아니다.

 

이 세 번의 부정 "나는 ......아니다"는 요한복음에서 아주 중요한 의미를 드러낸다.

요한복음에서 예수께서는 "나는 ....이다"라고 여러 번 당신을 계시하신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는 살아있는 생명의 떡이다."

"나는 포도나무이다."

"나는 문이다."

"나는 목자이다."

"나는 생명이요 부활이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는 생명의 물이다."....

 

"나는 ....이다"라는 말은 원래 구약성경에서

야훼 하나님께서 당신을 계시하실 때 사용하시던 정식 문구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나는 ...이다"라고 말씀하실 때,

바로 당신이 그 하나님과 똑같은 분이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그러기에 세례요한이 말하는 "나는 .... 아니다"는 말은

단순한 겸손의 의미만 들어있는 것은 아닌 것이다.

그는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세례요한는 그 자신이 '그리스도'가 아님을 알고 있었다.

또한 모세와 같은 '그 예언자'(신18:18)도 아니라고 확신한다.

그는 '엘리야'도 아니라고 말한다.

 

공관복음에서는 세례요한이 '엘리야'였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마11:13-14)

그런데 여기서 '엘리야'가 아니라고 하니 어떻게 된 일인가?  ←문제 제기

 

요한은 분명 엘리야는 아니었지만, 엘리야의 역할을 하고 있다.

즉 주님의 날이 오기 전,

백성들을 회개시키러 올 엘리야(말3:23-24)가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뒤에 올 더 훌륭하신 분을 맞이하기 위해

백성들에게 회개의 세례를 베풀고 있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그는 곧 '주님의 길을 곧게 내는'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의 역할을 하고 있을 뿐.

그는 '말씀'이신 분이 아니었다.

 

누가 뭐래도 자신의 신원을 명확히 알고 있었던 세례요한!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의 역할을 분명히 하고 있었던 세례요한!

 

즉 오늘날에도, 자기 사명을 분명히 감당하고 있는 종은

‘나는 ... 아니요!’ 한다.

 

그런데 ‘나는 .. 이요!’ 하는 자는,

이교도 로마 개선장군보다 못한 자요,

아직 ‘이루지 못한’ 자신임을.. 처절하게 깨달아야 한다.

빌3: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모든 사람이 다 필요합니다.

 

로마에 유학을 떠난 어느 여학생의 글에서 읽은 이야기입니다.

로마 시내에서는 방을 얻기가 어려워

여학생은 시내 외곽에 방을 얻어 기차로 통학을 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수업을 마치고 기차를 이용해 집으로 가는데

기차 안의 승객들은 저마다 자신의 일들로 책을 보거나, 신문을 보거나,

졸고 있거나, 휴대전화로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는데,

 

기차가 몇 정거장을 지났을까,

갑자기 건장해 보이는 청년(이 글의 주인공)이 아버지의 손을 잡고 타더라는 것입니다.

 

기차에 오른 청년은 이내 열차 안에 있는 사람들 한 명 한 명에게 다가가

질문을 던지는 것이었습니다.

 

“무슨 책을 보고 있어?”

“왜, 잠만 자?”

“신문에 무슨 기사가 났어?”

“누구하고 통화를 하는 거야?”

 

그러면서 놀란 사람들의 대답을, 자기 아버지에게 들려주는 것이었습니다.

“아빠, 이 사람은 이런 책을 읽고 있대.”

“아빠, 신문에 이런 일이 생겼대.”

“아빠, 이 사람은 여자 친구가 있대.”

 

그 순간 고요한 정적이 감돌던 기차 안은, 모두 청년에게로 시선이 집중되고

술렁거림이 생기게 되었다고 합니다.

 

얼마 후 청년은 아버지에게 오줌 마렵다고 소리를 쳤고

아버지는 청년을 데리고 기차에 딸린 화장실로 데려가 용변을 보도록 도와주었다고 합니다.

 

화장실에서 용변을 마치고 손을 씻은 청년은 기분이 좋았는지

또다시 기차 안의 승객들에게 다가가 비누로 씻은 자신의 두 손을 내밀며,

“맡아봐! 냄새 좋지?” 하며 일일이 냄새를 맡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 순간 기차 안은 폭소가 터졌고

모두가 연실 청년을 바라보며 웃음을 지었다고 합니다.

 

여학생은 그 글 끝에 이렇게 썼습니다.

“누가 무엇을 하는지 주변 사람에 대하여 무관심하고 정적만이 감돌던 기차 안은

머리가 부족한 청년 한 명으로 인하여.. 이내 사람 사는 냄새가 나기 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