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바람 결혼잔치 마22:1~10 출처보기
인간이 존재하는 이유는,
내 나름대로의 기쁨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늘에서 이미 성립된 그 기쁨에 참여하도록 만든 것이지,
내 기쁨을 발생시키도록 살라고 만들어 놓은 게 아니라는 거예요... - 본문 중에서
▲피바람 결혼잔치.. 참으로 섬뜩한 (설교)제목입니다.
본문은, 임금이 혼인잔치를 준비하고, 손님들을 초청합니다.
그런데 청한 손님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참석하지 않고,
심지어는 초청하는 심부름을 감당하는, 임금의 종들을 모욕하고 죽이기까지 합니다. :6
그러자 임금이 노하여 살인자들을 죽이고, 동네도 불사르고 :7
길에 나가서, 만나는 사람을 아무나 잔치에 데리고 오라고 명합니다. 마22:9
그러니까 ‘피바람 결혼잔치’란 설교제목은,
제/설교자가 상상으로 지어내거나, 과장한 것이 아니고,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내용 그대로 요약하면.. 이 제목이 되겠습니다.
그런데 ‘피바람’이라는 말, 이거 참 끔찍한 말입니다...
역사를 볼 때, 왕조나 왕이 바뀌면서 일어나는 숙청작업,
또한 공산국가에서 생기는 숙청작업 이런 게 아니라면,
도대체 ‘피바람’이 왜 ‘결혼잔치’라는 단어와 맞붙어 나오는 것입니까?
얼마 전에 영국 황태자가 결혼식을 하는데,
영국의 TV뉴스앵커가 하는 말이
‘정말 오랜만에 아무에게도 상처가 되지 않는 뉴스를 전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만큼 영국 왕가의 결혼식은.. 모두에게 기쁨이 되는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결혼식에 ‘피바람’이라니.. 이게 웬 말입니까?
▲예수님이.. 얘기를 과장되게 부풀려 말씀하실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참 특이한 내용은
결혼잔치에 오라는 초청을 알리는 그 왕의 종들을
초청을 받은 사람들이.. 왜 모욕하고 죽이는 건지 알 수가 없어요.
:5 그들이 돌아보지도 않고 한 사람은 자기 밭으로, 한 사람은 자기 사업하러 가고
:6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모욕하고 죽이니
결혼식에 안 갈 거면, 안 가면 될 것 아닙니까,
왜 왕의 종들을 모욕하고 죽이느냐 이거예요.
그리고 또 왕의 반응도, 너무나 과장되어 있는 듯합니다.
벌을 주고 싶으면 당사자들만 벌을 주면 되지, 동네를 불살라 버리는 겁니다.
:7. 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고
너무 이야기가 비약이 심하고,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선을 넘어가고,
표현들이 지나치게 과장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아요.
그런데 주님께서 일부러 겁주려고
과장된 표현을 쓰고, 전달하시려는 내용의 효과를 극대화하시기 위해서
있을 수도 없는 이야기를 과장되게 표현하셨겠습니까? (물론 아니지요)
‘피바람’이 ‘결혼잔치’에 붙을 수밖에 없는 내막이 있다는 겁니다.
그 내막이, 바로 우리가 함께 생각해야 할 부분이라는 거예요. ←문제 제기
▲아무도 축하해 주는 사람이 없을 때..
천애 고아가 서울대학을 수석합격 했습니다. *친척도 없는 진짜 고아라는 뜻
그래서 아무도 그 합격을 축하해 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면 그 ‘기쁨의 날’이.. 오히려 ‘슬픔의 날’이 돼버리는 거예요.
바로 그런 심정이 되었다는 얘기에요.
이 세상에서 인간이라는 피조물이 존재하는 이유는
원래가 아버지하나님과, 아들하나님 간에, 성령을 통하여 생긴
충만한 기쁨에 인간을 참여시키도록 한 것입니다.
본문과 관련해서 말씀드리면,
임금님의 혼인잔치에
하객이 북적해야.. 임금님이 기뻐하시죠.
하객이 없으면.. 임금님이 천애의 고아처럼.. 슬퍼하실 것입니다.
<천국에 있는 기쁨>을 표현할 길은
왕이 아들을 혼인시킬 때, 혼인잔치에서 느끼는 기쁨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최고의 기쁨이라는 뜻이지요.
그리고 왕의 혼인잔치에, 인간을 초청하는 것.. 이거 축복이지, 인간에게 저주가 아닙니다.
원래 인간이 그래서 만들어진 거예요.
▲그런데 왜 이게 <피바람의 결혼잔치>가 되어버립니까?
왜 사람을 죽이는 일이 생기고, 심판하는 일이 생겨버렸습니까?
인간이 만들어진 이유가
천국에서 지금도 진행되고, 발생하고 있는
그 하나님과의 기쁨에 참여하기 위해 만들어졌는데,
인간들이 이 세상에서 어떤 일을 도모하느냐 하면,
오늘 본문에 보니까, 그 결혼잔치의 초청에 거절하는 이유가
한 사람은 밭으로 가고,
한 사람은 사업하러 갔다는 거예요. :5
사람이 생겨난 이유는
‘그 천국 기쁨에 참여하라’는 목적으로 만들어졌는데,
사람들은, 천국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나는 나 나름대로 내 생활영역과
내 기쁨을 발견할 수 있는 다른 영역을 갖고 있는 거예요.
밭에 가서 일하고, 내 사업하고,
내 가족과 내 직장 등 내 영역을 따로 갖는 겁니다.
이것은 중요한 내용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서 창조되었습니다. 사43:21참조
그런데 사람들이, ‘하나님의 기쁨에 참예하지 않고,’
‘자기의 기쁨을 자체 생산’해 낸 것입니다.
그리고 오히려 ‘하나님의 기쁨’에 초청하는 종들을.. 핍박하고 죽였습니다.
그러자 임금이 노하여,
피바람이 나는 심판을, 그들에게 행했다는 내용입니다.
▲우리 기쁨의 근거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사람이 이 땅에서 사는 동안에
하늘에서 일어난 기쁨에 참여하지 않고,
따로 자기 나름대로의 기쁨의 영역을 만들어 내는 일/공간/시간은,
아예 없어야 합니다.
그럼 (오직 자기만의 기쁨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은 폭군이십니까?
물론 아닙니다.
인간이 자기를 위해, 자체 생산해 내는 기쁨은,
모두가 죄요, 이기적이요, 결국은 자기와 이웃을 파괴하는 기쁨(흉기)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초청하시는 기쁨/잔치/행복만이
참다운 기쁨/잔치/행복이요,
자기와 이웃을 유익하게 하고, 또한 하나님께도 기쁨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따로 이 세상/내 가정/내 직장에서
내 인생의 꽃을 피우면서, 내 나름대로의 기쁨의 영역을 갖게 된다는 것은
내 인생을 스스로 말살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내 사업하면서 기쁘고, 내 자식 키우면서 기쁘다는 이런 말들은
(이제껏 같은 맥락의 말씀이 이어져오고 있습니다마는)
이 땅 위에서는 아예 성립이 될 수 없다는 겁니다. 실제로 우리가 그렇게 느낍니다.
물론 하나님을 진정으로 섬기는 가운데서
그 부수효과로 내 가정/자녀/사업/인생에 기쁨이 생길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도외시/멸시/무시하고
내 스스로 일구고 자체 생산하는 내 가정/자녀/사업/인생의 기쁨은
그거 오래 못 갑니다. 그거 다 허무하고요,
대개 자신을 망치고, 타인까지 해롭게 하는.. 그런 흉측한 기쁨이 되고 맙니다.
▲인생을 나름대로 열심히 사는 사람들도.. 주의해야 합니다.
보세요, 상식적으로는 밭에 일하러 가고, 사업하러 가고..
그러니까, 남들보다 인생을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으로.. 볼 수도 있어요.
그래서 결혼식에 참여하지 못한 것이지요.
당연하죠. 열심히 인생을 살다보니..
‘왕의 기쁨의 자리’에 참여할 시간이 없는 것이지요.
이 사람들이 지금 오락하러 가고, 도박하러 갔습니까?
그게 아니잖아요.
또한 한가하게 뒹굴면서 낮잠 자면서 안 간 게 아니라,
밭에 일하러 가고, 사업하러 갔다는 거예요.
지극히 정상적인 생활패턴이 유지되고 있거나,
열심히 자기 인생을 경영한 사람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 지극히 정상적이라고 생각한 이것이
하나님이 보실 때, 피바람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는 반역이라는 겁니다.
자기 자체로 생산하는 기쁨.. 용납될 수 없는 거예요.
인간이 존재하는 이유는, 내 나름대로의 기쁨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늘에서 이미 성립된 기쁨,
이미 존재하고 발생한 그 기쁨에 참여하도록 만들어진 것이지,
내 기쁨을, 내 스스로 생산해서 살라고 만들어 놓은 게 아닙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렇게 질문할 수 있어요,
‘아니 그러면 사업하는 사람은 어찌 할 것이며,
밭에 나가 일을 해야 될 사람은 어찌 할 것이냐?
이 세상의 삶의 의미가 뭐냐?
가정은 왜 주신 것이며, 직장은 무엇이고, 이 인생살이가 다 뭐냐?’
그게 뭔 줄 아십니까? 그건 결혼식 피로연의 코스요리예요.
즉 ‘천국 잔치에 참여한 후에’
(호텔 결혼식 후에 코스요리가 나오듯이) 즐기라고 주신 것입니다.
네덜란드의 문화사학자 요한 호이징거가 말한 것 중에서
<호모 루덴스>라는 책이 있습니다. ‘인간은 노는 존재다’라는 거예요.
이 사람이 어떻게 이런 탁월한 통찰력을 갖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어요.
‘인간은 노는 존재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근본적으로 잔치에 참여하도록 초청받은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잔치를 누리면 되는 거지요.
그러면 직장생활은 뭐냐고요?
일단 천국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아버지와 아들 간의 기쁨에
내가 참여해서, 그 기쁨을 내가 함께 공유하게 됩니다.
일단 이렇게 천국의 기쁨을 갖게 되잖아요?
결혼식에 참여하면서, 그 아버지의 기쁨을 내 기쁨으로 삼게 되지 않습니까?
그러면 그 잔치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정말 피로연의 코스요리가 나오는 것처럼
직장생활, 가정생활, 사회생활.. 이 모든 것이 다 코스요리가 되는 거예요.
우리가 주님의 잔치의 기쁨에 함께 참여할 때,
그냥 ‘즐기면 되는 것’으로 주어진다는 겁니다.
하늘에서 이미 벌어진 잔치의 기쁨을, 내 기쁨으로 삼는 자들에게는
직장생활이
의무요, 부담이요, 돈을 벌어야 되는 책임의 활동이 아닙니다.
그건 그냥 코스요리 중에 하나예요.
날마다 그것을 즐기고 만끽할 수 있도록 되어 진다.. 이겁니다.
하늘의 기쁨으로 충만해지면
이 세상 모든 일들이 코스요리를 즐기는 것처럼.. 즐길 수 있게끔 됩니다.
▲실습이 필요 합니다.
그렇게 하늘의 기쁨으로 채워지면
이상하게 설교하는 자는 설교가 부담이 아니고, 코스요리를 먹는 놀이가 되는 것이고,
자식을 키우는 것도 놀이가 되고,
아내와 남편이 만나도 놀이가 되고,
모든 게 호이징거가 말한 것처럼 ‘호모 루덴스’ 놀이하는 인간이 될 수 있다는 겁니다.
이미 하늘의 기쁨을 갖고 있는 자들에게!
이 세상의 모든 일은.. 잔치하는 기쁨으로 살아가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게 기가 막힌 거예요, 여러분!
물론 운전기술을 책과 설명으로 배워도,
자기가 직접 주행연습을 해 봐야 하듯이..
여러분이 성경을 통해 배우신 이론들을,
실제 삶에서 내 것으로 만들려면.. 시간이 걸리고, 시행착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원리는 바로 이것입니다!
내가 이 세상에서 내 기쁨을 자체 생산하려고 하면.. 그건 모두 죄요, 또한 사탕발림의 기쁨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기쁨을 누리는 원리는.. 하나님의 기쁨의 잔치에 초대받아서,
그 기쁨을 함께 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천국의 기쁨은,
내 생각처럼, 마냥 좋은 것만도 아닐 수도 있습니다.
복음 전하는 자로서의 기쁨,
핍박 받아 인내하는 중에 기쁨,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린 후에, 곡식 단을 거두는 기쁨..
이런 ‘기쁨 같지 않지만’.. 그러나 진짜 기쁨이요, 영원한 기쁨이..
그 천국잔치의 기쁨의 범주에 포함됩니다.
왜 태어나셨어요?
잔치에 참여하라고 태어나신 거예요, 천국잔치에 참여하시라고!
다른 이유가 없어요, 뭐 대단한 일을 내가 이루라고 태어난 게 아니에요.
그리고 그저 잔치에서, 내가 그 기쁨을 맛보고 있는 동안에
하나님은 당신의 계획을 이루어나가실 거예요, 내가 이루는 게 아니라.
그러므로 ‘피바람 결혼잔치’가 이제 다시는 없게 하십시다.
그 천국잔치에 내가 참여 안 하면.. 피바람 난다니까요.
내 스스로, 나를 위해, 기쁨을 자체 생산하려는 사업/가정/인생은..
천국잔치의 초청을 거부하는 것이요..
그러면 듣기에 어감은 좋지 않지만,
우리 인생에 그런 하나님의 (피바람의) 심판이 있을 것이고,
또한 영원한 (피바람의) 심판도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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