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watch?v=LHq7u_1b_vM
◑눈에 사랑의 콩깍지 전1:2, 7
사랑하면 그의 모든 점이 사랑스러워 보이고
미워하면 그의 좋은 행동까지 위선으로 보입니다.
사람이 예뻐 보이고 안 예뻐 보이는 것은
그 상대방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상대방을 바라보는 내 눈의 문제인 것입니다.
만약 꽃을 본다고 합시다. 꽃은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모든 동물이 꽃을 아름답게 볼까요? 그건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만이 꽃을 아름답다고 합니다.
다른 동물들은 그저 다른 풀들과 다를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사람만이 꽃을 아름답게 보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사람 안에 ‘아름다움’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가 사람 안에 아름다움을 넣어 놓아서
그 아름다움으로 다른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다른 동물들은, 그 안에 아름다움이란 것이 없어서,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모르고, 진
리란 것이 없어서 진리가 무엇이며,
또 선이란 것이 없어서 무엇이 선인지도 구분하지 못합니다.
결론적으로 사람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무엇으로, 바깥세상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즉, 내가 어떤 사람이 특별히 아름답게 느껴졌다면
그 사람 안에 이미 아름다움이 있기 때문이고
어떤 사람이 사랑스럽게 느껴졌다면, 그 마음 안에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 안에 있는 콩깍지를 통해서 상대를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 눈엔 부처만 보이고, 돼지 눈엔 돼지만 보인다고 하는 말이 있는 것입니다.
어떤 분이, 신자로부터 이런 고백을 들으셨다 합니다.
“저는 세상 모든 사람이 다 싫은데 특히 몇몇은 더 싫어요.”
이 사람이 다른 사람을 그렇게 싫게 보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정말 안 좋은 사람들이어서가 아니라
그 사람들을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 안에 사랑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들을 위해서까지 기도하셨고
유다까지도 사랑하셔서 제자로 뽑아주셨습니다.
사람이 사랑스럽게 보이지 않는 이유는
단순히 내 안에 사랑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보아도 무관할 것입니다.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예쁘다고 합니다.
자신의 자식을 예쁘게 보이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입니다.
객관적으로는 다른 아이들보다 잘난 것이 없지만
자신의 자녀는 특별히 더 예뻐 보입니다.
하나님께서 부모에게 콩깍지를 씌우신 것입니다.
만약 자녀가 예쁘지 않으면, 부모는 책임감만으로 자녀를 키워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들이 사랑스럽게 보이면 살아가는데 덜 힘이 듭니다.
저도 예전에는 미워하는 사람과 닮았다는 이유만으로
그와 비슷한 사람들까지도 미워 보이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는 미운 짓을 하는 사람이 주위에서 사라졌기 때문이 아니라
내 자신을 사랑으로 가득 채우려고 노력해온 결과입니다.
내가 변해야 세상이 변합니다.
미워하는 사람이 많으면 그만큼 삶이 힘듭니다.
그렇다면 우리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라도
아버지께서 베드로에게 성령님을 보내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그분이 씌워주시는 사랑의 콩깍지를 씌워 주십사고 청해야겠습니다.
◑허무와 친해지기
“허무로다, 허무!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
있던 것은 다시 있을 것이고,
이루어진 것은 다시 이루어질 것이니,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이란 없다.” 전1:2, 7
오늘 저는 말씀 나누기가 조심스럽습니다.
이런 고백을 하고나면 여러분이
전과 같이 저를 자연스럽게 대하지 못할까 염려되기 때문입니다.
요즘 제게 자주 엄습하는 느낌들이 있습니다.
나이를 먹으면서,
특히 올 해 들어와서 자주 드는 느낌은 서운함과 노여움입니다.
아주 별 거 아닌 것들에 서운하고 노여워합니다.
전에 같으면 지나칠 것들이 요즘은 다 눈에 들어오면서
서운해 하고 노여워합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들입니다.
말씀 나누기(단체 톡방)에서 제가 한가위 인사를 했는데,
글을 읽은 많은 분들이 간단한 한가위 인사도 않습니다.
그것이 서운한데, 전에는 서운하지 않았었습니다.
전에는 인사하는 것을 바라지도 않았고 기대하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실은 제가 다른 분에게 인사할 줄 몰랐던 사람이었지요.
그런 제가 지금은 그런 것을 바라고 기대하는 가련한 자가 되었습니다.
강론(설교)에 전과 같은 신선함이 없다는 형제들의 말도 서운합니다.
형제들이 대 놓고 얘기한다는 것은 그것이 농담이고
그런 얘기를 해도 그것을 제가 진짜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얘기를 하는 것인데,
요즘의 저는 그것이 농담이 아닌 진심이라고 받아들이고
저의 강론(설교)에 신선함이 떨어졌으니
이제 그만 두어야겠다는 생각도 하곤 합니다.
전에는 그것이 진심일지라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 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넘어갔는데
요즘은 별 거 아닌 말도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지 못합니다.
좋게 이해하면 작은 것 하나도 지나치지 않고
세심하고 진지하게 대하게 되었다고 할 수도 있지만,
분명한 것은 바라고 기대하는 것이 있는
초라하고 불쌍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보다 더 강하게 드는 느낌은 허무감입니다.
사람들이 내 곁을 떠나는 것 같은 느낌,
내가 한 것이 다 허사로 돌아간 것 같은 느낌,
해봤자 아무 소용이 없을 것 같은 느낌 등.
이런 얘기를 듣고 평소의 저를 아는 분들은 많이 놀라실 것입니다.
저도 이런 제가 요즘 매우 낯설고
덕분에 이런 저에 대한 내면 공부와 수련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이 공부를 통해 깨닫는 것은
이것을 피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선 허무는 허무를 피하는 사람에게 느껴지는 것이니.
허무를 적어도 가치중립으로 놓고 껴안아야 하며,
허무를 앞에 놓고 “오, 나의 허무!”하며 바라봐야 할 것입니다.
허무를 나의 운명으로 껴안아야 하고
허무를 나의 본질로 껴안아야 합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주신 것은 다 뜻이 있으니
하나님을 만나는 장으로 껴안아야 할 것입니다.
허무가 (주님의) 사랑으로 느껴질 때까지
허무와 노닐며 친숙해져야 할 것입니다.
▲잘 흘러가야 합니다
모든 강이 바다로 흘러드는데 바다는 넘치는 일이 없구나.
강물은 떠났던 곳으로 돌아가서 다시 흘러내리는 것을. 전도서1:7
강물이 흘러갑니다.
구름도 흘러갑니다.
시간도 흘러갑니다.
사람도 흘러갑니다.
살아있는 것은 다 흘러갑니다.
흘러가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흘러가는 것이 정상입니다.
흘러야 신선합니다.
흐르지 않으면 힘듭니다.
흐르지 않으면 썩게 됩니다.
흐르지 않으면 결국 죽습니다.
지금 움켜잡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흐르도록 놓아주세요.
그것이 사는 길입니다.
흐르는 강물처럼 살기 원합니다.
큰 바위를 만나면.... 돌아가고
안 되면 기다렸다 여러 물과 함께 그 바위를 타고 넘어가면서
기나긴 강물의 굴곡 속에서
부딪히고 꺾여도 상처 없이 흐르는
강물 같은 인생을 살고 싶습니다.
소위 법(法)자는
물 수(水)자와 갈 거(去)자가 합쳐서 이루어진 말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법치 사회는 순리적이며 요란하지 않습니다.
물이 흘러가는 것처럼 순조롭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법대로 말씀대로 사는 인생도
물이 흘러가듯 상처없이 자연스럽게 사는 것입니다.
흐르는 강물처럼
오늘도 생명수의 강은 여전히 흘러 흘러
역사를 돌아서, 도도히 유리바다로 흘러 내려갑니다.
요즈음 가물이라서 물줄기가 자꾸 가늘어지지 않는지요.
나도 여기에 물 한 방울 보태서,
풍성한 생명수가 강물처럼 넘실거리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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